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 보상
새러 패러츠키 지음, 황은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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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상속자인 대학생 피터가 살해되고 동거하던 그의 연인 애니타가 자취를 감춥니다. 피터는 부유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허름한 아파트에 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거대 노조 대표의 딸인 애니타는 피터와 뜻을 함께 하며 장래 노동변호사를 꿈꾸던 여대생입니다. 사건에 뛰어든 워쇼스키는 조사를 진행할수록 단순 살인사건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시카고 최대 은행의 부행장, 막대한 자산을 소유한 거대 노조의 대표, 연금과 산재 등 각종 상품으로 이익을 내는 보험사의 간부, 그리고 마약과 청부살인을 일삼는 폭력조직 등 하나같이 부담스럽고 위험한 자들이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심증은 있지만 그 어디에도 확실한 단서가 없다는 점. 더구나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엉뚱한 자를 체포하곤 수사를 종결한 시카고 경찰의 행태도 워쇼스키에겐 악재 중의 악재입니다.

 

새러 패러츠키의 데뷔작이자 ‘V. I. 워쇼스키 시리즈의 첫 편인 제한 보상은 이야기 자체도 궁금했지만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에 읽게 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여성 주인공, 특히 형사나 탐정으로 국한시키면 그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더 주목과 관심을 받게 되거나 조금은 더 엄격한 잣대로 캐릭터가 평가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론 하무라 아키라, 히메카와 레이코, 피아 키르히호프, 제인 리졸리, 아멜리아 색스 등 예리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여성 캐릭터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V. I .워쇼스키는 이들에게는 큰언니이자 교과서와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급진적 운동이 전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배경인 1979년의 미국은 여성탐정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워쇼스키를 대하는 남성들의 시선은 연령과 계층에 관계없이 냉소적입니다. 아버지뻘인 남자들은 조신한 주부가 되기를 강요하며, 또래들조차도 독립심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워쇼스키를 경계합니다. 탐정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그들의 경계와 냉소는 더욱 노골적이고 차가워집니다.

국선변호사로 일하다가 사법체계의 부패함에 질려버린 뒤 사립탐정의 길에 들어선 워쇼스키는 여성이라는 편견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원래 풀 네임인 빅토리아 이피게니아 워쇼스키대신 일부러 ‘V. I. 워쇼스키라는 이름을 명함에 새겨 넣었으며 친한 사람들에게만 이라는 호칭을 허용합니다. 주저 없이 상대방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수 있는 가라데 유단자이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감정을 농락할 만큼 배짱도 두둑합니다. 강직한 경찰이던 아버지와 현명하고 자립심 강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자신만의 무기와 갑옷까지 갖춘 그녀는 그야말로 여성 장르물 주인공의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심증밖에 없는 상태에서 워쇼스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땡볕 아래 이어지는 고된 탐문과 행운이 따라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단서 찾기입니다. 하지만 사라진 딸 애니타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던 거대 노조대표는 물론 살해된 피터의 아버지까지 수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워쇼스키 본인은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등 끊이지 않는 시련이 잇따를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실낱같은 단서를 찾아내고 사건 관련자들에게서 중요한 진술을 얻어내 결정적인 실마리를 포착해낸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워쇼스키의 이러한 집요한 노력 덕분인데, 거기에 덧붙여 가라데 유단자다운 적절한 폭력을 구사하여 통쾌한 액션을 선보이는 장면은 일종의 보너스처럼 독자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워쇼스키 시리즈에서 언제나 경이로운 것은 V. I. 워쇼스키 그녀 자신이다.”라는 볼티모어 선의 평가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이야기 자체보다 워쇼스키의 캐릭터입니다. 분량에 비해 사건은 단순하고, 반전이나 트릭보다는 고전다운 정공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긴장감도 기대만큼 강렬하진 않습니다. 진범의 정체도 일찌감치 그 윤곽이 드러난 탓에 누가 범인?” 대신 어떻게 잡을까?”가 더 관심사가 되는데, 그러다 보니 독자의 시선은 오로지 워쇼스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한 보상외에 2000년대 들어서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블랙리스트’(2005) 한 편뿐이라 무척 아쉬운데, 언제라도 워쇼스키 시리즈가 출간된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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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삼킨 여자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김재희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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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연은 픽업아티스트입니다. 목표로 삼은 남자가 자신의 성적 매력과 따뜻한 미소에 넘어오면 두어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그를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그리곤 소액의 돈을 빌린뒤 연락을 차단하고 종적을 감춥니다. 그녀는 1년에 단 두 달, 성적 매력을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는 여름에만 활동합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피스텔의 1년 치 월세가 전부. 10여 명의 남자에게 각각 1백만 원 안팎만 받아낼 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한참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그녀는 살인사건 용의자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피살자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그녀이기 때문입니다. 특채로 프로파일러가 된 후 현장실습 차 송파서에 파견돼있던 강아람이 10년 선배 서선익과 함께 설희연을 쫓기 시작합니다.

 

픽업아티스트의 세계를 그렸다는 소개글을 보고 새로 생긴 직업인가, 싶었는데, 검색해보니 특정 상대를 목표로 섹스나 금전적인 이득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기꾼들을 통틀어 지칭하는 단어.”라고 나옵니다. 20세기의 제비족과 꽃뱀의 활동무대가 오프라인밖에 없었다면 21세기의 픽업아티스트는 온라인에까지 진출하여 이른바 로맨스 스캠이라는 신종 사업(?)을 벌이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설희연은 고전적인 오프라인 플레이만 고집합니다. 왁싱클럽, 워터파크, 카페 등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촉으로 선택한 목표물에게 접근하여 호감을 얻은 뒤 잘 해야 1~2백만 원의 소소한 사기를 친 뒤 종적을 감춥니다. 미스터리 속 주연급 악녀치곤 잡범에 가까운 소박한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희연의 도피 과정과 과거사를 그린 챕터들은 이 작품이 단순히 범인 찾기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강조합니다. 어린 시절, 개차반인 부모로부터 도망친 뒤 가출팸과 보도방을 전전하며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끝에 누군가와 길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희연이 왜, 어떤 식으로 픽업아티스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1년에 달랑 두 달, 그것도 큰돈도 아니고 낡은 오피스텔의 1년 치 월세만 손에 쥐고 물러나는 건지 그 내밀한 사연들을 조금씩 풀어놓습니다.

희연은 언뜻 생계형 범죄자처럼 보이는데, 그 문제를 놓고 경찰 주인공인 서선익과 강아람이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범행에서 악의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며, 오로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목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족에게 학대당하고 성()을 파는 것 외엔 달리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었던 희연의 과거사는 단순히 그녀를 생계형 범죄자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착잡함을 불러일으킵니다.

 

희연이 사람의 감정을 제멋대로 갖고 놀다가 야비하게 큰돈을 뜯어내는 악녀 캐릭터였다면 이야기는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겠지만, 평생 막다른 궁지에 몰린 채 살아온 그녀의 처지와 그녀가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픽업아티스트 사이의 모순 아닌 모순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할 여지를 남겨줬습니다. 명백한 범죄자지만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랄까요?

다만, 그런 희연의 캐릭터 때문에 다 읽은 뒤 “So What?”이라는 조금은 맥 빠진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독자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를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작가가 희연에게서 악녀의 향기가 일체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든 그녀에게 구원의 여지를 남겨주려고 일부러 애썼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경찰 주인공인 송파경찰서 서선익과 강아람은 실은 수사보다는 젠더 이슈를 위해 투입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름 베테랑이라는 서선익은 전혀 베테랑처럼 보이지 않았고, 강아람 역시 프로파일러나 형사로서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두 사람은 밥을 먹을 때나, 잠복을 할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남자와 여자이야기를 꺼내는데,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상투적인 논쟁이라 그리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 (작가의 전작 봄날의 바다에서 만났던 뼛속까지 속물 프로파일러감건호와 생계형 프로파일러여현정은 본의 아니게 살인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주된 역할은 서선익-강아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색다른 범죄와 범죄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여성의 성 상품화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젠더 이슈를 다룬 작품이란 소개글이 던진 기대감에 다소 못 미친 점, 그리고 독한 양념이 살짝 추가됐더라면, 또 서선익과 강아람이 조금만 더 진지한 태도로 사건 자체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은 끝내 피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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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마쓰다 아오코 지음, 권서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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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아저씨에 의해 운영되는 이상 여자아이는, 여성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아저씨의 손으로부터, ‘아저씨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아저씨가 정하지 않은 세계를 보고 싶다. ‘아저씨가 사라진다면 사회구조는 극적으로 바뀔 것이다.” (p271)

 

교복 입은 소녀를 소비하는 남자들, 호신용 스턴건을 소지한 여자에게 성인용품 아니냐?”고 낄낄대며 놀리는 남자들, 욕망의 대상으로 여자 아이돌을 바라보는 남자들, 뻔뻔하게 추행을 일삼는 것은 물론 저항하는 여자를 별나다는 듯 비난하는 남자들, 그리고 여자에게 한없는 순종과 겸손을 강요하면서 시선은 아래로! 목소리는 작게!”라고 당당하게 압박하는 남자들.

이 작품 속에서 소멸돼야 하고 벌 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 아저씨는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아저씨는 겉모습이나 나이와는 상관없으며, 학교든 직장이든 지하철이든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언제라도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아저씨중에는 여성도 있는데, ‘아저씨급으로 행동하는 여성은 아저씨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은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대한 고발, 그리고 그 사회를 손아귀에 쥔 채 여성을 악의와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아저씨아저씨의 나라를 혁명을 통해 단죄하는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전투적이고 과격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데, 반쯤은 맞고 반쯤은 살짝 과장했다고 보면 됩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부당하고 부도덕한 일들과 그에 저항하는 모습들이 간혹 독하고 세게 묘사되는 경우도 있지만, 작가는 대체로 냉정하고 이성적인 시선으로 그 모든 부당함과 부도덕함의 민낯을 그려냅니다.

 

피임조차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여성, 성추행을 신고했다가 오히려 회사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여성, 자신을 성적 노예로 묘사한 아저씨의 천박한 글 하나 때문에 아이돌을 그만둬야 했던 소녀, 수유할 때조차 성적인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어머니 등 작품 속 여성들은 물건처럼 취급되거나 나이와 처지에 관계없이 아저씨의 손과 눈에 농락당하곤 합니다.

주인공 게이코 역시 그런 여성 중 한 명입니다. 퇴직을 강요당한 뒤 한 달 동안 여동생이 있는 캐나다에 머무른 게이코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좀더 자유를 만끽하는 여성들을 보며 새삼스레 일본여성의 현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항하지 않으면 어떠한 순간에든 아저씨의 악의에, ‘아저씨가 만든 이 사회의 악의에 결박당하고 만다. 나는 일본에 돌아가면 아저씨를 무너뜨릴 것이다.”라는 각오와 함께 귀국합니다.

 

하지만 공항에서, 거리에서, 카페에서 만난 일본여성들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였고, 현실은 각오 하나만으론 작은 균열조차 만들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그런 게이코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여자 아이돌 그룹 XX입니다. 귀여움과 미숙함만 내세웠던 기존의 아이돌과 달리 저항적인 노래와 공격적인 태도를 앞세운 그들에게 빠져든 게이코는 자신의 분노를 살찌우고, 자신의 영혼을 더욱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발판 삼아 아저씨를 무너뜨리기 위한 각오를 다시금 다집니다.

 

이 작품이 좀더 독특해 보이는 이유는 판타지 설정 때문입니다. 게이코가 살던 시대를 흥미와 놀라움으로 조사하는 어느 먼 미래의 소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여고생 체험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겪은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아저씨아저씨의 나라에 저항했던 게이코와 동료들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냈는지 상세히 설명하는 역할도 맡습니다.

사실 이 대목은 다소 모호한 상징들로 채워진 판타지인데,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얘들은 누구야?”라며 따지기보다는 아저씨에게서 해방된 일종의 이데아 속 인물로, 그래서 수 세기 전의 여성들(아저씨가 아닌 남성들)이 어떻게 부당한 삶을 강요받았고, 어떻게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알려주는 설명역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82년생 김지영이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연대기의 형식을 빌어 서술한 정통 소설이라면,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은 현실고발과 판타지 서사를 동시에 활용한 독특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과격한 성명서나 행동 못잖은 강한 울림을 품고 있습니다. 스스로 난 절대 아저씨처럼 살지 않았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순 없지만 분명 아저씨를 혐오하는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82년생 김지영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이 남겨준 공감, 분노, 부끄러움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더 이상 아저씨들이 우리의 영혼을 망치게 두지 않아.”라는 주인공들의 절실하고도 강고한 각오와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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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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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북부 스카보로경찰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퇴직한 리처드 린빌이 자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케일럽 헤일 반장은 과거 리처드에게 체포당한 뒤 공공연히 복수를 다짐했던 전과자 데니스 쇼브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리처드의 딸이자 런던경찰국 형사인 케이트가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에 왔다가 의외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케일럽 반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수사를 벌이던 케이트는 또 다른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한 것은 물론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된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샤를로테 링크는 스릴러 카페 멤버 한 분이 대가라고 극찬하셔서 알게 된 작가로, 한국에 소개된 작품이 여섯 편이나 되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지금까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최근 넬레 노이하우스의 사악한 늑대를 다시 읽은 뒤 로미 하우스만의 사랑하는 아이까지 계속 독일 스릴러를 접한 탓에 올해 초엔 유독 독일 작품과 인연이 있나보다 싶었는데, 작가도 독일인이고 원제도 독일어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배경도 영국이고 주인공도 영국인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영국을 배경으로 집필됐다는데 무척 특이한 케이스라 그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두 개의 사건이 병행되는데, 하나는 퇴직형사 리처드가 피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어 발생하는 의문의 연쇄살인이고, 또 하나는 번 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진 산장으로 휴가를 떠난 크레인 가족이 맞닥뜨린 치명적인 위기입니다. 메인 사건은 연쇄살인이지만 크레인 가족의 위기 역시 거의 대등한 분량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조연들의 이야기에 불과한 크레인 가족 사건이 이만한 비중과 분량을 차지한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출판사의 소개글과 옮긴이의 말을 보니 작가의 특징 중 하나인 것 같아 나름 수긍이 가기도 했습니다.

 

연쇄 살인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참혹한 살인의 충격적인 정황에 집중하기보다는 그에 얽힌 (인물들의) 사연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중략)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페이지터너 스릴러이지만, 그 씁쓸한 분위기는 책장을 덮고 나서도 꽤 오래 여운을 남길 것이다.”라는 알라딘 소설MD 최원호 님의 소개글대로 이 작품은 사건 자체보다는 가해자, 피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 그리고 경찰에 이르기까지 본인 혹은 가족의 문제로 인해 크고 깊은 상처를 지닌 인물들의 사연에 더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결여된 자신감과 대인기피 증세로 인해 경찰로서도, 여성으로서도 무기력한 삶을 살아온 케이트, 유능한 형사지만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케일럽 반장, 불임 이후 입양을 통해 얻은 아들 덕분에 삶의 빛을 되찾았지만 그로 인해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게 된 크레인 부부, 밤낮이 따로 없는 형사로 일하면서 심각한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제인 등 대부분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진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자연히 각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풍부해질 수밖에 없는데, 연쇄살인이긴 해도 스케일도 크지 않고 그리 복잡하지도 않은 사건에 비해 다소 과도해 보이는 592페이지라는 분량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빚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래선지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든 조연들의 심리에 대해서까지 지나치게 친절하고 상세한 묘사를 할애한 점은 개인적으론 무척 아쉬웠던 대목입니다. 이 작품을 심리스릴러 범죄소설이라고 칭한 번역가의 해설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아마 그 때문에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스릴러답지 않게 난해하지도, 배배 꼬지도 않은 간결하고 선명한 문장들 덕분에 페이지는 엄청 빠른 속도로 넘어가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범인의 정체와 연쇄살인의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 반전은 어느 정도 파괴력이 있지만, 어지간한 독자라면 중반부쯤 어렵지 않게 사건의 윤곽을 점칠 수 있어서 미스터리 자체의 힘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은 왜 지금?”, 즉 사건의 출발점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거나 불친절하게 느껴졌는데, 작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거나 너무 당연한 일이니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의문이 끝내 해소되지 않은 탓에 이 작품의 미덕보다는 찜찜함이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큰 명망을 얻은 작가를 단 한 편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제 취향과 가깝지 않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심리보다는 좀더 사건 쪽에 비중이 실린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장 최근에 출간된 수사’(2020)까지 도전해보고 샤를로테 링크를 계속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과 관련된 자체 스포일러가 너무 많습니다. 중반부쯤에나 밝혀지는 연쇄살인의 계기가 (간접적이긴 해도) 뒤표지에 버젓이 표기돼있고,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에는 범인의 정체까지 다 공개돼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어떤 정보도 접하지 말고 바로 본 내용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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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바다
김재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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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2살에 서울을 떠나 엄마와 동생과 제주도 애월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희영은 불과 10년 만에 쫓기듯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동생 준수가 잔혹한 살인범으로 체포된 뒤 구치소에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10년간 희영의 삶은 두려움과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가해자의 가족이란 사실이 드러날까 봐 세상과 담을 쌓았고,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자괴감 때문에 소소하게 웃는 것조차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준수의 무죄를 주장하던 엄마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뒤 희영은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하나 때문에 충격에 빠집니다. 제주도 애월에서 10년 전과 꼭 닮은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어쩌면 두 사건의 범인이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며 유력한 용의자 후보까지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준수의 무고함을 밝힐 수 있다고 믿은 희영은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가해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온 희영이 동생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진범을 찾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영이 탐정처럼 활약하는 이야기 혹은 반전을 거듭하는 팽팽한 미스터리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장르물과 장르물의 경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미묘한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은 자와 감옥에 갇힌 자, 그리고 고통의 심연에서 웅크리고 숨죽인,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가해자와 그 가족, 피해자의 유족, 그들의 친구와 이웃, 그리고 담당 형사와 프로파일러 등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1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는다기보다는 그 비극들을 각자의 처지에 따라 극과 극의 형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역할에 더 충실합니다. , 회한에 잠기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사악하게 이용하거나 또는 완벽하게 은폐하려 하는 등 비극에 대처하는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진범 찾기못잖게 묵직하게 그려집니다.

 

애월에 내려온 희영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오로지 그 범인이 10년 전 (준수가 범인으로 지목됐던) 사건의 범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근 벌어진 여대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 애씁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 10년 만에 만난 학창시절의 절친과 가족, 당시 사건을 맡았던 형사와 프로파일러, 그리고 10년 전 살해된 피해자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희영은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사건 관련자들의 사연에 놀라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학교폭력, 왕따, 가정폭력, 충동조절장애, 시기와 질투, 누명과 복수와 용서 등 예상치도 못한 코드들이 희영의 진실 찾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애월의 오름과 바다는 희영에게 두 개의 살인사건은 물론 거기에서 파생된 비극까지 떠안긴 것입니다.

 

마지막에 두 살인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긴 하지만, 독자는 누가 범인?”보다는 희영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몸과 마음에 새로 새겨진 상처들, 그리고 그 상처들이 앞으로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더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한 종장은 그래서 더 길고 짙은 여운을 독자의 기억 속에 남겨놓습니다.

 

사실, 김재희의 작품은 저와는 코드가 잘 안 맞는 편입니다. 서평을 남긴 건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초기작인 , 짓하다이웃이 같은 사람들뿐이고, 대표작인 경성 시리즈는 첫 편 초반까지밖에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봄날의 바다곳곳에서도 저와 잘 안 맞는 신호들이 발견됐는데, 의도와 다르게 역효과가 난 인용들(영화나 책이나 제주의 전설), 희영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됐지만 작위적으로 보인 조연들의 사연들(게스트하우스 사람들, 희영의 절친 등), 상식적이지 않았던 몇몇 장면(특히 프로파일러 관련)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와 캐릭터, 이야기의 묵직함이 잘 어우러진 덕분에 이번에도 안 맞으면 더는 읽지 않겠다.”던 저의 오만한 예단은 일단은 꼬리를 내려야만 했습니다. 특히 독자의 기대를 배신한(?) 막판의 진실과 엔딩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는데, 이야기에 걸맞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비극성을 도드라지게 만든 봄날의 바다라는 제목과 함께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만든 1등 공신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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