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버린 날 버티고 시리즈
하비에르 카스티요 지음, 김유경 옮김 / 오픈하우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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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한낮, 보스턴 시내에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를 든 벌거벗은 남자가 나타납니다. 체포된 이후 경찰은 물론 정신의학센터 원장 젠킨스에게도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던 그는 조사관으로 투입된 FBI 프로파일러 스텔라 하이든이 나타나자 오직 그녀와만 이야기하겠다며 입을 엽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 또 한 개의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가 발견되면서 젠킨스 원장과 스텔라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두 사람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미소만 지으며 스텔라와의 1:1 면담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는 스텔라에게 자신의 이름이 제이컵이며, 이 사건은 17년 전 솔트레이크에서 벌어진 기괴한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제목이나 간략한 줄거리만 봐도 평범한 미스터리나 스릴러가 아니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시간적 배경 17년 전인 1996년의 솔트레이크, 2013년 크리스마스이브 직전과 직후 속에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다 사건 역시 꽤 복잡하게 꼬여 있고, 사방팔방에 스포일러 지뢰가 묻혀있어서 큰 얼개를 소개하는 것조차 난감한 일입니다.

 

17년 전 솔트레이크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가족휴가를 왔다가 자기 이름과 기괴한 별이 그려진 쪽지를 발견한 뒤 치명적인 위기에 빠진 소녀, 그 소녀와 서로 한눈에 반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만 소년, 딸에게 닥친 비극 때문에 자책을 거듭하다가 붕괴하고만 소녀의 가족, 그리고 출산 이틀 만에 흔적도 없이 아내가 사라지자 패닉에 빠졌던 한 남자.

이들은 17년이 지난 2013, 다시금 과거의 악몽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됩니다. 그중에는 그 긴 시간을 오로지 가느다란 희망 하나만으로 버티며 폐인이 되다시피 한 사람도 있고, 가까스로 그 악몽에서 벗어난 듯 했지만 더더욱 큰 참극에 휘말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건 바로 보스턴 시내에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를 들고 나타난 의문의 남자 제이컵입니다.

 

사건 자체도 기괴한데다 체포된 남자 제이컵은 시종 정상인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이야기의 흐름이 단순한 범인 찾기가 아니라는 것은 금세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뭔가 형이상학적이거나 정신적 문제, 혹은 호러나 오컬트의 냄새가 폴폴 풍기긴 하지만 어쨌든 초반에는 끔찍한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푸는 쪽으로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그러다가 중반부쯤 이 작품을 특징짓는 화두인 운명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 비로소 장르적 특징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운명이란 건 팩트 중심의 살인미스터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공포와 불안감을 앞세운 심리스릴러와는 그나마 좀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해도 역시 잘 어울리는 화두는 아닙니다. 물론 이 작품 곳곳에 살인미스터리와 심리스릴러가 뒤섞여있긴 하지만 운명이 주된 화두인 탓에 아무래도 서스펜스, 그것도 특정 영역의 서스펜스로 읽히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갈릴 거란 생각입니다.

 

제 경우엔, 사건 자체도 흥미롭고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중반부쯤 진실의 일부 누가, 왜 젊은 여자의 머리를 잘랐는가? - 가 공개될 무렵 한 인물이 내뱉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대사가 100% 공감이 될 정도로 개인적으론 그 지점부터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작품의 장르가 확연해지자 마음의 벽 같은 게 생겼다고 할까요? 그런 탓에 그 이후 작가가 조금씩 풀어놓는 진실의 조각들이나 등장인물들의 언행들이 낯설거나 억지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그 불편함은 다 읽은 뒤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서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적잖이 열광할 여지가 충분한 것 역시 사실이기도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이 작품이 꽤 큰 성공을 거뒀고 후속작도 나왔다고 하는데, 막판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던진 떡밥이 후속작을 위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작가라서 찾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심리스릴러나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신선하고 특별한 재미를 줄 수도 있는 작품이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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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소녀 - Novel Engine POP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정은주 옮김, 치런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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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세이보 여고 경영자의 딸이자 뛰어난 미모와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3학년생 시라이시 이츠미가 학교 화단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원인은 추락사. 사인도 범인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츠미가 이끌던 문학동아리 멤버 6명은 학기말 정기모임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낭독회로 대체합니다. ‘아름다운 소녀 이츠미의 죽음을 테마로 각자 단편소설을 쓴 뒤 직접 발표하기로 한 것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오랜 전통대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갖고 온 재료 외엔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암흑전골을 나눠 먹는 가운데 멤버들은 세이보 여고의 비너스이츠미와 자신이 맺었던 빛나던 인연과 아름다운 추억담을 그린 소설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는 자신만의 추리로 장식합니다. 이츠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지목한다는 뜻인데, 문제는 지목된 범인이 모두 제각각이란 점입니다.

 

고백하자면,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라노벨로 분류된 작품들은 미스터리 서사가 담겨있더라도 조금의 미련도 없이 외면해온 게 사실입니다. 아마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암흑소녀역시 영원히 제 관심권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었을 텐데, 다 읽은 후의 솔직한 소감은 그동안 라노벨이란 포장 때문에 놓친 숨은 진주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제 스스로도 예상 못한 탄식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 면에서는 별 5개도 부족한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미스터리나 반전의 힘이 허술하거나 미약한 것도 아닙니다. 흥미로운 미스터리가 포함된 단편집 결혼기담을 포함하여 한국에 소개된 아키요시 리카코의 모든 작품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론 그녀의 최고작인 성모다음으로 추천할 만한, 재미와 미스터리와 반전이 잘 믹스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폐쇄적이고 엄격하지만 동시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미션계 여고라는 배경, 의사를 꿈꾸던 재원이자 극강의 외모와 카리스마로 학교 구성원들의 경외심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던 여학생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문학동아리 멤버들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낭독회, 그것도 마치 관련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명탐정이 최종 결과를 발표하듯 각자 집필한 소설을 통해 범인을 지목하는 긴장감 넘치는 설정 등 라노벨과 미스터리의 풍성한 재료들이 흥미진진하게 배치돼있습니다.

소설이 발표될 때마다 앞서 발표된 소설의 추리를 뒤집는 진술이 등장하는데, 그 때문에 독자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누가 이츠미를 죽인 범인인지 마지막 소설이 발표될 때까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엇이 들어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암흑전골을 떠먹으며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낭독을 듣는다는 설정은 거듭 용의자를 뒤바꿔가며 독자에게 스릴 넘치는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인생의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시절, 누구보다도 정점에 서고 싶었던, 그래서 모두를 조연으로 내치고 홀로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10대 소녀들의 예민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과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저지른 치명적인 비밀과 거짓말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멤버들의 단편소설은 다 읽고 되돌아 생각해보면 지독한 악취만 느껴질 정도로 악의 그 자체에 가까워서 새삼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짜릿한 건 반전의 여왕이란 별명답게 작가가 막판에 터뜨리는 연이은 반전 폭탄들입니다. “여고생들끼리 주고받는 미스터리에 뭐가 있겠어?”라는 라노벨 차별자의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반전 폭탄들은 폼만 그럴듯하게 잡아놓고 억지만 가득 찬 결말을 내세운 일부 함량 부족 미스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성모때문에 아키요시 리카코의 팬이 된 독자들도 아마 암흑소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성모이후의 미스터리들이 (기대치가 워낙 높아서 그랬겠지만) 고만고만했던데 반해, ‘암흑소녀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필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반전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별명이 단지 성모한 편 때문에 얻어진 게 아니란 걸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지금도 할인가 9천원에 판매 중인 암흑소녀는 충분히 제값을 하고도 남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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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후루타 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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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오 출판사의 에이스 편집자 카에데는 어느 날 딸의 옷을 직접 제작하는 포스팅을 올려 인기를 얻고 있는 딸바보 아빠 소라파파의 블로그에 시니컬한 댓글을 남깁니다. “당신은 정말 아이를 사랑하나요?” 그런데 그날 이후 자신의 과거의 비밀이 담긴 일기장이 인터넷에 공개되고 댓글을 통해 지독한 공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한편 어린 딸을 본가에 맡긴 채 홀로 도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다나시마는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와 5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인 아내 미유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의 유일한 행복은 딸을 위해 옷을 직접 만드는 것뿐. 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자신의 블로그를 찾아와 집요한 비난 댓글을 다는 한 여자 때문에 격분하고 맙니다. 딸에 대한 사랑을 이기심으로 왜곡하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여긴 다나시마는 여자를 파멸에 몰아넣기로 결심합니다.

 

지금은 친절하고 수더분한 40대 순경 아저씨지만 한때 용의자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자백 전문 가노라 불리며 현경 수사1과에서 맹활약했던 가노 라이타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연작단편집 거짓의 봄’(한국 출간 2021)으로 처음 알게 된 여성콤비 작가 후루타 덴의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고대하고 있던 가노 라이터 시리즈의 장편이 아니라서 아쉬웠지만, 데뷔 후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란 점과 독특한 표지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다양한 코드들이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막판에 거듭된 반전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는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심리스릴러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뒤표지 카피대로) 인터넷과 SNS에서 횡행하는 익명의 악의가 어떤 식으로 파멸적 비극을 만들어내는지를 디테일하게 그린 사회파 장르물의 미덕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막판 반전이 돋보이는 미스터리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론 탐욕스럽게 애정을 갈구하고 상처받을까 봐 두려운 나머지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구는 사람열등감에 사로잡힌 주제에 자존심이 세고 자기애로 똘똘 뭉친 사람’, 그리고 시기, 질투, 미움 같은 악의에 사로잡혀 상대를 망가뜨리려는 사람들이 벌이는 심리스릴러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14살에 겪은 비극으로 인해 어떻게든 과거를 삭제해버리고 싶은 나머지 스스로를 전혀 다른 사람, ,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강한 면모를 가진 사람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었던 카에데는 30대에 이르렀을 때 나름 그 목표를 이뤄냈다고 자부했지만, 사소한 댓글 하나에서 시작된 균열이 점차 사방으로 번지면서 일상을 무너뜨리자 공포에 휩싸입니다.

한편,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정성으로 간병하며 딸을 위해 직접 옷을 만드는 딸바보 다나시마 역시 그 내면에는 복잡다단한 심리가 뒤얽힌 인물입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공무원 일,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교차하는 아내와의 추억, 진짜 사랑인지 자신의 이기심의 산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딸에 대한 감정, 그리고 가족들과의 불화 등 그의 삶에 평온함을 갖다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과거와 혼란스러운 현재 때문에 허우적대다가 무심결에 주고받기 시작한 익명의 악의로 인해 패닉에 빠지는 두 주인공 카에데와 다나시마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읽는 내내 미스터리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심리스릴러의 주인공으로 보였습니다. 또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큰 생채기를 남긴 이들이 가족 혹은 그만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더더욱 그들의 불안정을 부추겼는데, 이 역시 심리스릴러를 더욱 심도 있게 만든 요소입니다. 실제로 주인공들의 책임못잖게 사건의 도화선이 된 건 그들 주변 인물들의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악의였고,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론 모두가 그녀를 죽였다가 이 작품에 더 어울리는 제목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두 주인공이 펼치는 심리스릴러는 이 작품의 매력이자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사건 자체나 팩트보다는 일그러지고 왜곡된, 혹은 타인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심리적 혼란이 과도하게 강조되다 보니 굳이 저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언행들이 자주 반복된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에 기대를 걸었던 독자에겐 두 주인공의 애매모호한 행보 때문에 다소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거짓의 봄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에서 맛볼 수 있었던 후루타 덴의 필력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홀딱 빠질 정도는 아니라도 계속 관심을 갖고 신간소식을 기다리게 만든 건 분명한데, 다음에는 제가 고대하던 가노 라이터 시리즈의 장편(‘犯罪’, 일본 출간 2021)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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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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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인 침입자들에서 범상치 않은 45살 택배기사 행운으로 등장하여 시니컬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전직 용병 K. 과거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그는 한때 전 세계를 함께 누볐던 동료 안나로부터 5년 만에 부탁 전화를 받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K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에 자리한 러시아풍의 저택. 그런데 안나를 만난 K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소박하기만 한 안나의 부탁에 놀랍니다. 자신의 동생 이레네와 조카 마리를 이 이상한 마을에서 데리고 나가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저택의 노부인과 그녀의 망나니 손자들이 벌일 유혈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듣곤 깊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결국 안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K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저택에 머물며 특유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피비린내가 진동할 전쟁을 준비합니다.

 

파괴자들에 앞서 출간된 침입자들을 먼저 읽은 이유는 같은 주인공의 활약을 그린 시리즈물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침입자들에서 그저 묵묵히 노동에만 전념하는 말수 적은 택배기사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지닌 것으로 보였던 그는 단지 자신이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작품 내내 행운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침입자들이 택배기사로 일하며 자신 못잖게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과 인연을 맺고 다양한 사건을 겪는 행운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행운이 과거의 자신, 즉 용병 K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야말로 피와 살이 난무하는 한바탕 전쟁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 그곳에 생뚱맞게 자리 잡은 러시아풍 저택, 그리고 치외법권 지역이라도 되는 듯 마약, 매춘, 도박을 통해 자신들만의 왕국을 이끌고 있는 노부인과 손자들, 거기에다 그들에게 고용된 무자비한 글로벌 용병들.

K가 한바탕 전쟁을 준비하는 공간은 다소 판타지에 가깝게 설정돼있긴 하지만, 그곳을 채우고 있는 인물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자체가 워낙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조금도 위화감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특히 이미 세 차례의 전쟁으로 숱한 피비린내를 겪고도 네 번째 최후의 전쟁을 준비 중인 노부인과 세 손자들 사이의 긴장감과 함께 그들에게 고용된 용병들 사이의 속고 속이는 두뇌싸움, 그리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상을 저지르는 무자비함은 마치 영화로 보는 듯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쉼 없이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K의 본색과 능력을 알아본 노부인과 세 손자들이 어떻게든 K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액을 베팅하거나 협박을 일삼기도 하지만 오로지 K는 안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만 열중할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침입자들에서도 익히 본 적 있는 K만의 특유의 비아냥과 냉소와 썩은 유머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물론 조금의 자비심이나 주저함도 없는 어마어마한 폭력 재능 역시 독자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가 과거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을 박살내고 얻은 별명 아미고 델 디아블로’(악마의 친구)의 진가를 확인시켜주는 흥분지수 만점의 대목들이기도 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대규모 유혈 전쟁도 짜릿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용병들의 잇따른 반전입니다. 그야말로 용병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이 반전들은 자칫 애매한 권선징악으로 끝날 수도 있던 이야기를 묵직하고 비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작인 침입자들의 서평에서 주인공 행운의 입을 빌린 작가의 지적 허영이 과도했다는 쓴소리를 한 적 있는데, 다행히도 파괴자들K에게선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이야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침입자들에서 맛봤던 작가의 필력이 단발성이 아니란 점, 또 그가 오마주를 바친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대가 켄 브루언의 매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저는 켄 브루언의 작품들에게 높은 평점을 주진 못했지만 그의 냉소적이다 못해 신랄한 문장들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작가가 앞으로 K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주인공을 창조하더라도 한국형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신세계를 개척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앞으로도 자신만의 특화된 장르에 더욱 공을 들여주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액션 스릴러 혹은 누아르에 관한 한 뜨거운 피의 김언수, ‘방의강 시리즈의 방진호에 이어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만든 한국 장르물의 기대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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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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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한 장을 넘겼을 때 재미가 없다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장을 넘겼다면 분명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될 거라고 자신한다.”

 

말 그대로 자신감 넘치는 출판사 소개글의 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습니다. 과거를 꽁꽁 숨긴 채 고된 택배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45살 남자 행운이 주인공입니다. 그가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범상치 않은 이력과 함께 심연과도 같은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단 몇 조각의 단서만 주어질 뿐 독자는 그의 본명은 물론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기에 비아냥 가득한 말장난과 썩은 농담으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는 것인지, 또 도대체 어떤 이력을 지녔기에 문()과 무()는 물론 예술과 영화와 팝음악에 이르기까지 가히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끝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행운이 과거의 어느 지점 아마도 그가 백지처럼 지워버리고 싶었던, 하지만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는 떡밥을 남겨놓음으로써 후속작에서 이어질 그의 행보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만 어마어마하게 부풀려놓습니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2021년에 출간된 파괴자들에 관심을 가진 덕분입니다. 소개글을 잠깐 훑어보니 제가 좋아하는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제멋대로 이름 붙이자면 희대의 공처가이자 무적의 살인청부업자 방의강의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쯤 됩니다.)와 닮은꼴처럼 보였고, 알고 보니 주인공 K의 택배기사 시절을 다룬 침입자들이라는 전작이 있다기에 순서대로 읽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추리/미스터리로 분류해놓았지만 실은 스릴러로 분류될 작품입니다. 하지만 하위 장르까지 따지면 딱히 이것이라고 명명하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약간의 액션과 납치극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거친 노동과 중독 수준의 알코올과 장서가 수준의 독서에만 몰두하는 비밀 가득한 한 남자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비밀을 털어놓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맺는 다채로운 관계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음험하기도, 냉소적이기도, 친절하기도, 소심하기도 한 복잡미묘한 행운의 캐릭터 자체는 하드보일드 스릴러와 아주 잘 어울려 보여서 피와 살이 난무하기는커녕 대부분 택배기사의 고달픈 일상으로 채워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행운은 대놓고 철벽을 쳐놓은 45살의 택배기사인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대체로 멀쩡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인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매일 같은 자리에서 멍 때리다가 행운만 나타나면 담배 한 개비를 요구하는 우울증 환자, 경찰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헛소리만 떠벌리는 동네 바보, 난데없이 나타나 행운에게 경제철학 강의를 늘어놓는 노망난 노교수, 은밀한 눈빛으로 그를 유혹하는 게이 바 직원, 빈곤과 가난의 중간에서 삶을 저울질하는 폐지 줍는 소녀가 그들입니다. 가끔 칼을 품은 양복쟁이들도 등장하고, 별 일 아닌 일만 해줘도 거액을 주겠다며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선의의 침입자도 있고 악의를 숨긴 침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행운에게는 그들의 사연과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모두 침입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은 그들의 침입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줍니다. 때론 거칠게 부딪히기도 하지만 때론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그들을 감싸주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택배기사로서 고된 시간들을 보내며 다양한 인연들을 맺었던 행운은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어디론가 떠나려는 모습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립니다. 아마도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그렇게 떠난 행운이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또다시 과거의 K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꽁꽁 감춰진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룰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쩌면 제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가 제대로 터져줄 것 같아 나름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좀 길지만 쓴 소리 한마디만 꼭 하고 싶은데(재미있게 읽고도 별 1개를 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학, 영화, 그림, 사진, 음악, 심지어 경제와 수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묘사되는 행운의 과도한 천재성 때문에 읽는 내내 짜증을 넘어 화가 나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두세 번이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요하듯 반복된 행운의 올 라운드 천재성은 실은 작가의 지적 허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대목부터는 “OOO는 이렇게 말했지.”라는 문장만 보이면 아예 그 문단을 통째로 건너뛰곤 했습니다. 작가 스스로 인정한 켄 브루언과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오마주까지는 괜찮았지만, 적정선을 넘어 잘난 척으로밖에 안 보인 인용들은 오히려 행운의 캐릭터를 훼손시킬 뿐이었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지적 허영을 반복할 생각이라면 그것이 곧 자신의 소설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작가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행운이라면 그런 식으로 잘난 척을 일삼는 인물에게 과연 어떤 냉소 섞인 비아냥을 보낼까, 생각해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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