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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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인 침입자들에서 범상치 않은 45살 택배기사 행운으로 등장하여 시니컬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전직 용병 K. 과거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그는 한때 전 세계를 함께 누볐던 동료 안나로부터 5년 만에 부탁 전화를 받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K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에 자리한 러시아풍의 저택. 그런데 안나를 만난 K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소박하기만 한 안나의 부탁에 놀랍니다. 자신의 동생 이레네와 조카 마리를 이 이상한 마을에서 데리고 나가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저택의 노부인과 그녀의 망나니 손자들이 벌일 유혈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듣곤 깊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결국 안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K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저택에 머물며 특유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피비린내가 진동할 전쟁을 준비합니다.

 

파괴자들에 앞서 출간된 침입자들을 먼저 읽은 이유는 같은 주인공의 활약을 그린 시리즈물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침입자들에서 그저 묵묵히 노동에만 전념하는 말수 적은 택배기사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지닌 것으로 보였던 그는 단지 자신이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작품 내내 행운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침입자들이 택배기사로 일하며 자신 못잖게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과 인연을 맺고 다양한 사건을 겪는 행운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행운이 과거의 자신, 즉 용병 K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야말로 피와 살이 난무하는 한바탕 전쟁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 그곳에 생뚱맞게 자리 잡은 러시아풍 저택, 그리고 치외법권 지역이라도 되는 듯 마약, 매춘, 도박을 통해 자신들만의 왕국을 이끌고 있는 노부인과 손자들, 거기에다 그들에게 고용된 무자비한 글로벌 용병들.

K가 한바탕 전쟁을 준비하는 공간은 다소 판타지에 가깝게 설정돼있긴 하지만, 그곳을 채우고 있는 인물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자체가 워낙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조금도 위화감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특히 이미 세 차례의 전쟁으로 숱한 피비린내를 겪고도 네 번째 최후의 전쟁을 준비 중인 노부인과 세 손자들 사이의 긴장감과 함께 그들에게 고용된 용병들 사이의 속고 속이는 두뇌싸움, 그리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상을 저지르는 무자비함은 마치 영화로 보는 듯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쉼 없이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K의 본색과 능력을 알아본 노부인과 세 손자들이 어떻게든 K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액을 베팅하거나 협박을 일삼기도 하지만 오로지 K는 안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만 열중할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침입자들에서도 익히 본 적 있는 K만의 특유의 비아냥과 냉소와 썩은 유머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물론 조금의 자비심이나 주저함도 없는 어마어마한 폭력 재능 역시 독자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가 과거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을 박살내고 얻은 별명 아미고 델 디아블로’(악마의 친구)의 진가를 확인시켜주는 흥분지수 만점의 대목들이기도 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대규모 유혈 전쟁도 짜릿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용병들의 잇따른 반전입니다. 그야말로 용병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이 반전들은 자칫 애매한 권선징악으로 끝날 수도 있던 이야기를 묵직하고 비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작인 침입자들의 서평에서 주인공 행운의 입을 빌린 작가의 지적 허영이 과도했다는 쓴소리를 한 적 있는데, 다행히도 파괴자들K에게선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이야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침입자들에서 맛봤던 작가의 필력이 단발성이 아니란 점, 또 그가 오마주를 바친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대가 켄 브루언의 매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저는 켄 브루언의 작품들에게 높은 평점을 주진 못했지만 그의 냉소적이다 못해 신랄한 문장들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작가가 앞으로 K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주인공을 창조하더라도 한국형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신세계를 개척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앞으로도 자신만의 특화된 장르에 더욱 공을 들여주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액션 스릴러 혹은 누아르에 관한 한 뜨거운 피의 김언수, ‘방의강 시리즈의 방진호에 이어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만든 한국 장르물의 기대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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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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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한 장을 넘겼을 때 재미가 없다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장을 넘겼다면 분명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될 거라고 자신한다.”

 

말 그대로 자신감 넘치는 출판사 소개글의 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습니다. 과거를 꽁꽁 숨긴 채 고된 택배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45살 남자 행운이 주인공입니다. 그가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범상치 않은 이력과 함께 심연과도 같은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단 몇 조각의 단서만 주어질 뿐 독자는 그의 본명은 물론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기에 비아냥 가득한 말장난과 썩은 농담으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는 것인지, 또 도대체 어떤 이력을 지녔기에 문()과 무()는 물론 예술과 영화와 팝음악에 이르기까지 가히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끝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행운이 과거의 어느 지점 아마도 그가 백지처럼 지워버리고 싶었던, 하지만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는 떡밥을 남겨놓음으로써 후속작에서 이어질 그의 행보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만 어마어마하게 부풀려놓습니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2021년에 출간된 파괴자들에 관심을 가진 덕분입니다. 소개글을 잠깐 훑어보니 제가 좋아하는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제멋대로 이름 붙이자면 희대의 공처가이자 무적의 살인청부업자 방의강의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쯤 됩니다.)와 닮은꼴처럼 보였고, 알고 보니 주인공 K의 택배기사 시절을 다룬 침입자들이라는 전작이 있다기에 순서대로 읽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추리/미스터리로 분류해놓았지만 실은 스릴러로 분류될 작품입니다. 하지만 하위 장르까지 따지면 딱히 이것이라고 명명하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약간의 액션과 납치극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거친 노동과 중독 수준의 알코올과 장서가 수준의 독서에만 몰두하는 비밀 가득한 한 남자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비밀을 털어놓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맺는 다채로운 관계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음험하기도, 냉소적이기도, 친절하기도, 소심하기도 한 복잡미묘한 행운의 캐릭터 자체는 하드보일드 스릴러와 아주 잘 어울려 보여서 피와 살이 난무하기는커녕 대부분 택배기사의 고달픈 일상으로 채워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행운은 대놓고 철벽을 쳐놓은 45살의 택배기사인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대체로 멀쩡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인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매일 같은 자리에서 멍 때리다가 행운만 나타나면 담배 한 개비를 요구하는 우울증 환자, 경찰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헛소리만 떠벌리는 동네 바보, 난데없이 나타나 행운에게 경제철학 강의를 늘어놓는 노망난 노교수, 은밀한 눈빛으로 그를 유혹하는 게이 바 직원, 빈곤과 가난의 중간에서 삶을 저울질하는 폐지 줍는 소녀가 그들입니다. 가끔 칼을 품은 양복쟁이들도 등장하고, 별 일 아닌 일만 해줘도 거액을 주겠다며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선의의 침입자도 있고 악의를 숨긴 침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행운에게는 그들의 사연과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모두 침입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은 그들의 침입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줍니다. 때론 거칠게 부딪히기도 하지만 때론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그들을 감싸주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택배기사로서 고된 시간들을 보내며 다양한 인연들을 맺었던 행운은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어디론가 떠나려는 모습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립니다. 아마도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그렇게 떠난 행운이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또다시 과거의 K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꽁꽁 감춰진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룰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쩌면 제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가 제대로 터져줄 것 같아 나름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좀 길지만 쓴 소리 한마디만 꼭 하고 싶은데(재미있게 읽고도 별 1개를 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학, 영화, 그림, 사진, 음악, 심지어 경제와 수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묘사되는 행운의 과도한 천재성 때문에 읽는 내내 짜증을 넘어 화가 나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두세 번이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요하듯 반복된 행운의 올 라운드 천재성은 실은 작가의 지적 허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대목부터는 “OOO는 이렇게 말했지.”라는 문장만 보이면 아예 그 문단을 통째로 건너뛰곤 했습니다. 작가 스스로 인정한 켄 브루언과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오마주까지는 괜찮았지만, 적정선을 넘어 잘난 척으로밖에 안 보인 인용들은 오히려 행운의 캐릭터를 훼손시킬 뿐이었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지적 허영을 반복할 생각이라면 그것이 곧 자신의 소설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작가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행운이라면 그런 식으로 잘난 척을 일삼는 인물에게 과연 어떤 냉소 섞인 비아냥을 보낼까, 생각해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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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독자
막스 세크 지음, 한정아 옮김 / 청미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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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의 고급 주택가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채 발견된 그녀는 조커처럼 기괴하게 웃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현장 수사관들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범행수법이 로저의 베스트셀러인 마녀사냥에 묘사된 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이후 책 내용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헬싱키 경찰은 그저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담당 형사인 제시카 니에미는 중세 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 살해수법, 일부러 정보를 흘리는 듯한 범인의 기이한 행태, 흑발의 젊은 여성이란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 희생자 등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 속에서 명백히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지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당혹감에 빠지고 맙니다.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핀란드 스릴러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특별히 더 관심을 가진 작품입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에 걸맞게 핀란드는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 풍경 외엔 달리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는데, ‘모방 독자는 그 이미지 가운데 차갑고 어두운 면만 뚝 떼어내 옮겨놓은 듯 폭설, 얼음바다, 강풍 등 스산한 분위기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마녀사냥’ 3부작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를 시작으로 검은 머리의 젊은 여성들이 책 속에 묘사된 수법 그대로(혹은 비슷하게) 연이어 살해당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과 단서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인 기괴함 혹은 신비주의나 사탄주의의 악취를 풍기고 있어서 담당 형사 제시카 니에미를 비롯한 수사진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시신들은 (대부분) 똑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독살, 화형, 익사, 압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돼서 도무지 범인의 동기나 희생자 선정 방식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듭니다.

사건과 함께 나란히 전개되는 이야기는 주인공 제시카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15년 전에 그녀가 베네치아에서 겪은 끔찍한 악몽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 섞인 기억,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도저히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없었던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상실의 자리를 메우고자 향했던 베네치아에서의 4개월간의 악몽 등 제시카는 유능한 강력계 형사라는 외피 속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속 수법을 모방한 잔혹한 연쇄살인, 중세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이상학적 코드들(마녀사냥, 신비주의, 사탄숭배, 정신이상 등), 그리고 매력적이지만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주인공 등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들이 포진돼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것은 몇몇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큰 것은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입니다. 다분히 북유럽 스릴러다운 설정이긴 하지만 어느 한 곳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범인의 마지막 메시지는 기괴함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질적인 북유럽의 문화적 충격이라도 만끽했다면 그나마 조금은 보람이 있었을 텐데 그 역시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다음으론 주인공 제시카의 캐릭터인데, 작가는 초반부터 그녀는 무척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반복적으로 묘사되던 제시카의 고통은 뒤늦게 그녀가 6살에 겪은 가족의 해체와 15년 전에 겪은 베네치아에서의 악몽을 통해 부연설명됩니다. 제시카의 과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걸 보면 그녀의 고통이 현재 벌어진 사건과 관련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에도 그녀의 고통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연쇄살인사건 스토리와 분리된 듯 따로국밥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없어선 안 될 설정이지만 너무 과도한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납득하기 힘든 범인의 동기와 더 납득하기 힘든 주인공의 캐릭터가 접점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다소 허무하게 보인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을 극찬한 번역가와 인터넷서점 서평란에 별 5개를 준 많은 독자들처럼 취향만 잘 맞는다면 모방 독자는 사건 자체나 제시카의 캐릭터, 범인의 기괴한 범행동기 등 모든 면에서 충분히 열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소수의견일 가능성이 무척 높지만) 개인적으론 핀란드의 스산하고 지독한 한겨울의 풍경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대목을 찾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가혹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지배하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이런 소재와 설정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또 대박을 위한 필수조건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저 같은 성향의 한국 독자에게 어필하기에는 산타클로스만큼이나 현실감이 부족해 보인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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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찰리 돈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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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는 시카고경찰서 특수조사팀 소속이지만 실은 프리랜서나 다름없는 범죄 재구성 전문가로리 무어. 번아웃과 우울증 때문에 6개월 넘게 잠수를 타던 그녀는 갑작스레 사망한 변호사 아버지가 남긴 업무를 떠맡게 되는데, 그 가운데 로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가석방을 코앞에 둔 일명 도적에 관한 것입니다. 40년 전 연쇄납치살인마로 지목됐지만 시신도 없고 단서도 없이 정황증거만으로 60년 형을 선고받았던 도적의 가석방은 언론마저 주목하는 사안인데, 로리로서는 아버지가 왜 그 오랜 시간동안 도적같은 자를 변호하며 적잖은 돈을 받아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도적의 과거 자료 속에 등장하는 미지의 여인 때문에 로리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집니다. 40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터넷과 과학수사 없이 거의 완벽한 범죄의 재구성을 이뤄내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찰리 돈리가 창조한 독특한 커플 주인공 로리 무어와 레인 필립스는 이미 수어사이드 하우스’(20211)를 통해 한국 독자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원작 출간순서로는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가 먼저입니다.) 10년째 연인이지만 결혼 따윈 생각하지 않는 두 사람은 각각 최고의 범죄 재구성 전문가, 최고의 법정-범죄심리학자로 공인받은 인물들입니다. 특히 메인 주인공인 로리 무어의 캐릭터는 워낙 독특해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지독한 자폐, 강박, 편집증은 30대 중후반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악수 같은 간단한 스킨십조차 거부하는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갑옷 차림 - 두꺼운 뿔테안경, 이마까지 내려쓴 비니, 턱 밑까지 단추를 채운 회색 코트, 전투적 분위기를 내뿜는 컴뱃 부츠 으로 세상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의 상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엄청난 집중력과 정보 분석력, 그리고 사건을 재구성해 진실을 캐내는 힘의 원천이 돼줬습니다. 전직 FBI 프로파일러이자 범죄심리학자인 연인 레인과의 협업 외엔 오롯이 홀로 모든 작업을 진행하는 로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보기에는 산발적이고 상관없는 것들을 연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카고경찰서 살인전담반장 론 데이비슨이 그 누구의 간섭도 거부하는 천방지축로리를 내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품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발군의 재능과 이미 수차례 입증된 뛰어난 실적 때문입니다.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는 여러 면에서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비극들이 우연처럼 또는 운명적으로 한꺼번에 충돌하며 사건들을 빚어낸다는 점, 또 등장인물, 시공간, 사건 모두 다소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독자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특히 어지간한 스릴러 작가라면 못 해도 600페이지 안팎의 분량을 쏟아내고도 남을 소재와 서사를 400페이지 미만의 분량에 욱여넣은 탓에이야기는 단 한 줄도 설렁설렁 넘길 수 없게끔 정교하고 빽빽하게 구축돼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스릴감도 대단하고 재미나 반전 역시 매력이 철철 넘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979년 시카고를 공포에 빠뜨린 20대 여성 연쇄실종사건에 집착하는 자폐증 환자 앤절러의 이야기와 함께 40년 후인 2019, 살인범 도적의 가석방 절차를 떠맡게 된 로리의 이야기가 교차로 전개됩니다. 뭐든 한 번 꽂히면 통제불능 수준에 빠지고 마는 집착 덕분에 연쇄실종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 앤젤러의 이야기가 심리-호러-범죄 스릴러를 골고루 겸비한 서사라면, 아버지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40년 전의 진실을 추적하는 로리의 이야기는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미스터리의 힘을 발산합니다. 과연 앤절라는 40년 전 제대로 된 진실을 파헤친 것인지, 그렇다면 성실한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왜 도적을 감싸온 것인지, ‘도적은 정말 가석방될 만큼 죄를 뉘우친 것인지 등이 로리에게 주어진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들입니다.

 

짧게는 1~2페이지, 길어도 10페이지 남짓하게 짧게 끊어진 챕터들은 안 그래도 빠른 속도감을 몇 배는 더 가속시켰는데, 덕분에 화장실 갈 틈도 없이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수어사이드 하우스보다 재미와 힘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라 느껴졌는데, 특히 여러 주인공 중 한 자리 정도를 차지하는데 불과해서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달리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폭주를 보여준 로리는 그녀 자신의 캐릭터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빛나게 한 일등공신이라는 생각입니다.

 

2021년에만 한국에 두 편의 작품이 소개된 찰리 돈리는 이제 막 중견으로 발돋움하려는 단계의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존을 검색해보면 ‘Summit Lake’, ‘The Girl Who Was Taken’, ‘Don't Believe It’, ‘Twenty Years Later’ 등의 작품이 나오는데, 대부분 로리와 레인이 등장하진 않는 것 같지만, 그와 관계없이 가능하다면 원작 출간순서대로, 그게 어렵다면 뒤죽박죽이라도 좋으니 2022년에도 그의 작품을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찰리 돈리의 매력적인 스릴러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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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이혁재 옮김 / 더이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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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은 2008살인 방관자의 심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가 2021년 개정판이 나온 건데, 초판의 경우 각 수록작의 제목들을 원제와 무관하게 의역한데다, 원작과 달리 엉뚱한 작품을 표제작으로 내세운 바람에 개정판과 서로 다른 작품으로 오인할 여지가 많습니다.)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된 경찰소설의 대가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집입니다. 비록 경찰(혹은 사법기관)이 등장하진 않지만 깊고 묵직한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는 수작입니다. 제목인 진상은 수록된 작품 중 한 편의 제목이지만 실은 모든 수록작들을 아우르는 화두이자 주제이기도 합니다. 다섯 작품 모두 과거와 현재에 걸쳐 벌어진 참혹하고 안타까운 비극을 다루고 있는데, 그 비극들은 하나같이 고의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교묘히 은폐된 진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늦게 드러난 그 진상은 사건 관련자 모두에게 후련함이나 속 시원한 엔딩보다는 더욱 더 고통스러운 상처와 암울한 미래를 남겨놓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과자라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집주인에게 쫓겨나 길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선의 덕분에 집이라는 안식처를 얻게 되지만 숙명처럼 다시 찾아온 불행에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타인의 집), 전도유망한 공무원 자리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자체장 선거에 나섰지만 14년 전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18번 홀), 아들을 살해한 범인이 10년 만에 체포됐다는 소식에 오히려 회한과 비통함에 빠진 아버지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뒤 오히려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이야기(진상), 정리해고 당한 뒤 불법 아르바이트로 위태로운 삶을 유지하던 한 남자가 방화 살인사건에 연루되면서 겪게 되는 아이러니하고도 서글픈 이야기(불면), 대학시절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체육부 합숙과정에서 친구를 잃은 남자들이 12년이 지나서야 마주치게 되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에 대한 이야기(꽃다발 바다) 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동안 읽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들은 장편(‘64’, ‘그림자밟기’, ‘빛의 현관’, ‘사라진 이틀’, ‘클라이머즈 하이’)의 경우 사건과 서사는 무척 묵직하고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깊은 여운과 따뜻한 감동도 함께 남겨준 반면, 단편집(‘얼굴()’, ‘종신검시관’)은 경찰(혹은 사법기관 종사자)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다소 가볍고 읽기 편한 느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상은 일반인들이 주인공을 맡고 있긴 해도 각각 전과자, 살인 은폐자, 살인사건 유족, 정리해고자, 학폭 피해자 등 어두운 과거를 지닌 캐릭터들인데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날수록 오히려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 세례라도 받은 양 더욱 더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그의 어느 장편보다도 무겁고 스산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 중 뒷맛이 가장 씁쓸했다고나 할까요? 물론 미스터리의 재미와 긴장감은 그에 못잖게 대단하지만 말입니다.

 

개정판을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은 모두 12편입니다. 아직 읽지 못한 4편 가운데 루팡의 소식3의 시효는 책장에 오랫동안 방치해놓은 상태인데, 게을러서라기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나중에 먹으려고 일부러 아껴둔, 그런 심정으로 방치해놓은 게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간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아까워서라도 기약 없이 계속 방치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한 편이라도 더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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