바람을 뿌리는 자 스토리콜렉터 8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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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발전단지 건설을 놓고 개발회사 윈드프로와 시민단체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회사 경비원과 시민단체의 대표가 연이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고로 보였던 경비원의 죽음은 과학수사 결과 살인의 가능성이 제기됐고, 거액의 보상 제안을 뿌리치고 풍력발전단지 건설에 반대해온 시민단체 대표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됐습니다. 호프하임 강력 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개발회사 관계자들에게서 수상쩍은 느낌을 받지만 동시에 시민단체의 내분에도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특히 개발회사 전직 직원이면서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쳐온 재니스는 여러 면에서 유력한 용의자 후보로 보입니다. 하지만 살해된 시민단체 대표의 자식들 역시 범행동기가 충분해서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좀처럼 수사 초반에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바람을 뿌리는 자는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 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주인공으로 한 타우누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네 작품이 (한국 번역본 기준으로) 300페이지 중반에서 많아야 500페이지 초반 정도였던 것에 반해 바람을 뿌리는 자는 거의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인데,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다양해서 간략하게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우선 두 사건은 어떻게 봐도 동일범의 소행 혹은 연장선상의 살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두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덕분에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은 많지만 어디에서도 확실한 실마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한 메인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 없는 듯 보이는 인물들이 꽤 중요한 화자로 등장하는 바람에 과연 이들이 풍력발전단지 건설을 둘러싼 살인사건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 연결되긴 되는 것인지 무척 궁금해지게 됩니다.

 

가장 흥미로운 건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진두지휘해야 할 반장임에도 불구하고 사건 외적인 것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보덴슈타인의 행보입니다. 아버지 하인리히 백작이 풍력발전단지 개발의 갈등 한복판에 휘말리면서 보덴슈타인은 잠시나마 보상금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물론 그 사실 자체를 감추는 바람에 큰 곤경에 처합니다. 더구나 아내 코지마에게 배신당한 상처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그는 사건관련자 중 한 명인 여성에게 푹 빠져버리는데, 문제는 그녀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은 미스터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피아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에게 수사를 떠맡긴 채 밖으로만 도는 보덴슈타인에게 격분하지만 4년을 함께 지낸 파트너답게 인내심을 갖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사실, 막판에 드러난 진실만 놓고 보면 사건의 얼개는 무척 단순합니다. 모든 것이 부와 명예와 허영을 향한 일그러진 탐욕에서 비롯됐고, 진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범인이었다.”라고 보일 정도로 정석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 가능했던 건 비밀과 거짓말, 사랑과 증오, 믿음과 배신 등 등장인물들 사이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디테일하게 묘사된 점, 그리고 보덴슈타인의 개인적인 고민과 일탈을 그린 대목들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점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앞선 타우누스 시리즈가 그랬듯 바람을 뿌리는 자역시 대단한 페이지터너여서 시작부터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인물관계도라도 그려야 하나?”라는 고민이 들 정도로 인물과 사건이 복잡하게 설정된 것은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 이 작품을 처음 읽었던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을 땐 다소 허전하거나 단순했다.”라는 인상이었는데, 그건 아마도 이 시리즈의 대표작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읽고 난 직후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바람을 뿌리는 자는 전혀 허전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숙성된 시리즈의 깊은 맛과 함께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캐릭터가 더욱 매력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조금은 사족 혹은 과잉처럼 보인 대목들이 있었고, 그 때문에 사건의 규모나 질감에 비해 분량 자체가 다소 부풀려진 점은 아쉬웠습니다. 막판 반전 역시 앞서 언급한대로 기대에 못 미쳤던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를 만끽할 만큼 미덕이 더 컸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완벽한 젠틀맨 같던 보덴슈타인의 연약하고 인간적인 모습과 그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며 쑥쑥 성장하는 피아의 카리스마는 순서대로 다시 읽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재미라서 여타 아쉬움들을 다 덮게 해준 1등 공신이었습니다. 이야기나 사건보다 주인공의 매력에 푹 빠져 시리즈를 탐독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타우누스 시리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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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드로 미샤니 지음, 이미선 옮김 / 북레시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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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 세 명의 여자가 각각 한 챕터씩 주인공을 맡아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이혼 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오르나는 특별한 기대감 없이 이혼자들을 위한 만남 주선 사이트에서 한 남자를 만납니다. 라트비아에서 온 46살의 외국인 노동자 에밀리아는 자신이 간병하던 노인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로부터 아파트 청소를 부탁받았다가 좀 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30대의 늦깎이 대학원생 엘라는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 때문에 낯선 흥분에 사로잡히지만 유부녀라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집요함은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어느 새 그와의 특별한 여행을 기대하기에 이릅니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지만 세 여자는 중년의 변호사 길 함트자니라는 미스터리한 접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난생 처음 접한 이스라엘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역시 거의 처음 접하다시피 한 독특한 플롯입니다. “범행이 이루어질 것인지 말 것인지 불분명한 범죄 소설, 형사가 등장한 것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추리 소설이라는 저자 서문처럼 세 여자는 일반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공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첫 번째 여자 오르나의 챕터가 이혼 후 복잡한 심경과 현실적 난관에 부딪힌 싱글맘의 삶을 그린 여성소설 같았다면, 두 번째 여자 에밀리아의 챕터는 외국인 노동자의 곤경 혹은 신과 종교와 구원을 다룬 듯한 고발소설 같았고, 세 번째 여자 엘라의 챕터는 두려우면서도 묘한 흥분을 일으키는 불륜을 앞두고 달뜬 고민에 빠진 중년여성의 체험담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서문대로 독자는 초반 내내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첫 챕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가 던진 첫 번째 폭탄을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반전은 아니지만 오히려 충격의 무게는 훨씬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왜?”라는 어이없음 혹은 분노와 함께 말입니다. 나머지 챕터들 역시 비슷한 구성이라 결말이 뻔히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예정된 비극을 막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안감은 한없이 증폭됩니다. 물론 막판에 이르러 갑자기 속도를 끌어올리며 사건 해결을 향해 달려가는 대목에서는 (다소 상투적이긴 해도) 또 다른 스타일의 반전과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 있어서 앞서 누적된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긴 합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끔찍한 연쇄살인 이야기정도가 될 것입니다. 잔혹한 묘사도 없고 선정적인 장면도 없지만 지금껏 책으로 접한 그 어떤 살인사건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유는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서사 때문입니다. 아마도 노골적이고 잔인한 문장들로 독자를 유혹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범작 수준에 머물렀겠지만, 부드러움, 차분함, 조곤조곤함이 깃든 연쇄살인 이야기라는 묘한 포장 덕분에 색다름 이상의 특별한 매력을 품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최고 범죄소설 작가라는 타이틀이 과장된 홍보가 아니라면 조만간 드로 미샤니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여자처럼 기존의 미스터리와 스릴러 문법에 반기를 든 작품이든 반대로 그에 충실한 작품이든 일단 한두 편쯤은 꼭 더 만나보고 싶은 작가인데, 언제든 신간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세 여자에 등장하는 화폐단위는 모두 한국의 입니다. 예전에 일본 미스터리 익명의 전화’(야쿠마루 가쿠)에서도 똑같은 오류를 본 적 있는데, 그나마 이 작품에선 일러두기를 통해 화폐단위를 ‘1=10이라고 전제라도 했지만, ‘세 여자는 그런 설명도 없이 이스라엘 소설 속 화폐를 한국의 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제가 유독 삐딱하게 보는 건지, 이런 번역 자체가 문제인 건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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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날 버티고 시리즈
하비에르 카스티요 지음, 김유경 옮김 / 오픈하우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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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한낮, 보스턴 시내에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를 든 벌거벗은 남자가 나타납니다. 체포된 이후 경찰은 물론 정신의학센터 원장 젠킨스에게도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던 그는 조사관으로 투입된 FBI 프로파일러 스텔라 하이든이 나타나자 오직 그녀와만 이야기하겠다며 입을 엽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 또 한 개의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가 발견되면서 젠킨스 원장과 스텔라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두 사람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미소만 지으며 스텔라와의 1:1 면담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는 스텔라에게 자신의 이름이 제이컵이며, 이 사건은 17년 전 솔트레이크에서 벌어진 기괴한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제목이나 간략한 줄거리만 봐도 평범한 미스터리나 스릴러가 아니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시간적 배경 17년 전인 1996년의 솔트레이크, 2013년 크리스마스이브 직전과 직후 속에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다 사건 역시 꽤 복잡하게 꼬여 있고, 사방팔방에 스포일러 지뢰가 묻혀있어서 큰 얼개를 소개하는 것조차 난감한 일입니다.

 

17년 전 솔트레이크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가족휴가를 왔다가 자기 이름과 기괴한 별이 그려진 쪽지를 발견한 뒤 치명적인 위기에 빠진 소녀, 그 소녀와 서로 한눈에 반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만 소년, 딸에게 닥친 비극 때문에 자책을 거듭하다가 붕괴하고만 소녀의 가족, 그리고 출산 이틀 만에 흔적도 없이 아내가 사라지자 패닉에 빠졌던 한 남자.

이들은 17년이 지난 2013, 다시금 과거의 악몽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됩니다. 그중에는 그 긴 시간을 오로지 가느다란 희망 하나만으로 버티며 폐인이 되다시피 한 사람도 있고, 가까스로 그 악몽에서 벗어난 듯 했지만 더더욱 큰 참극에 휘말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건 바로 보스턴 시내에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를 들고 나타난 의문의 남자 제이컵입니다.

 

사건 자체도 기괴한데다 체포된 남자 제이컵은 시종 정상인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이야기의 흐름이 단순한 범인 찾기가 아니라는 것은 금세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뭔가 형이상학적이거나 정신적 문제, 혹은 호러나 오컬트의 냄새가 폴폴 풍기긴 하지만 어쨌든 초반에는 끔찍한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푸는 쪽으로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그러다가 중반부쯤 이 작품을 특징짓는 화두인 운명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 비로소 장르적 특징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운명이란 건 팩트 중심의 살인미스터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공포와 불안감을 앞세운 심리스릴러와는 그나마 좀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해도 역시 잘 어울리는 화두는 아닙니다. 물론 이 작품 곳곳에 살인미스터리와 심리스릴러가 뒤섞여있긴 하지만 운명이 주된 화두인 탓에 아무래도 서스펜스, 그것도 특정 영역의 서스펜스로 읽히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갈릴 거란 생각입니다.

 

제 경우엔, 사건 자체도 흥미롭고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중반부쯤 진실의 일부 누가, 왜 젊은 여자의 머리를 잘랐는가? - 가 공개될 무렵 한 인물이 내뱉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대사가 100% 공감이 될 정도로 개인적으론 그 지점부터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작품의 장르가 확연해지자 마음의 벽 같은 게 생겼다고 할까요? 그런 탓에 그 이후 작가가 조금씩 풀어놓는 진실의 조각들이나 등장인물들의 언행들이 낯설거나 억지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그 불편함은 다 읽은 뒤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서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적잖이 열광할 여지가 충분한 것 역시 사실이기도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이 작품이 꽤 큰 성공을 거뒀고 후속작도 나왔다고 하는데, 막판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던진 떡밥이 후속작을 위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작가라서 찾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심리스릴러나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신선하고 특별한 재미를 줄 수도 있는 작품이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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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소녀 - Novel Engine POP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정은주 옮김, 치런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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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세이보 여고 경영자의 딸이자 뛰어난 미모와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3학년생 시라이시 이츠미가 학교 화단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원인은 추락사. 사인도 범인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츠미가 이끌던 문학동아리 멤버 6명은 학기말 정기모임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낭독회로 대체합니다. ‘아름다운 소녀 이츠미의 죽음을 테마로 각자 단편소설을 쓴 뒤 직접 발표하기로 한 것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오랜 전통대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갖고 온 재료 외엔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암흑전골을 나눠 먹는 가운데 멤버들은 세이보 여고의 비너스이츠미와 자신이 맺었던 빛나던 인연과 아름다운 추억담을 그린 소설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는 자신만의 추리로 장식합니다. 이츠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지목한다는 뜻인데, 문제는 지목된 범인이 모두 제각각이란 점입니다.

 

고백하자면,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라노벨로 분류된 작품들은 미스터리 서사가 담겨있더라도 조금의 미련도 없이 외면해온 게 사실입니다. 아마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암흑소녀역시 영원히 제 관심권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었을 텐데, 다 읽은 후의 솔직한 소감은 그동안 라노벨이란 포장 때문에 놓친 숨은 진주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제 스스로도 예상 못한 탄식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 면에서는 별 5개도 부족한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미스터리나 반전의 힘이 허술하거나 미약한 것도 아닙니다. 흥미로운 미스터리가 포함된 단편집 결혼기담을 포함하여 한국에 소개된 아키요시 리카코의 모든 작품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론 그녀의 최고작인 성모다음으로 추천할 만한, 재미와 미스터리와 반전이 잘 믹스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폐쇄적이고 엄격하지만 동시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미션계 여고라는 배경, 의사를 꿈꾸던 재원이자 극강의 외모와 카리스마로 학교 구성원들의 경외심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던 여학생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문학동아리 멤버들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낭독회, 그것도 마치 관련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명탐정이 최종 결과를 발표하듯 각자 집필한 소설을 통해 범인을 지목하는 긴장감 넘치는 설정 등 라노벨과 미스터리의 풍성한 재료들이 흥미진진하게 배치돼있습니다.

소설이 발표될 때마다 앞서 발표된 소설의 추리를 뒤집는 진술이 등장하는데, 그 때문에 독자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누가 이츠미를 죽인 범인인지 마지막 소설이 발표될 때까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엇이 들어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암흑전골을 떠먹으며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낭독을 듣는다는 설정은 거듭 용의자를 뒤바꿔가며 독자에게 스릴 넘치는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인생의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시절, 누구보다도 정점에 서고 싶었던, 그래서 모두를 조연으로 내치고 홀로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10대 소녀들의 예민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과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저지른 치명적인 비밀과 거짓말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멤버들의 단편소설은 다 읽고 되돌아 생각해보면 지독한 악취만 느껴질 정도로 악의 그 자체에 가까워서 새삼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짜릿한 건 반전의 여왕이란 별명답게 작가가 막판에 터뜨리는 연이은 반전 폭탄들입니다. “여고생들끼리 주고받는 미스터리에 뭐가 있겠어?”라는 라노벨 차별자의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반전 폭탄들은 폼만 그럴듯하게 잡아놓고 억지만 가득 찬 결말을 내세운 일부 함량 부족 미스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성모때문에 아키요시 리카코의 팬이 된 독자들도 아마 암흑소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성모이후의 미스터리들이 (기대치가 워낙 높아서 그랬겠지만) 고만고만했던데 반해, ‘암흑소녀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필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반전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별명이 단지 성모한 편 때문에 얻어진 게 아니란 걸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지금도 할인가 9천원에 판매 중인 암흑소녀는 충분히 제값을 하고도 남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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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후루타 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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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오 출판사의 에이스 편집자 카에데는 어느 날 딸의 옷을 직접 제작하는 포스팅을 올려 인기를 얻고 있는 딸바보 아빠 소라파파의 블로그에 시니컬한 댓글을 남깁니다. “당신은 정말 아이를 사랑하나요?” 그런데 그날 이후 자신의 과거의 비밀이 담긴 일기장이 인터넷에 공개되고 댓글을 통해 지독한 공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한편 어린 딸을 본가에 맡긴 채 홀로 도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다나시마는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와 5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인 아내 미유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의 유일한 행복은 딸을 위해 옷을 직접 만드는 것뿐. 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자신의 블로그를 찾아와 집요한 비난 댓글을 다는 한 여자 때문에 격분하고 맙니다. 딸에 대한 사랑을 이기심으로 왜곡하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여긴 다나시마는 여자를 파멸에 몰아넣기로 결심합니다.

 

지금은 친절하고 수더분한 40대 순경 아저씨지만 한때 용의자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자백 전문 가노라 불리며 현경 수사1과에서 맹활약했던 가노 라이타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연작단편집 거짓의 봄’(한국 출간 2021)으로 처음 알게 된 여성콤비 작가 후루타 덴의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고대하고 있던 가노 라이터 시리즈의 장편이 아니라서 아쉬웠지만, 데뷔 후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란 점과 독특한 표지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다양한 코드들이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막판에 거듭된 반전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는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심리스릴러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뒤표지 카피대로) 인터넷과 SNS에서 횡행하는 익명의 악의가 어떤 식으로 파멸적 비극을 만들어내는지를 디테일하게 그린 사회파 장르물의 미덕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막판 반전이 돋보이는 미스터리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론 탐욕스럽게 애정을 갈구하고 상처받을까 봐 두려운 나머지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구는 사람열등감에 사로잡힌 주제에 자존심이 세고 자기애로 똘똘 뭉친 사람’, 그리고 시기, 질투, 미움 같은 악의에 사로잡혀 상대를 망가뜨리려는 사람들이 벌이는 심리스릴러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14살에 겪은 비극으로 인해 어떻게든 과거를 삭제해버리고 싶은 나머지 스스로를 전혀 다른 사람, ,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강한 면모를 가진 사람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었던 카에데는 30대에 이르렀을 때 나름 그 목표를 이뤄냈다고 자부했지만, 사소한 댓글 하나에서 시작된 균열이 점차 사방으로 번지면서 일상을 무너뜨리자 공포에 휩싸입니다.

한편,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정성으로 간병하며 딸을 위해 직접 옷을 만드는 딸바보 다나시마 역시 그 내면에는 복잡다단한 심리가 뒤얽힌 인물입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공무원 일,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교차하는 아내와의 추억, 진짜 사랑인지 자신의 이기심의 산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딸에 대한 감정, 그리고 가족들과의 불화 등 그의 삶에 평온함을 갖다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과거와 혼란스러운 현재 때문에 허우적대다가 무심결에 주고받기 시작한 익명의 악의로 인해 패닉에 빠지는 두 주인공 카에데와 다나시마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읽는 내내 미스터리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심리스릴러의 주인공으로 보였습니다. 또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큰 생채기를 남긴 이들이 가족 혹은 그만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더더욱 그들의 불안정을 부추겼는데, 이 역시 심리스릴러를 더욱 심도 있게 만든 요소입니다. 실제로 주인공들의 책임못잖게 사건의 도화선이 된 건 그들 주변 인물들의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악의였고,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론 모두가 그녀를 죽였다가 이 작품에 더 어울리는 제목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두 주인공이 펼치는 심리스릴러는 이 작품의 매력이자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사건 자체나 팩트보다는 일그러지고 왜곡된, 혹은 타인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심리적 혼란이 과도하게 강조되다 보니 굳이 저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언행들이 자주 반복된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에 기대를 걸었던 독자에겐 두 주인공의 애매모호한 행보 때문에 다소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거짓의 봄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에서 맛볼 수 있었던 후루타 덴의 필력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홀딱 빠질 정도는 아니라도 계속 관심을 갖고 신간소식을 기다리게 만든 건 분명한데, 다음에는 제가 고대하던 가노 라이터 시리즈의 장편(‘犯罪’, 일본 출간 2021)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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