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통행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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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을 다룬 미야베 월드 2에는 여러 시리즈와 주인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현재진행형이며 가장 매력적인 건 주머니가게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벌어지는 괴담 들어주기를 그린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입니다.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라는 흑백의 방의 유일한 규칙 덕분에 손님인 화자(話者)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내밀하고 믿기 힘든 괴담을 편한 마음으로 털어놓습니다. 그 괴담들은 때론 안타깝기도, 때론 감동적이기도, 또 때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털어놓음으로써 오랜 시간 가슴 한쪽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바위덩어리를 치워버리거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게 됩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영혼 통행증까지 모두 일곱 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그중 앞의 네 편은 17살 소녀 오치카가 괴담을 듣는 역할을 맡았고, 5편인 금빛 눈의 고양이에서는 미시마야의 차남이자 오치카의 사촌인 도미지로가 함께 괴담을 들었으며, 오치카가 결혼한 뒤인 6눈물점부터는 도미지로가 단독으로 그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눈물점서평에도 썼던 내용이지만 도미지로는 오치카보다 나이는 몇 살 더 많지만 다소 미덥지 못한 인물입니다. 몸도 약하고 심지도 굳건하지 않은데다 밥벌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것 같아 손님들이 털어놓는 괴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눈물점에서 단독 데뷔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도미지로는 아직 초보 티가 여전합니다. 괴담을 들려줄 손님이 등장하면 바짝 긴장하기도 하고, 간혹 앞질러 이야기를 예단하다가 당황하기도 하며, 손님이 돌아간 뒤에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하지만 약간이긴 해도 도미지로가 분명히 성장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더는 오치카의 도움이 간절할 정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든든한 두 하녀 오카쓰와 오시마에게 기대지도 않습니다. 나름 쌓은 노하우로 대화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능력도 갖추기 시작했고, 들은 괴담을 바탕으로 그리는 그림 역시 꽤 진지한 구상과 고민을 담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제법 청자(聽者)로서 틀이 잡혀 간다고 할까요?

 

모두 세 편의 괴담이 실려 있는데, 산 속 용암 연못에 기거하는 터주의 은혜 덕분에 화기(火氣)를 제압할 수 있는 신비한 큰북 님을 갖게 된 오카지 번의 이야기(‘화염 큰북’), 맛있는 꼬치경단을 파는 소녀 오미요의 안타까운 가족사(‘한결같은 마음’),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영혼의 비극적인 사연과 그 영혼을 돌보며 마지막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뱃사람의 애틋한 기행(‘영혼 통행증’) 등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이 비교적 현실적인 에피소드를 그린 반면, ‘화염 큰북영혼 통행증은 괴담의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화염 큰북의 경우 용암 속에 살던 생물이 산 속 연못에서 터주로 추앙받으며 불기운을 좌지우지한다는 설정도 매력적이고, 터주에 얽힌 놀라운 반전은 괴담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충격과 감동을 전합니다. ‘영혼 통행증은 전형적인 한 맺힌 귀신 이야기같지만 영혼을 안내하는 뱃사람과 영혼을 볼 수 있는 15살 소년이 가세하면서 색다른 귀신 이야기로 장식됩니다.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클라이맥스는 카타르시스의 힘까지 담고 있어서 통쾌함과 애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줍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수작 원더풀 라이프를 떠올리게도 했는데, 이야기의 결은 전혀 다르지만 영혼을 안내하는 자의 성실함과 진정성이란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세 편밖에 수록되지 않아 기대보다 홀쭉했던 분량입니다. ‘편집자의 덧붙임을 읽어보니 애초 여섯 편이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분량이 너무 과도해지고 출간시기가 많이 늦어질 수 있어서 내린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세 편의 연재가 일본에서 마무리됐고 한국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라니 저의 아쉬움은 그런대로 풀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년 봄쯤에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 1.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의 괴담 자리가 3년 전에 시작됐다는 서문을 읽고 깜짝 놀랐는데, 저의 체감으로는 족히 10년은 된 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찾아보니 시리즈 첫 작품인 흑백이 한국에 소개된 게 2012년 봄, 그러니까 거의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미시마야에 또다시 3년의 시간이 흐르려면 앞으로 10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요? 부디 절반 정도로라도 줄여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족 2. 미미 여사는 이 시리즈를 통해 모두 99편의 괴담을 선보이겠다고 예고한 바 있는데, (편집자의 설명에 따르면) ‘영혼 통행증까지 34편이 완성됐습니다. 1/3 지점인데, 그저 미미 여사가 건강하고 씩씩하게 남은 65편의 괴담을 빠짐없이 들려주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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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의 아이
시게마쓰 기요시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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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년 전, 한적한 뉴타운 아사히가오카의 중학교에서 30명의 학생이 사망 혹은 중태에 빠지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동급생 우에다 유타로가 급식에 독을 탔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 사건의 트라우마가 일대를 잠식하고 있는 가운데, 14살 아들 하루히코를 둔 이혼녀 가나에와 결혼한 시미즈 요시아키가 아사히가오카에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갑자기 14살 아들을 얻은 시미즈는 어떻게든 행복한 가족을 이루려 애쓰지만 학교폭력의 상처까지 지닌 하루히코는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새 집 근처에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희생자들이 살았다는 점 때문에 걱정이 많던 시미즈는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하루히코가 7년 전 사건의 범인 우에다 유타로와 닮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친구가 생겼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하루히코가 잦은 밤 외출을 하자 시미즈의 불안은 점점 증폭됩니다.

 

꽤 길게 줄거리를 정리했지만, 실은 초반부 소개에 불과할 정도로 목요일의 아이는 무척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지녔습니다. 학교와 가정의 폭력, 가족의 문제, 촉법소년이 저지른 과거의 끔찍한 대량살인, 그리고 한적한 뉴타운 아사히가오카를 다시금 두려움에 빠뜨리는 7년 전 사건의 공포 등 각각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만한 주제들이 한데 뒤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이야기 - 행복한 가족과 좋은 아버지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시미즈의 고민, 대량살인범 우에다 유타로의 7년 만의 출소에 때맞춰 아사히가오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의문의 사건들 - 가 메인인데, 양쪽 모두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자관계인 시미즈와 하루히코가 중심에 서있습니다. 어떻게든 하루히코와 마음을 트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던 시미즈는 하루히코가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연루되기 시작하자 초조함을 넘어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자살시도까지 했던 하루히코에게 연민과 애정을 품었던 시미즈지만 끝내 하루히코가 감춰온 본 모습을 알게 된 뒤론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던 7년 전 사건의 한복판으로 달려들기로 결심합니다.

 

사건에 연루된 아들과 그로 인해 충격에 빠지는 아버지라는 구조만 보면 우타노 쇼고의 세상의 끝, 혹은 시작’, 할런 코벤의 홀드 타이트’(구판 제목 아들의 방’)가 언뜻 떠오르지만, ‘목요일의 아이는 아버지 시미즈와 아들 하루히코 외에 제3의 주인공인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만의 작지 않은 영역과 주제를 품고 있어서 다소 복잡하고 난해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같은 반 친구들을 몰살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해 동기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세상의 끝을 보고 싶었고, 내 손으로 세상을 끝내고 싶었다.”는 궤변에 가까운 범인의 주장이 중반부 이후 이야기를 지배했고, 범인과 그 추종자들이 쳐놓은 정교한 덫에 걸려든 시미즈가 갈피를 잃고 허우적대기 시작하면서 그 전까지의 통상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장르가 전개되는 탓에 솔직히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작가가 집요해 보일 정도로 자주 거론하는 세상의 끝은 이 작품의 여러 주제들 가족의 의미, 학교와 가정에서 자행되는 폭력, 대량살인범의 범행 동기 - 을 관통하고 있지만, 실은 그 개념 자체가 너무 모호하고 자의적이어서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7년 만에 세상에 나와 나름 거창한 집단살인극을 통해 세상을 끝장내버릴 것 같던 범인과 그 추종자들의 초라한 엔딩 때문에 세상의 끝에 관한 그들의 주장은 치기 어린 황당한 궤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섞이기 힘든 주제를 한줄기에 엮기 위해 동원한 세상의 끝이란 개념은 오히려 이 작품의 정체성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그 개념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큰 그림이 너무 많이 흐트러져버렸다고 할까요?

 

역자 후기에서라도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지만 스포일러 때문인지 자세한 언급이 없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그래도 이야기의 중심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주인공의 고뇌와 싸움.”이란 설명 때문에 더 혼란만 느꼈는데, 그 설명을 받아들이자니 그럼 그토록 강조된 세상의 끝이란 건 도대체 뭐지?” 라는 의문만 더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어떤 독자가 이 작품을 사이코 서스펜스로 분류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미스터리로 시작해서 사이코 서스펜스로 절정을 달리다가 가족 드라마로 마무리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좋게 얘기하면 다양한 장르의 폭주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한 줄로 정리하기 어려운 복잡난해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사족으로... 출판사에서 올린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는 중반부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사건과 해프닝들이 꽤 많이 노출돼있습니다. 누가 죽고 누가 죽였는지, 또 어떻게 죽였는지까지 상세히 소개됐는데,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가급적 피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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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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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사람들1994년에 발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입니다. 그의 작품 리스트의 기점이 1985년에 출간된 방과 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초기작이라고 보기엔 어렵지만, 본격적으로 성숙한 작품들을 내놓기 직전, 그러니까 중견으로의 진입 시점에 발표된 작품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가 형사 시리즈초기작이라든가 숙명등 매력적인 작품들을 내놓긴 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야기의 톤이나 중량감만 따지면 일상 미스터리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동원된 사건들은 살인, 강도, 절도 등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건은 지독한 악의나 소시오패스의 광기와는 거리가 먼, 다소 우발적이거나 착각 또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또 대단한 반전이나 정교한 미스터리 트릭은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내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법한 현실적인 사건들로 읽혔습니다.

 

동료들에게 돈을 받고 자신의 집을 밀회의 장소로 제공해온 남자가 어느 날 아침 낯선 여자와 마주친 뒤 겪는 미스터리(자고 있던 여자),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한 남자에 대한 오랜 원한(판정 콜을 다시 한 번!), 성실함과 근면함의 두 얼굴을 그린 직장 미스터리(죽으면 일도 못해), 신혼여행 첫날밤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복수(달콤해야 하는데), 결혼 사실을 알려온 친구의 편지에 담긴 낯선 여자의 사진의 비밀(결혼 보고) 등 수록작 모두 독특한 설정의 미스터리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소소한 악의가 예상 밖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에피소드를 그린 등대에서였습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두 주인공의 캐릭터도 흥미로웠고, 반전의 힘도 꽤 강렬했으며, 단편만이 발휘할 수 있는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중에는 좀더 사건성이 강한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이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편이지만, 일상 미스터리와 삶의 아이러니를 담담하게 그린 수상한 사람들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개성을 맛볼 수 있는 괜찮은 단편집이라는 생각입니다. 독하고 강한 양념에 익숙해진 독자에겐 30년 가까이 된 다소 쉽고 가벼워 보이는 미스터리가 무덤덤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매력과 미덕이 있는 작품집이니 오후 한나절쯤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지고 싶다면 수상한 사람들도 좋은 선택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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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체스트넛맨
쇠렌 스바이스트루프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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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으로 잔혹하게 폭행당한 뒤 신체 일부가 절단된 채 살해된 여성들의 시신이 잇달아 발견됩니다. 코펜하겐 경찰 살인수사과의 나이아 툴린은 유로폴에서 징계를 받고 한시적으로 살인수사과에 복귀한 마르크 헤스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참여합니다. 피해자들의 곁에 놓여있던 밤 인형(chestnut man)에서 1년 전 실종된 소녀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발견되자 수사는 혼란에 빠집니다. 사회부 장관 로사 하르퉁의 딸인 크리스티네를 납치한 범인이 이미 1년 전 체포됐고, 그는 시신을 토막 낸 뒤 숲에 유기했다고 진술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굴러온 돌헤스는 연쇄살인과 크리스티네 실종이 연관된 사건이라고 확신하지만, ‘박힌 돌툴린과 1년 전 범인 체포로 큰 공을 세웠던 살인수사과 반장은 헤스의 추측을 무시합니다. 가까스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밝혀진 가운데 추가범행까지 벌어지자 수사관계자들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동안 북유럽 스릴러의 대세는 각각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로 대표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덴마크스릴러의 출간 소식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는 재미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란 타이틀까지 갖춘 덕분에 읽기 전부터 두툼한 분량에 대한 기대감이 남달랐습니다. 끔찍한 폭행 이후 산 채로 신체를 절단하고 시신 옆에 밤 인형을 남겨놓는 연쇄살인마의 행각은 북유럽 스릴러 특유의 잔혹함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범인을 쫓는 두 주인공 나이아 툴린과 마르크 헤스의 캐릭터 역시 여러 북유럽 스릴러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툴린과 헤스가 사건에 임하는 태도와 처지는 일반적인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살인수사과의 최연소 여성 팀장 후보지만 정작 살인사건에선 별 흥미를 못 느낀 채 컴퓨터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사이버범죄센터로의 이적을 꿈꾸는 툴린은 부디 이 사건이 복잡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귀차니즘을 애써 감추지 않습니다. 또 유로폴에서 징계를 받고 한시적으로 살인수사과에 좌천성 복귀를 지시받은 헤스는 오로지 유로폴로의 복귀만 생각하며 빈민가에 위치한 아파트를 팔아넘기는 일에 더 몰두합니다. 말도 없고 사건에는 관심도 없고 행색마저 추레한 헤스가 못마땅한 툴린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지만, 헤스는 그런 적대감따윈 달관한 듯 초연한 태도만 보입니다.

이렇듯 물과 기름 같던 두 주인공은 동일범의 살인이 연이어 벌어지고 생각지도 못한 단서 1년 전 실종된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묻은 밤 인형 가 나타나면서 조금씩 협력 관계를 구축해나갑니다. 두 사람의 케미는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하게 눈길을 끄는데 만약 시리즈로 확대된다면 그 어느 콤비보다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과 1년 전 장관의 딸 크리스티네의 실종사건이 엇비슷한 비중으로 전개되면서 독자는 두 사건의 접점이 과연 언제, 어디에서 드러날까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두 사건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헤스와 자신의 공적이 날아갈까 봐 실종사건 재수사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수뇌부가 치열하게 갈등하는 가운데, 툴린은 점점 헤스의 주장에서 설득력을 발견하고 그가 과거 살인수사과의 최고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연쇄살인사건과 나란히 병행되는 또 하나의 시퀀스는 딸 크리스티네를 잃고 휴직했던 장관 로사가 1년 만에 복직하자마자 벌어지는 협박사건입니다. 누군가 로사를 살인범이라 지칭하며 노골적인 협박을 가해오는데 이로 인해 툴린과 헤스의 수사는 더욱 큰 혼선을 빚게 됩니다.

 

꽤 오래 전 기사지만 북유럽 스릴러 소설 왜 국내에선 안 뜰까?”(201234, 경향신문)에서는 어두운 분위기과 복잡한 플롯, 그리고 사건은 흉악한데다 등장인물의 과거 상처나 기억이 얽혀드는 탓에 북유럽 스릴러가 한국 독자들에게 안 먹힌다고 분석한 적 있습니다. 분명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더 체스트넛 맨은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어둡기만 한 헤스의 캐릭터와 과거사라든가 끔찍한 범행수법, 또 배경이 10월임에도 작품 내내 장마처럼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풍경 묘사 등 기사 내용과 엇비슷한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인데, 그래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선 영미권 스릴러처럼 친숙하게 읽히는 편입니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움을 꼽는다면 사건에 비해 과도한 분량입니다. 이 역시 북유럽 스릴러의 특징 중 하나인데, ‘더 체스트넛 맨의 경우 부차적인 시퀀스나 장면들이 분량을 꽤 많이 잡아먹었고,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앞서 읽은 분량들을 조금은 허망하게 만들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분량이 400페이지 안팎인데, ‘더 체스트넛 맨을 읽다가 조금 지루하다 싶어서 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딱 그 지점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조금만 슬림했더라면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을 거란 아쉬움은 책을 덮을 때까지 계속 됐습니다.

 

마지막 챕터를 보면 툴린과 헤스가 시리즈 주인공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상황인데, 개인적으론 어떻게든 두 사람이 또 한 번 호흡을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북유럽 혹은 독일 스릴러에 못잖은 덴마크콤비 시리즈의 활약이 더없이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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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행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8 미치 랩 시리즈 7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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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코앞에 두고 끔직한 폭탄테러 사건이 벌어져 민주당 후보인 조시 알렉산더의 아내와 경호원 등 다수가 사망합니다. 3개월 후, FBI 국장 아이린 케네디의 밀명을 받고 테러범을 잡기 위해 지중해의 키프로스에 머물던 미치 랩은 새 대통령의 취임식 1주일 전 보스니아 출신 암살자를 체포합니다. 하지만 랩이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기도 전에 체포 사실이 세상에 공개됐고 FBI와 법무부가 사건을 채가려 하자 랩은 테러범만 넘긴 채 종적을 감춥니다. 그리고 합법적인 수사로는 알아낼 수 없는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위험천만한 행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다 랩이 용의자를 고문했다는 의심까지 제기되자 CIA와 케네디 국장은 위기에 몰립니다. 케네디와 랩을 눈엣가시로 여겨온 부통령 당선자 마크 로스는 그들을 일거에 제거할 호기로 여기고 야비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미치 랩 시리즈일곱 번째 작품인 반역행위는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출간된 미치 랩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2015년 이후 더는 소식이 없으니 후속작 출간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3의 선택을 제외하고 대부분 작품에서 미치 랩의 주요 미션은 중동 테러리스트들과의 대결이었지만, ‘반역행위는 미국 대통령 선거를 배경으로 더럽고 비열한 정치적 음모와 폭탄테러 사건에 맞서는 랩의 활약을 그립니다. 초반에 독자에게 폭탄테러 사건의 범인과 배후는 물론 동기까지 다 밝혀지기 때문에 범인은 누구?”보다는 랩이 어떻게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자신과 케네디 국장, 그리고 CIA에 몰아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가 관심을 끌게 됩니다. 물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한 테러사건의 배후를 어떤 방식으로 통쾌하게 처단할 것인가도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미치 랩 시리즈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야비한 정치인들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랩과 케네디 국장의 반격인데, ‘반역행위는 그동안 CIA를 비호해온 헤이즈 대통령이 재선 출마를 포기한 상태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는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두 사람의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지경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새 대통령 취임을 1주일 앞둔 상태라는 시간제한 설정 때문에 긴장감과 초조함은 극도에 달합니다.

하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랩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느긋하고 여유 있습니다. 랩의 궁극적인 목표는 당연히 테러범의 배후와 동기를 알아내는 것이지만, 그 전에 랩은 자신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수사방식을 비난하고 그걸 핑계 삼아 CIA를 공격하는 정치권과 언론을 제대로 엿 먹이기 위한 흥미진진한 계획을 세웁니다. 랩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케네디 국장은 거의 홀로 십자포화를 맞으며 큰 위기에 빠지지만 끝까지 랩을 믿고 기다립니다.

 

대선을 둘러싼 폭탄테러의 진상은 정교하고 잔혹하지만 이야기의 큰 선은 제법 단순해서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심플한 인상을 줬습니다. 또 분량도 상대적으로 짧았는데, 그래서인지 스토리와 무관한 부연 설명들이 꽤 많아서 군데군데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야비한 적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통쾌함은 여전해서 랩과 케네디 국장의 매력이 여느 작품 못잖게 빛을 발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검색을 해보니 놀랍게도 미치 랩 시리즈는 아직까지 미국에서 계속 출간 중이었습니다. 빈스 플린은 2013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모두 13편의 시리즈를 내놓았는데, 이후로 Kyle Mills2015년부터 매년 한 편씩 미치 랩 시리즈를 출간했고, 2021년 현재 스무 번째 작품인 ‘Enemy at the Gates’가 나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미국에서 2006년에 출간된 반역행위에서 각각 39살과 45살인 미치 랩과 케네디 국장이 최소 50대 중반~60대 초반은 됐을 것 같은데, 과연 어떤 모습들로 활약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할 따름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적어도 빈스 플린이 집필한 나머지 6편이라도 한국에 소개되는 것인데, 요원하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언젠가 다시 한 번 미치 랩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쉽게 포기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에 미치 랩 시리즈는 아니지만 빈스 플린의 데뷔작인 임기종료를 조만간 읽을 생각인데, 희미하게나마 미치 랩의 그림자를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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