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싶다 케이스릴러
노효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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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이던 딸 진경이 실종된 건 16년 전인 2003. 정상훈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을 돌며 전단지를 돌렸지만 아내마저 세상을 뜨자 자포자기하듯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고탐정이라는 수상한 인물이 찾아옵니다. 6개월에 6천만 원을 요구하며 자신이 납치살인범을 잡아 딸의 시신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같은 처지였던 실종아동협회원으로부터 고탐정 덕분에 아들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상훈은 마지막 도박이란 심정으로 고탐정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용의자를 잡았다는 연락에 흥분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그런 정상훈 앞에 부산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장 박진희가 나타나 고탐정은 실종자 가족을 이용하는 사기꾼이거나 가공할 살인범이라며 그에 관한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압박합니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족의 실종은 살인이나 사고보다 더 끔찍한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자발적인 가출이나 잠적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에 의한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납치범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래서 이미 죽었더라도 납치당한 자의 시신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면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탐정의 본명은 고남준. 20대 중반인 그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이른바 슈퍼 리코그나이저(Super Recogniser)인 그는 사진으로든 방송으로든 한 번 본 용의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실제로 그와 마주치는 순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초인식자입니다. 후천적인 계기로 그 능력을 갖게 된 남준이 가장 먼저 시도한 건 유년기에 갑자기 사라진 어머니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학대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실종됐지만 경찰은 불륜+가출이라는 결론만 내리며 등을 돌렸고, 이후 남준은 경찰에 대한 지독한 불신과 증오심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능력을 실종자 가족을 위해 쓰기로 결심한 건 바로 그런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남준의 또 하나의 캐릭터는 사적 복수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범인을 찾는 것뿐 아니라 남준이 실종자 가족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엔 이런 것도 포함됩니다.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거 도와드릴게요. 그놈을 그냥 살려둘 순 없죠.”

말하자면 남준은 괴물과 싸우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괴물이 된 인간입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마다하지 않으며,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 뒤에는 흔적도 없이 처리합니다. 거기엔 일말의 고민도 주저함도 없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결국 부산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장 박진희에게 꼬리를 잡히고 맙니다.

 

세컨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박진희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경찰에 투신했고, 남성중심의 조직에서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어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박진희는 좀더 큰 야망을 품고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고탐정은 승진과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줄 더없이 좋은 먹잇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애초 고탐정을 실종자 가족에게 돈이나 뜯어내는 사기꾼 혹은 제멋대로 점찍은 용의자를 살해하는 살인범으로 치부하던 박진희는 수사를 진행할수록 혼란에 빠집니다. 그의 진지한 태도와 능력을 직접 목격한데다 박진희 스스로 간절히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건의 범인까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에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탐정을 손아귀에 넣기로 한 박진희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노효두는 2021년에 출간된 면식범을 통해 먼저 알게 됐습니다. 역시 납치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좀더 복잡한 미스터리와 페이스오프 액션 스릴러를 겸비하여 개인적으로 꼽은 ‘2021년 미스터리&스릴러 베스트11’에도 포함시킨 작품인데, 덕분에 1년 먼저 출간된 찾고 싶다를 찾아 읽게 된 것입니다. ‘면식범때문에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던 탓에 살짝 싱겁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캐릭터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만큼은 앞으로 나올 노효두의 작품에 큰 기대를 걸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줬습니다. 납치나 실종도 좋고 그 어떤 소재라도 좋으니 연말쯤 노효두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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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페어
하타 타케히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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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2004년에 출간된 이 작품의 원제는 추리소설입니다.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제목인데, 하나는 연쇄살인범이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앞으로 저지를 살인을 소재로 집필한 소설 속 소설의 제목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기존 추리소설의 덕목에 대한 반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지어진 제목이란 점입니다.

 

피해자들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마치 무차별 살인처럼 보이는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유일한 단서라곤 불공정한 것은, 누구인가?”라는 선문답 같은 문장이 적힌 책갈피가 전부라 경찰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중 추리소설 이라는 제목의 원고와 함께 그 원고를 3,000만 엔 이상의 가격에 낙찰시키지 않으면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범인의 예고장이 날아듭니다.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해 범인에게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의견과 살인을 막기 위해 거래를 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이 충돌하지만 그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진 못합니다. 수사에 나선 경시청의 유키히라 나츠미는 대담하거나 냉정하거나 기상천외한 의견을 내놓으며 자신만의 감으로 수사를 진행합니다.

 

정리된 줄거리만 보면 언뜻 혼다 데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와 닮은꼴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읽기 전에 주인공 유키히라 나츠미의 캐릭터 소개글을 보곤 단번에 히메카와 레이코가 떠올라 남다른 기대를 하기도 했는데, 실은 언페어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와는 거리가 아주 먼 독특한 작품입니다. 물론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쫓는 주인공 형사가 등장하므로 형식적으로는 미스터리, 즉 제목대로 추리소설로 보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에서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와 페어플레이라고 하는, 판에 박힌 평어(評語) 자체의 어눌함에 들이대는 풍자의 칼날”(p317)이라는 해설처럼 이 작품은 추리소설을 이용하여 기존의 추리소설의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가령, “사건은 반드시 해결된다.”, “범인은 반드시 밝혀진다.”, “초반에 등장하는 수상한 인물은 항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기호거나 제2, 3의 피살자로 이미 정해져 있다.” 등 미스터리의 기본 공식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독자들은 보수적이라 항상 공정할 것을 요구한다. 공정하게 웃겨라. 공정하게 놀라게 하라.”, “대반전은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독자는 말한다.”라며 불공정하거나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하는 독자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모두 범인의 것입니다. 일반적인 소시오패스가 광기와 사념에 사로잡혀있다면 이 작품의 범인은 리얼리티불공정에 집착하는 소시오패스라고 할까요? 동기, 범행, 협박, 살인예고 등 모든 과정에서 기존 미스터리 속 범인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범인은 그런 범행이야말로 진짜 리얼리티이며 독창적이고 공정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해진 공식대로, 독자가 원하는 대로 전개될 뿐인 미스터리는 전부 개나 주라는 듯이 말입니다.

범인의 행적이 이러하니 경시청 검거율 1위 유키히라 나츠미도 도무지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헤맬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범인은 기존 미스터리와 반대로 공정한 게임을 위해 의도적으로 단서를 흘려놓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쉽게 눈치 챌 수 없는 고난이도의 단서였고, 유키히라 나츠미는 마지막 살인극을 앞두고 가까스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읽기가 무척 불편합니다. 수시로 화자가 바뀌고, 시간적 배경도 아무 설명 없이 툭툭 뒤바뀝니다. 시나리오 지문 같은 단편적인 문장이 자주 등장하고, 앞뒤 상황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장면들도 수시로 눈에 띕니다. 그나마 필요한 대목에서 글씨체라도 바꿔준 건 최소한의 친절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어쩌면 이런 불편함은 범인 친화적인(?) 이야기를 위한 의도적인 설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존의 추리소설 공식에 대입할 수도, 그 공식으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범인의 기이한 행동과 사고를 은연중에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설계라는 것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가장 기대한 건 주인공 유키히라 나츠미의 캐릭터였습니다. ‘쓸데없이 미인이란 별명에다 경시청 검거율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지만 동시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여형사. 그런데 워커홀릭에 냉정한 독설가에다, 틈만 나면 술을 마시고, 취하기만 하면 알몸으로 잠든 채 전화마저 받지 않아 후배 남자형사에게 곤혹스러운 인간 알람을 떠맡기곤 하는 괴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아마 기존의 전형적인 추리소설이었다면 무척이나 눈길을 끌었을 인물인데 하필 범인이 워낙 튀는 캐릭터라 오히려 소외당한 주인공이 된 느낌입니다.

다행히도 이 작품의 후속작인 여형사 유키히라의 살인 보고서’(북스토리, 2010)가 출간돼있어서 기회가 되면 찾아보려고 하는데, 부디 유키히라의 매력적인 면모가 부각된, 아주 일반적이고 뻔한추리소설이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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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든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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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남편 서배스천을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30대 심리상담가 마리아나는 여전히 상실감과 암울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언니 부부의 사고사에 이어 남편까지 잃은 마리아나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은 서배스천과 함께 키워온 조카 조이뿐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조이는 어느 날 패닉 상태에 빠진 채 다급한 연락을 해옵니다. 유일한 친구인 타라가 끔찍하게 살해됐다는 것입니다. 초조해진 마리아나는 즉시 케임브리지로 달려가고, 충격에 빠진 조이를 보호하는 한편 타라 살인범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리아나는 속히 범인을 잡아야만 조이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심리상담가일 뿐인 마리아나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연이어 터집니다.

 

그리스 신화와 비극, 연쇄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된 심리학 스릴러!”라는 홍보카피 때문에 읽을지 말지 꽤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최근 심리스릴러 혹은 심리학스릴러(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조금 넓게 보면 결국 같은 이란 생각입니다)에 여러 번 질린 데다 그리스 신화역시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끼어들 때마다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기대감의 근거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는 작가의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였는데 아직 읽지 못한 상태라 일단 100페이지까지만 읽어보자, 라는 심정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첫 페이지의 프롤로그부터 마리아나가 범인으로 의심하는 자의 이름이 공개됩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고전문학 교수 에드워드 포스카입니다. 그는 특권층 출신에 뛰어난 미모를 지닌 몇몇 여학생에게 수상쩍은 개인지도를 하는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파티를 열거나 은밀한 비밀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스카 교수를 숭배하는 그 여학생들은 일명 메이든스’(처녀들)라 불리며 유명세와 경계심을 동시에 얻었는데, 마리아나는 그 사실에 주목하며 포스카 교수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킵니다.

 

사실, 평범한 심리상담가가 조카의 친구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설정은 그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잘 알기에 수양딸처럼 키워온 조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마리아나의 의지는 이해가 되지만, 단서나 증거를 찾기보다 포스카 교수와 메이든스를 심리상담가의 관점에서 관찰하며 진상을 밝혀내겠다는 태도는 다소 작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작가는 마리아나의 행보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녀가 지금도 겪고 있는 남편을 잃은 심연과도 같은 상실감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마리아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건 살해수법과 범인의 메시지입니다.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들은 마치 의식에 바쳐진 제물 같은 인상을 남겼는데, 마리아나에겐 그런 살해수법이 수사진들의 눈을 멀게 하여 중요한 것을 못 보게 하려는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또 마리아나는 경찰이 놓친 현장 단서를 손에 넣는데 그것은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엽서들입니다. 거기에 적힌 것은 고귀한 처녀를 데메테르의 딸에게 바쳐야 한다.”라든가 이제 곧 너의 목은 칼을 맞고 피가 솟구쳐 흐를 것이다.” 같은 그리스 비극의 끔찍한 인용문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포스카 교수를 향한 마리아나의 의심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지만, 정작 경찰은 마리아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떠날 것을 강하게 요구할 뿐입니다.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져서 애초 100페이지 정도만 읽겠다던 결심이 무색해지고 말았는데, 이 작품의 진짜 백미는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막판 반전에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동기가 폭로되는 순간, 그저 어설픈 독자일 뿐인 저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는데, 개인적으론 최고의 반전 목록에 넣어도 괜찮을 만큼 충격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작동하겠구나, 라는 감탄과 함께 소소해 보일 수도 있는 모티브를 그리스 신화와 비극, 연쇄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된 심리학 스릴러로 확장시킨 작가의 필력에도 적잖이 놀란 게 사실입니다.

물론 약간은 사족처럼 느껴진 내용들 19세기 시인까지 동원한 마리아나의 상실감에 대한 거듭된 묘사,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유년기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 살짝 과잉처럼 보인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소개 등 이 있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작가의 개성으로 인정할 만 했고, 약간 허술하거나 빈틈이 있는 미스터리와 의도가 빤히 보이는 캐릭터 설정 역시 무시해도 괜찮은 수준의 사소한 아쉬움에 불과합니다.

 

메이든스는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앞서 출간된 성공적인 데뷔작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뒤늦게라도 빨리 찾아 읽어야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출간될 그의 작품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0.5개를 뺀 만큼의 아쉬움이 있었던 것 맞지만 이만한 이야기꾼을 발견한 건 나름 큰 수확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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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버린 이번 생을 애도하며 -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지혜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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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진 않은데 살고 싶지도 않은 순간이 찾아오면 잠시 삶을 멈추고 싶어집니다.”

 

작가는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냉동인간이라는 제안에 혹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동안 영화나 소설 등 여러 매체에서 SF라는 장르를 통해 묘사된 냉동인간 뚜렷한 목표 혹은 주어진 임무를 위해 주인공이 비장한 표정으로 냉동실에 들어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공감이 되는 상황임에 분명합니다.

시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먼 미래가 배경이지만 인간의 냉동과 해동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작품 속 세상은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치병으로 사람들이 죽고, 프로포즈를 위해 꽃다발을 건네며, 사춘기 자녀와 부모는 변치 않는 갈등을 벌입니다. 하지만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간 냉동됐다가 해동된 인간들을 구성원으로 지닌 사회는 구석구석에서 심상치 않은 균열을 보입니다. 그 균열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때론 모두에게 충격을 안길만한 심각한 이슈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264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잖은 비중과 이름을 가진 인물만 10여 명에 달해서 벽돌 책을 보면서도 어지간해선 그리지 않던 인물관계도까지 그리며 책장을 넘겨야만 했는데, 뒤로 갈수록 미리 그려놓은 인물관계도가 꽤 도움이 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냉동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인연과 악연을 주고받습니다.

그중에서도 중심에 서있는 인물은 냉동인간 기업의 유능한 팀장 차규선과 그의 약혼녀 이가은, 그리고 꿈속에서 만난 여인과의 재회를 위해 50년간 냉동됐던 김기한입니다. 규선은 냉동기업에 근무하지만 정작 냉동인간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애초 냉동을 선택한 의도 자체가 의심스러웠고, 해동된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약혼녀 가은은 차마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결혼을 앞두고 전전긍긍합니다. 더구나 그 과거를 까발릴 존재가 자기 앞에 나타나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한편 서류상으론 한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서라고 돼있지만 실상은 비열한 이유로 냉동인간을 선택했던 기한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치자 예의 그 비열함을 드러내며 위기를 일으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기둥 역할을 하지만, 그들과 인연과 악연으로 얽힌 그 외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더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만산(晩産) 이후 자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냉동을 택한 엄마의 비극, 냉동인간 기업의 만행을 보도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선과 악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는 기자, 20여 년 전 악연으로 만났던 여자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자 충격에 빠지는 남자 등 냉동인간이라는 소재가 탄생시킬 수 있는 다채로운 인물들이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임팩트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개인적으론 냉동인간에 관한 암울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SF도 로맨스도 미스터리도 아닌, 냉동인간 그 자체 혹은 그것을 자유롭게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낳은 비극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냉동인간은 은밀하거나 비겁하거나 비열하거나(가령, “감출 게 많고 가진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피처”) 아니면 망해버린 이번 생의 종장을 어떻게든 유보해보려고 벼랑 끝 선택을 한 경우들(가령, “미래에는 지금보다는 취업이 잘 되지 않을까요?”)입니다. 때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족에 의해 냉동되는 경우도 등장합니다. 비밀리에 태어난 아이돌의 아기, 위기를 감지한 부모에 의해 강제로 냉동된 자식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냉동인간의 비극은 별 대책도 없이 해동되는 경우 더 극명해집니다. 물려받은 집이나 재산도 없는 상태에서 두 개의 나이(주민증의 나이와 냉동 당시의 나이)를 가진 그들은 다시 얻은 삶을 막막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민증의 나이 때문에 취업도 쉽지 않으며 너무 많이 달라진 사회에 적응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범죄의 60%가 냉동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참사가 빚어집니다. 심지어 보호자가 먼저 죽었거나 사라진 경우 은밀한 절차에 의해 삶을 마감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표지에 새겨진 너 잠깐 냉동되지 않을래? 나중에 꼭 깨워줄게!”라는 카피만 보면 자칫 코믹한 톤의 SF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은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그 어떤 디스토피아 콘텐츠보다도 암울하고 우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깔끔하고 개운한 결말도, 충격적인 반전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현실감 높은 SF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아직까지 그 사례가 없는 해동 기술이 언젠가 발명된다면 이 작품에서 묘사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비극들은 그 즉시 현실에서 쉽사리 목격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SF물에 큰 관심도 없었고 냉동인간이라는 소재 자체도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냉동인간으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다양한 비극들과 그에 어울리는 캐릭터들을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로 그려낸 작가의 필력 덕분에 기대 이상의 인상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후속작으로 들고 나올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임엔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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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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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 하나 없는 한직인 BANC(특이 사건국)로 좌천된 록산 몽크레스티앙 경감은 부임과 동시에 기이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센 강에서 알몸으로 발견된 여성이 이송 도중 탈출했는데, 그녀가 남긴 머리카락을 조사해보니 이미 1년 전에 사망한 유명 피아니스트 밀레나의 DNA와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도망친 여성의 시계와 문신을 통해 추적을 이어가던 록산은 밀레나의 연인으로 알려진 작가 라파엘과 만나는데, 문제는 라파엘이 밀레나에 관해 조금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라파엘 주위에서 끊임없이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 록산은 집요한 조사 끝에 도망친 여성과 밀레나, 그리고 라파엘의 관계를 파악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더불어, 술의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전복과 일탈의 신, 분노와 광기의 신이기도 한 그리스신화 속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그룹이 사건과 관련 있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남들은 다 좋다는데, 혹은 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데 유독 나와는 인연이 없는 작가는?”이란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한두 명쯤은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엔 그런 작가가 꽤 많은 편이고 그중 한 명이 바로 기욤 뮈소입니다. 선물로 받은 전집 세트마저 하염없이 방치할 정도로 관심 밖이던 기욤 뮈소와 처음 만난 건 통속성 강한 미스터리 아가씨와 밤이었는데 기대를 안 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고, 그 여세(?)를 몰아 시간여행을 다룬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까지 읽게 됐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큰맘 먹고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을 장바구니에 담기에 이르렀습니다.

 

제목부터 관심을 자극한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은 한겨울에 알몸으로 강에서 발견된 뒤 자취를 감춘 여성이 알고 보니 1년 전에 이미 죽은 여성으로 밝혀지면서 꽤 흥미로운 출발을 보입니다. 거기다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주인공 록산은 합리적이고 유능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반골 기질 탓에 부당한 처우를 당하고 마는다소 상투적인 여형사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초반부터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죽은 여성 피아니스트의 연인이자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모호한 작가 라파엘, 라파엘의 아버지이자 공교롭게도 록산의 전임자인 바타유 국장이 추적하던 정체불명의 그룹, 사방이 유리인 라파엘의 집에 출몰하는 미지의 인물들, 그리고 한직으로 밀려난 상태라 공식적인 수사를 포기한 채 오롯이 혼자 힘으로 뛰어다녀야 하는 록산과 그녀의 파트너인 박사논문 준비생 발랑틴 등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들이 빠른 템포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갑니다.

특히 별개로 보였던 각각의 사건들이 실은 복잡미묘하게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초반의 기대감과 매력은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다 읽은 뒤에도 머릿속으로 큰 얼개를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가 복잡하고 배배 꼬여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지만) 따라가기 힘든 장르의 믹스역시 난감할 뿐이었는데, 도플갱어 스토리인가 싶으면 갑자기 꿈과 환각과 정신의학이 등장하고, 기괴한 형태로 시신과 현장을 꾸미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스릴러인가 싶으면 느닷없이 그리스신화, 연극, 디오니소스 숭배, 제물과 제의(祭儀)가 튀어나옵니다.

말하자면, 미스터리인 줄 알고 따라가다가 난데없이 호러 혹은 신화 판타지와 맞닥뜨리고, 잠시 후엔 또 다시 미스터리로 급선회하는 혼란이 읽는 내내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도대체 이 작품의 장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수시로 들 수밖에 없었고, 중반을 조금 넘은 지점부터는 애초 주인공과 사건에 품었던 기대감과 매력은 더 이상 이어가기 어려워졌습니다. 잔뜩 연쇄살인을 설정해놓곤 막판에 가서 불가해한 영역으로 독자를 이끌어 납득하기 힘든 결론을 강요하는 일부 북유럽 스릴러의 닮은꼴이라고 할까요?

 

물론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깔끔하거나 선명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눈길을 끄는 이야기, 그리스신화를 차용한 신비주의에 가까운 서사, 숭배 혹은 제의(祭儀)를 통한 악의의 발산 등에 관심 있는 독자에겐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은 기대 이상의 만족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욤 뮈소와 친하지 않다고 해도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 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니 이 작품이 궁금하다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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