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 협박 시 주의사항 - JM북스
후지타 요시나가 지음, 이나라 옮김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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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편집자를 꿈꾸는 여대생 오카노 케이코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 때문에 호스티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입니다. 하루 빨리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고 싶지만 취업은 요원하고 대출금은 무섭게 불어나는 탓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케이코는 어느 날 집 인근에서 단골손님 쿠니에다를 목격합니다. 문제는 그가 뛰쳐나온 맨션에서 피살자가 발견됐고, 사망추정시간 역시 케이코가 그를 발견한 시간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케이코는 그날 이후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악의 때문에 갈등에 빠집니다. 고급인력 파견업체 사장인데다 젠틀하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쿠니에다라면 쉽게 협박에 응해 적잖은 돈을 내놓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당신이 살인범임을 알고 있다.”는 익명의 협박 편지를 보낸 케이코. 하지만 사태는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낯선 이름이라 당연히 신인작가라고 여겼지만 다 읽은 뒤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니 1950년생으로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나오키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을 유작으로 2020년 세상을 떠난 베테랑 작가였습니다. 이전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2008텐텐’()이 유일했는데, 경력에 비하면 고개가 갸웃거릴 정도로 덜 알려진 작가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彼女恐喝’, 직역하면 그녀의 공갈입니다. 나름 센스 있는 번역 제목 때문에 눈길이 확 끌렸는데, 얼핏 가벼운 톤의 미스터리로 오해할 여지가 있지만 실은 인물이나 사건 모두 꽤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서 페이지를 넘길수록 살인범을 협박했다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다만, 케이코가 단골손님이자 살인범인 쿠니에다를 협박하는 이야기는 대략 1/3지점에서 마무리되고 이 작품의 진짜 알맹이는 그 이후부터 전개되는데, 그 내용을 설명하려면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이 없어서 대략적인 인상비평 이상의 서평을 쓰기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 딱 그 대목까지만 간략하게 언급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협박범 케이코와 살인범 쿠니에다의 관계입니다. 20대 호스티스와 50대 손님이라는 통속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케이코로서는 호스티스인 자신을 늘 정중하고 젠틀하게 자신을 대해준 쿠니에다가 살인범이란 사실 자체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를 상대로 공갈 협박을 저질러도 되는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말 못할 사연을 지닌 듯한 쿠니에다는 어떻게든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려 애쓰는 자신을 대견히 여기는 것은 물론 플라토닉한 관계에 만족하면서도 물심양면으로 돕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협박범과 살인범으로 엮였으니 이야기는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케이코의 협박이 마무리되는 1/3지점까지는 전체적으로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문장은 지나치게 짧고 간결하고, 내용 역시 진중한 구석 하나 없이 숭덩숭덩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쿠니에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되는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되면서 전혀 다른 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케이코의 협박장이 초래한 의외의 사태들이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초반의 가벼움만 견뎌낸다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성급한 독자라면 조금만 인내심을 갖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조금 긴 사족으로 번역 혹은 편집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하고 싶은데, 자잘한 오타 정도는 몰라도 간혹 인물의 이름을 오기하거나(아야나 아야네, 미노베 미노부, 요코타 료코 요코타 요시코), 시제나 표현의 오류를 발견했을 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작가 약력에도 오류가 있었는데, “2017년에는 폭설 이야기로 제51회 후루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이라고 돼있지만,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 작품의 원제는 大雪物語이며, 그 작품이 수상한 상은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吉川英治文学賞)입니다. 역자나 편집자라면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오류들이라 아쉬움이 더 컸는데, 매번 오역이나 오타를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인쇄하기 전 한번만 더 자신들의 작품을 성의 있게 살펴볼 수는 없는 건지, 하다못해 가제본 서평단이라도 꾸려서 체크해볼 수는 없는 건지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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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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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를 바라보는 독일어 번역가 조한나의 본명은 변이숙입니다. 제주 4.3사건과 빨갱이낙인은 수십 년에 걸쳐 그녀의 가족을 산산조각 냈고, 20대에 이른 그녀는 결국 한국을 떠나 독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름까지 바꾸며 과거와의 단절을 바랐지만, 얼마 못가 어처구니없는 누명과 함께 또다시 조국의 잔혹한 폭력에 짓밟히고 맙니다.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며 20여년을 지낸 조한나는 2015, 다시 한 번 한국을 떠나고 싶은 간절함에 사로잡힙니다. 가까스로 봉인했던 공포와 분노를 되살아나게 만들 가당찮은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번역한 소설의 원작자인 마르코 라디치의 초대를 받은 조한나는 멀고도 먼 발칸반도를 향해 먹먹한 여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친 것은 너무도 낯익은 상처들입니다.

 

내전과 인종청소로 얼룩진 발칸반도의 비극과 대량학살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제주 4.3사건을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만, ‘밤이여 오라는 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고발장입니다. 특히 이념, 민족주의, 종교를 앞세운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거대한 폭력이 어떻게 개개인의 삶을 궤멸시키는지, 또 수십 년이 흘러도 결코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집요하면서도 차분하고 명징한 태도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중심 이야기는 20여 년 전 참혹한 내전과 인종청소가 벌어졌던 발칸반도 곳곳을 여행하는 조한나의 여정입니다. 자그레브, 비셰그라드, 부코바르 등 가는 곳마다 추모비가 이정표처럼 세워져있는 발칸반도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한국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심신이 완전히 파괴됐던 조한나에게는 발칸반도의 상처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또한 자신의 가족을 붕괴시킨 제주 4.3사건과 빨갱이낙인을 상기시키는 닮은꼴의 흔적들을 발칸반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나는 발칸에서 제주를 보았고, 제주에서 다시 발칸을 보고 있었다. 발칸에서 나는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략) 내가 정말 무서웠던 건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도무지 낯설지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p207~208, ‘작가의 말)

 

발칸반도에서 조한나가 만난 사람들은 여전히 20년 전에 얻은 상흔에 갇혀있습니다. 아내와 딸을 잃고 폐인이 된 남자, 군인들의 윤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어떻게든 발칸반도를 떠나려는 청년, 내전의 피해자지만 비무장 상태의 적군을 죽인 일로 트라우마를 겪는 남자, 고향은 같지만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물려받은 연인 등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조한나는 때론 그들에게서 일란성 쌍둥이같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철저히 망가진 가족과 연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통점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여다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다시금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기 시작한 조한나는 오랫동안 봉인해둔 기억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릅니다.

 

다소 주제의식이 강한 작품인 건 맞지만, 선언적이지도 않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서사 때문에 오히려 깊은 인상과 여운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한나의 상처의 근원이 제주 4.3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겪은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닮은꼴의 상처를 지닌 발칸반도에서의 여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지만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그린 점은 이 작품만의 가장 특별한 미덕입니다. 또 발칸반도의 풍광을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낸 문장들은 그곳의 비극과 대비되어 더 처연하게 느껴졌고,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대목에서조차 서늘함을 유지했던 차분하고 정갈한 문장들은 역설적으로 작품 속 인물들의 공포와 분노를 더 강렬하게 만들었는데, ‘9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은 바로 이런 점들이 높이 평가받은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워서 일부러 과거의 참혹한 이야기를 외면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밤이여 오라는 고통스럽긴 해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좀더 다양한 계층의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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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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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뉴욕. 작은 법률사무소의 사무원인 그레이스 힐리는 기차역 벤치에 버려진 여행가방에서 10여 장에 가까운 젊은 여자들의 독사진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방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그레이스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사진들을 갖고 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가방 주인인 엘레노어 트리그라는 여자가 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된 영국 특수작전국 요원임을 알아내곤 그녀와 사진 속 젊은 여자들의 사연을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1944년 런던과 파리. 영국 특수작전국장의 비서였던 엘레노어 트리그는 국장의 전격적인 결정에 의해 여자 특수요원들을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맡습니다. 엘레노어에 의해 발굴된 요원 중 한 명은 홀로 5살 딸을 키우던 마리입니다. 프랑스어에 능통하지만 특수요원으로서의 재능이라곤 전혀 없었던 마리는 파리에 투입된 이후 위험한 작전들을 무사히 수행합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파리의 비밀조직과 특수요원들이 독일군에게 일망타진됩니다. 누군가의 배신이 아니고선 절대 벌어질 수 없었던 대참극에 엘레노어와 마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무려 8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서사와 진한 여운을 품고 있는 장르입니다. 올해(2021) 유독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그 당시 사건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많이 접했는데, 리스 보엔의 팔리 들판에서’, 에릭 앰블러의 공포로의 여행’, 헤더 모리스의 실카의 여행이 전자라면,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는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사라진 소녀들은 공식 직함은커녕 아무런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여자 특수요원들의 활약과 비극을 한 축으로, 또 그녀들의 감춰진 진실을 좇는 긴박한 미스터리를 다른 한 축으로 삼아 전쟁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나름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본 작품입니다. 엘레노어와 마리가 1943~1944년의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여자 특수요원들의 활약과 비극을 설명하고 있고, 전쟁 직후인 1946년을 무대로 우연히 엘레노어의 여행가방에서 젊은 여자들의 사진을 발견한 그레이스가 그녀들의 사연을 조사하며 누가 그녀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며, 왜 엘레노어는 전쟁이 끝난 후 그녀들의 사진을 들고 뉴욕에 나타났나?”를 추적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이후 젊은 남자들이 사라진 프랑스에서 영국의 남자 특수요원들이 속절없이 독일군에게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여자 특수요원이었습니다. 지극히 남성우월의식이 팽배해있던 시절인데다 군대라는 조직의 보수성은 더 극단적이어서 애초 여자 특수요원의 양성과 파견은 잘 해야 비웃음, 보통은 비아냥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레노너와 마리 등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고 불과 1년 만에 여자 특수요원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소소한 희생은 불가피한 법이라는 전쟁의 딜레마 속에서 여자 특수요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 후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고, 1944년 런던의 엘레노어와 1946년 뉴욕의 그레이스는 그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큰 틀만 놓고 보면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무참히 버려진 이름 없는 용사들의 진실을 좇는 이야기라는, 다소 낯익은 구조를 갖고 있지만, 엘레노어-마리-그레이스라는 세 명의 화자를 동원하여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병행시킨 덕분에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전쟁의 비극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연히 습득한 젊은 여자들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그녀들이 겪은 참상을 조사하는 그레이스의 챕터는 명탐정 미스터리 못잖은 긴장감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전쟁 장르물 이상의 미덕을 만끽하게 만듭니다. 또 스스로 발굴하고 훈련시킨 특수요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전쟁 중에는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엘레노어의 죄책감과 사명감은 비장한 느낌까지 들게 만듭니다.

 

전쟁 서사와 미스터리의 조합 자체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사라진 소녀들은 그 분야에 있어서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2차 대전과 여자 특수요원이란 설정 때문에 자칫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지만 사라진 소녀들은 분명 그 선입견 이상의 여운을 제공하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기도 했는데, 시공간은 물론 캐릭터들도 워낙 매력적이라 영상으로 만난다면 원작 이상의 감흥을 누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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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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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0m급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일본 최대의 댐 오쿠토와에서 운전원으로 근무하는 도가시는 몇 달 전 절친한 동료인 요시오카와 함께 조난자를 구하러 나갔다고 홀로 살아남은 뒤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요시오카의 약혼녀였던 지아키가 요시오카의 일터이자 목숨을 앗아간 오쿠토와를 직접 보고 싶다며 찾아온다는 소식에 도가시는 그녀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할 마음의 준비를 하지만, 예기치 못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댐이 점거당하고 지아키마저 인질로 붙잡히자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도가시는 자동소총과 폭약으로 중무장한 범인들에 의해 육로와 통신이 모두 마비되어 댐이 외부와 완벽하게 고립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가시는 오쿠토와의 산세와 댐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무기 삼아 홀로 위험천만한 싸움에 나섭니다.

 

“2,000m급 설산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테러! 테러에 맞서 싸울 무기는 오직 설산에 대한 경험뿐이다.”라는 카피만 보면 당연히 클리프 행어류의 영미권 액션 스릴러가 떠오르는데, 거대한 댐과 설산을 배경으로 한 일본 작품이라 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목인 화이트아웃짙은 안개나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자신의 손과 발도 보이지 않는데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어 허공에 뜬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주인공 도가시는 과거 절친인 요시오카를 잃었을 때에도, 또 홀로 테러리스트들과 맞서는 과정에서도 수차례 오쿠토와에 몰아친 극심한 화이트아웃을 겪습니다.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마주치지만, 자신이 좀더 분투했다면 요시오카를 살릴 수도 있었다는 죄책감과 세상을 떠난 친구가 맡긴 사명’, 즉 그의 약혼녀 지아키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도가시는 그 숱한 화이트아웃들을 이겨냅니다.

 

큰 구도만 보면 테러리스트들이 장악한 빌딩 안에서 브루스 윌리스 혼자 총격전을 벌이며 인질들을 구해내는 (무려 30년도 넘은 영화) ‘다이 하드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도가시는 경찰도 아니고 하물며 총에 관한 한 쏴본 적은커녕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순수 아마추어입니다. 그의 유일한 재능은 오쿠토와의 산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안다는 점과 댐 전문가로서의 지식과 경험뿐입니다. 그래서인지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특히 눈앞의 주적은 댐을 점거한 무장 테러리스트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이 내뿜는 폭설과 추위와 화이트아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와 싸우는 도가시의 결연한 각오와 분투는 단순한 액션 스릴러 이상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해주곤 합니다.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설산이란 설정은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힘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사건을 단조롭게 만들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닌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하지만 가끔 540여 페이지의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건 바로 이런 단조로운 전개 때문입니다. 물론 범인과의 협상에서 난항을 겪는 경찰의 분주한 모습도 간간이 그려지고, 테러리스트 가운데 비밀을 간직한 인물의 이야기라든가 약혼자를 집어삼킨 오쿠토와를 찾았다가 인질이 된 지아키의 이야기도 나름 비중 있게 그려져서 지루할 틈은 거의 없었지만, 막판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도가시와 테러리스트들의 대결이 다소 동어반복적으로 느껴진 건 단조로운 전개가 낳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생각입니다. 0.5개가 빠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99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2000년에 영화로도 제작됐다고 하는데, 어떤 경로로든 꼭 구해서 보고 싶은 욕심입니다. 설산과 댐을 배경으로 한 엄청난 재난 상황과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졌을지도 궁금하지만, 원작에서 느낀 단조로운 전개의 아쉬움이 어쩌면 영상에서는 어느 정도 극복됐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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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 파비안 리스크 시리즈 1
스테판 안헴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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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남서부 도시 헬싱보리에서 연이어 심각하게 훼손된 사체들이 발견됩니다. 경찰은 범죄 현장에 남겨진 사진을 통해 피해자들이 학교 동창임을 알게 됩니다. 스톡홀름 범죄수사국에서 해고되듯 쫓겨나 고향인 헬싱보리로 돌아온 파비안 리스크가 이 사건 수사에 합류하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피해자들과 동창이었고, 살해된 자들이 학창 시절 지독한 학폭 가해자였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팀워크를 강조하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파비안은 당시 두 사람의 먹잇감이었던 자가 범인이란 심증을 갖고 단독행동에 나섭니다. 하지만 일은 엉망진창으로 꼬이고 파비안은 오히려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나름 북유럽 스릴러를 무척 좋아한다고 자평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높지 못한 타율(?) 때문에 조금은 피로도를 느끼는 중이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벽돌에 가까운 분량을 자랑하는 작품은 일단 피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곤 했는데, 이 작품은 몇몇 이유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한 경우입니다. 우선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헨닝 망켈의 얼굴 없는 살인자와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기 때문인데, 같은 스웨덴 작품인데다 번역 제목까지 똑같고 심지어 두 작품 모두 시리즈의 포문을 연 첫 작품입니다. (물론 원제는 다릅니다. 헨닝 망켈의 ‘Mördare utan ansikte’는 직역해도 얼굴 없는 살인자인데 반해, 스테판 안헴의 ‘Offer Utan Ansikte’로 직역하면 얼굴 없는 희생자쯤이 됩니다.)

주인공 캐릭터도 비슷해서 둘 다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베테랑들이며, 주 활동지역 역시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주로 엇비슷합니다. 또 아내와 자식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마음고생을 한다는 점까지도 닮았습니다. 다만, 헨닝 망켈의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가 배 나온 아저씨스타일에 어딘가 살짝 허술해 보인다면, 스테판 안헴의 주인공 파비안 리스크는 10년은 젊어 보이는 외모에 마르고 민첩한 몸을 지녀 외모만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긴 합니다.

 

서론이 좀 길어졌지만 이런 이유로 648페이지라는 부담스런 분량에도 불구하고 스테판 안헴의 얼굴 없는 살인자를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별 3개밖에 줄 수 없을 정도로 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범죄의 잔혹성이라든가 주인공 캐릭터만 놓고 보면 개인적인 취향에 딱 들어맞는 편이지만, 수시로 페이지 수를 들여다보게 할 정도로 장황하고 산만한 전개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0페이지 정도까지만 해도 기대감에 들뜨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점점 핵심보다는 곁가지 위주로 흐르기 시작했고,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그에 비례해서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거의 주인공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는 불행한 가족사는 너무 뻔해서 지루하게 읽혔고, 결국 막판에 가족이 사건에 휘말리겠구나, 라는 예상까지 쉽게 하게 만들었습니다. , 인접한 덴마크의 경찰을 끌어들인 것 자체는 괜찮았지만 그들만의 사건이 적잖이 분량을 차지하면서 오히려 메인 스토리에 방해가 되기만 했습니다. 사소한 예지만 큰 역할도 없는 단역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위해 몇 페이지씩 할애한 대목에선 그냥 통째로 넘긴 적도 있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들을 겪을 때마다 자꾸만 페이지 수를 보게 되곤 했는데, 언제 648페이지까지 가나, 싶은 생각에 한숨만 나온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장 아쉬웠던 건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입니다. , , , , 자궁 등 수많은 동창생의 몸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범인 치곤 그래서 죽였다고?”라는 의문을 자아낼 정도로 다소 어이없는 동기를 밝히는데, 이 대목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예전에 벽돌 책도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던 시절엔 스티그 라르손이나 요 네스뵈의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스릴러도 하루 안에 읽어내곤 했지만, 요즘은 조급증이 생긴 탓인지 일단 600페이지가 넘어간다 싶으면 읽으면서도 마음이 바빠집니다. 그래도 이야기가 흐트러지지 않고 밀도 있게 쭉 달리면 어떻게든 읽긴 하지만, 스테판 안헴의 얼굴 없는 살인자는 스릴러 자체보다도 곁가지들 때문에 지치고 만 작품입니다. 주인공, 조연, 사건 모두 흥미로워서 조금만 슬림했더라면 좋은 인상은 물론 후속작까지 기대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으로선 비슷한 분량(632페이지)의 시리즈 2편지의 심판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인터넷서점의 독자 서평은 대부분 호평 일색입니다. 제 서평이 극히 예외적인 소수 의견일 수 있으니 다른 독자들의 호평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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