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스
나가우라 교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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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농림수산성 관료 고바 게이타는 상부의 지시로 불법적인 비자금 조성에 가담했다가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 모든 걸 잃고 증권맨으로 새 인생을 사는 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탈리아 대부호 마시모 조르지아니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의뢰를 받습니다. 홍콩의 한 은행금고에 보관돼있는 플로피 디스켓과 서류들을 탈취해달라는 것입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자료가 금고 밖으로 나오는 기회를 노리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증권맨 고바 게이타에겐 터무니없는 제안이지만 그는 수락 아니면 죽음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카드를 내밉니다. 그리고 홍콩에 도착한 고바 게이타는 자신과 닮은 다국적 패배자들과 함께 한 팀이 되어 무모한 미션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들인 언더독스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홀로는 이길 수 없었던 패배자들이 모인 오합지졸”, “성공한 놈이나 자신감이 넘치는 놈은 한 명도 없다. 스스로의 실패와 능력 부족으로 궁지에 몰린, 글자 그대로 패배자 팀.”

전직 관료이자 평범한 증권맨 고바 게이타를 비롯하여 정부기관 소속 홍콩인, 실직한 영국 은행원, 핀란드 출신 전직 IT 전문가 등 언더독스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지독한 실패와 패배를 맛본 뒤 세상의 궁지에 몰린 인물들입니다. 누가 봐도 은행금고 속 기밀자료를 빼내는 미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니 애초 그들을 한 팀으로 묶은 이탈리아 대부호 마시모 조르지아니의 의도 자체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바 게이타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건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입니다. 작전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도 두려운 일인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 영국, 미국의 정부기관들이 압박과 협박을 가해오기 시작하고,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아 팀원 중 일부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고바 게이타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야말로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언더독스에겐 지옥과도 같은 악몽이 쉴 새 없이 닥쳐오는 형국입니다.

외부의 압박과 협박만큼이나 고바 게이타를 초긴장상태로 몰아넣은 건 언더독스 멤버들조차 절대 믿어선 안 된다는 의심이 피어오른 점입니다. 은행금고 속 기밀자료를 독점하려는 각국의 정부기관은 언더독스 내에 스파이를 심기에 이르렀고 실제로 배신행위가 드러나면서 고바 게이타로서는 외국 정부기관 및 내부의 배신자와의 싸움에도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미션에 실패해도 죽음, 미션을 포기해도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고바 게이타는 살아남기 위해선 상대방을 요령껏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실패와 패배로 인해 궁지에 몰렸거나 복수심에 사로잡혔다고 해도 첩보나 액션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언더독스가 탐 크루즈 급미션에 투입된다는 설정은 요약된 줄거리만 보면 다소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약한 자이기에 오히려 죽기 살기로 지혜를 짜내고 때로는 엄청난 힘을 보여주지.” 등 여러 번에 걸쳐 조르지아니의 입을 빌려 이 기이한 미션을 설득력 있게 포장합니다. 또 홍콩 도착과 함께 연일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미션 자체보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고바 게이타의 고난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독자의 눈에 전직 관료이자 평범한 증권맨의 이미지 대신 조금씩 단련되는 강철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 역시 초반의 위화감을 금세 잊게 만든 작가의 뛰어난 필력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중국으로의 반환을 코앞에 둔 홍콩을 무대로 피와 살이 난무하고 끝없는 배신이 이어지는 리얼한 첩보액션은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골고루 발휘하고 있습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전개와 다국적 캐릭터들의 카리스마도 무척 매력적입니다. 다만, 몇몇 대목에서 역시나 어쩔 수 없는 아마추어의 위화감을 완전히 지워내진 못한 점이 아쉬웠고, 일부 인물이 작위적으로 배신을 위한 배신에 이용된 점이나 주인공 고바 게이타가 막판에 보인 다소 이해하기 힘든 행동 역시 무리수로 보인 게 사실입니다. 만점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고민 끝에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나가우라 교는 2021머더스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사적 복수를 소재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캐릭터와 설정 때문에 눈길을 끌었던 작가입니다. 아이디어, 자료조사, 리얼한 첩보액션 서사가 잘 조합된 언더독스는 그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여준 작품인데, 앞으로 그의 신간 소식을 좀더 자주 들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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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토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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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처가 확인된 가출소녀 미치루를 집으로 데리고 와달라는 간단한 의뢰를 받고 현장으로 간 프리랜서 탐정 하무라 아키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휘말려 옆구리에 칼을 맞고 발등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습니다. 가까스로 부상에서 회복될 무렵, 이번에는 미치루의 친구 미와의 아버지로부터 열흘 넘게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미와의 행적을 쫓던 하무라는 미치루의 친구 중 또 한 명의 소녀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 와중에 그녀들과 친구이던 한 소녀가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초긴장 상태가 됩니다. 경찰은 살인과 실종사건을 별개라고 결론짓지만 하무라의 촉은 두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무라는 피해자 소녀들의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지만 매번 막다른 벽에 부딪히곤 합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 기준으로) 1996년 첫 편 네 탓이야’, 2000의뢰인은 죽었다’, 2001나쁜 토끼가 차례로 출간됐는데, 이후 13년이 지난 2014년에야 후속작인 이별의 수법이 출간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번역가 문승준은 앞의 세 작품을 시즌1, ‘이별의 수법부터를 시즌2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2014년에 나온 단편집 어두운 범람중 두 편에도 하무라가 등장하긴 합니다.)

개인적으론 이별의 수법으로 40대의 하무라 아키라를 처음 만났는데, ‘사십견과 노안에 시달리는 아줌마하무라가 넓디넓은 오지랖과 거침없는 폭주를 앞세워 맹활약하는 이야기에 홀딱 반해 단번에 그녀의 팬이 됐습니다. 그래서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던 나쁜 토끼의 출간 소식은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별의 수법보다 13년 전인 31살의 하무라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오지랖도 넓고 폭주에 폭주를 거듭하며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탐정이라는 별명답게 몸과 마음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맞닥뜨린 사상 최악의 9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나쁜 토끼10대 소녀들의 실종과 피살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막판에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엽기를 넘어 소시오패스의 끝판왕처럼 보일 정도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소녀들의 사건 외에도 하무라를 고달프게 만드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폭행과 강간을 일삼다가 하무라에게 뜨거운 맛을 본 탐정회사 직원과 그를 손자로 둔 악귀와도 같은 할머니의 공공연한 복수 선언은 하무라로 하여금 24시간 경계태세를 풀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 절친인 미노리를 가슴을 설레게 만든 남자에게서 수상쩍은 기운을 느끼고 조심하란 조언을 건네지만 오히려 미노리에게 온갖 비난과 분노를 산 하무라는 그저 황망할 따름입니다. 하무라에게 늘 한 발 이상 뒤처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압박을 가하곤 하는 무사시히가시 경찰서의 형사들 역시 스트레스만 겹겹이 쌓아놓는 존재들입니다.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랄 정도로 하무라의 행보는 쉴 틈 없이 이어집니다. 실종 혹은 살해된 소녀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집요한 탐문 외엔 딱히 단서를 얻을 길이 없기 때문인데, 그런 탓에 이야기는 다소 느리고 디테일하게 전개됩니다. 물론 칼에 찔리고, 뼈가 부러지고, 등짝이 온통 멍으로 도배되는 등 하무라의 악전고투는 안쓰러움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만, 상대적으로 탐문과 추리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맴 도는 형국이다 보니 하무라의 찐팬이 아니라면 중반부쯤 지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서브 사건들이 중간중간 의외의 상황들을 통해 지루함을 덜어주고 있고, 노골적으로 묘사되진 않아도 연애와는 담을 쌓은 하무라가 살짝 로맨스의 기운을 내보이는 대목도 막간극과 같은 재미를 주고 있어서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금세 독파할 수 있게 만듭니다.

 

아직 못 읽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더 많아서 어떤 작품이 가장 재미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론 이별의 수법을 통해 40대의 하무라를 먼저 만났던 게 더 괜찮았다는 생각입니다. 31살의 하무라가 맹활약한 나쁜 토끼도 재미있긴 했지만, 캐릭터의 매력과 카리스마는 이별의 수법이 훨씬 더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와카타케 나나미의 미스터리 서사가 개인적인 취향에 아주 잘 맞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토끼를 허겁지겁 찾아 읽은 건 순전히 주인공 하무라에 대한 애정과 기대감 때문입니다. 간혹 작가와는 잘 안 맞아도 주인공 때문에 작품을 선택할 때가 있는데,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토끼보다 먼저 출간된 네 탓이야의뢰인은 죽었다는 잘 벼려진 칼날 같은 20대의 하무라가 등장합니다. ‘나쁜 토끼보다 더 초기작이라 이야기는 기대에 못 미칠지 몰라도 좀더 날것 같은 하무라를 만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기대감이 드는 작품들입니다. 모두 절판된 상태지만 중고로라도 구해서 하무라의 매력을 한껏 맛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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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의 남편 이판사판
하라다 마하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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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아니라면 정치를 소재로 한 모든 콘텐츠는 사실상 판타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악관 내 권력투쟁을 다룬 여러 편의 미드도, 기무라 타쿠야를 최연소 총리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일드 체인지도 실은 우리에게도 저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판타지를 구현시켜준 작품들입니다. ‘총리의 남편에선 사상 최초 여성총리이자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쥔 40대 소마 린코가 바로 그 판타지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1인칭 화자는 린코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히요리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따르면 그는 조류애호 눈물과다 초식남인데, 조류학자로서 늘 새를 관찰하며 일기를 써오던 그는 아내 린코가 총리가 된 날부터 특별한 관찰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먼 미래에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아내이자 총리인 린코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거기엔 그들의 첫 만남이나 평범한 일상부터 총리와 총리의 남편으로서 겪은 희로애락이 디테일하게 담겨있습니다.

이야기는 린코가 총리로서 맞이한 첫날부터 시작되어 숱한 우여곡절과 치명적인 위기를 넘기며 국민들에게 신임 받는 유능한 총리로 자리 잡기까지의 시간들을 그립니다. 린코가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의 공격이라든가 당장 국민들로부터 지지받기 어려운, 하지만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위기를 겪는다면, 히요리는 예의 허당에 가까운 성격 때문에 이른바 권력자 가족의 스캔들을 자초하거나 린코에게 큰 힘이 돼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고뇌에 빠지곤 합니다.

 

사실, 린코와 히요리에게 닥치는 위기는 딱히 새롭다거나 특별하진 않습니다. 위기 자체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도 충분히 예측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가 여전히 독자에게 불쑥불쑥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저급하고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행태 때문일 것입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시대를 불문하고 사리사욕에 눈 먼 권력자들을 응징하는 선한 리더의 이야기는 늘 통쾌한 대리만족과 감동을 주기 마련입니다. 린코는 그런 서사에 잘 어울리는 주인공이고, 히요리는 눈물과다 초식남이긴 해도 늘 린코에게 역시 나는 히요리 씨의 이런 점이 좋다니까.”라는 칭찬을 듣는 훌륭한 화자이자 조연입니다.

 

린코의 첫 번째 캐릭터는 물론 여성총리지만, 실은 이 작품에서 여성성은 그리 강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장에는 욕을 먹고 표를 잃고 정치적인 위기를 자초할 게 뻔한 정책이더라도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호소하고 제대로 밀어붙이는 바람직한 정치인캐릭터가 훨씬 더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겉으론 사람 좋은 아저씨 같아도 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노회한 정치인이라든가 어려운 시절부터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해온 충직한 비서진들, 여성총리에 관한 대중적 관심을 이용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등 이 작품의 중요한 조연들 역시 린코의 여성성보다는 바람직한 정치인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린코의 1인칭 시점도, 3인칭 시점도 아닌 허당 남편이자 조류학자 히요리의 관점에서 전개된 덕분에 딱딱한 정치 서사와는 거리가 먼 흥미진진한 총리 관찰기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지긴 했어도 독특한 개성을 지닐 수 있었던 건 바로 타이틀 롤을 맡은 총리의 남편히요리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야심가나 빈틈없는 조력자가 아니라 오로지 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인 눈물 많은 남자를 화자이자 총리의 남편으로 설정한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된 건 2013년인데, 공교롭게도 린코가 내건 공약들은 2022년 대한민국 대선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공약 따위야 누구나 내걸 수 있는 것이지만 그걸 제대로 실천하는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린코의 행보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많은 독자에게 우리에게도 저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판타지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 대선을 1주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그 판타지는 훨씬 더 강렬하고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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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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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여름, 14살의 스스무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 아사기의 롯코 산 별장에서 방학을 보내게 됩니다. 아사기의 아들인 동갑내기 가즈히코와 산 곳곳을 누비던 스스무는 대저택에 사는 동갑내기 소녀 카오루와 어울리게 되고 세 사람은 잊지 못할 여름방학을 만끽합니다. 한편, 소년소녀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와 별개로 어른들의 비밀스런 과거사가 전개되는데, 하나는 1935년 두 소년의 아버지가 베를린 출장 때 만난 마치코라는 미지의 여성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1941~1945년에 걸친 카오루의 고모 히토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년소녀들은 우연히 혹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서서히 어른들의 비극 한복판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갈 무렵 롯코 산엔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278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에 독이 서린 어른들의 비밀이라는 미스터리를 담고 있긴 해도 ‘14살 소년소녀들의 풋사랑이 혼재된 이야기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순수문학과 추리문학이 절묘하게 만난 작품이라는 홍보카피 좀 별난 간식 정도로 이 작품을 대하게 만들었는데, 고백하자면 마지막 장을 덮고 서평을 쓰기까지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곱씹어볼수록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면서 앞서 읽은 문장과 단어들이 만화경 속 색종이 조각들처럼 이리저리 휘날리는 듯한 야릇한 불쾌감마저 느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막판에 밝혀진 트릭과 반전의 충격 때문입니다. 쉽고 가벼운 문장들이라 안이하고 빠르게 읽어버린 것도, 초반부터 그릴까 말까 고민했던 인물관계도를 그리지 않은 일도 후회됐습니다. 그랬다면 막판에 밝혀진 사실들이 조금은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년소녀들의 풋풋한 첫사랑은 롯코 산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그 또래다운 순수함을 발산하며 그려집니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어른들의 챕터 역시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정도에 그칩니다. 물론 1945년 패전을 앞두고 일어난 살인사건이 미스터리를 증폭시키긴 하지만 그 사건이 1952년의 소년소녀들과 어떻게 연결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어 그다지 큰 미끼로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첫사랑에 달떠있던 소년소녀들은 방학이 끝나갈 무렵 어른들에게서 하나둘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밀회를 즐기는 자들, 문신투성이 야쿠자들과 은밀한 만남을 갖는 어른, 누군가를 닮은 오래된 앨범 속 사진의 인물, ‘여왕이라 불리며 찻집을 운영하는 비밀투성이 여자 등 소년소녀들에게는 하나같이 두려움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들입니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소년소녀들의 눈을 통해 어른들의 비밀을 들여다보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그들은 알아챌 수 없는 비밀을 독자에게만 알려주기도 합니다. 특히 막판에 한 소년이 목격한 사소한 사고 장면은 독자만이 눈치 챌 수 있는, 1935년부터 시작된 비극의 전모와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결정적 단서이자 반전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독자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허겁지겁 책의 앞머리로 돌아가 무심코 읽어 넘겼던 문장들과 평범하게만 보였던 단어들을 다시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문장과 단어들이 실은 복선으로 가득 찬 트릭 덩어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인터넷서점과 미스터리 카페를 뒤져보니 역시 이 작품의 막판 반전은 많은 독자들의 논란거리였습니다. “뭐가 반전이란 거냐?”, “내가 생각하는 게 맞긴 맞는 거냐?”, “이 사람이 살인범이라고? ~!!!” 등 의문, 분노, 배신감, 감탄 등 다양한 반응들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작가가 놀랍기 그지없는 반전을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잠시 멍 때리다간 눈치 채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독자 앞에 풀어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맑은 물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서서히 독자의 머릿속에 그 충격이 퍼지도록 설계라도 한 듯 말입니다. 두 번은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미스터리를 숱하게 만났지만 실제로 두 번을 읽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흑백합은 두 번, 그것도 연달아 읽어야만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전개와 구성은 다소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호불호를 일으켰는데, 제 경우엔 어질어질한 가운데에도 별 5개 이상을 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이야기 속의 미스터리도 흥미로웠지만 소설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어느 독자의 평처럼 단어 하나하나까지 해부해보고 싶을 만큼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작품을 놓고 독서모임을 갖는다면 다 읽고도 미처 눈치 못 챘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소년소녀들의 풋사랑과 쉽고 간결한 문장들이 얼마나 대단한 위장막 역할을 했는지도 함께 말입니다.

서평을 마치는 대로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다시 읽을 생각인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서평 자체를 다시 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이야기 자체보다도 두 번 읽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든 작가의 대단한 설계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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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이
로미 하우스만 지음, 송경은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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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글 범위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된 서평입니다.)

 

14년 전에 실종된 딸 레나로 추정되는 여자가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마티아스는 이내 레나가 아니라 야스민이라는 여자임을 확인하곤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병원 복도에서 레나의 어린 시절과 꼭 닮은 소녀 한나를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조사 결과 실제로 한나는 레나의 딸로 밝혀집니다. 그런데 한나는 교통사고로 입원한 야스민을 엄마라고 불러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야스민은 괴한에게 납치당한 뒤 4개월간 납치범의 아내이자 한나의 엄마 레나로 살아오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털어놓습니다. 퇴원 후 야스민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납치범의 정체와 그가 레나와 자신을 납치한 이유, 그리고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숲속 오두막에서 아이들을 키워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애씁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한 사이코패스에 의한 잔혹하고 일그러진 납치극정도로 심플해 보이지만 사랑하는 아이는 평범한 소재라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특별한 서사와 개성을 지닐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14년 전 실종된 레나, 4개월 전 납치된 뒤 폭력과 공포 속에 레나로 살아야만 했던 야스민, 레나의 딸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야스민을 자연스레 엄마라고 부르는 소녀 한나, 그리고 딸을 잃은 상심을 손녀 한나를 통해 보상받고 싶은 것은 물론 야스민에게서 레나에 관한 단서 하나라도 알아내고 싶은 절박한 심정의 마티아스 등 다양한 화자들이 들려주는 기이한 납치극의 진상은 상투적이고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뛰어넘어 읽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출판사의 소개글만 보고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건 야스민은 레나라는 여자의 대타로 납치됐고, 무슨 이유에선지 레나로 살아갈 것을 강요당했다는 점입니다. 이 설정까지만 해도 남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끄는 점은 레나가 낳은 것이 분명한 한나가 아빠에 의해 납치된 야스민을 태연스레 엄마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또 야스민이 지독한 폭행을 당하는 걸 목격하고도 두려워하거나 동정하기는커녕 엄마가 실수해서 벌을 받는 거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장면도 그저 기이해보일 뿐입니다.

이 미스터리의 열쇠는 그들이 사는 숲속 오두막에 있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국경지대의 숲속에 자리한 오두막은 모든 창문이 틀어 막혀 햇빛 한 톨 들어올 틈도 없는 완벽한 감옥입니다. 이 기이한 공간이 한나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를 지켜보는 건 사건 자체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작품이 단지 탈출에 성공한 야스민이 진범의 정체를 밝히고 실종된 레나의 진실을 알아내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비슷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 대동소이했겠지만,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두꺼운 책을 통해 지식을 쌓아온 한나라는 캐릭터 덕분에 전혀 결이 다른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나는 납치범인 아빠와 공범이라도 되는 듯 야스민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더욱 요동치게 만듭니다. 또 자신을 실종된 딸이 남긴 소중한 손녀로 여기는 마티아스를 대하는 장면에선 마치 어린 소시오패스마냥 천진난만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발산하는데, 그래선지 과연 한나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독자와 마주하게 될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건 자체를 이끌어 가는 건 어떻게든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 자신과 레나를 납치한 이유를 확인하려는 야스민과 그녀를 통해 실종된 딸 레나의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마티아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다 극성스런 언론의 표적이 된 신세지만 레나의 진실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합니다. 평범한 일반인이다 보니 슈퍼히어로 같은 활약을 기대할 순 없는데, 이 부분은 마티아스의 친구인 게르트 브륄링 경감의 적절한 지원을 통해 해결됩니다.

 

완벽하게 통제된 숲속 오두막의 주인인 납치범, 14년 전 납치되어 아이까지 낳은 레나, 그녀의 대타로 납치된 야스민, 14년 동안 실종된 딸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마티아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소녀 한나가 펼치는 독특한 납치 스릴러 사랑하는 아이는 흥미진진함은 물론 여러 가족에게 닥친 끔찍한 비극의 여운까지 전해주는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딱히 납치극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충분히 기대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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