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키스 스토리콜렉터 98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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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피오르 해안에 자리한 소도시 크리스티안순에서 IT기업 인턴사원의 피살체가 발견됩니다. 치밀한 계획과 지독한 증오심이 엿보이는 사건이지만 수사과장 플레밍 토르프는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해 답답할 뿐입니다. 같은 시간, 한때 연적이었지만 여전히 절친으로 지내고 있는 플레밍을 도와 외국인 여성노동자 살인사건을 해결하여 대머리 탐정이란 별명과 유명세까지 얻은 광고 카피라이터 단 소메르달은 딸 라우라의 부탁으로 결혼사기를 당한 50대 여교사 우르술라를 만납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정식 의뢰를 받아 사립탐정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문제는 단이 구해온 결혼사기꾼의 지문이 플레밍이 맡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플레밍은 어쩌면 외국인 여성노동자 살인사건 때처럼 단 때문에 또다시 자신과 경찰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유다의 키스2020년 봄에 출간된 이름 없는 여자들의 뒤를 잇는 단 소메르달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아나 그루에가 덴마크 작가란 점 때문에, 즉 차갑고 잔혹한 북유럽 스릴러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 하나 때문에 선택했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아무 정보도 없이 읽다가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파악한 시점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기대했던 북유럽 스릴러의 톤과는 전혀 다른 코지 미스터리가 전개됐기 때문입니다.

단과 플레밍은 오랜 절친이지만 단의 아내 마리아네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플레밍의 여친이었고, 이 사실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둘 사이에 앙금 아닌 앙금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플레밍이 마리아네의 뺨에 키스를 할 때면 단의 혈압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물론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살인사건을 놓고 협업과 갈등을 벌이며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이 시리즈의 핵심입니다.

 

이름 없는 여자들에서 두 사람은 팽팽한 갈등 끝에 각자 수사를 진행한 뒤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와 추리를 공유하기로 타협한 바 있지만, ‘유다의 키스에서는 거의 단이 주도권을 쥔 채 수사과장 플레밍과 경찰을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저돌적인 수사를 펼쳐나갑니다. 살짝 다혈질이지만 연륜을 자랑하는 플레밍은 자칫 사건을 망치고 범인을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 단의 광폭행보에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본업인 광고 카피라이터만큼이나 뛰어난 수사관으로서의 을 지닌 단의 성과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지경을 여러 차례 겪게 됩니다.

 

플레밍이 담당한 살인사건과 단이 조사하는 결혼사기사건이 우연히도 지문이라는 접점을 갖게 되면서 이야기는 코지 미스터리를 벗어나 심각한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단이 쫓는 결혼사기꾼의 행각은 피해 여성이 한둘이 아님이 밝혀지고 그 수법도 지능적이고 정교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단순사기로 볼 수 없는 중대범죄로 규정됩니다. 또 결혼사기꾼과 살해된 IT기업 인턴사원의 배경에 엄격한 규율을 지닌 종교단체가 있음을 알아낸 단과 플레밍은 애초 예상과 달리 사건이 꽤 복잡하게 꼬여있으며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연루된 사실을 깨닫습니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 단의 공명심과 이기심때문입니다. 직접 찾아낸 단서와 정보가 아깝기도 하지만 처음 정식으로 의뢰받은 내 사건이란 인식 탓에 단은 어떻게든 경찰을 배제하고 자신이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은 나머지 무리한 행동을 반복합니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호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수사를 망칠 수도 있는 행보를 멈추지 않는 단의 모습은 때론 민폐 캐릭터로 보일 정도로 불편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이름 없는 여자들과 달리 사건을 해결한 단에게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었는데,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의 공명심과 이기심때문에 비호감의 인상이 강하게 남고 말았습니다. 또 아마추어인 단의 수사에 행운이 과도하게 많이 따른 점과 막판에 밝혀진 결혼사기범의 범행 동기가 다소 억지스럽게 설명된 점 역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들이라 별점을 삭감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 시리즈가 7편이나 출간됐고 TV시리즈로 제작되어 세 번째 시즌을 앞둔 점만 봐도 캐릭터와 스토리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데, ‘유다의 키스는 코지 미스터리의 매력과 스릴러의 미덕이 잘 믹스된 서사도 만족스러웠고, 매끄러운 전개와 간결하고 생기 넘치는 문장들도 전작 못잖게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앞서 언급한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단 소메르달 시리즈를 한국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유일한 바람이라면 부디 단이 더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민폐까지 끼치며 독주하는 일만은 자제해줬으면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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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의 사육사
김남겸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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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표지에 실린 카피만 봐도 이 작품이 사적 복수를 다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소재지만 이제 더는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래서인지 엇비슷한 전개 혹은 억지스러운 설정에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끄는 제목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던 건데, 결론부터 말하면 과연 이런 사적 복수를 계획할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물과 설정 모두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줄거리를 거의 공개하지 않은 출판사의 간략한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요점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상식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이 택한 복수의 방법은 상대방에게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하고 잘만 다룬다면 새로운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읽는 내내 불편함과 반발심만 들었던 건 그 어디에서도 그럴 듯하다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 애초의 사건은 충분히 비극적이긴 했지만 과연 이런 식의 극단적인 복수를 계획하게 만들 만큼 참혹하고 잔인했는가? 설령 그렇다 해도 복수 가담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과연 적절하고 치명적인가? , 그 방법이 상대방에게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복수 가담자들의 목표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그 목표 자체가 과연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No”입니다. 복수 가담자들이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입은 상처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이후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한 그들의 행보, 즉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을 연구하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복수를 계획하는 과정은 전혀 상식적이지도 않고 납득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복수는 오히려 가담자들에게 더 큰 상처만 남길 뿐 정작 가해자가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겪을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가담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도 없었고, 그 방법조차 억지스러웠던 탓에 이들의 사적 복수 이야기는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졌을 뿐입니다.

 

앞서 얼마든지 가능하고 잘만 다룬다면 새로운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라고 언급했듯 설정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독자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하기에는 인물도, 사건도, 복수의 방법도 허술하거나 억지스러웠고, 또 문장과 구성 등 전반적인 필력 역시 부족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적 복수 이야기를 좋아해서 기대감이 높았던 탓에 조금은 신랄할 혹평이 되고 말았는데, 많은 작가들이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댄 소재인 만큼 사적 복수를 구상하는 작가라면 좀더 치열한 고민과 정교한 설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독자의 고언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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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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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 대통령의 재선을 좌지우지할 예산안 의결을 앞두고 최측근인 비서실장 스투 개럿과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낸스는 찬성표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원들을 압박합니다. 이상주의를 꿈꾸던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국을 파탄에 빠지게 할 예산안을 지켜보며 워싱턴 정가의 탐욕과 위선에 환멸을 느낍니다. 의결일 당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예정된 승리에 도취돼 흥분하지만 이른 새벽에 벌어진 원로 정치인 세 명의 암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암살범들은 예산안의 전면수정과 개혁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언론을 통해 발표합니다. 오루크는 살해된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기득권과 사익을 위해 농단을 부려온 자들이라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지만, 왠지 이 충격적인 암살사건이 자신이 1년 전 만났던 누군가와 연관돼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임기종료CIA 비밀암살요원의 활약을 그린 미치 랩 시리즈의 작가 빈스 플린의 데뷔작입니다. 미치 랩이 등장하진 않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론 시리즈 프리퀄을 읽는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정의로운 이상주의 정치가인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치 랩 시리즈에서는 단역급 카메오 정도로만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주인공을 맡은 임기종료에서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맹활약합니다. 또한 전직 네이비실(Navy SEAL)이자 미치 랩의 영원한 동료인 스콧 콜먼을 비롯하여 CIA 국장 토머스 스탠스필드, 대 테러센터 본부장 아이린 케네디, FBI 특수요원 스킵 맥마흔, 대통령 경호요원 잭 워치 등 낯익은 인물들의 초기 모습은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습니다.

 

예산안 의결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은 한국에서도 낯익은 모습이지만 그것이 노회한 정치인들을 향한 대량 암살로까지 번지는 설정은 다소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산안 의결이 현직 대통령의 재선을 가늠할 수 있는 예비선거의 성격을 띠고 있고, 예산안 자체가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야합의 결과이며 장차 미국을 파산으로까지 이끌 수 있는 위험천만한 덫이라는 설정 때문에 큰 위화감 없이 초반부 시퀀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갈등의 주체들은 크게 넷입니다. 예산안 수정과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연이어 암살을 자행하는 범인들, 암살범들의 메시지에 동의하면서도 살인과 폭력이 옳은 방법인지 고민에 빠지는 하원의원 오루크, 암살범들을 쫓는 FBICIA, 그리고 예산안 통과를 목전에 뒀다가 암살범들 때문에 궁지에 몰리자 위험한 음모를 꾸미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그들입니다.

주로 중동 테러리스트를 주적으로 삼은 미치 랩 시리즈와 달리 내부의 적, 즉 사익과 기득권에 눈먼 탐욕스런 정치인들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통해 개혁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와 폭력 역시 개혁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섭니다. 이 당혹스런 상황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하원의원 오루크는 숱한 고민과 갈등 끝에 전직 해병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며 야합과 이기심이 판치는 워싱턴 정가와의 전면전을 결심합니다.

 

위선으로 가득 찬 비열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스토리는 중동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한 액션 스릴러 이상의 쾌감과 흥분을 발산합니다. 비록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이 합리화되는 대목은 편하게 읽히지 않았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서 이미 그 진가를 맛봤던 빈스 플린 특유의 과격한 주장과 논리는 충분히 독자를 설득하고도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캐릭터의 힘이 그 주장과 논리를 탄탄히 밑받침하고 있는데, 악당들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한데다 몇 대 날려주고 싶을 정도로 야비했고, 암살범들의 고도의 전략과 작전수행능력은 몇 번이나 박수를 보내주고 싶을 만큼 뛰어났으며, 이상주의를 꿈꿨던 초보 정치인이 숱한 위기를 넘기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대목들은 단순한 영웅서사 이상의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딱 한 가지, 0.5개를 빼게 만들었던 아쉬움은 다소 과해 보였던 분량입니다. 데뷔작이라 욕심을 부려서 그런지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곳곳에서 템포를 처지게 만들었는데 그런 장면들이 쌓이다 보니 평균 450~550 페이지 정도였던 미치 랩 시리즈보다 훨씬 긴 650 페이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루 안에 너끈히 마칠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했지만 아주 사소한 옥의 티처럼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순서대로라면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임기종료지만, 개인적으론 오히려 미치 랩 시리즈를 마친 뒤에 읽은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미치 랩은 등장하지 않지만 이런 게 프리퀄의 재미!”라는 걸 잔뜩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새삼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미치 랩 시리즈가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적어도 빈스 플린이 생전에 직접 집필했던 작품(‘The Last Man’, 2012, ‘미치 랩 시리즈’ 13)까지만이라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The Survivor’부터 2021년 작 ‘Enemy at the Gates’까지는 Kyle Mills에 의해 집필된 미치 랩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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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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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친구를 살해한 죄로 1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토비아스는 자신 때문에 가족이 산산이 해체되고 가업이 몰락한 현실을 목도하곤 절망감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사건 당시 술에 취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태에서 경찰이 들이민 정황 증거만으로 살인범 혐의를 썼던 토비아스는 뒤늦게라도 진실을 알아내려 하지만 폐쇄적인 고향마을 알텐하인 사람들은 그에게 철저히 등을 돌리고 혐오의 시선만 보낼 뿐입니다. 한편 베를린에 살다가 반강제로 따분한 시골마을 알텐하인에 머물게 된 18살 소녀 아멜리는 토비아스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흥분에 사로잡혀 독자적인 조사를 시작합니다.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지하탱크에서 발견된 유골과 한 중년여성의 추락사고를 수사하던 중 토비아스 사건과의 연관성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곧 11년 전 경찰 수사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처음 읽은 건 꼭 10년 전의 일입니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지만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이유는 그만큼 재미와 완성도가 뛰어났기 때문인데, 10년 만에 다시 읽어도 역시 그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몇 번이고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큰 틀은 스스로 살인을 저질렀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1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토비아스가 지독히도 폐쇄적인 고향마을 알텐하인에서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는 따분한 일상에 질려있던 호기심 많은 18세 소녀 아멜리와 뛰어난 그림 재능을 갖고 있는 자폐증 환자 티스가 함께 합니다. 또한 다른 사건을 수사하다가 토비아스 사건에 의문을 품게 된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알텐하인 주민들의 비밀들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가 또 하나의 큰 축을 맡고 있습니다.

추악한 행적을 은폐하려는 악의, 피도 눈물도 없는 더러운 탐욕, 일그러진 애정에서 비롯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주해오는 사람도 없이 토착민들이 대를 이으며 살고 있는 알텐하인의 폐쇄성까지 뒤섞인 11년 전의 진실은 피아와 보덴슈타인, 아멜리와 티스에 의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지만 거의 마지막 장까지 새로운 정보와 사실들이 연이어 터지는 탓에 독자 입장에선 쉽사리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앞선 타우누스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짧게라도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품이지만,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전작들과 달리 모든 요소들이 선명하게 전개되고 깔끔하게 정리돼서 조금의 불편함이나 두통을 겪지 않고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인물관계도를 그리거나 메모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잡한 대목들이 등장하긴 합니다. 11년 전에 벌어진 사건 자체는 단순했지만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했던 사람들의 머리수도 무척 많고 그들의 악의는 제각각 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는데다 그 뿌리부터 실타래처럼 뒤엉켜있어서 진실을 쫓는 모든 이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전작에서 다소 우왕좌왕했던 것과는 달리) 인물 하나하나, 단서 하나하나까지 잘 챙겨가며 자신이 짠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나갑니다.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지루할 새가 없었던 건 바로 이런 매력들 덕분입니다.

 

사건 자체만큼 독자의 눈길을 끈 건 보덴슈타인의 개인사, 26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코지마와의 갈등입니다. 거기다가 부하들의 잇단 일탈까지 겹치면서 보데슈타인은 일과 가정 모두를 상실한 듯한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지는데, 늘 반듯하고 철두철미했던 보덴슈타인이 감정적으로 동요하며 수사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타우누스 시리즈의 독자에겐 안타까우면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출간 기준으로) ‘잔혹한 어머니의 날까지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소개됐지만 역시 타우누스 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작품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입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각각 특별한 매력과 미덕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모든 요소들이 골고루 빛을 발하며 마지막까지 흥분과 긴장을 만끽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타우누스 시리즈뿐 아니라 스릴러 전체를 통틀어서도 열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작품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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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무지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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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러가드 버그몽타주는 한때 범죄현장 도주차량 운전에 관한 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드라이버입니다. 과거를 청산한 뒤로 버지니아의 레드힐 카운티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며 가족과의 안온한 삶을 유지해왔지만, 인근에 대형 정비소가 들어선 이후로 보러가드는 치명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은행 대출이 막혀 정비소의 존폐조차 위태로워진데다 10대 시절에 낳은 딸의 대학등록금,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단돈 1달러가 절실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함께 일했던 미치광이로니로부터 다이아몬드 탈취라는 솔깃한 제안을 받은 보러가드는 고민 끝에 딱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사태는 급변하고 보러가드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위험한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첫 장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주인공 보러가드가 모는 머슬카에 탑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옮긴이의 말대로 읽는 내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급격하게 요동치는 탈선 직전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하이스트 누아르, 즉 범죄의 계획과 실행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전형적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지만, ‘검은 황무지는 주인공 보러가드의 캐릭터와 그의 상처투성이 가족사 덕분에 혈관을 폭발시킬 것 같은 초긴장에 더해 묵직하고 애틋한 비극의 서사까지 맛볼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딱 한 번!”이란 다짐으로 시작된 다이아몬드 탈취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보러가드는 말 그대로 지옥불에 빠지고 맙니다. 문제는 그 지옥불이 보러가드의 모든 것이기도 한 아내와 자식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친 점입니다. 결국 보러가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쟁을 치르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의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평범한 삶을 꿈꾸던 보러가드는 자신에게 내재된 또 하나의 자아, 즉 최고의 도주차량 드라이버였던 시절의 버그가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자책합니다.

 

제 자아가 두 개라고 생각해왔어요. 보러가드에게는 와이프와 아이들이 있어요. 사업을 운영하고 아이들 학예회에 빠지지 않죠. 버그는 은행을 털고 급회전구간에서도 시속 160km로 차를 몰아요. 사촌을 죽인 놈들을 차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죠. 아빠가 옳았어요. 한 사람이 두 개의 삶을 살 수는 없어요. 결국엔 한 놈의 고삐가 풀려 다 망쳐버리죠.” (p342)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폭주하는 머슬카와 함께 보러가드의 삶을 지배해온 건 품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망령입니다. 특히 도주차량 드라이버의 완벽한 재능과 잔혹한 폭력성의 유전자까지 고스란히 물려준 아버지는 보러가드에게는 평생 애증의 대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버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웅으로 여기며 그가 남긴 머슬카 더스터를 목숨만큼 아끼는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 자신도 아버지처럼 가족을 위기에 몰아넣고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하는 처지가 되자 차라리 범죄자에 술주정뱅이에 나쁜 남편이었던 아버지가 더 솔직하고 당당했다는 자책에 빠지게 됩니다. ‘검은 황무지가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한 주인공의 범행을 그린 하이스트 누아르 이상의 품격을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보러가드의 가족사 덕분입니다.

 

다이아몬드 탈취사건이 일으킨 나비효과와도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전은 반전을 거듭하며 팽팽한 긴장감과 잔혹한 폭력성 이상의 흥분을 선사합니다. 때론 보러가드에 지나치게 이입한 나머지 마치 직접 총과 주먹을 휘두르는 듯한 쾌감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그가 처한 비참한 처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움과 애틋함에 푹 젖어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검은 황무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누아르를 읽으면서 만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컷 즐기고도 남을 만큼 순도와 농도가 대단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검은 황무지S. A. 코스비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데뷔작인 ‘My Darkest Prayer’는 물론 세 번째 작품으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는 ‘Razorblade Tears’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졌는데, ‘검은 황무지가 좋은 성과를 내서 그의 작품들이 계속 한국에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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