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청소부 마담 B
상드린 데통브 지음, 김희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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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지하세계에서 마담 B로 불리는 39살의 블랑슈 바르자크는 경력 15년의 베테랑 범죄현장 청소부입니다. 은밀한 의뢰를 받고 살인현장에서 시신은 물론 혈흔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이 그녀의 임무입니다. 지금까지 92건의 완벽한 청소를 이뤄냈지만 93번째 의뢰는 그녀의 삶을 통째로 망가뜨립니다. 청소 도중 20년 전 자살한 어머니의 유품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청소부 멘토이자 양아버지인 아드리앙과 자신밖에 모르는 그 유품이 왜 살인현장에 있던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진 블랑슈에게 더욱 큰 충격을 가한 건 누군가 명백히 자신과 아드리앙을 향해 살의를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그 와중에 아드리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점입니다.


 

프랑스 소설답게 범죄스릴러와 심리스릴러가 교묘하게 얽힌 독특한 작품입니다. 영미권 또는 일본의 장르물이었다면 꽤 명쾌하고 스피디한 전개가 이뤄졌을 소재지만, 작가는 프랑스 소설 특유의 정중동 서사 또는 인물의 심리를 집요하게 묘사하는 스타일을 통해 다소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요약하자면, 범죄청소부인 블랑슈와 그녀의 양아버지인 아드리앙이 복잡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복수극에 휘말렸다가 끝내 진상을 밝혀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묻혀있던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큰 고통과 비극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프랑스 소설답게 만드는 중요한 설정 중 하나는 블랑슈의 어머니가 20년 전 극도의 정신착란 증세를 겪다가 권총으로 자살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블랑슈의 삶 자체를 지배해온 무겁고 고통스런 과거이자 그녀 역시 모계유전의 영향으로 보이는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탓에 어찌 보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비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블랑슈에게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어머니의 유품은 적잖은 정신적 타격을 입힌 것은 물론, 자신을 향한 정체불명의 공격이 어쩌면 20년 전 자살한 어머니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블랑슈는 현재의 위기와 과거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블랑슈와 아드리앙을 향한 첫 공격은 마치 유령에 의해 자행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겨서 모녀 2대에 걸친 정신착란 설정과 함께 이 작품의 초반부를 서스펜스 호러스릴러 풍으로 읽히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으로 탈바꿈하면서 진범 찾기 미스터리 서사가 펼쳐지고, 블랑슈의 범죄청소부로서의 과거는 물론 20년 전 어머니의 자살까지 소환되며 이야기는 더더욱 복잡미묘한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상드린 데통브의 문장은 어렵거나 난해하진 않지만 블랑슈의 요동치는 심리를 현미경 들여다보듯 묘사하는 대목들이 많아서 이야기의 복잡미묘한 양상과 함께 독자에게 더욱 섬세하고 집중력 있는 책읽기를 요구합니다.

 

이야기는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블랑슈의 고통과 비극을 극대화합니다. 20년 전 어머니의 자살에 얽힌 사연, 자신과 아드리앙을 공격한 범인의 정체와 의도, 뒤늦게 아드리앙이 털어놓은 믿을 수 없는 과거사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자들의 악의와 탐욕 등 무엇 하나 제정신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팩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블랑슈의 불안정한 정신을 무자비하게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녀는 청소부로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딸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의 중요한 설정들은 모두 과거에서 비롯됩니다. 블랑슈의 진실 찾기 여정은 현재보다 과거 속에서 헤매는 대목이 많습니다. 띠지 카피 역시 지워야 했던 것은 증거가 아니라 내 과거였다!”라는 문구를 강조하는데, 안 그래도 프랑스 소설이라면 일단 경계하는 독자에겐 다소 위협적인(?)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금 천천히, 조금 더 집중해서 읽다 보면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프랑스 스릴러의 참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일부 중요한 대목에서 설명이 명쾌하지 않았던 점, 복선과 단서들이 남김없이 회수되긴 했지만 얼마간의 찜찜함을 남긴 점, 그리고 너무 범죄가 너무 복잡하게 설계된 탓에 한눈에 들어오지 않은 점 때문에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줬지만,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색다른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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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속 아이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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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재벌가의 상속녀 오리아나가 프랑스 남부 휴양지의 요트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사망합니다. 수사에 나선 니스 경찰청 강력반은 현장에서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고,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1년 뒤, 오리아나의 남편이자 유명 재즈피아니스트인 아드리앙의 저택에 범행 흉기가 보관 중이라는 익명의 제보가 들어오고, 감식 결과 흉기에 말라붙은 혈흔과 머리카락의 주인공이 오리아나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수사팀장 쥐스틴은 아드리앙을 취조하지만 철저한 부인과 함구에 전혀 진척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제3의 인물, 즉 아드리앙의 숨겨진 연인으로 추정되는 아델이란 여자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까지 고작 다섯 편밖에 읽지 못한 터라 함부로 단정할 순 없지만 유독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욤 뮈소는 제겐 늘 반반 정도의 만족감을 준 작가입니다. 프랑스 작가답지 않게 쉽고 편하게 읽히는데다 예기치 못한 반전과 긴장감을 품은 장르물 서사가 장점이라면, 무게감이 다소 부족해 보이고 간혹 이해하기 힘든 전개와 결말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점이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미로 속 아이는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확실한미스터리 스릴러라서 나름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역시 반쯤은 만족했고 반쯤은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니스 경찰청 강력반의 쥐스틴 팀장이 사건 발생 1년 만에 유력한 용의자로 감치된 오리아나의 남편 아드리앙을 취조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입니다. 사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경찰은 아드리앙을 의심했지만 여러 가지 정황 상 그를 체포할 근거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가 뜬금없는 익명의 제보 덕분에 결정적 단서를 손에 넣게 된 셈인데, 그래선지 쥐스틴의 취조는 다소 무리하고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재미있는 건 취조가 진행될수록 쥐스틴의 마음속엔 아드리앙에 대한 상반된 심정, 즉 유죄가 분명해 보이지만 왠지 그럴 리 없어 보인다는, 본인도 납득 안 되는 모순이 자라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앙의 숨겨진 연인 아델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쥐스틴의 추리는 그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전개되는데, 특히 사건 발생 18개월 전, 재벌가 상속녀인 오리아나가 가난한 호텔 메이드 아델에게 접근하여 터무니없는 제안 - “내 남편의 연인이 되어줘.” - 을 한 뒤 벌어지는 기이한 상황들 때문에 독자는 두 여자의 관계가 살인사건과 어떻게 접목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미스터리 못잖게 큰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주조연을 막론하고 가족의 문제를 겪고 있는 인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젊은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뒤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40대 중반의 쥐스틴 팀장, 어린 시절 끔찍한 사고를 겪었지만 끝내 주목받는 상속녀로 성장했으며 결혼 후 남편 아드리앙과 크고 작은 트러블을 겪긴 했어도 아이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던 오리아나, 평생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장밋빛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자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히는 아델, 청소년기에 접어든 뒤 인생을 망쳐버린 아들 때문에 자괴감에 사로잡힌 형사 등 미스터리 자체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꽤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큰 그림을 보면 인물과 사건 모두 가족이라는, 가장 가깝고도 먼 관계를 기반으로 설정됐음을 알 수 있어서 굳이 많은 분량과 비중을 들여 비하인드 스토리를 설명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습니다.

 

미로 속 아이는 단 몇 글자만으로 초대형 스포일러를 유발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몇 글자에 대해 독자들 사이에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라는 실망감이 먼저 든 게 사실이지만, 기욤 뮈소는 나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설정을 투입함으로써 식상한 결말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그만의 특별한 엔딩을 이끌어냈습니다. “마지막 한 줄을 다 읽고 나야 모든 의혹이 해소된다.”라는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저처럼 ?”라는 실망감이 들더라도 마지막 장까지 차분하게 읽다 보면 그만의 특별한 엔딩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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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식당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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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독신으로 훗카이도에서 살아온 산고는 어느 날 갑자기 도쿄 진보초의 다카시마 헌책방의 주인이 됩니다. 대학 입학과 함께 도쿄로 가서 홀로 살다가 작고한 작은오빠 지로가 자신이 소유했던 헌책방과 3층짜리 건물을 산고에게 남겼기 때문입니다. 도쿄에서의 생활도, 가게 운영도 처음인 산고를 돕는 건 대학원에서 고전을 전공하는 조카손녀 미키키입니다. 오빠 지로에 대한 그리움, 훗카이도에 살 때 연심을 품었던 히가시야마에 대한 미련, 그리고 모든 것이 서툴 뿐인 헌책방 운영 등 산고의 하루하루는 심란하고 위태로울 뿐이지만, 미키키의 도움 덕분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헌책방을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교류를 통해 작지만 소중한 보람을 맛봅니다.

 


하라다 히카의 이름은 인터넷서점의 일본소설을 검색할 때마다 자주 발견하곤 했지만, 그동안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은 건 낮술’, ‘우선 이것부터 먹고’, ‘도서관의 야식난 음식소설입니다.”라고 노골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낸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미스터리가 가미된 음식소설은 즐겨 읽는 편이지만 힐링 서사와 섞인 음식 이야기는 제 취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오로지 제목에 들어간 헌책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특히 언젠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도쿄 진보초의 헌책방 거리를 무대로 한 이야기라 더욱 구미가 당겼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도쿄 땅에서 오빠 지로에게 물려받은 헌책방을 운영하게 된 할머니 산고, 작은할아버지 지로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데다 스스로 고전을 전공하면서 진보초의 헌책방 거리에 익숙한 덕분에 고모할머니 산고를 돕게 된 대학원생 미키키가 헌책과 음식을 소재로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동네가 전부 헌책 식당인 거네요. 거리 전체에 오래된 책들이 넘쳐흐르고, 맛있는 음식도 넘쳐흐르니까요. 참 멋진 동네예요.” (p348)

 

산고와 미키키는 헌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알맞은 책을 추천하고 그들과 함께 포장해 온 음식을 먹으며, 그들이 헌책방을 찾아오게 된 사연을 듣곤 분에 넘치지 않는 조언을 들려줍니다. 동시에 두 사람은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들을 헌책방에서의 하루하루를 통해 조금씩 덜어내거나 정리하기도 합니다. 인생 후반기에 낯선 곳에서 낯선 일을 떠맡게 된 산고가 오빠의 유산인 헌책방의 소중함을 절감하면서도 한 남자를 향한 미련 어린 연심 때문에 수심 깊은 나날들을 보낸다면, 논문을 준비 중인 대학원생이면서도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미래 때문에 고민에 빠진 미키키는 산고 할머니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속내 때문에 매일 같이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면서도 각자의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헌책방을 둘러싼 정감 어린 힐링 서사와 잘 섞여 있어서 자칫 지루한 동어반복이 될 수도 있는 스토리를 입체감 있게 만들어줍니다.

 

워낙 책을 좋아하는데다 막연한 망상이긴 해도 언젠가 작은 서점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터라 헌책 식당은 제겐 각별한 재미와 의미를 준 작품입니다. 다만 헌책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건지, 아니면 작가의 전공이 음식이라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식당이란 소재가 끼어든 건 개인적으론 무척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뭐랄까, 헌책과 식당의 조합이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억지스럽게 꾸며진 느낌이랄까요? 제각각의 사연으로 헌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치유와도 같은 알맞은 책을 추천하거나 때론 논쟁을 벌이며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장면들은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그들에게 포장해 온 음식을 권하고 거기에서 다소 뜬금없는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상황은 다분히 작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어라고는 그저 어설프게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읽어내는 정도가 전부일 뿐이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루쯤 통으로 진보초 거리를 걸어보고 싶은 로망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제가 좋아하는 일본소설의 원작을 발견한다면 그저 소장하는 게 전부일지라도 한두 권쯤은 사고 말 거라는 욕심도 품고 있습니다. ‘헌책 식당에 소개된 서점과 카페와 식당이 실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진보초 거리를 걷게 된다면 꼭 찾아가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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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모든 것을
시오타 타케시 지음, 이현주 옮김 / 리드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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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가나가와현과 도쿄에 걸쳐 전대미문의 아동 동시 유괴사건이 벌어집니다. 수사력이 분산된 경찰은 혼란에 빠졌고, 유괴범에게 돈 전달을 맡은 가족이 뜻밖의 폭주를 벌이는 바람에 범인이 자취를 감추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다행히 유괴된 소년 중 한 명은 발견됐지만 나머지 한 명인 4살 나이토 료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 7살이 된 료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문제는 지난 3년에 대해 료가 아무 말도 안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당시 2년차 경찰 출입기자였던 몬덴 지로는 자신과 각별했던 사이이자 유괴사건 수사에서 중책을 맡았던 형사 나카자와의 장례식에서 뜻밖의 상황과 마주합니다. 한 주간지에 지금은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화가가 된 료의 사진이 실렸고, 그걸 발견한 나카자와의 후배 형사들이 몬덴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추가 조사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표지와 제목 모두 평범한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마치 인문과 철학의 향기가 깃든 묵직한 순문학을 연상시켜서 읽기 전부터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작품입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30년 전의 기이한 유괴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한 노회한 기자의 분투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의 핵심이자 주인공 몬덴 지로의 목표는 범인의 정체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유괴됐던 소년 나이토 료가 과연 3년 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왜 료는 그 시간에 대해 입을 다물었던 건지,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잠적한 채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화가로 성장하게 된 사연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몬덴의 조사는 유괴사건의 진상과 범인 찾기로 시작되지만, 그의 손에 들어오는 정보들이 하나같이 놀라운 우연과 적잖은 위화감으로 포장돼있다는 걸 깨닫자 몬덴은 료가 감췄던 3년의 공백 속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사연이 숨어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기자와 형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몬덴의 지난한 여정은 범죄 미스터리 못잖게 저널리즘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보여줍니다. 평생 기자로 살아왔지만 만족감보다는 자괴감이 더 깊게 남은 54세의 몬덴이 결국 자네는 왜 신문기자를 하는 건가?”라는 나카자와 형사의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 마지막 현장 취재라는 각오로 진심을 다해 분투하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저널리즘 휴먼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요코야마 히데오)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진정성 있게 다가왔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희미한 단서들의 고리를 찾아내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이끌어내며 한걸음씩 목표에 다가가는 모습은 기자로서도, 형사로서도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진상을 알아낸 그가 “‘살아 있다는 묵직함, 그리고 살아왔다는 대단함을쓰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며 저는 인간을 쓰겠습니다.”라고 일성을 내뱉을 때의 감동은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한편 이 작품은 미술, 특히 사실화(寫實畫)를 중요한 소재이자 소품으로 다루는데, 방대한 자료조사의 흔적이 역력한데다 그림 하나하나에 대한 시오타 타케시의 깊고 은은한 문장들까지 더해져서 “(사진처럼) 비슷하다는 차원을 넘어 혼의 일부를 빨아들여 캔버스에 증식시킨 듯한사실화의 진수를 마치 눈으로 직접 보는 듯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사실화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꾸미기 위한 설정이 아니라 미스터리 자체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읽는 내내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55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툼한 분량 속엔 표지와 제목에 걸맞게 묵직하고 비범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그저 미스터리로만 분류해서는 안 되는, 즉 애틋한 휴먼드라마와 운명적인 비극과 미술 이야기가 혼재된 아주 특별한 작품이라고 할까요? 읽기 전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존재의 모든 것을이라는 제목이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희미하게나마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아마도 그 특별함이 독자인 제게 제대로 소구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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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왕의 방패 - 제166회 나오키 상 수상작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1
이마무라 쇼고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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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시대(戰國時代)의 전란 속에 가족을 잃은 교스케는 석축, 즉 돌쌓기 장인 도비타 겐사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뒤 그의 후계자로 성장합니다. 각지의 다이묘들이 큰 성의 성벽 쌓는 일을 의뢰할 만큼 대단했던 겐사이의 명성은 돌의 모습으로 경계를 지켜주는 새신(塞神)’에 빗대어 새왕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그런 겐사이의 후계자가 된 교스케의 꿈은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성을 쌓는 것입니다. 모든 성이 난공불락이 된다면 더 이상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철포 장인인 구니토모 겐쿠로는 포선(砲仙)이 되어 어떤 방어도 깨뜨리는 총포를 만들어 평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센고쿠시대의 막바지, 일본의 패권을 다투는 대전투를 앞두고 교스케와 겐쿠로는 방패와 창의 마지막 대결을 벌입니다.

 


모순(矛盾)이라는 단어의 어원대로 모든 걸 뚫을 수 있는 창모든 걸 막아낼 수 있는 방패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꺾이든 부서지든 어느 한쪽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으려는 새왕 교스케와 그 어떤 성벽도 궤멸시킬 총포를 만들려는 포선 겐쿠로는 하필 전란으로 뒤덮인 16세기 일본의 센고쿠시대에 숙적으로 만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아이러니한 건 교스케와 겐쿠로 모두 승전이나 패권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교스케는 난공불락의 성을 통해, 겐쿠로는 천하무적의 총포를 통해 전쟁을 끝장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궁극의 꿈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전으로 비유하자면 전쟁 억지를 위해 한쪽은 완벽한 아이언 돔, 한쪽은 막아낼 수 없는 핵폭탄을 구축하려고 분투한다는 셈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공존 불가능한 방패와 창의 대결은 어떻게 막을 내릴까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전쟁 서사의 주인공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사들의 몫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벽을 쌓는 새왕총포를 만드는 포선을 앞세운 새왕의 방패는 무척이나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의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또한 승패의 결과 혹은 승패가 몰고 온 역사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상반된 수단을 통해 전쟁 없는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두 주인공의 집념과 분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 어떤 전쟁 서사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감동적이면서도 농도 짙은 휴머니즘을 선사합니다. “열정 그 자체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는 아사다 지로의 평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완벽한 성벽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교스케가 선()이고, 무자비한 총포로 전쟁을 억지하려는 겐쿠로가 악()인 듯싶지만 이 이야기 속엔 그 어디에도 선과 악의 구분이 없습니다. 일본 패권을 노리는 두 진영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이고 교스케와 겐쿠로는 각각의 진영에 속해 맞대결을 펼치지만 새왕의 방패승자독식 패자지옥같은 어설픈 주제 대신 각자의 신념에 따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인물들을 섬세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물들은 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진심을 다하는 교스케와 겐쿠로를 응원하고 지원합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수많은 목숨들이 하찮게 스러지는 전장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빛을 잃지 않는 두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새왕의 방패는 일본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겐 꽤 진입장벽이 높은 작품입니다. 복잡한 인명과 지명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 센고쿠시대의 역사를 전혀 모르면 앞뒤 맥락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일본소설, 특히 시대소설에 익숙한 터라 그리 낯설지 않았고, 마침 1년 전 교토 여행 때 새왕의 방패의 주 무대인 오미(현재의 시가현) 비와호(琵琶湖) 인근을 둘러본 적이 있어서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지만,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센고쿠시대에 관한 간략한 지식(나무위키 검색 결과만으로도 충분합니다)과 함께 교토와 비와호 인근의 지도를 예습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교스케와 겐쿠로의 삶은 전쟁과 평화를 거듭했던 센고쿠시대의 요동치는 역사와 꼭 닮아있으며, 그들의 터전이자 최종 대결의 무대들 - 시가현, 비와호, 오쓰성 등 - 은 단순히 무대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워낙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인물이나 줄거리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세세히 늘어놓자면 A4 몇 장으로도 모자랄 만큼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체질적으로 일본 시대소설에 거부감이 있다면 할 수 없지만, 교스케와 겐쿠로가 들려주는 진짜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는 그 거부감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처절하고도 감동적이라서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분권도 안 한 720여 페이지의 분량이라 저는 이틀에 걸쳐 읽었지만, 이른 아침 첫 페이지를 연다면 늦은 밤이 되기 전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사족 하나

희한한 시리즈 만들기에 진심이신 북스피어의 삼송 김사장님께서 이번엔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라는 긴 제목의 별난 시리즈를 창조하셨습니다. 새 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새왕의 방패라는 멋진 작품으로 끊으셨는데, 실은 북스피어 출간작 중에 이 시리즈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들이 있어서 제목만이라도 소개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느 포수 이야기’(구마가이 다쓰야), ‘연가’(아사이 마카테), ‘웃는 이에몬’(교고쿠 나쓰히코)은 당장이라도 개정판을 통해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시리즈에 추가하고 싶은 작품들입니다.

 

- 사족 둘

새왕의 방패는 굳이 시간적 배경을 좁혀서 말하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흥망성쇠를 겪은 1570~1600년입니다. 그래선지 등장하는 일본 무장 중(두 주인공과 교감 혹은 친분을 나누는 인물 중에도) 적잖은 수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대목도, 침략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인물도 없긴 하지만, 아무래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띌 때면 잠시 기분이 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무시무시한 무력을 지닌 왜적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 땅을 지켜낸 선조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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