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늑대 스토리콜렉터 16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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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하임 경찰서 강력 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연이어 터진 미스터리한 사건들 때문에 곤혹스런 지경에 빠집니다. 성폭행과 학대의 흔적을 지닌 채 익사체로 발견된 소녀 사건은 신원확인조차 안 돼 막다른 벽에 부딪혔고, 유명 방송인 한나 헤르츠만이 지독하게 폭행당한 뒤 차 트렁크에서 발견된 사건 역시 단서 하나 잡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2년 전 정직 당했던 악명 높은 동료 프랑크 벤케가 갑자기 지역범죄수사국 내사팀이 되어 나타나선 복수를 다짐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던 세 개의 사건은 시간이 갈수록 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하고, 피아는 지금껏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끔찍한 아동 성범죄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좋아하지만 어린 소년, 소녀가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학대와 성범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데, ‘사악한 늑대는 이른바 아동 포르노 마피아의 끔찍한 만행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라 두 번째 읽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겁고 불편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앞선 시리즈들이 늘 그랬듯 굉장히 많은 등장인물과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여러 사건이 초반부터 독자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사악한 늑대는 세 개의 사건이 하나 같이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더 어지러웠는데, 누구나 막판에 이 사건들이 한 방향으로 수렴될 거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중반까지만 해도 과연 어떤 식으로 접점을 이룰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는 제각각 흘러가기만 합니다.

 

익사체로 발견된 소녀 사건이 3주가 되도록 성과가 없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유명 방송인 한나 헤르츠만의 납치-폭행 사건에 투입됩니다. 유력한 용의자를 두 명이나 포착했지만 행방이 묘연하거나 혐의점을 찾지 못해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나타나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이번 사건은 정말이지 꼬이고 꼬여서 풀릴 줄 몰랐다.”(p323)는 피아의 푸념처럼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사건은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합니다. 그만큼 난감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 당연히 흥미진진하고 긴장감이 넘쳐야 하는데, 실은 이 작품이 넬레 노이하우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3/4지점쯤부터 폭발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꽤나 야박한 점수를 주고도 남았을 만큼 중반까지의 이야기는 산만하고 느슨하고 지루하게 읽힙니다. 뭐랄까... 충격적인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위해 과도할 정도로 기초공사를 탄탄하게 한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세 사건의 접점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리고 그 접점이 다름 아닌 독일과 유럽의 권력층과 부유층으로 구성된 아동 포르노 마피아라는 게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 건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비롯하여 중요한 조연들에게 피해자 또래의 딸이 있다는 점, 그래서 그들 모두 진상에 다가갈수록 자신의 딸들도 늑대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겁에 질리는 모습들입니다. 또 사방팔방에 인맥과 조직을 갖춘 아동 포르노 마피아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가차 없이 파멸시키는 대목이나 어렸을 적 학대를 당했지만 성장하면서 더 끔찍한 가해자가 돼버린 인물, 그리고 늑대들에게 삶과 인격이 완전히 파괴당한 피해자들의 사연 등은 무거움이나 불편함 이상의 착잡한 감정을 독자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놓습니다.

 

아동 포르노 마피아 이야기만큼 독자의 눈길을 끈 건 피아와 보덴슈타인에게 복수를 선언한 예전 동료 프랑크 벤케의 과거사입니다. (사실 아동 포르노 마피아와 벤케의 과거사를 하나로 엮은 건 살짝 무리수처럼 보이긴 했습니다.) 애초 전직 군인 출신으로 유능한 형사였던 벤케를 개망나니에 악의로 가득 찬 인물로 만든 10여 년 전의 사건은 그 자체로 무척 흥미진진한데, 특히 그 사건이 아동 포르노 마피아 사건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 덕분에 피아와 보덴슈타인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건 물론 그들의 상관인 니콜라 엥겔 수사과장의 과거까지 폭로된다는 설정은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고조시키고도 남을 만큼 흥미롭습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분량이 늘어나더니 사악한 늑대에선 기어이 600페이지를 찍고 말았습니다. 중반까지의 산만하고 느슨한 전개만 아니었다면 아동 성범죄라는, 불편하지만 몰입할 수밖에 없는 묵직한 주제가 좀더 독자의 공감을 살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았는데,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넬레 노이하우스로서도 다소 과하더라도 탄탄한 기초공사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그저 막연하게나마 추정할 뿐입니다.

사악한 늑대는 완결되지 않은 거대한 두 개의 떡밥을 남긴 채 마무리됩니다. 비록 읽은 지 7년이 지나긴 했지만 다음 작품인 산 자와 죽은 자는 별개의 사건을 다룬 것으로 기억하는데, 과연 남겨진 두 개의 떡밥이 어떤 식으로 해소될지 다시 한 번 읽으면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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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여름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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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직후인 19457, 패전 이후 연합군과 소련의 통치 하에 놓인 독일 베를린에서 유력인사 크리스토프가 독극물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해당 지역을 관할하던 소련군은 전쟁 중 크리스토프에게 은신처를 제공받았던 17살 소녀 아우구스테 니켈을 용의자로 검거합니다.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살해동기도 찾을 수 없었지만 소련군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그녀에게 또 다른 용의자 에리히의 거처를 알아내라는 이상한 지시를 내립니다. 그는 살해된 크리스토프가 입양했던 친조카로 어릴 적 알 수 없는 이유로 도망을 쳐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된 인물입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끔찍한 참화가 그치지 않는 베를린에서 에리히를 찾기 위한 아우구스테의 이틀간의 여정은 지옥 그 자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2017년 출간된 전쟁터의 요리사들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후카미도리 노와키의 작품입니다. 일본작가의 작품인데도 둘 다 일본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전쟁 미스터리라는 점도 눈길을 끌지만, 글쓴이가 그 시대를 경험했던 노회한 중진이 아니라 30대 여성이란 점 때문에 더더욱 놀라게 됩니다.

 

전쟁터의 요리사들가혹한 전장에서 조리병들이 선사하는 일상 미스터리였다면 무죄의 여름은 전쟁이 빚어낼 수 있는 온갖 비극을 정면으로 그려낸 묵직하고 심도 깊은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되긴 해도 역사소설에 더 가깝게 읽힐 정도로 작가는 2차 대전 전후의 독일의 광기 어린 혼란상을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1차 대전 패전 후의 갈등, 히틀러와 나치의 발흥,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쟁과 인종청소, 그리고 나치의 폭압에서 벗어났지만 패전 후 연합군과 소련군의 만행에 시달리는 베를린의 참상을 생생한 영상처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상범으로 몰린 끝에 죽음에 이른 아버지와 독극물로 자결한 어머니,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가 허무하게 세상을 뜬 동생 등 아우구스테에게 전쟁은 잔혹한 시련을 안겨줬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폭력, 차별, 희롱, 생활고 등 그녀의 비극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어릴 때부터 공부한 영어 덕분에 미군 식당에서 가까스로 일자리를 얻지만 이내 크리스토프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또다시 지옥불과도 같은 날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소련군의 지시를 받고 배우 출신 도둑인 카프카와 함께 유력 용의자 에리히를 찾아 나선 아우구스테의 이틀간의 여정입니다. 폐허로 변한 도시들과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끔찍했지만 야차 같은 점령군은 물론 혼란을 틈타 날뛰는 떼강도, 나치의 만행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등 아우구스테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전쟁 이상의 공포를 안겨주며 수시로 목숨을 위협합니다. 이틀의 여정이 마무리될 무렵, 아우구스테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함께 크리스토프 살인사건의 잔혹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막판 반전을 품은 살인사건 미스터리이긴 해도 앞서 언급한대로 무죄의 여름은 전쟁 전후 독일의 혼란과 그 당시를 살아가야 했던 여러 개인들의 비극이 더욱 강조된 역사소설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자체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세밀하고 반복적인 전쟁 서사가 다소 버겁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테의 고통스러운 이틀간의 여정이 마무리될 무렵엔 작가가 의도한 전쟁 미스터리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작가가 특별히 요청했다는 한국어판의 서문 - “(일본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침략과 학살을 자행했던 나라임을 기억하라는 뜻도 이 글에 담았습니다.” - 의 묵직한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쉽게 읽어내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래서 반드시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만 될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덜어내고 아우구스테의 여정을 끝까지 지켜본다면 기대 이상의 여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지옥이 돼버린 소녀 아우구스테의 절규가 절절하게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이여, 이 도시를 불태워. 내게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을 빼앗은 이 나라를 태우고, 모두를 죽음으로 내몬 나를 그 불길로 태워 없애줘.” (p51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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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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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부의 부촌 햄스테드 히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화가인 아내 앨리샤가 사진가 남편 가브리엘을 총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체포된 뒤 실어증에 걸린 듯 입을 다문 앨리샤는 알케스티스라는 자화상을 남긴 뒤 정신질환 범죄자 감호병원인 그로브에 수감됩니다. 오래 전부터 앨리샤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심리상담가 테오 파버는 그로브의 구인광고를 보곤 안정적인 직장에 사표를 냅니다. 앨리샤의 심리상담가가 된 것을 운명이라 여긴 테오는 그녀의 입을 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동시에 그녀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도 함께 진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테오는 놀랍거나 의심스러운 정황들을 다수 발견하게 되는데, 앨리샤가 침묵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인물들이 적잖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앨리샤가 드디어 반응을 보이고 자신이 쓴 일기장까지 내주자 테오는 머잖아 진실이 밝혀질 거라 확신합니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2019)가 스릴러 독자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건 올해(2022) 출간된 두 번째 작품 메이든스를 읽은 뒤였습니다.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심리학 스릴러라는 장르에다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까지 왠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았고, 그런 탓에 작품에 대한 반응조차 알아볼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메이든스에서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재미와 짜릿한 반전을 맛보곤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부랴부랴 찾아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으로 나올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신작은 무조건 장바구니에 담게 될 게 확실하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잔혹한 방법으로 남편을 살해하곤 6년째 입을 다물고 있는 앨리샤가 살인사건 직전 몇 주에 걸쳐 쓴 일기장의 내용, 앨리샤의 입을 열어 6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는 심리상담가 테오의 노력, 그리고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아내 캐시의 불륜을 눈치 챈 테오의 절망이 그것입니다.

테오는 주위의 만류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앨리샤의 입과 마음을 열기 위해 애씁니다. 동시에 앨리샤의 주변 인물들 살해된 가브리엘의 형, 거래하던 화랑 주인, 앨리샤의 친척, 과거 앨리샤를 치료했던 의사 등 을 집요하게 찾아다니며 앨리샤에 관한 작은 단서라도 잡기 위해 분투합니다. 테오가 볼 때 앨리샤의 범행은 결코 즉흥적이거나 우발적인 게 아니라 오래 전에 그 씨앗이 뿌려진 심리적 불안에서 기인한 듯 했고, 그 모든 걸 알아내려면 앨리샤의 유년기부터 샅샅이 조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테오는 앨리샤가 자신과 비슷한 트라우마 - 부모로부터의 끔찍한 학대 - 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테오와 앨리샤가 번갈아 화자를 맡아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사실 독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지 계속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척 단순합니다. 부모의 학대가 남긴 트라우마 때문에 심리상담을 받다가 스스로 심리상담가를 직업으로 택한 테오는 스스로 여전히 반쯤은 환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앨리샤와 상담을 하면서도 불안한 심리를 감추지 못하는데, 거기다가 가끔 즐기는 마리화나는 그를 몽환적인 상태로 몰아넣곤 해서 독자 입장에선 테오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앨리샤가 남긴 일기장 역시 조울증의 기록마냥 행복과 기쁨, 초조와 불안이 교차하기도 하고, 살인사건 직전의 몇몇 일기는 망상으로 가득 차서 독자는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까지가 착각인지 혼란을 겪게 됩니다.

 

메이든스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살인사건과 심리학 스릴러의 조합에다 그리스 비극 한 편을 끼워 넣었습니다. 그것은 남편 대신 목숨을 내놓았다가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지옥 문턱에서 이승으로 돌아오지만 그 뒤로 입을 다물어 버린 여인을 그린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입니다. 앨리샤가 병원에 수감되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의 제목이 알케스티스인데, 그 때문에 테오는 자화상 혹은 그리스 비극 자체에 앨리샤의 진실을 위한 열쇠가 숨어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막판에 테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며 공개됩니다.

 

메이든스의 서평에 이 작품의 진짜 백미는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막판 반전에 있습니다.”라고 썼는데, ‘사일런트 페이션트역시 그에 맞먹는 놀라운 반전을 선사합니다. 정신이상자의 진술처럼 어딘가 모호하기 그지없던 테오와 앨리샤의 이야기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명확한 접점을 이룬 끝에 6년 전 사건의 진실을 토해내는 대목에선 말 그대로 온몸이 굳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고, 같은 페이지를 서너 번은 되읽은 뒤에야 겨우 책장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작동하겠구나!”라며 감탄했던 메이든스의 서평 한 줄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말입니다.

 

(같진 않지만 같은 이라 볼 수 있는) 심리스릴러 또는 심리학 스릴러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장르이고, 스릴러에 끼어든 그리스 신화와 비극은 비호감 그 자체인 게 사실이지만,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두 작품은 오히려 그 두 가지 요소 덕분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스릴러 고유의 미덕과 함께 끝내주는 반전을 일궈낸 그의 글 솜씨는 읽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독자에게마저 부러움과 질투심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2년 간격으로 두 작품을 냈으니 (원작 기준으로) 대략 2023년에 새 작품이 나올 듯 싶은데, 부디 신작에서도 앞선 두 작품 못잖은 감흥과 여운을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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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심장 스토리콜렉터 100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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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내내 월반을 거듭해 23살에 범죄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LAPD 특수사건전담반 팀장으로 일하는 로버트 헌터는 FBI도 탐내는 뛰어난 프로파일러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파견 형식으로 콴티코의 FBI 아카데미에 오게 됩니다. 우연한 사고로 범행이 드러난 살인용의자가 헌터에게만 말하겠다.”며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터는 심문실에 도착해서야 용의자가 과거 대학시절 절친이자 범죄심리학도로서 라이벌이었던 루시엔 폴터라는 걸 알곤 크게 놀랍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동안 헌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희생자의 수조차 가늠할 수 없는 역대급 연쇄살인의 진실을 파헤치는 일도 고통스러웠지만, 오랫동안 봉인해온 끔찍한 트라우마까지 폭발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낯선 작가의 작품 띠지에 “‘양들의 침묵을 능가하는 충격 심리스릴러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면 일단은 과장 광고로 여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북로드에서 출간한 작품이라면 의심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발동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능가여부는 독자 개개인이 판단할 일이지만, 개인적으론 양들의 침묵에 못잖은 소름 돋는 소시오패스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연쇄살인마와 강력계 형사로 마주한 두 범죄심리학자, 끝을 알 수 없는 두뇌 싸움으로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다!”라는 홍보 카피대로 이 작품은 사건도 사건이지만 범죄심리학자간의 불꽃 튀는 심리공방전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미세한 표정 변화, 사소한 몸짓, 미묘한 말투만으로도 상대방의 심리와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데다 함께 범죄심리학을 전공하며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추억을 공유한 연쇄살인마와 강력계 형사의 만남은 양들의 침묵에서 그려진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과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심리전과는 전혀 다른 결의 긴장감을 초반부터 팽팽하게 부풀려 놓습니다.

 

이미 체포된 범인과 안전한 거리를 두고 심문을 벌이는 형사라는 구도 때문에 자칫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지루한 심문 일지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여러 개의 액자소설을 끼워 넣는 형식을 통해 연쇄살인마가 저지른 끔찍한 고문과 살인, 헌터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트라우마 등을 번갈아 그려내면서 조금도 느슨해질 틈이 없는 스피디한 스릴러를 구축했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설정은 어디에 묻혀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수십 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사체를 찾아야만 하는 헌터에게 루시엔이 그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운 기괴한 범행동기를 자랑스럽게 피력하는 것은 물론 헌터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자신이 제안하는 심리전에 가담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루시엔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헌터는 그가 던진 질문에 거짓 없이 답을 해야만 하는데, 문제는 루시엔이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가 헌터에겐 참혹한 고문과도 같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루시엔의 집요한 질문은 뛰어난 범죄심리학자이자 프로파일러인 헌터의 평정심을 요동치게 만들고, 결국엔 파국에 가까운 상황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제야 루시엔이 헌터를 콕 찝어 심문자로 선택한 이유도 함께 폭로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제대로 언급할 순 없지만 루시엔의 범행 동기는 그동안 보아온 어느 가공할 소시오패스와도 차별화되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 읽고 찬찬히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책이나 영화로 만난 소시오패스들은 루시엔에 비하면 잔챙이처럼 느껴진다고 할까요? 물론 중후함(?)에 있어서는 한니발 렉터가 으뜸이지만, 루시엔은 범죄심리학자 출신 연쇄살인마답게 그만의 확고하고 뚜렷한, 하지만 동시에 어이없으면서도 이상하게 공감이 가는 범행동기를 지니고 있어서 개성에 관한 한 한니발 렉터에 못잖은 캐릭터라는 생각입니다.

 

검색해보니 크리스 카터는 이미 로버트 헌터 시리즈로 큰 명성을 얻은, 그래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되는 게 이상할 정도인 스릴러의 대가입니다. 그의 홈페이지를 보니 악의 심장은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2014)인 듯 싶은데, 대단한 필력에도 반했지만 매력적인 주인공 로버트 헌터 때문에라도 이 시리즈가 앞으로 계속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습니다. FBI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연방요원 대신 LAPD의 강력계를 고집해온 그의 출발점부터 차근차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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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효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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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의 시효F현경 수사1과를 배경으로 한 여섯 편의 단편이 실린 연작집입니다. 매 수록작마다 참혹한 범죄를 다루고 있고 진범과 진상을 파헤치는 미스터리가 전개되지만, 실은 범죄소설이라기보다는 경찰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F현경 수사1과 내부의 사연들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입니다.

 

뛰어난 능력자지만 제각각 강한 개성과 실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윗선들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반장들, 너무 뛰어난 부하 반장들 때문에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힌 수사과장, 수사1과의 명성에 짓눌려 스스로 파멸하고 마는 형사, 어린 시절 살인도구로 이용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형사가 된 수사1과의 막내 등 다양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그 중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넘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수사11,2,3반의 반장들이 실질적인 주인공인데, 이들은 각각 시리즈 주인공으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독특한 캐릭터와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차세대 간부가 유력한 1반 반장 구치키는 20여 년 전 겪은 참혹한 사고로 인해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파란 귀신이란 별명대로 굳은 표정과 서늘한 인상을 풍기는 그는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지만 이치를 따지며 수사하는 전형적인 형사입니다.

공안형사 출신으로 냉혈한이란 별명을 가진 2반 반장 구스미는 상관은 물론 부하들과도 좀처럼 소통하지 않는 괴짜입니다. 부하들에게 현장을 떠맡긴 채 독자적인 수사를 벌이며 범인 검거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1반 반장 구치키와 함께 검거율 100%를 기록하며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입니다.

반면 3반 반장 무라세는 직감이 아주 뛰어난 형사로, 부하들은 그가 현장을 둘러본 뒤 내뱉는 첫 마디를 듣고 사건의 성격과 해결방향을 가늠하곤 합니다. 다른 두 반장과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천재형 형사라고 할까요?

 

일반적인 형사들을 집념이나 직업정신’, ‘프로 근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그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정념이나 저주’, ‘원망같은 불길한 단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수사과장인) 다하타는 사건으로 먹고 살았지만 그들은 사건을 먹고 살았다. (p131)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답게 수록작 모두 대단한 흡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64’사라진 이틀처럼 장편은 아니지만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장편 이상의 묵직함과 비극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 묵직함과 비극성은 참혹한 사건이나 놀라운 반전 때문이라기보다는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과 심리라든가 우연과 필연이 겹쳐진 듯한 어찌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더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특징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데, ‘3의 시효는 경찰소설이자 범죄소설이면서 동시에 사건 이면의 비극을 잘 포착한 수작 중의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 아껴 읽다보니 14년 전에 한국에 출간된 이 작품을 이제야 읽게 됐는데, 역시 이번에도 기대 이상의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매번 느끼는 바지만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한눈에 읽히는 쉽고 간결한 문장들, 그리고 캐릭터, 사건, 반전, 여운이 적절하게 믹스된 서사는 요코야마 히데오를 최애작가중 한 명으로 꼽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게 만듭니다. ‘빛의 현관이나 그림자밟기등 간혹 의미나 문학성이 더 강조된 작품도 있지만, 경찰소설에 관한 한 그만의 독보적인 매력은 누구에게나 추천하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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