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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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IT기업 스피라링크스의 신입사원 공채에서 5,000여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 전형까지 살아남은 단 6. 그들은 한 달 후에 열릴 팀 토론을 통해 시너지 효과만 보여준다면 모두 합격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습니다. 일면식도 없던 그들은 열정적인 노력은 물론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품으며 한 달의 시간을 알차게 준비합니다. 하지만 토론 직전 합격자는 단 한 명. 팀 토론을 통해 누구를 합격시킬지 결정할 것.”이라는 날벼락 같은 연락을 받습니다. 한순간에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 아연실색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토론장에서 벌어집니다. 누군가 갖다 놓은 의문의 봉투에 지원자 각각의 치명적인 비밀을 폭로한 고발장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초 누가 합격되더라도 수긍하겠다던 호의적인 분위기는 급변하고 고발장으로 인해 치부가 드러난 인물들은 충격에 얼어붙고 맙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라면 살인이나 납치 등 강력사건과는 거리가 먼 신입사원 공채를 배경으로 한 일상 미스터리로 보여서 읽을지 말지 잠시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일단 50~100페이지 정도까지만 읽어보고 취향과 안 맞으면 덮겠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펼쳤는데, 묘하게 궁금증을 자아내는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들 때문에 단박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이뤄져있는데, 하나는 과연 토론장에 의문의 봉투들을 갖다 놓은 자, 즉 단 하나뿐인 합격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비열하게 경쟁자들의 치부를 폭로한 자는 누구인가를 쫓는 미스터리이고, 또 하나는 한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니, 지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달의 뒷면마냥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 아닌가?”라는 다소 관념적인 주제를 신입사원 선발이라는 통속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그린 사회고발 메시지입니다.

 

1부가 최종 팀 토론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상황과 단 한 명의 합격자가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2부는 그로부터 8년 후 누군가팀 토론 당일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관련자들을 만나 뜻밖의 사실들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1부에서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도 흥미진진하지만, 2부에서 거듭된 반전 끝에 밝혀진 진범의 정체와 그 동기에 대해선 꽤 의외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부터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 “한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 아닌가?” - 라는 주제가 잔잔한 반전과 함께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일상을 함께 하는 가족조차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물며 기껏해야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그저 달의 앞면만 봤을 뿐인 타인끼리 서로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다면 불과 한 달 동안 몇 차례의 회동만을 가졌을 뿐인 6명의 팀 토론 참가자들은 어땠을까요? 또 몇 분에서 몇 십 분에 지나지 않는 면접이란 자리는 얼마나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걸까요? 오류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이 상황들 속에서 누군가 상대방을 잘 알게 됐다.”라고 말한다면, 또는 상대방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잘 알게 됐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오만함 그 자체가 아닐까요?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은 다소 고리타분해보일 수도 있는 이 주제를 흥미로운 미스터리와 잘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강력사건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하기에도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은 미스터리의 미덕은 물론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준 특별한 작품입니다. 독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밍밍하지 않을까, 라는 선입견을 갖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의외의 재미를 만끽할 수도 있는 작품이라 나름 기대를 가져도 괜찮을 거란 생각입니다.

 

재미있는 건 한국에 처음 소개된 아사쿠라 아키나리의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를 읽었을 때도 제 취향과 거리가 먼 초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탓에 100페이지 정도만 읽고 중간에 포기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열었는데, 의외로 눈길을 끄는 이야기에 금세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했습니다.”라는 서평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두 편 모두 설정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솜씨에 홀딱 반했던 것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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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노크
케이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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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초보자, 실패자들이 모인 동네라서 늘 사건과 사고가 끊이질 않았죠. 한마디로 끈적이는 동네예요. 장사 안 되는 식당 주방처럼 찌든 때가 여기저기 붙은 곳이죠. 우울, 슬픔, 비루함, 분노, 모든 것이 뒤섞여 끈적거려요.” (p51)

 

막장과도 같은 동네에 자리 잡은 원룸 건물 3층에는 여섯 명의 여자가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젊은 층인 무속인, 디자이너, 사회복지사, 지적장애인, 액세서리 노점상, 그리고 건물을 관리하는 50대 여성이 그들입니다. 모든 소음이 넘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살지만 그녀들 사이엔 타인의 영역에 절대 무관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녀들은 서로의 삶의 대부분을 눈치 챕니다. 일부러든 아니든 엿봐서 알게 된 것도 있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 때문에 알게 된 것도 있지만, 결코 내색하진 않습니다. 그런 그녀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건 복도에서 발견된 한 남자의 사체입니다. 경찰은 여섯 명의 여성을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벌이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얼마 후 경찰마저 손을 뗀 상태에서 그녀들이 사는 3층에는 더욱 더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독특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작품입니다. 변사(變死) 혹은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이자 생존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의 일그러진 탐욕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지독할 만큼 궁지에 몰린 밑바닥 삶의 피폐함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혹은 현실과 유리된 듯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인 진술서 혹은 녹취기록으로 구성된 1부는 다분히 미스터리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녀들의 진술 내용은 사건에 관한 것보다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 혹은 어딘가 4차원인 듯한 세계관을 토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각자의 독백을 담은 2부는 변사 사건 이후 사뭇 달라진 원룸의 분위기와 함께 여섯 여성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거나 소통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소음조차 차단하지 못하던 얇은 벽이 변사 사건 덕분에 뻥 뚫린 듯 그녀들은 서로를 탐색하거나 호기심을 드러내는데, 문제는 그녀들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온한 기운이 파국 이상의 결말을 예고라도 하듯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눈길을 끈 독특한 설정과 탄탄하면서도 유려한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서사 때문입니다. 앞서 미스터리, 탐욕, 피폐함, 망상과 광기 등 다양한 코드들을 언급했는데, 이 가운데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다 읽은 지금도 명확히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라는 뒤표지의 카피나 망설이면 진다. 한 번에 목덜미를 물고 숨통을 끊어야 한다. 시간을 끌고 미루는 순간 내가 먹잇감이 된다.”라는 본문 속의 강렬한 문장이 이 작품을 대변하는 듯 하지만, 과연 이게 전부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미스터리 혹은 장르물이라 하기엔 사족이 배보다 더 큰 배꼽처럼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청춘들을 그린 사회고발물이라 하기엔 그녀들의 상태가 하나 같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 어떤 독자의 서평대로 마치 악녀선발대회마냥 파국으로 치닫는 클라이맥스에 제대로 이입할 수 없었던 건 그 자체가 현실인지 망상인지, 미스터리인지 광기 서린 쇼인지 애매모호했기 때문인데, 그런 탓에 다 읽고도 한두 줄로 요약이 안 되는 이리저리 뒤엉킨 기분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새로운 시도가 곳곳에서 엿보이긴 했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가 동시상영된 탓에 오히려 그 미덕이 가려진 작품이 됐습니다. 출판사는 홍보글에서 화차미야베 미유키를 언급했는데, 개인적으론 서사 자체가 대중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았고, (설령 그것이 캐릭터 묘사를 위한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부풀려진 사족들은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에 더 가까웠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한 홍보성 멘트로 보였습니다.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였다면 이 작품은 훨씬 더 슬림한 분량 속에 직설적이고 선명한 이야기를 담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악녀선발대회에 좀더 충실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지독히 통속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뭔가 있어 보이게포장하긴 했지만, 그 포장지 때문에 정작 진짜 통속적인 재미가 가려졌다는 느낌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이 작품이 영화화될 때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된다면 저주받은 걸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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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의 살의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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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일본 Q현의 유서 깊은 니레 가문 저택에서 일가족 독살사건이 벌어집니다. 유력한 단서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받은 남자는 살인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행을 인정하고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2008,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가석방으로 세상에 나온 남자는 니레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당시 사건현장에 있었던 한 여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살인범이 아니었지만 범행을 자백했던 이유를 설명하며 뒤늦게나마 진범을 알아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추리소설 마니아인 여자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남자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왔던 여자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가설을 공유하고 진범을 추리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추리가 달아오를수록 두 사람의 가설은 충격적인 내용들로 채워진다는 점, 또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진범 후보로 떠오른다는 점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등장인물 소개사건이 벌어진 현장의 조감도가 맨 앞에 실린 것을 발견하곤 지레 올드한 본격이 아닐까, 선입견을 가졌던 게 사실인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래, 이게 진짜 본격의 맛이지!”라는 감탄이 여러 차례 튀어나올 정도로 흥미진진했기 때문입니다.

2010년 신인상 수상 당시 시마다 소지로부터 들은 격찬 덕분에 추리의 정밀기계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후 열두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이력을 보면 미키 아키코가 이제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을 특별한 별명에 걸맞게 그녀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정교한 설계도 위에 각종 트릭과 거듭되는 반전의 향연을 펼쳐나갑니다. 그것도 두 남녀가 주고받는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인터넷서점에 소개된 목차를 보면 편지를 주고받는 남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지만, 살인사건을 묘사한 첫 챕터의 재미 때문에라도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부적절해서 줄거리 속에 그저 남자’, ‘여자라고만 언급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도 마찬가지입니다.) , 편지의 내용이라든가 그 이후의 전개 역시 거의 모든 것이 스포일러라 서평 쓰기가 무척 난감한 것 역시 사실인데, 뒤집어 얘기하자면 그만큼 트릭과 반전이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고 물샐 틈 없이 설정돼있다는 뜻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인 1960년대, 가부장적이고 독재적인 선대 당주에 의해 장기판 말처럼 휘둘려 애정 하나 없이 가족이 된 인물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질투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그 일그러진 관계는 일가족 독살사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범인이 아님에도 스스로 무기징역수가 된 남자는 42년이 지난 후 진실을 알아내고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하에 수없이 다양한 가설을 세우고 진범을 쫓는 집념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남자와 편지를 주고받는 여자 역시 단순한 추리 파트너가 아니라 40여 년 동안 심중에 지독한 애증을 품어온 인물로 남자에게 복잡다단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미스터리한 캐릭터입니다.

 

두 남녀의 편지가 다섯 차례 오간 후 이야기는 급격한 흐름을 탑니다. 42년 전 사건의 여파는 또다시 끔찍한 비극을 일으켰고, 경찰 수사는 그럴 듯하지만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결론을 내며 종결됩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거듭된 반전을 통해 뒤집히고 또 뒤집히기를 반복합니다. “이게 진짜 본격의 맛이지!”라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온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이 작품의 제목에 들어간 기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게 됩니다.

기만의 살의는 인물이나 사건 모두 굉장히 아날로그적이지만, 빼어난 트릭과 반전의 힘은 올드한 설정 따위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현대적입니다. 속도감 역시 대단해서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만드는데, 문제는 이 속도감에 도취되면 작가가 숨겨놓은 힌트와 단서를 죄다 놓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독자를 안달복달 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미덕이라고 할까요?

 

자극적이지만 허술함 또는 불편함이 더 많이 느껴질 정도로 변형된 형태의 본격을 추구하는 작품들이 적잖은 요즘, 미키 아키코라는 작가를 발견한 건 꽤 행운이란 생각입니다. 60(2007)에 집필을 시작하여 63세에 데뷔작을 내놓았으니 그 자체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후 12편의 작품을 출간한 저력은 일본 미스터리의 탄탄한 토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만드는 사실입니다. ‘기만의 살의가 호응을 얻는다면 그녀의 작품들을 연이어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머잖아 그 기대가 꼭 실현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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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키스 스토리콜렉터 98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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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피오르 해안에 자리한 소도시 크리스티안순에서 IT기업 인턴사원의 피살체가 발견됩니다. 치밀한 계획과 지독한 증오심이 엿보이는 사건이지만 수사과장 플레밍 토르프는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해 답답할 뿐입니다. 같은 시간, 한때 연적이었지만 여전히 절친으로 지내고 있는 플레밍을 도와 외국인 여성노동자 살인사건을 해결하여 대머리 탐정이란 별명과 유명세까지 얻은 광고 카피라이터 단 소메르달은 딸 라우라의 부탁으로 결혼사기를 당한 50대 여교사 우르술라를 만납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정식 의뢰를 받아 사립탐정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문제는 단이 구해온 결혼사기꾼의 지문이 플레밍이 맡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플레밍은 어쩌면 외국인 여성노동자 살인사건 때처럼 단 때문에 또다시 자신과 경찰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유다의 키스2020년 봄에 출간된 이름 없는 여자들의 뒤를 잇는 단 소메르달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아나 그루에가 덴마크 작가란 점 때문에, 즉 차갑고 잔혹한 북유럽 스릴러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 하나 때문에 선택했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아무 정보도 없이 읽다가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파악한 시점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기대했던 북유럽 스릴러의 톤과는 전혀 다른 코지 미스터리가 전개됐기 때문입니다.

단과 플레밍은 오랜 절친이지만 단의 아내 마리아네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플레밍의 여친이었고, 이 사실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둘 사이에 앙금 아닌 앙금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플레밍이 마리아네의 뺨에 키스를 할 때면 단의 혈압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물론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살인사건을 놓고 협업과 갈등을 벌이며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이 시리즈의 핵심입니다.

 

이름 없는 여자들에서 두 사람은 팽팽한 갈등 끝에 각자 수사를 진행한 뒤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와 추리를 공유하기로 타협한 바 있지만, ‘유다의 키스에서는 거의 단이 주도권을 쥔 채 수사과장 플레밍과 경찰을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저돌적인 수사를 펼쳐나갑니다. 살짝 다혈질이지만 연륜을 자랑하는 플레밍은 자칫 사건을 망치고 범인을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 단의 광폭행보에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본업인 광고 카피라이터만큼이나 뛰어난 수사관으로서의 을 지닌 단의 성과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지경을 여러 차례 겪게 됩니다.

 

플레밍이 담당한 살인사건과 단이 조사하는 결혼사기사건이 우연히도 지문이라는 접점을 갖게 되면서 이야기는 코지 미스터리를 벗어나 심각한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단이 쫓는 결혼사기꾼의 행각은 피해 여성이 한둘이 아님이 밝혀지고 그 수법도 지능적이고 정교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단순사기로 볼 수 없는 중대범죄로 규정됩니다. 또 결혼사기꾼과 살해된 IT기업 인턴사원의 배경에 엄격한 규율을 지닌 종교단체가 있음을 알아낸 단과 플레밍은 애초 예상과 달리 사건이 꽤 복잡하게 꼬여있으며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연루된 사실을 깨닫습니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 단의 공명심과 이기심때문입니다. 직접 찾아낸 단서와 정보가 아깝기도 하지만 처음 정식으로 의뢰받은 내 사건이란 인식 탓에 단은 어떻게든 경찰을 배제하고 자신이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은 나머지 무리한 행동을 반복합니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호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수사를 망칠 수도 있는 행보를 멈추지 않는 단의 모습은 때론 민폐 캐릭터로 보일 정도로 불편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이름 없는 여자들과 달리 사건을 해결한 단에게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었는데,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의 공명심과 이기심때문에 비호감의 인상이 강하게 남고 말았습니다. 또 아마추어인 단의 수사에 행운이 과도하게 많이 따른 점과 막판에 밝혀진 결혼사기범의 범행 동기가 다소 억지스럽게 설명된 점 역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들이라 별점을 삭감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 시리즈가 7편이나 출간됐고 TV시리즈로 제작되어 세 번째 시즌을 앞둔 점만 봐도 캐릭터와 스토리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데, ‘유다의 키스는 코지 미스터리의 매력과 스릴러의 미덕이 잘 믹스된 서사도 만족스러웠고, 매끄러운 전개와 간결하고 생기 넘치는 문장들도 전작 못잖게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앞서 언급한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단 소메르달 시리즈를 한국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유일한 바람이라면 부디 단이 더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민폐까지 끼치며 독주하는 일만은 자제해줬으면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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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의 사육사
김남겸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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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표지에 실린 카피만 봐도 이 작품이 사적 복수를 다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소재지만 이제 더는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래서인지 엇비슷한 전개 혹은 억지스러운 설정에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끄는 제목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던 건데, 결론부터 말하면 과연 이런 사적 복수를 계획할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물과 설정 모두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줄거리를 거의 공개하지 않은 출판사의 간략한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요점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상식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이 택한 복수의 방법은 상대방에게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하고 잘만 다룬다면 새로운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읽는 내내 불편함과 반발심만 들었던 건 그 어디에서도 그럴 듯하다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 애초의 사건은 충분히 비극적이긴 했지만 과연 이런 식의 극단적인 복수를 계획하게 만들 만큼 참혹하고 잔인했는가? 설령 그렇다 해도 복수 가담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과연 적절하고 치명적인가? , 그 방법이 상대방에게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복수 가담자들의 목표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그 목표 자체가 과연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No”입니다. 복수 가담자들이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입은 상처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이후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한 그들의 행보, 즉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을 연구하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복수를 계획하는 과정은 전혀 상식적이지도 않고 납득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복수는 오히려 가담자들에게 더 큰 상처만 남길 뿐 정작 가해자가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겪을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가담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도 없었고, 그 방법조차 억지스러웠던 탓에 이들의 사적 복수 이야기는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졌을 뿐입니다.

 

앞서 얼마든지 가능하고 잘만 다룬다면 새로운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라고 언급했듯 설정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독자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하기에는 인물도, 사건도, 복수의 방법도 허술하거나 억지스러웠고, 또 문장과 구성 등 전반적인 필력 역시 부족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적 복수 이야기를 좋아해서 기대감이 높았던 탓에 조금은 신랄할 혹평이 되고 말았는데, 많은 작가들이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댄 소재인 만큼 사적 복수를 구상하는 작가라면 좀더 치열한 고민과 정교한 설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독자의 고언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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