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식범 케이스릴러
노효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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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식범은 고즈넉이엔티의 케이스릴러27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11번째 만난 작품인데, 다소 편차는 있더라도 그동안 읽은 작품들 모두 개성과 매력을 갖춘 수작들이긴 했지만, ‘면식범은 탄탄한 이야기와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가 잘 조합된 명품으로 그 어느 케이스릴러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전직 경찰이자 지금은 유명한 범죄 심리학자인 도경수는 어느 날 갑작스런 교통사고 후 누군가에게 납치됩니다. 감금된 채 자신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들을 떠올리던 도경수는 얼마 후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납치당한 이유가 6년 전 한 소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가족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들어간 페이스 스릴러라는 표현 때문에 자칫 이 작품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페이스 스릴러가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건 맞지만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등장인물 모두의 심장을 한없는 무게로, 그것도 영원히 짓누를 죄와 벌에 관한 서사라는 게 더 정확한 설명입니다.

6년 전, 한 소녀의 죽음에서 시작된 두 가족의 비극은 오해와 은폐와 복수와 절망이라는 어둡고 긴 여정을 거쳐 마지막 페이지에서 거대한 마침표를 찍게 되지만, 실은 훨씬 더 고통스러울 남은 날들을 위한 쉼표일 뿐 진짜 마침표는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족을 지키려던 자에게도,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분노를 복수로 어루만지려던 자에게도 해피엔딩이란 어울리지 않으며, 더 무겁고 가혹한 굴레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여정 속에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페이스 스릴러도 포함되고, “누가? ? 어떻게?”라는 범인 찾기 미스터리도 끼어들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심리 이기심, 분노, 복수심, 두려움, 욕망 등 에 좀더 관심을 두고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비극에 말려든 모든 인물은 6년 전 사건에 대해 각자만의 처지와 감정을 끌어안고 있지만, 그것들은 이야기 속 인물 그 누구에게든 쉽게 털어놓을 수도, 이해받거나 용서받을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괴로움과 고통은 독자를 향해 발산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독자는 이야기 못잖게 각각의 인물의 처지와 감정에 더욱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다소 거친 면도 있고, 시비를 걸자고 작정하면 몇몇 흠결을 지적할 수도 있지만 면식범은 그것들을 다 덮을 만큼의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을 보면 독자마다 평가가 엇갈리는 걸 알 수 있는데, 그중엔 단지 이 작품이 한국산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이유만으로 편견 섞인 시선을 드러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준 이하의 작품들을 무더기로 쏟아내거나 잔인하기만 할뿐 온통 억지로 가득 찬 일부 외국 작품들에 비하면 면식범은 충분히 호평 받고도 남을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언급된 작가의 전작 찾고 싶다를 당장 읽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동시에 이 작가가 앞으로 잘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 역시 그에 못잖게 간절합니다. 지금은 톱클래스에 오른 도진기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 여러 신인들의 매력적인 데뷔작처럼 면식범역시 그만한 인상과 여운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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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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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올해(2021) 꽤 눈여겨봤을 작가 중 한 명이 아시자와 요입니다. 이전까지 한국에 소개된 작품이 아마리 종활 사진관’(2017, 엘리) 단 한 편이었는데, “영정사진을 둘러싼 네 가족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린 연작 미스터리라서 그런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무려 네 편의 작품을 한국에 출간하며 슬슬 화제성과 유명세에 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2)을 시작으로 학교폭력과 복수의 문제를 다룬 죄의 여백’(4), 일상에 깃든 농도 짙은 공포를 소재로 한 단편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11)까지 매번 색다른 장르와 소재를 능숙하게 다루는 그의 필력은 왜 이제야 그의 작품들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작품보다 한 달 앞선 10월에 출간된 나의 신은 아직 못 읽었습니다.)

죄의 여백’(일본 출간 2012)으로 데뷔한 이래 가장 최근작인 悪手’(일본 출간 20215)에 이르기까지 모두 13편의 장단편을 출간했으니 1년에 한 편 이상씩 꾸준히 활동한 셈인데,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 8편이나 된다는 것도 잘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덕분에 그만큼 아시자와 요와 자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기대감도 갖게 됐으니 어쩌면 다행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표제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를 비롯하여 모두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장르와 소재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라면 (그것이 사건이든 사고든)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서늘한 공포가 깃들어있다는 점과 주인공들의 동기에 대한 독자의 예측을 뒤집어버리는 매력적인 막판 반전입니다. 특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지만 실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을 맛보게 만드는 독특한 반전은 (출판사 소개글대로) 단정하고 서늘한 아시자와 요의 필치 덕분에 더욱 큰 힘을 발산합니다.

 

18년 전 살인자가 된 외할머니의 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사소한 실수를 덮기 위해 벌인 행동이 야기한 돌이킬 수 없는 파국(‘목격자는 없었다’), 9살 손녀에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강요해온 할머니가 마주한 예상 밖의 종말(‘고마워, 할머니’), 세 살 딸을 학대한 끝에 죽음으로 내몬 여자의 이야기(‘언니처럼’), 그리고 지옥도나 다름없는 그로테스크한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던 한 여류 화가의 비극(‘그림 속의 남자’) 등 모두 개성 강한 색채를 지녔지만 어딘가 하나의 실로 꿰어질 듯한 기묘한 이야기들이 수록돼있습니다.

형식 역시 다양해서 작은 단서에서 출발하여 진실을 찾아내는 미스터리도 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 속의 공포를 다룬 작품도 있고, 그 외에 서술트릭이나 그로테스크 호러 등 말 그대로 팔색조 같은 재미를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단편집입니다.

 

대체로 장편을 선호하는 취향이지만 아시자와 요는 단편 혹은 연작단편을 제대로 맛깔나게 요리할 줄 아는 작가라서 앞으로도 그의 단편이라면 고민 없이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우선은 올해 출간된 나의 신을 먼저 읽을 예정인데, 내년에도 아시자와 요의 작품들을 여러 편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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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홈즈
전건우 지음 / 몽실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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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선주공아파트에 사는 네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주부탐정단. 수개월 간 곳곳에서 출몰한 성추행범 쥐방울을 잡기 위해 결성됐지만, 아파트 쓰레기통에서 여성의 잘린 손목과 함께 2년 간 경기도에서 일어난 미제 연쇄살인사건(일명 스마일 맨 사건)의 상징이 발견되면서 주부탐정단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쥐방울의 범행이 대범해졌을 수도 있고, 연쇄살인마 스마일 맨이 활동 영역을 서울로 옮겼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주부탐정단은 본격적으로 살인범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탐정단의 막내가 한밤중에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단순가출로 치부하는 경찰에게 격분한 주부탐정단은 위험천만한 단독수사를 결심합니다.

 

경찰들이 잘하는 것과 주부들이 잘하는 것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냥 지나쳤던 중요한 장면을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 (p113)

 

고백하자면 할머니 탐정’, ‘학생 탐정’, ‘바리스타 탐정’, ‘어린이 탐정등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사건 자체도 덜 독하고, 해법 역시 주인공 캐릭터에 맞춰 아마추어 냄새를 풍기거나 감동 코드가 강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맥주집 가나리야의 주방장 구도가 손님들의 미스터리한 사연을 듣는 단편집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같은 예외가 있기도 합니다.) 2년 전에 출간된 살롱 드 홈즈를 외면해온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데, 이 작품이 프랑스에 진출했다는 소식에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라는 호기심에 뒤늦게 찾아보게 됐습니다.

 

네 명의 주부탐정단의 중심인물은 30대 후반의 주부 공미리입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탐정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그녀는 지금은 우울증에 걸린 초라한 중년이 됐지만 여전히 탐정에의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또래이자 세 자리 수에 육박하는 몸무게를 지닌 추경자, 장차 프랑스 풍 카페를 꿈꾸는 광선슈퍼의 주인 60대 전지현, 대학 중퇴 후 친정에 살며 아기를 키우는 싱글맘 박소희가 주부탐정단의 멤버로 가세합니다. 이들은 주부들이 잘하는 것의 힘을 발휘하며 작은 단서에서부터 차곡차곡 미스터리를 풀어나갑니다.

 

초반에 바바리맨 성추행범 쥐방울을 잡는 것이 목표일 때만 해도 역시나...”라는 편견을 가졌던 게 사실인데, 범인이 화자인 챕터를 읽고 그녀들이 마주할 사건의 규모와 잔혹성을 깨달은 뒤론 어지간한 미스터리를 읽을 때처럼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는 평범한 이들이 비범한 사건과 만나 아등바등하는 이야기라고 소박하게 표현했지만, 주부탐정단이 마주한 사건은 잔혹한 소시오패스 살인극입니다. 언뜻 영화 세븐과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초반에 도쿄의 공원 쓰레기통에서 여자의 오른팔과 핸드백이 발견됩니다.)이 연상되는 연쇄살인은 치졸하고 무능한 남편들에게 무시당하고 사회의 주류에서 내쳐진 주부탐정단 멤버들에게 그저 비범한 사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하고 끔찍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부탐정단이 유명한 주인공들처럼 빛나는 추리와 화려한 액션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주부의 눈에만 보이는 사소하지만 명확한 단서들을 포착해내고, ‘함께 있으면 든든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자들만의 소속감과 유대감과 우정을 통해 경찰 못잖은 협업을 이뤄내며, 순수한 분노의 에너지를 앞세워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아줌마 스타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부 캐릭터 때문에 한계가 분명했던 건 사실입니다. 경찰이 놓친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긴 했지만 그건 주부탐정단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주인공들을 위해 태만하거나 모자라게 설정된 경찰 캐릭터 덕분입니다. 리더인 공미리의 추리는 분명 반짝반짝 빛나긴 했지만 (리얼리티 때문인지) 역시 아마추어 이상의 내공을 발휘하진 못했고, 잔인한데다 용의주도해 보인 범인이 다소 허술한 최후를 보인 점도 중반까지 잘 유지돼온 긴장감을 흐트러뜨린 요인입니다.

 

작은 규모의 광선주공아파트에서 또다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것 같진 않기에 이들의 활약을 다시 보기는 어렵겠지만 어쩌면 작가는 다른 동네를 설정해서라도 혹은 주인공 격인 공미리를 이사를 시켜서라도 제2의 주부탐정단을 조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반에 인용한 문장처럼 주부들이 잘하는 것은 경찰 혹은 명탐정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설정이기에 실제로 제2의 주부탐정단이 결성된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응원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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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사쿠라이 미나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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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 업체 디자이너 스즈쿠라 마나는 지난 5년 동안 현실이 될까 두려워하던 악몽과 마주치고 맙니다. 마나와 결혼했던 남자, 마나를 지독하게 폭행했던 남자, 그리고 마나가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인 남자 스즈쿠라 카즈키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오랜 치료 끝에 겨우 살아났지만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고 털어놓는 카즈키는 과거 잔인하게 주먹을 휘두르던 그 카즈키가 아니었습니다. 선하고 다정한데다 과거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듣곤 머리 숙여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결국 그날부터 마나는 카즈키와 불안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카즈키가 살아 돌아온 것 자체도 믿을 수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의 기억상실이 언제 해제될지 알 수 없어 두려웠고, 만일 다른 누군가가 죽은 카즈키 행세를 하는 거라면 그 목적은 과거 마나의 살인을 밝혀내려는 게 분명하므로 그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입니다.

 

자신이 죽인 남편 카즈키가 살아 돌아온 상황은 마나에겐 그야말로 외통수에 다름 아닙니다. 진짜 카즈키라면 언젠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때 폭력 정도가 아니라 마나를 죽이려 들 게 분명했고, 누군가 카즈키 행세를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마나의 살인을 밝혀낸다면 지난 5년간 악착같이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물거품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독자 역시 마나의 혼란과 공포를 고스란히 머릿속에 새기며 과연 그녀 앞에 나타난 카즈키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카즈키의 짐을 뒤지고 몰래 미행하는 마나를 통해, 또 그녀가 목격하는 수상쩍은 카즈키의 행보를 통해, 그리고 중간중간 끼어드는 과거의 회상 장면들을 통해 작가는 애매모호한 힌트들을 주긴 하지만 독자로선 좀처럼 꼬리를 잡는 게 쉽진 않습니다. 다만, 중반도 채 되기 전에 명백하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곳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와의 흥미진진한 두뇌 싸움을 벌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막장 드라마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고, 독특한 제목 뒤에 숨겨진 미스터리가 매력적이라고 호평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두 의견의 중간쯤 정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3.5개라는 야박한 평가에 그친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부터 통 이해하기 힘든 전개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2/3쯤 된 지점에서 마나는 자신을 옥죄던 궁금증을 풀 확실한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사태를 바로잡겠다는 듯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던 마나는 오히려 그때부터 이해하기 힘든 수동적인 태도만 보이며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을 언급할 순 없지만, 작가는 한순간에 독자와의 게임을 불공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물어야 할 걸 묻지 않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을 제치고 갑자기 주도권을 틀어쥔 엉뚱한 인물,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혼자만 앞서 달려가는 작가. 독자로선 주인공이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건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이야기 따라잡기에 급급해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실이 훅 공개되면서 그제야 독자는 주인공의 입에 재갈이 물린 이유를 알게 되는데, 조금도 납득하기 힘든 전개였던 것은 물론 미스터리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무시한 불공정한 게임이 돼버렸다는 생각입니다. 클라이맥스를 위해 (진실에 근접한) 주인공의 눈과 입을 틀어막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걸까요?

 

막장극 같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나름 흥미롭게 미스터리를 전개시켰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 튀어나온 작가의 반칙 때문에 꽤 공을 들인 막판의 반전과 엔딩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독특한 제목 때문에 기대를 많이 했지만 그 이상의 아쉬움만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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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의 일기
엘리 그리피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나무옆의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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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부 서식스의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빅토리아 시대 고딕소설 작가 R. M. 홀랜드의 전기를 집필 중인 40대 여성 클레어 캐시디는 어느 날 친한 동료 교사 엘라가 무참하게 살해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담당형사인 하빈더 카우어에게 조사를 받은 클레어는 얼마 전 교사 연수에서 엘라와 충돌했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일기장을 폈다가 깜짝 놀랍니다. 누군가 그날의 일기 밑에 소름 끼치는 메모를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메모의 필체가 살해된 엘라 곁에서 발견된 (범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포스트잇의 필체와 똑같다는 점입니다. 이후 연이어 클레어 주위의 인물들이 공격을 받자 하빈더는 안 그래도 못 마땅히 여겼던 클레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정통 영국 미스터리와 고딕 스릴러의 조합은 개인적으론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장르입니다. 제목과 표지 역시 개인적인 취향과 거리가 먼 이 작품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100페이지까지만 가보자, 라며 어렵게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젊은 시절 읽은 단편 낯선 사람에 반한 뒤 R. M. 홀랜드의 일생과 비극적인 가족사에 관심을 갖게 된 클레어는 현재 그의 전기를 집필중입니다. 마침 그녀가 근무하는 고등학교 탈가스 하이의 별관이 과거 그의 저택이었고, 그곳엔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보존돼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유령 목격담이 끊이지 않았던 그 건물은 클레어에겐 마치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그야말로 고딕의 정취가 클레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클레어 주위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은 명백히 현실의 일이지만 왠지 R. M. 홀랜드의 단편 낯선 사람을 연상시키는 괴이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살자 곁에서 발견된 포스트잇에 적힌 지옥은 비었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의 유명한 구절이자 동시에 R. M. 홀랜드의 단편 낯선 사람의 중요한 인용구이기도 합니다. 또 사후에 새겨진 시신의 양손바닥의 자상은 마치 성흔(聖痕)과도 같아 보여서 수사진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사건의 중심부에 놓인 클레어, 인도계 영국인인 담당형사 하빈더, 그리고 클레어의 15살 딸 조지아 등 세 여성이 한 챕터씩 번갈아 화자를 맡습니다. 피해자인 듯 가해자인 듯 애매해 보이는 클레어는 사건 정보 전달과 함께 고딕 스릴러로서의 이 작품의 정체성을 독자에게 수시로 각인시키는 인물입니다. 반면, 첫눈에 클레어가 못마땅해진 하빈더는 일련의 사건들이 클레어의 일기장과 밀접하게 연관된 게 확실해지자 다소 편견에 사로잡힌 수사를 벌이지만 끝내 미스터리의 마지막 퍼즐을 풀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습니다. 비밀리에 미스터리 작가의 꿈을 키우던 조지아는 본의 아니게 엄마 클레어가 연루된 사건에 휘말리지만 침착하게 대처하며 자신만의 성장을 이루는 인물입니다.

 

(애초 ‘100페이지 계획을 넘어선 지점이지만) 1/3쯤 됐을 때 중도포기를 진지하게 고민한 게 사실입니다. 우려했던 대로 정통 영국 미스터리와 고딕 스릴러의 조합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고, R. M. 홀랜드가 맡은 과거의 고딕과 영어교사 클레어가 맡은 현재의 고딕이라는 투 트랙 설계는 어딘가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특히 이런저런 사족들(고딕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묘사들, 군살처럼 느껴진 가족-과거-주변 인물들에 대한 부연설명들)이 차지한 과도한 분량은 지루함만 더했을 뿐 조금도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욱 아쉬웠던 건 작가가 나름 열심히 구축한 영국 미스터리+고딕 스릴러라는 밑바탕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던 범인의 정체와 동기입니다. 따지고 보면 굳이 빅토리아 시대 고딕소설가를 소환할 이유도 없었고, 클레어로 하여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딕 분위기를 고조시킬 필요도 없어 보였습니다. 외피는 거대했지만 실상 그 안의 알맹이는 너무 빈약했다고 할까요? 다른 독자들의 서평에서도 이런 지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비혼 여성형사, 이민자, 성 소수자로 설정된 형사 하빈더 카우어를 주인공으로 한 후속작이 이미 출간됐다고 합니다. ‘하빈더 카우어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고딕 스릴러를 추구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그렇다면 독특한 매력을 지닌 형사 하빈더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한국에선 아직 낯설지만 다수의 시리즈를 출간했을 정도로 꽤 깊은 내공을 지닌 작가인 만큼 고딕이 아닌 하빈더 카우어 시리즈라면 한번쯤은 재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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