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미스터리 2021.겨울호 - 72호
계간 미스터리 편집부 지음 / 나비클럽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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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광팬이라 자처하면서도 그 분야를 다룬 평론이나 문예지 혹은 장르물 잡지를 읽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뭐랄까, 어렵고 학구적일 거란 선입견도 작용했고, 직접 읽은 작품의 후반부에 실린 해설이라면 모를까, 광범위하고 원론적인 주제에 대한 전문가의 식견은 그리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를 접하게 된 건 순전히 제가 가입한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를 소개한 글이 실렸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긴 분량은 아니지만 종종 서평도 올리고 댓글도 자주 달곤 하는 카페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내용은 제법 흐뭇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카페 소개글 외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270여 페이지의 분량 안에 담긴 다양한 글들을 읽으면서 내심 놀랐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특히 여성 캐릭터 리부트라는 제목 하에 실린 죽어야 하는 여자들’(듀나), ‘추리 소설의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한이)는 그동안 장르물을 읽으면서 여러 번 생각했던 바를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어서 무척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살해 혹은 고문당하는 장면조차 관음증의 대상으로 여겨진 여성 캐릭터의 문제라든가 그것을 고의적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애용해온 작가들의 태도, 그리고 마초 주인공이 날뛰던 하드보일드 시대에 더욱 저급한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한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찰 등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내용들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신인상 수상작’, ‘단편소설’, ‘특별 초청작’, ‘미니픽션’,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트릭의 재구성등 다채로운 미스터리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는데, “확실하게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단편 혹은 미니픽션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작품도 꽤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름 돋을 정도로 잔인하지만 동시에 정갈하기(?) 짝이 없는 소시오패스를 그린 인간을 해부하다’(류성희)는 장편으로의 확장이 기대되는 작품이었고,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소재인 장기 기증을 일종의 복수코드와 접목시킨 토요일의 예고 살인’(황세연)은 비록 미스터리 자체는 평범했지만 설정 자체가 매력적이라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 마니아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소심한 욕심을 품기 마련인데, 수록된 미스터리 작품들을 보며 그런 욕심이 조금은 더 생긴 게 사실입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도 없고 연마한 필력도 없으니 그저 소박한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어쩌면 계간 미스터리덕분에 무모한(?) 도전에 나서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처음 접한 미스터리 전문 잡지의 독특한 재미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과월호도 찾아보고 싶어졌고 앞으로 나올 신간들 역시 그 목차를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미스터리의 탄탄한 토대를 위해, 또 화수분처럼 재능 있는 한국 장르물 작가들의 산실로서 앞으로도 계간 미스터리가 늘 건승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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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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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워싱턴 주의 소도시 시더 그로브에서 18살 세라가 실종된 직후 인근에 사는 성범죄 전과자 에드먼드가 체포됩니다. 세라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에드먼드는 정황증거만으로 1급 살인죄와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어느 날, 세라의 유골이 발견되자 동생의 실종 이후 한시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애틀경찰국 강력계 형사 트레이시 크로스화이트는 그동안 자신이 품어왔던 의심이 사실이라고 확신하며 주위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라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20년 전 빈약했던 정황증거와 석연치 않은 법정공방 끝에 에드먼드의 유죄를 이끌어낸 건 다름 아닌 트레이시 자매의 아버지, 시더 그로브의 보안관, 그리고 검사와 변호사 등이었는데, 트레이시의 눈에는 그들이 뭔가를 감추고 있으며 어쩌면 진범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내 동생의 무덤은 다채로운 장르가 잘 버무려진 스릴러입니다. 20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치열한 미스터리+법정 스릴러이자 시애틀경찰국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의 거침없는 활약을 그린 형사물이며, 동생을 잃고 가족이 붕괴된 뒤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온 평범한 한 여성의 비극을 그린 가족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세라의 죽음의 진실을 찾으려는 트레이시의 여정은 가시밭길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첫 과제가 20년 전 아버지와 보안관을 비롯한 모든 사법기관이 범인으로 지목한 잔혹한 성범죄 전과자 에드먼드가 무죄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 때문인데, 그로 인해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시더 그로브 사람들은 트레이시에게 차갑고 냉정한 시선만 보낼 뿐이며, 당시 수사를 맡았던 노회한 보안관 캘러웨이는 노골적으로 트레이시의 행보를 막아섭니다. 더불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트레이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애틀경찰국 수사국장의 압박까지 더해져 트레이시의 운신의 폭은 극도로 불리한 지경에 처합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트레이시의 지원군이 돼준 건 어린 시절 친구이자 지금은 변호사가 된 댄 올리리입니다. 그녀의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댄은 당시 에드먼드를 유죄로 몰아간 자들의 행동과 법정에서 거론된 증거들을 재조사한 뒤 공식적인 재심 절차에 돌입합니다.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하여 자신과 친밀했던 사람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 진범을 찾기 위해 잔혹한 성범죄 전과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만에 하나, 성범죄 전과자만 풀어준 채 아무런 진실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최악의 가능성 등 피를 말리는 재조사에 있어서 트레이시에게 긍정적인 요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20년 전의 진실을 향해 오로지 돌직구처럼 달려들 뿐입니다. 때론 운이 따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예리한 추리와 성실한 발품으로 성과를 얻어내는 트레이시의 행보는 독자의 눈길을 한시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모든 것이 밝혀지는 중후반부의 반전의 대목은 전혀 새로운 전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놀라움과 함께 마음 한쪽을 서늘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전은 트레이시가 오랫동안 참아왔던 격한 감정을 일시에 터지게 만들고 맙니다.

 

이런 구도 덕분에 독자는 마지막 장까지 숨 가쁘게 가속만 반복하는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을 만끽하게 되는데, 범죄스릴러와 법정스릴러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야기는 한때 그 분야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존 그리샴을 떠올리게 했고, 그중에서도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펠리컨 브리프의뢰인의 감흥을 기억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이 2014년에 출간된 점, 또 이후 현지에서 트레이시 크로스화이트 시리즈8편까지 나온 점을 감안하면 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됐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다행인 건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시애틀경찰국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로서 마초들 틈바구니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는 열혈 캐릭터 트레이시의 맹활약을 접할 기회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대도시 시애틀을 무대로 강력범죄와 치열한 전쟁을 벌일 트레이시의 모습이 더 기대되는데, 그 기대대로 머잖아 후속작들이 연이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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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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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IT기업 스피라링크스의 신입사원 공채에서 5,000여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 전형까지 살아남은 단 6. 그들은 한 달 후에 열릴 팀 토론을 통해 시너지 효과만 보여준다면 모두 합격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습니다. 일면식도 없던 그들은 열정적인 노력은 물론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품으며 한 달의 시간을 알차게 준비합니다. 하지만 토론 직전 합격자는 단 한 명. 팀 토론을 통해 누구를 합격시킬지 결정할 것.”이라는 날벼락 같은 연락을 받습니다. 한순간에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 아연실색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토론장에서 벌어집니다. 누군가 갖다 놓은 의문의 봉투에 지원자 각각의 치명적인 비밀을 폭로한 고발장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초 누가 합격되더라도 수긍하겠다던 호의적인 분위기는 급변하고 고발장으로 인해 치부가 드러난 인물들은 충격에 얼어붙고 맙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라면 살인이나 납치 등 강력사건과는 거리가 먼 신입사원 공채를 배경으로 한 일상 미스터리로 보여서 읽을지 말지 잠시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일단 50~100페이지 정도까지만 읽어보고 취향과 안 맞으면 덮겠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펼쳤는데, 묘하게 궁금증을 자아내는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들 때문에 단박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이뤄져있는데, 하나는 과연 토론장에 의문의 봉투들을 갖다 놓은 자, 즉 단 하나뿐인 합격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비열하게 경쟁자들의 치부를 폭로한 자는 누구인가를 쫓는 미스터리이고, 또 하나는 한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니, 지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달의 뒷면마냥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 아닌가?”라는 다소 관념적인 주제를 신입사원 선발이라는 통속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그린 사회고발 메시지입니다.

 

1부가 최종 팀 토론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상황과 단 한 명의 합격자가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2부는 그로부터 8년 후 누군가팀 토론 당일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관련자들을 만나 뜻밖의 사실들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1부에서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도 흥미진진하지만, 2부에서 거듭된 반전 끝에 밝혀진 진범의 정체와 그 동기에 대해선 꽤 의외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부터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 “한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 아닌가?” - 라는 주제가 잔잔한 반전과 함께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일상을 함께 하는 가족조차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물며 기껏해야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그저 달의 앞면만 봤을 뿐인 타인끼리 서로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다면 불과 한 달 동안 몇 차례의 회동만을 가졌을 뿐인 6명의 팀 토론 참가자들은 어땠을까요? 또 몇 분에서 몇 십 분에 지나지 않는 면접이란 자리는 얼마나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걸까요? 오류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이 상황들 속에서 누군가 상대방을 잘 알게 됐다.”라고 말한다면, 또는 상대방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잘 알게 됐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오만함 그 자체가 아닐까요?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은 다소 고리타분해보일 수도 있는 이 주제를 흥미로운 미스터리와 잘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강력사건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하기에도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은 미스터리의 미덕은 물론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준 특별한 작품입니다. 독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밍밍하지 않을까, 라는 선입견을 갖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의외의 재미를 만끽할 수도 있는 작품이라 나름 기대를 가져도 괜찮을 거란 생각입니다.

 

재미있는 건 한국에 처음 소개된 아사쿠라 아키나리의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를 읽었을 때도 제 취향과 거리가 먼 초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탓에 100페이지 정도만 읽고 중간에 포기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열었는데, 의외로 눈길을 끄는 이야기에 금세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했습니다.”라는 서평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두 편 모두 설정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솜씨에 홀딱 반했던 것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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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노크
케이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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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초보자, 실패자들이 모인 동네라서 늘 사건과 사고가 끊이질 않았죠. 한마디로 끈적이는 동네예요. 장사 안 되는 식당 주방처럼 찌든 때가 여기저기 붙은 곳이죠. 우울, 슬픔, 비루함, 분노, 모든 것이 뒤섞여 끈적거려요.” (p51)

 

막장과도 같은 동네에 자리 잡은 원룸 건물 3층에는 여섯 명의 여자가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젊은 층인 무속인, 디자이너, 사회복지사, 지적장애인, 액세서리 노점상, 그리고 건물을 관리하는 50대 여성이 그들입니다. 모든 소음이 넘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살지만 그녀들 사이엔 타인의 영역에 절대 무관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녀들은 서로의 삶의 대부분을 눈치 챕니다. 일부러든 아니든 엿봐서 알게 된 것도 있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 때문에 알게 된 것도 있지만, 결코 내색하진 않습니다. 그런 그녀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건 복도에서 발견된 한 남자의 사체입니다. 경찰은 여섯 명의 여성을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벌이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얼마 후 경찰마저 손을 뗀 상태에서 그녀들이 사는 3층에는 더욱 더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독특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작품입니다. 변사(變死) 혹은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이자 생존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의 일그러진 탐욕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지독할 만큼 궁지에 몰린 밑바닥 삶의 피폐함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혹은 현실과 유리된 듯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인 진술서 혹은 녹취기록으로 구성된 1부는 다분히 미스터리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녀들의 진술 내용은 사건에 관한 것보다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 혹은 어딘가 4차원인 듯한 세계관을 토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각자의 독백을 담은 2부는 변사 사건 이후 사뭇 달라진 원룸의 분위기와 함께 여섯 여성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거나 소통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소음조차 차단하지 못하던 얇은 벽이 변사 사건 덕분에 뻥 뚫린 듯 그녀들은 서로를 탐색하거나 호기심을 드러내는데, 문제는 그녀들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온한 기운이 파국 이상의 결말을 예고라도 하듯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눈길을 끈 독특한 설정과 탄탄하면서도 유려한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서사 때문입니다. 앞서 미스터리, 탐욕, 피폐함, 망상과 광기 등 다양한 코드들을 언급했는데, 이 가운데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다 읽은 지금도 명확히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라는 뒤표지의 카피나 망설이면 진다. 한 번에 목덜미를 물고 숨통을 끊어야 한다. 시간을 끌고 미루는 순간 내가 먹잇감이 된다.”라는 본문 속의 강렬한 문장이 이 작품을 대변하는 듯 하지만, 과연 이게 전부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미스터리 혹은 장르물이라 하기엔 사족이 배보다 더 큰 배꼽처럼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청춘들을 그린 사회고발물이라 하기엔 그녀들의 상태가 하나 같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 어떤 독자의 서평대로 마치 악녀선발대회마냥 파국으로 치닫는 클라이맥스에 제대로 이입할 수 없었던 건 그 자체가 현실인지 망상인지, 미스터리인지 광기 서린 쇼인지 애매모호했기 때문인데, 그런 탓에 다 읽고도 한두 줄로 요약이 안 되는 이리저리 뒤엉킨 기분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새로운 시도가 곳곳에서 엿보이긴 했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가 동시상영된 탓에 오히려 그 미덕이 가려진 작품이 됐습니다. 출판사는 홍보글에서 화차미야베 미유키를 언급했는데, 개인적으론 서사 자체가 대중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았고, (설령 그것이 캐릭터 묘사를 위한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부풀려진 사족들은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에 더 가까웠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한 홍보성 멘트로 보였습니다.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였다면 이 작품은 훨씬 더 슬림한 분량 속에 직설적이고 선명한 이야기를 담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악녀선발대회에 좀더 충실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지독히 통속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뭔가 있어 보이게포장하긴 했지만, 그 포장지 때문에 정작 진짜 통속적인 재미가 가려졌다는 느낌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이 작품이 영화화될 때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된다면 저주받은 걸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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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의 살의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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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일본 Q현의 유서 깊은 니레 가문 저택에서 일가족 독살사건이 벌어집니다. 유력한 단서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받은 남자는 살인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행을 인정하고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2008,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가석방으로 세상에 나온 남자는 니레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당시 사건현장에 있었던 한 여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살인범이 아니었지만 범행을 자백했던 이유를 설명하며 뒤늦게나마 진범을 알아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추리소설 마니아인 여자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남자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왔던 여자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가설을 공유하고 진범을 추리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추리가 달아오를수록 두 사람의 가설은 충격적인 내용들로 채워진다는 점, 또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진범 후보로 떠오른다는 점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등장인물 소개사건이 벌어진 현장의 조감도가 맨 앞에 실린 것을 발견하곤 지레 올드한 본격이 아닐까, 선입견을 가졌던 게 사실인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래, 이게 진짜 본격의 맛이지!”라는 감탄이 여러 차례 튀어나올 정도로 흥미진진했기 때문입니다.

2010년 신인상 수상 당시 시마다 소지로부터 들은 격찬 덕분에 추리의 정밀기계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후 열두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이력을 보면 미키 아키코가 이제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을 특별한 별명에 걸맞게 그녀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정교한 설계도 위에 각종 트릭과 거듭되는 반전의 향연을 펼쳐나갑니다. 그것도 두 남녀가 주고받는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인터넷서점에 소개된 목차를 보면 편지를 주고받는 남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지만, 살인사건을 묘사한 첫 챕터의 재미 때문에라도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부적절해서 줄거리 속에 그저 남자’, ‘여자라고만 언급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도 마찬가지입니다.) , 편지의 내용이라든가 그 이후의 전개 역시 거의 모든 것이 스포일러라 서평 쓰기가 무척 난감한 것 역시 사실인데, 뒤집어 얘기하자면 그만큼 트릭과 반전이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고 물샐 틈 없이 설정돼있다는 뜻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인 1960년대, 가부장적이고 독재적인 선대 당주에 의해 장기판 말처럼 휘둘려 애정 하나 없이 가족이 된 인물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질투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그 일그러진 관계는 일가족 독살사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범인이 아님에도 스스로 무기징역수가 된 남자는 42년이 지난 후 진실을 알아내고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하에 수없이 다양한 가설을 세우고 진범을 쫓는 집념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남자와 편지를 주고받는 여자 역시 단순한 추리 파트너가 아니라 40여 년 동안 심중에 지독한 애증을 품어온 인물로 남자에게 복잡다단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미스터리한 캐릭터입니다.

 

두 남녀의 편지가 다섯 차례 오간 후 이야기는 급격한 흐름을 탑니다. 42년 전 사건의 여파는 또다시 끔찍한 비극을 일으켰고, 경찰 수사는 그럴 듯하지만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결론을 내며 종결됩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거듭된 반전을 통해 뒤집히고 또 뒤집히기를 반복합니다. “이게 진짜 본격의 맛이지!”라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온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이 작품의 제목에 들어간 기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게 됩니다.

기만의 살의는 인물이나 사건 모두 굉장히 아날로그적이지만, 빼어난 트릭과 반전의 힘은 올드한 설정 따위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현대적입니다. 속도감 역시 대단해서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만드는데, 문제는 이 속도감에 도취되면 작가가 숨겨놓은 힌트와 단서를 죄다 놓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독자를 안달복달 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미덕이라고 할까요?

 

자극적이지만 허술함 또는 불편함이 더 많이 느껴질 정도로 변형된 형태의 본격을 추구하는 작품들이 적잖은 요즘, 미키 아키코라는 작가를 발견한 건 꽤 행운이란 생각입니다. 60(2007)에 집필을 시작하여 63세에 데뷔작을 내놓았으니 그 자체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후 12편의 작품을 출간한 저력은 일본 미스터리의 탄탄한 토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만드는 사실입니다. ‘기만의 살의가 호응을 얻는다면 그녀의 작품들을 연이어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머잖아 그 기대가 꼭 실현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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