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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 ㅣ 파비안 리스크 시리즈 1
스테판 안헴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21년 6월
평점 :
스웨덴 남서부 도시 헬싱보리에서 연이어 심각하게 훼손된 사체들이 발견됩니다. 경찰은 범죄 현장에 남겨진 사진을 통해 피해자들이 학교 동창임을 알게 됩니다. 스톡홀름 범죄수사국에서 해고되듯 쫓겨나 고향인 헬싱보리로 돌아온 파비안 리스크가 이 사건 수사에 합류하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피해자들과 동창이었고, 살해된 자들이 학창 시절 지독한 학폭 가해자였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팀워크를 강조하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파비안은 당시 두 사람의 먹잇감이었던 자가 범인이란 심증을 갖고 단독행동에 나섭니다. 하지만 일은 엉망진창으로 꼬이고 파비안은 오히려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나름 북유럽 스릴러를 무척 좋아한다고 자평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높지 못한 타율(?) 때문에 조금은 피로도를 느끼는 중이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벽돌에 가까운 분량을 자랑하는 작품은 일단 피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곤 했는데, 이 작품은 몇몇 이유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한 경우입니다. 우선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헨닝 망켈의 ‘얼굴 없는 살인자’와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기 때문인데, 같은 스웨덴 작품인데다 번역 제목까지 똑같고 심지어 두 작품 모두 시리즈의 포문을 연 첫 작품입니다. (물론 원제는 다릅니다. 헨닝 망켈의 ‘Mördare utan ansikte’는 직역해도 ‘얼굴 없는 살인자’인데 반해, 스테판 안헴의 ‘Offer Utan Ansikte’로 직역하면 ‘얼굴 없는 희생자’쯤이 됩니다.)
주인공 캐릭터도 비슷해서 둘 다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베테랑들이며, 주 활동지역 역시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주로 엇비슷합니다. 또 아내와 자식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마음고생을 한다는 점까지도 닮았습니다. 다만, 헨닝 망켈의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가 ‘배 나온 아저씨’ 스타일에 어딘가 살짝 허술해 보인다면, 스테판 안헴의 주인공 파비안 리스크는 10년은 젊어 보이는 외모에 마르고 민첩한 몸을 지녀 외모만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긴 합니다.
서론이 좀 길어졌지만 이런 이유로 648페이지라는 부담스런 분량에도 불구하고 스테판 안헴의 ‘얼굴 없는 살인자’를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별 3개밖에 줄 수 없을 정도로 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범죄의 잔혹성이라든가 주인공 캐릭터만 놓고 보면 개인적인 취향에 딱 들어맞는 편이지만, 수시로 페이지 수를 들여다보게 할 정도로 장황하고 산만한 전개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0페이지 정도까지만 해도 기대감에 들뜨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점점 핵심보다는 곁가지 위주로 흐르기 시작했고,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그에 비례해서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거의 주인공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는 ‘불행한 가족사’는 너무 뻔해서 지루하게 읽혔고, 결국 막판에 가족이 사건에 휘말리겠구나, 라는 예상까지 쉽게 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인접한 덴마크의 경찰을 끌어들인 것 자체는 괜찮았지만 ‘그들만의 사건’이 적잖이 분량을 차지하면서 오히려 메인 스토리에 방해가 되기만 했습니다. 사소한 예지만 큰 역할도 없는 단역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위해 몇 페이지씩 할애한 대목에선 그냥 통째로 넘긴 적도 있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들을 겪을 때마다 자꾸만 페이지 수를 보게 되곤 했는데, 언제 648페이지까지 가나, 싶은 생각에 한숨만 나온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장 아쉬웠던 건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입니다. 손, 발, 혀, 눈, 자궁 등 수많은 동창생의 몸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범인 치곤 “그래서 죽였다고?”라는 의문을 자아낼 정도로 다소 어이없는 동기를 밝히는데, 이 대목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예전에 벽돌 책도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던 시절엔 스티그 라르손이나 요 네스뵈의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스릴러도 하루 안에 읽어내곤 했지만, 요즘은 조급증이 생긴 탓인지 일단 600페이지가 넘어간다 싶으면 읽으면서도 마음이 바빠집니다. 그래도 이야기가 흐트러지지 않고 밀도 있게 쭉 달리면 어떻게든 읽긴 하지만, 스테판 안헴의 ‘얼굴 없는 살인자’는 스릴러 자체보다도 곁가지들 때문에 지치고 만 작품입니다. 주인공, 조연, 사건 모두 흥미로워서 조금만 슬림했더라면 좋은 인상은 물론 후속작까지 기대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으로선 비슷한 분량(632페이지)의 시리즈 2편 ‘편지의 심판’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인터넷서점의 독자 서평은 대부분 호평 일색입니다. 제 서평이 극히 예외적인 ‘소수 의견’일 수 있으니 다른 독자들의 호평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