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99
제프 린지 지음, 고유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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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의 도둑을 자처하는 라일리 울프는 천재적인 절도범이자 화려한 곡예로 빌딩 숲을 활주하는 파쿠르(Parkour) 실력자이면서 필요할 땐 살인도 서슴지 않는 냉혹한 킬러다. ‘21세기의 뤼팽이라 할 그의 목표는 상류층이다. 부도덕한 부자들로부터 그들이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빼앗는 행위 자체가 라일리에게는 쾌감의 원천이다. 그런 라일리 울프의 눈에 이란 황실의 보물, ‘빛의 바다라는 별명을 가진 세계 최대의 핑크 다이아몬드 다리야에누르가 들어온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 개선을 위한 국보 상호교환 전시로 다리야에누르가 미국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직접 테헤란까지 날아가 다이아몬드를 보고 완전히 매료되어 그것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헌신적이고 친절하고 달콤한 킬러덱스터 모건을 앞세운 덱스터 시리즈로 잘 알려진 제프 린지(Jeff Lindsay, 한국에 출간된 덱스터 시리즈에는 제프 린제이로 표기됨)가 이번에는 천재적인 대도(大盜) 라일리 울프라는 캐릭터를 창조했습니다. 백주대낮에 12.5톤에 달하는 동상을 태연히 훔칠 정도로 대담한 라일리는 언뜻 덱스터와 닮은꼴로 보입니다.

끔찍한 흉악범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긴 하지만 그 동기가 정의감과는 전혀 무관한, 즉 대상이 흉악범일 뿐 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잔혹한 소시오패스가 덱스터라면, 라일리는 부도덕한 부유층을 노리긴 하지만 부의 공평한 분배나 사회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개인적인 복수 같기도, 달리 보면 돈 그 자체를 위한 게임 같기도 한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필요하다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대목에선 덱스터 못잖은 소시오패스 기질까지 엿보입니다. 요약하자면 천재적인 도둑 재능까지 갖추게 된 덱스터라고 할까요?

 

라일리의 가장 큰 고민은 모든 일이 너무 쉽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 앞에서 초대형 동상을 훔치고도 보람도 자부심도 못 느꼈던 건데, 그런 그에게 도전욕구를 불지른 것이 바로 이란 황실의 보물 다리야에누르입니다. 15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가치뿐 아니라 보석으로서의 최고의 아름다움까지 지닌 다리야에누르는 가히 라일리가 탐낼 만한 명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석 자체보다 라일리를 들끓게 만든 건 철벽과도 같은 보안시스템입니다. 최첨단 장비에 전직 특수부대원으로 구성된 용병과 이란 혁명수비대까지 가세한 탓에 성공 가능성은 0.0001%도 채 되지 않아 보입니다. 흥분지수가 최고조로 올랐던 라일리가 절망에 사로잡힌 건 이 때문입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건 한 편의 복잡한 플롯의 영화 시나리오와도 같은,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몇 배 이상 발휘해야 하고 그만큼의 행운까지 따라줘야만 하는 고난이도의 전략입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치명적인 침입 작전이라고 할까요?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라일리를 쫓는 FBI요원 프랭크 델가도의 추격전입니다. 라일리의 본명도 얼굴도 모르지만 오직 그를 체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델가도의 집착은 그가 유능한 요원이 아니었다면 진작 FBI에서 쫓겨나고도 남을 만큼 강박에 가깝습니다. 이란 황실의 보물이 라일리의 다음 타깃이라고 확신하지만 끝내 상부를 설득하지 못한 델가도는 휴가를 내고 개인적으로 라일리에 대해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미약한 단서들을 쫓아 라일리의 유년기부터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델가도의 행보를 통해 라일리의 개인사와 가족사, 특히 그를 대도이자 소시오패스로 성장하게 만든 비극들을 접하게 됩니다.

 

요약하면 보물 하나 훔치는 이야기지만 역시 덱스터 시리즈의 창조자답게 작가는 흥미진진한 케이퍼 스릴러를 완성시켰습니다. 다만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희대의 도둑질 자체도 (준비과정은 엄청 치밀하고 정교했지만) 뒤통수를 치는 맛이 강렬하지 못합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주인공 라일리의 캐릭터인데, 필요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긴 해도 결국엔 도둑이다 보니 주특기(?)가 살인인 덱스터에 비해 말랑말랑해 보인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의문 도둑질의 동기 혹은 목적은 무엇인가? - 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아서 그의 화려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깊이 이입할 수 없었던 게 더 큰 이유입니다. FBI요원 델가도에 의해 밝혀진 그의 과거, 즉 평범한 소년이 괴물이 된 과정 역시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고, 덱스터와 마찬가지로 라일리도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은 걸로 설정돼있지만 무게감이나 충격의 강도는 훨씬 약해 보였습니다. 더불어, ‘정의로운 도둑이 선사하는 쾌감이라곤 전혀 맛볼 수 없는 라일리의 캐릭터는 독자에 따라 비호감으로 여겨질 여지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라일리 울프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찰(탐정)이나 살인자가 주인공인 경우와 달리 도둑의 이야기는, 그것도 라일리 같은 캐릭터의 도둑이라면 다양한 이야기를 펼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또 데뷔작에서처럼 라일리의 캐릭터가 다소 모호하게, 그리고 비호감에 가깝게 그려진다면 계속 지켜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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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 세트 - 전2권 왼팔
방진호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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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따르면 방진호는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 분야에서 전설적 마니아층을 거느린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2018년이었는데, 엄청난 살상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소심한 공처가이기도 한 살인청부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방의강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죽어도 되는 아이를 통해서입니다. 이후 앞서 발표된 세 작품을 연이어 읽었고, 그 뒤론 신작 소식을 궁금해 하며 기다리게 될 정도로 홀딱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왼팔을 비롯하여 적잖은 작품이 있는 걸 알게 됐고, 이미 절판되어 중고서점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그를 전설적 마니아층을 거느린 작가로 만든) ‘왼팔을 읽게 됐습니다. 더 놀랐던 건 처음 접했을 때 생소한 이름이라 대략 데뷔 5년 안팎의 신인과 중견 사이라고 여겼던 방진호가 왼팔을 처음 출간한 게 2001년이란 점입니다. ‘한국이라는 무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액션 스릴러와 피와 뼈가 난무하는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구축해온 방진호의 저력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할까요?

 

왼팔은 독자에 따라 ‘SF 액션 스릴러로 규정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1960년대부터 비밀리에 존재해온 국방부 산하의 기관은 각종 실험체를 통해 가공할 인간 살상병기를 만들어왔고, 거기엔 인간과 맹수의 유전자를 조합한 괴수, 좀비처럼 피를 필요로 하며 극강의 재생력까지 지닌 존재, 그리고 흥분이 임계점을 넘으면 온몸이 금속으로 변이하는 괴물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피조물들이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슬로터라 불리는 그들은 중무장 시 1개 대대와 맞먹을 정도의 살상력을 지니고 있는데, ‘왼팔의 주인공 장도검은 그 슬로터 중에서도 최강의 능력을 지녔던 남자로, 터미네이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각종 무기가 장착된 기계 팔과 기계 눈을 가진 인물입니다.

 

기관과 그 산하의 연구소가 첨예하게 갈등을 벌이던 10년 전, 장도검은 목숨을 걸고 기관과 대결을 벌인 뒤 그곳을 뛰쳐나왔고, 지금은 연구소출신 주장서가 운영하는 레드아이라는 피자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거구의 몸집에 (기계 눈을 가리기 위해)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데다 성대가 망가진 탓인지 스피커 소리와도 같은 음성을 내뱉는 등 겉으론 꽤나 위협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그의 직업은 절반쯤은 피자집 종업원이고, 절반쯤은 심부름센터 수준의 의뢰를 받는 소소한 청부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장도검 주위에선 끊임없이 대형 사건들이 터집니다. ‘기관이 파견한 슬로터가 장도검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들기도 하고, 봉인해둔 실험체가 탈출하여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킨 탓에 장도검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합니다. 그때마다 방진호 특유의 잔혹한 액션 스릴러와 하드보일드 누아르가 펼쳐지고, 독자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장면들이 내뿜는 쾌감을 만끽하게 됩니다.

 

이런 살벌한 서사를 중화시켜주는 건 피자집 레드아이에서 벌어지는 막간극 같은 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론 방의강 시리즈에서 맛봤던 영국식 블랙유머 혹은 촌철살인 같은 독설만큼 짜릿하진 않았지만, ‘기관과 얽힌 쓰라린 과거를 지녔거나 큰 사건에 휘말려 상처를 입었던 인물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며 소박한 코미디를 펼치는 장면들은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던 두 어깨를 잠시나마 쉬게 해주는 맛깔난 양념입니다.

또 사방팔방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벌어지다 보니 경찰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울 중앙서 강력범죄수사팀의 막내형사 이명희(남자형사입니다)는 신경질적인 팀장 주인환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하면서도 날카로운 관찰력과 행동력을 갖춘데다 장도검 및 레드아이멤버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 인물이라 등장할 때마다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1~2권 합쳐 9개의 챕터로 구성돼있고, 각 챕터마다 사건이 설정돼있어서 연작단편의 형식이긴 하지만 실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 장편이나 다름없습니다. 두 권을 합치면 748페이지의 적잖은 분량이지만 워낙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서 하루 안에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저런 설정이 가능하다고?”라고 반문할 독자도 있겠지만, 그런 반감만 지워낸다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오락성 강한 액션 스릴러+하드보일드 누아르라서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강렬한 여운과 함께 뒷이야기를 위한 대형 떡밥만 남긴 채 막을 내린 건 무척 아쉬웠지만, 찾아보니 3부작으로 출간된 적경왼팔의 후속작인 것 같아 오늘부터 부지런히 중고서점을 다시 뒤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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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이클롭스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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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이클롭스엠브리오 기담’(엘릭시르, 2014)에 이은 이즈미 로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오츠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에도 시대 배경의 기담집인데, 그의 다른 작품들(‘GOTH’, ‘ZOO’, ‘암흑동화)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포 기담을 다루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이야기의 큰 뼈대는 여행안내서를 집필하는 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이자 친구인 미미히코가 유명한 온천과 신사를 여행하며 겪은 기담 혹은 괴담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두 사람의 여정을 담은 엠브리오 기담과 달리 나의 사이클롭스에는 로안에게 여행안내서 집필을 의뢰한 서점의 직원인 린이라는 소녀까지 세 명이 등장합니다. 린은 전작인 엠브리오 기담에도 등장했던 인물로, 한 노파에게 신비한 파란 돌을 선물 받은 뒤 거듭된 삶을 살게 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선지 이름도 윤회를 뜻하는 린()인데, 이번에는 야무지고 톡톡 쏘는 캐릭터로 등장해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도중여경이라는 여행안내서를 집필하는 작가 이즈미 로안은 무척 특이한 인물입니다. 긴 말총머리 때문에 여자로 착각하게 만드는 용모를 지닌 그는 비쩍 마른데다 기운도 없어 보이지만 거칠고 험한 여행길을 그 누구보다 기운차게 걷고, 믿기 힘든 이야기라도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그 진위에 관계없이 흥미를 보이며 여행안내서에 수록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길치 캐릭터가 가장 돋보이는데, 가령 외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고, 같은 자리에서 며칠이고 계속 맴돌거나 바다를 건넌 적도 없는데 어느 새 섬에 갇힌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치 캐릭터는 실은 로안의 신비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인데, ‘엠브리오 기담에서 로안의 프리퀄을 그린 수록작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부터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 보통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대화도 가능한, 그래서 불가해한 기담과 괴담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로안의 캐릭터 덕분에 동행한 미미히코와 린의 여행은 꽤나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툭하면 일행을 놓쳐 홀로 난감한 지경에 처하거나 수시로 기괴하거나 섬뜩한 상황과 맞닥뜨리곤 하는데,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짐꾼인 미미히코가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에 빠질 정도로 곤혹스러운 여정을 겪습니다.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나태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 동생뻘인 린에게 수도 없이 비난과 비아냥을 사는 인물인데, 그런 성격 탓에 화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가 겪은 무수한 들이 나의 사이클롭스의 주된 소재이기도 합니다.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표제작인 나의 사이클롭스만 린이 겪은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모두 미미히코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합니다.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의 비극(나의 사이클롭스), 기형아로 태어났거나 네모난 두개골을 지닌 어린 아이들의 안타까운 사연(네모난 두개골과 아이들), 마주치는 모든 걸 모른 척 해야만 무사히 넘을 수 있는 눈가림산의 진실(죽음의 산), 수상한 세 가족과 피비린내 진동하는 저택을 둘러싼 엽기 공포물(폭소의 밤), 오로지 오르막길밖에 없는 산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별과 곰의 비극) 등 전작인 엠브리오 기담못잖은 매력적이고 오싹한 기담과 괴담들이 실려 있습니다.

죽어서도 몸에 지닌 열로 마을을 전멸시키는 존재, 생명이 끊어졌지만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 살해당한 사람의 잘린 손가락을 씹거나 핥는 것을 좋아하는 소년, 사람을 바다로 끌어당기는 비취반지 등 기괴하면서도 도발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설정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 시리즈만큼 흥미진진하면서도 야마시로 아사코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뿍 담고 있습니다.

 

실은 가장 기대했던 이야기는 이즈미 로안의 과거사 또는 길치 캐릭터의 진실이었습니다. ‘엠브리오 기담에서 소개된 그의 프리퀄의 뒷이야기를 기대하기도 했고, 그가 툭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실은 어떤 계기나 의지에 의한 공간 이동임을 밝혀주는 에피소드를 기대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다만, 마지막 수록작인 별과 곰의 비극에서 그가 자신의 과거, 특히 부모와 관계된 진실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한 장면은 이어질 후속작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것 같긴 합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건을 일으키거나 사건에 휘말리는 1인칭 화자 역할을 대부분 미미히코가 맡고 있어서 이즈미 로안이 거의 방관자처럼 사건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마다 해법을 제공하거나 사건을 종결하기도 하지만 그만의 이야기가 눈에 띄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일본 출간기준으로 엠브리오 기담2012, ‘나의 사이클롭스2016년에 출간됐습니다. 6년이나 지났으니 후속작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이즈미 로안의 과거와 비밀이 궁금한 독자로서 하루라도 빨리 후속작 소식이 들려오길 바랄 뿐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현대를 배경으로 삼은 야마시로 아사코의 호러물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작가정신, 2019)부터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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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가 여자들
파스칼 디에트리슈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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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을 무대로 마피아 집안의 세 모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대부 레오네의 아내이자 명예 마피아인 어머니 미셸, 아버지와 마피아에 대한 반감으로 인도주의 단체에서 일하는 장녀 디나, 현대적인 방식으로 가업을 이어가려는 차세대 보스 후보 차녀 알레시아. 어느 날, 알츠하이머를 앓던 남편 레오네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미셸은 그 사실보다도 남편이 사전에 써놓은 편지 때문에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편지엔 레오네가 자신을 배신한 아내 미셸을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했으며, 조만간 그가 미셸의 숨통을 끊기 위해 방문할 거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셸은 두 딸과 함께 킬러의 정체를 밝히고 살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마피아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은 매체를 불문하고 예외 없이 남성 중심의 서사를 펼치기 마련입니다. 비장미 넘치는 영웅도, 차기 보스를 노리는 야심가도, 심지어 사업에서든 권력투쟁에서든 덜 떨어진 모습을 보이는 조연이나 그저 총알 세례 장면을 위해 동원된 단역들조차 모조리 남자들의 몫입니다. 여자들은 무기력하거나 순종적이거나 성적 대상이거나 잘 해야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된 채 무의미한 저항을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목에서부터 도발적인 기운을 감추지 않은 마피아가 여자들은 기존의 마피아 물과는 정반대의 성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혼수상태에 빠진 마피아 대부의 아내와 두 딸인데, 그녀들은 마피아 세계에서 여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억지로 강요당할 수 있는 몇몇 삶의 방식을 사실감 있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부의 아내인 미셸은 마피아의 여자로서의 소극적인 역할을 수긍한 채 살아온 인물입니다. 낭만적이지만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남편에게 평생 순종해왔고, 마피아가 제공한 부유한 삶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피아 아내들이 뜻을 모으면 얼마든지 남편들을 구워삶을 수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깨달은 인물입니다.

장녀 디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마피아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혔고, 그로 인해 보란 듯이 인도주의 단체에서 활동하지만, 실은 마피아와 인도주의 단체가 이복형제란 사실을 깨닫곤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내를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한 아버지를 혐오하지만, 똑같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려는 동생 알레시아 역시 불편하게만 여겨질 뿐입니다.

약국을 운영하며 몰래 마약을 판매하고 돈 세탁을 일삼는 차녀 알레시아는 차세대 그르노블 마피아 보스 자리를 넘보는 야심찬 여성입니다. 기존의 마피아 서사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마지막까지 멍청한 남자들 대신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마피아를 이끌고 갈 여자들의 역할을 모색하는 인물입니다.

 

띠지에 인쇄된 낡은 전통과 침묵의 규율을 깨부수는 짜릿하고 통쾌한 코믹-여성-누아르!”라는 카피는 절반쯤은 맞고 절반쯤은 과장됐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인데, 짜릿함과 통쾌함에 대해선 기대치를 너무 높게 가져선 안 되고, 코믹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판타지 같은 남성 중심의 마피아 서사와 달리 차분하면서도 사실감 넘치는 여성 마피아 스릴러라는 카피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미셸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된 청부살인업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이나 알레시아가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차세대 보스 자리를 노리는 과정은 딱히 놀라운 반전이나 흥분을 일으키는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총격전 외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남성 마피아 서사에 비하면 훨씬 더 리얼하고 그럴듯하게 다가왔고,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피아가 여자들을 포함하여 파리의 대마초 여인’, ‘포커 플레이어 그녀등 최근 들어 프랑스 미스터리 스릴러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쓸데없이 어렵게 이야기를 풀거나 과장되게 폼만 잡는다고 여겼던 프랑스 작품들에 대한 선입견을 시원하게 날려줄 만큼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저와 그다지 코드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한 기욤 뮈소의 신작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을 곧 읽을 예정인데, 과연 기욤 뮈소마저도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전해줄지 사뭇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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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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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200713회 문학동네 소설상수상작입니다. 출간 즈음에 읽었으니 대략 14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인데, 최근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돼있던 책들을 골라내다가 유독 달을 먹다에 시선이 머문 건 당시 꽤 파격적이란 느낌과 함께 깊은 여운을 만끽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부분적인 기억만 남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한 이유 중 하나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달을 먹다는 캐릭터, 이야기, 시대적 배경, 그리고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 속에 깃든 서늘함과 애틋함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주목받았어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정조와 순조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니 역사소설인 건 분명하지만, 실은 이 작품에서 역사는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의 순도와 위기감을 고조시킬 뿐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네 가문의 3대에 걸친 욕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무대를 현대로 바꿔도 무방할 만큼 보편적인 인물과 감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소설이라는 외피는 독자로 하여금 똑같은 금지된 사랑이라 하더라도 엄격한 법도와 완강한 신분질서가 작동하던 그 시절이라서 더욱 불온하고 위험하고 절실하게 느껴지도록 설치된 일종의 보조장치라고 할까요?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능하거나 비겁하거나 가부장적인 권위만 앞세우는 남자들의 권세와 허영 속에서 맥없이 시들거나 분노만 삼킬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굳은 심지로 자신의 입지를 지키는 여러 여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호색한에 난봉꾼이던 아버지를 증오한 나머지 시집간 뒤에도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묘연, 서녀로 태어났음에도 양반처럼 애지중지 키워졌지만 결국 중인의 첩으로 들어가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하연, 첫 아이를 유산한 뒤 피폐한 삶을 살다가 가까스로 딸을 낳았지만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점차 나락으로 떨어지는 후인, 어머니가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뒤 무책임한 부성의 굴레에 갇혀 살다가 끝내 파국을 맞이하고 마는 향이 등이 그녀들입니다.

 

또 하나는 지독히도 비극적인 여러 커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리를 저는 12살 소녀에게 반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다른 여자와 결혼한 뒤 폐인에 이르고 만 여문, 학대에 가까운 남편의 태도에 지쳐 모든 것을 놓고 싶어 하는 15살 연상의 여자를 흠모한 나머지 그녀를 훔쳐 달아나는 후평, 그리고 이 작품에서 가장 두꺼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 다른 이종사촌 간의 금지된 사랑이 그것입니다. 이른바 막장에 가까운 설정이지만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 서정성 높은 문장과 역사소설이라는 외피 덕분에 오히려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돋보인 이야기입니다.

 

사실 달을 먹다는 독자에게 결코 친절한 작품이 아닙니다. 간결하고 단정하지만 서늘함과 애틋함이 깃든 문장들은 베껴 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화자는 10명 가까이나 되고, 또 그들이 특별한 경계(줄바꿈이나 챕터 바꾸기)도 없이 시공간을 수시로 바꿔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구성은 꽤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심사평 중에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놓고 줄을 그어가며 읽어야라든가 “3대에 걸친 욕망과 사랑의 퍼즐 맞추기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이지는 느리게 넘어갈 수밖에 없고, 지금 읽고 있는 대목이 앞의 어느 부분과 연결된 이야기인지를 세세히 살피며 읽어야만 합니다. 독서 스타일이 안 맞는 독자라면 다소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구성이지만, 반대로 이 작품만의 독특함이자 매력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달을 먹다에 홀딱 반한 나머지 김진규의 다음 작품인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2009)까지 내쳐 읽었다가 (재미있긴 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달을 먹다의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을 방문했다가 알게 된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이후 출간된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2010)을 끝으로 김진규의 작품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감정을 후벼 파면서도 절대 오버하지 않는 문장들, 영국식 블랙유머를 연상시키는 촌철살인 같은 독설, 침향과 꽃차와 자수(刺繡) 등 온갖 시각적인 즐거움을 안겨주는 매력적인 묘사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가로 여겼기에 10년 넘게 무소식인 김진규의 새 이야기가 더 안타까울 뿐입니다. 절필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새 작품으로 독자들과 꼭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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