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총이 빠르다 - 마이크 해머 시리즈 2 밀리언셀러 클럽 31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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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일을 마치고 심야식당에서 빨간 머리의 매춘부를 만난 마이크 해머는 잠깐의 대화를 통해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곤 진심을 담아 새 삶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해머는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그녀 주변을 조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며, 그녀가 지닌 뭔가를 쫓는 자들이 있음을 눈치 챕니다. 작은 단서에서부터 출발하여 차근차근 그녀의 과거를 훑어가던 해머는 숱한 위기를 넘긴 끝에 그녀의 죽음의 배후에 매춘조직과 권력층 간의 부패한 커넥션이 있다는 걸 확신합니다. 절친인 뉴욕 강력계 반장 팻 체임버스와 공조 수사를 벌이긴 하지만 해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채 의도적으로 경찰을 배제하곤 악당들을 향해 거침없이 45구경 권총을 발사합니다.

 

내 총이 빠르다법보다 주먹을! 재판보다 직접 처단!”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난폭한 정의의 탐정 마이크 해머의 두 번째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뒤표지 카피에 의하면 하드보일드의 살아있는 신화로 이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한 정의가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사실만을 기술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실은 이 시리즈의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오히려 하드보일드의 전설인 필립 말로와는 상당히 대척점에 서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미키 스플레인의 문장 역시 대체로 차갑고 건조하긴 해도 결정적인 순간, 즉 해머가 폭발하는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온갖 분노의 감정을 총동원하여 격하기 이를 데 없는 폭주를 감행하는데, 그러고 보면 작가나 주인공 모두 필립 말로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하드보일드를 구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내가 심판한다의 원제가 ‘I, The Jury’, 내가 심판이고 배심원이고 판사.”라는 노골적인 선언을 담고 있듯 해머는 자신이 한 번 꽂힌 사건에 관한 한 일부러 경찰을 따돌려가면서까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겉모습은 매춘부였지만 숙녀의 우아함을 지녔던 빨간 머리 여자의 죽음에 분노한 해머는 상대해야 할 적이 거대하고 부패한 권력층과 매춘조직의 커넥션이란 걸 깨달은 뒤로 필요에 따라 뉴욕 경찰의 강력계 반장인 팻 체임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난폭한 영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340여 페이지 내내 그만의 심판을 거침없이 휘두릅니다.

 

해머의 첫 번째 미덕은 45구경 권총으로 대변되는 그의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이지만, 그는 유능한 사립탐정답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상당한 추리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사소한 단서조차 절대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집중력도 대단합니다. 동시에 한 작품 안에서 숱한 여성들과 농도 짙은 로맨스를 펼치는 마초적인 기질도 어김없이 발산하는데, 이 시리즈가 1947년에 시작되어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작인 내가 심판이다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복수심과 함께 부패를 향한 공적인 분노와 정의감이 뒤섞여 있는 내 총이 빠르다(로맨스 장면을 제외하곤) 거의 쉴 틈 없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처럼 전개되는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입니다. 한순간도 눈을 떼기 힘든 매력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간혹 중요한 대목에서 애매모호한 문장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지?”라는 의아함을 자아낼 때가 있습니다.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점을 제외하곤 흥분지수를 고도로 유지할 수 있는 오락물의 힘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20세기 중반을 무대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지금 당장 드라마로 만들어도 똘끼 충만한 매력적인 탐정으로 각광받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모두 13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한국에는 초기 세 편만 소개되고 말았는데, 언젠가 레트로 열풍이 분다면 다시 한 번 재조명될 수 있는 명품 캐릭터가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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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약속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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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약속형사의 눈빛’, ‘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에 이은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2편인 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를 읽을 때도 느낀 점이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도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표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점은 참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형사의 약속은 인터넷 서점 소개글에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라는 아주 짤막한 언급이라도 있었지만 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는 직접 읽기 전엔 어디에서도 시리즈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 감춘 것 같진 않고, 그저 출판사의 무성의함 또는 소홀함 탓이란 생각입니다.

 

히가시이케부쿠로 경찰서 소속인 마흔 살의 형사 나츠메 노부히토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노부히토(信人)라는 이름대로 사람을 믿고 아이들을 좋아해서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진로를 바꿔 법무부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딸 에미가 묻지마 테러로 식물인간이 된 뒤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어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도무지 의심이란 걸 할 줄 모르는 나츠메가 형사가 된 걸 이해 못했지만, 그런 그의 독특한 이력과 성격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타고난 유능함 덕분에 경시청이나 검찰청에서도 입소문을 타기에 이르렀습니다.

 

형사의 약속에는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어린이 실종사건, 13년을 다짐해온 복수, 도주하던 피의자의 사망, 치매노인이 일으킨 상해사건, 그리고 수차례 칼에 찔린 사체 등 다양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일반적인 형사물과는 사뭇 다른 엔딩들을 맞이합니다. 진상을 알아냈지만 모르는 척 하는 게 모두에게 바람직하다고 판단된 사건, 진심어린 충고와 조언으로 범행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던 사건, 피의자의 말 못할 속내를 알아내곤 오히려 그()를 위로하는 사건 등 대부분 나츠메가 아니면 맞이하기 힘들었을 특별한 엔딩들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츠메에게 회한과 자책감을 불러일으킨 끝에 다소 우울하게 마무리되는 사건도 있어서 그의 다정다감하고 온기 넘치는 치유 능력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도 함께 전달됩니다.

 

마지막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형사의 약속에서 작가는 사람이 곧 희망.”이라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다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주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하나만 있었더라도 비극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주제의식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몽적인 느낌도 살짝 있긴 하지만 나츠메의 캐릭터 덕분에 큰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수긍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사건은 끔찍해도 그 해법은 온기로 가득한 따뜻한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자극적이고 독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조금은 밋밋하고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일본에서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는 네 번째 작품인 刑事’(2018, 단편집)까지 출간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표현이 들어간 걸로 보아 앞선 작품들과는 조금은 결이 다른 이야기가 예상되는데, 이 작품 역시 곧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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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1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창식 옮김 / 창해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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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양들의 침묵에서 FBI 연수생이었던 클라리스 스탈링은 그사이 유능한 특별수사관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훼방하고 질투하는 자들의 모함과 그녀 자신의 고집 센 태도 때문에 FBI에서의 앞날은 오히려 꽉 막힌 상태입니다. 마약밀매단 급습 중 부적절한 용의자 사살문제가 불거지면서 스탈링은 큰 위기를 맞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덕분에 7년 만에 한니발 렉터로부터 연락을 받게 됩니다. 한편, 과거 렉터에게 공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채 첨단 의료시설에 의존하고 있는 메이슨 버저는 엄청난 유산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렉터에 대한 정보를 끌어 모읍니다. 이탈리아에서 렉터의 흔적을 보고받은 그는 자신이 당한 것 이상의 참혹한 방법으로 렉터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웁니다.

 

레드 드래건양들의 침묵에 이은 한니발 렉터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렉터는 앞선 두 작품에서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카메오로 보는 게 적절할 정도로 사건 자체와는 거리가 있던 인물입니다. ‘레드 드래건에서는 짧지만 강렬한 존재감만 드러냈을 뿐 특별한 역할이 없었고, ‘양들의 침묵에서는 스탈링과의 만남을 통해 팽팽한 심리전을 벌이며 비교적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긴 했지만 어쨌든 연쇄살인범은 따로 존재했기에 (책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세 번째 주인공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렉터가 자신의 이름을 딴 한니발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왔으니 이번 작품은 스탈링과 함께 메인 주인공으로 맹활약할 렉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니발을 이끄는 주요 인물은 모두 네 명입니다. 7년 만에 렉터의 추적을 재개한 스탈링은 끈질긴 조사를 펼치면서도 오래 전 그와 나눴던 대화들과 그가 종적을 감추면서 남긴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떠올리며 묘한 감회에 사로잡힙니다. 이탈리아에서 펠 박사라는 신분으로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던 렉터는 자신에게 사적인 복수를 가하려는 메이슨의 계획을 감지한 뒤 오랜만에 피비린내를 진동할 태세를 갖춥니다. 메이슨은 렉터를 납치한 뒤 산 채로 갈가리 찢어 죽이기 위해 돈과 권력을 있는대로 휘두르는 사이코패스입니다. 또 그에게 돈으로 매수된 법무부 관료 폴 렌들러는 양들의 침묵에서 이미 스탈링과 악연을 맺었던 인물로 이번에도 스탈링과 렉터를 파멸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당으로 등장합니다.

 

주요 인물들의 설정을 보면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이라기보다는 메이슨의 복수극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렉터를 스탈링이 구하는 이야기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FBI 요원 스탈링과 식인 살인마 렉터는 적대적 관계일 뿐 아니라 서로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며 묘하게 교감하는 관계라서 이른바 공동의 적인 메이슨 & 렌들러를 향해 협력할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1/3 지점 정도까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상이고 추측일 뿐 이야기가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앞선 두 작품이 분명 연쇄살인마 스릴러이긴 해도 심리전의 성격이 강했다면 한니발은 사건성이 명확한 작품입니다. 심리전과는 확연히 다른 현실적인 긴장감이 팽팽하고, 과거가 아닌 현재 시점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훨씬 더 많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는 전작들에 비해 거의 2배속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의 미덕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해 아쉬움을 느낀 대목을 정리하면, 우선 황당한 느낌까지 받은 막판 엔딩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원했을 수도, 반대로 그만큼 많은 독자가 절대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는 엔딩인데, 개인적으론 알고 보니 모두 꿈이었다.”에 버금갈 만큼 납득하기 힘든 대단원에 솔직히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갑자기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꺼내든 렉터의 뜬금없는 캐릭터입니다. 2차 대전 말기 여동생 미샤를 비참하게 잃은 렉터의 상처가 마치 그의 핵심 캐릭터인 양 그려진 것도, 또 그 상처를 스탈링에게 투사하는 설정도 모두 개연성 부족한 억지에 가까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허술하게 묘사된 클라이맥스(렉터를 향한 메이슨의 복수)의 문제인데, 어설픈 액션과 함께 뭐가 이렇게 쉬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전작들 모두 비슷한 허술함을 지닌 걸 떠올려보면 작가의 고유한 성향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략 절반 정도까지는 스릴러와 심리전의 미덕을 고루 갖춰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돼서 오히려 몰입감이 훅 떨어졌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180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애초 왜 이 작품이 양들의 침묵이후 11년 만에 출간됐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진 저로서는, 무리한 추측이긴 해도, 전작들의 영광에 편승한 작가의 사심(?)이 발동했거나 주변에서 등을 떠민 탓에 마지못해 후속작을 내게 된 작가의 어정쩡함이 빚어낸 산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는 렉터의 프리퀄을 다룬 한니발 라이징까지 읽을 생각이었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아무래도 한니발보다 더한 작가의 사심과 어정쩡함을 마주하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까지 읽어온 렉터와는 전혀 달라 보이는 과거의 렉터를 읽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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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리커버 에디션)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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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을 살해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끔찍한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이 날뛰는 가운데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은 어느 날 갑자기 행동과학부장 잭 크로포드에게 호출을 받습니다. 크로포드의 지시는 겉으론 강력범죄 예방을 위한 범죄자 데이터 수집이었지만 실은 스탈링으로 하여금 주립 정신병원에 수감돼있는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와의 면담을 통해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공포와 긴장 속에 렉터와의 면담이 거듭되지만 스탈링이 얻은 건 그저 모호하고 선문답 같은 진술일 뿐 좀처럼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상원의원의 딸이 버팔로 빌에게 납치되자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스탈링과 크로포드는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면서 수사에서 배제되고 맙니다.

 

(1988)으로나 영화(1991)로나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마를 다룬 스릴러로서 분명 기념비적인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어떤 매체로든 깊은 인상을 한번 받고 나면 다른 매체로는 같은 작품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 성격이라 최근까지 책으로는 양들의 침묵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냥 아무 계기도 없이 문득한니발 렉터 이야기를 순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 얼마 전 책장 속에 한참을 갇혀있던 레드 드래건의 먼지를 털어줬고, 이제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정점인 양들의 침묵을 읽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책을 읽는 내내 오래 전 분명히 봤다고 생각했던 영화의 내용이 거의 생각이 나지 않아 당황스러웠는데, 참혹하지만 묘하게 끌리던 포스터 사진과 두 주연배우(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의 클로즈업 장면 외에는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그만큼 각색을 많이 했기 때문이든지 제 기억력의 문제든지 둘 중 하나겠지만,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면 책으로 읽은 양들의 침묵은 기대했던 것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버팔로 빌에 의한 끔찍한 연쇄살인이고, 또 하나는 FBI 연수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크로포드에게 발탁된 스탈링이 전대미문의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와 면담하며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각종 차별과 위기를 견뎌내며 뛰어난 FBI 요원으로 성장하는 될성부른 떡잎스탈링의 성장기가 이야기의 밑바닥에 깔려있습니다.

 

젊은 여성을 살해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버팔로 빌사건은 워낙 엽기적이라 호기심과 공포심을 함께 자아내지만, 전작인 레드 드래건에서도 그랬듯 범인의 욕망의 출발점 자체가 워낙 불가지한 심리적 문제이다 보니 오히려 사건이 거듭될수록 긴장감을 떨어뜨렸다는 생각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책이든 영화든 안 본 사람도 다 아는 내용이지만) 그가 희생자의 살가죽을 벗긴 이유가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욕망에서 기인했다면 독자가 느끼는 공포심은 훨씬 더 배가됐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작가의 고유한 성향 탓으로 보였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역시 두 주인공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입니다. 능력자이긴 해도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FBI 연수생 스탈링과 천재적인 정신과 전문의이자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연쇄살인마 렉터의 대결은 처음부터 너무나도 완벽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보였지만, 면담이 거듭될수록 스탈링의 내공이 깊어지고 그걸 솔직하게 인정해주는 렉터의 태도가 엿보이면서 짜릿한 묘미까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초 버팔로 빌사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시작된 면담이지만, 정작 눈길을 끈 건 정보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탈링이 렉터에게 털어놓은 그녀의 내밀한 과거사들입니다. 특히 어릴 적 들었던 도살 직전의 양들의 울음소리는 스탈링에겐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트라우마이자 악몽인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그 이야기를 건네는 과정에서 스탈링은 고작연수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식인 살인마 렉터 앞에서 점점 더 당당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렉터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선문답 같긴 해도 나름의 단서를 슬쩍슬쩍 흘려주곤 합니다. 물론 이 대목들이 잔혹하고 스피디한 연쇄살인 스릴러를 다소 정적이고 느슨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두 캐릭터의 힘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대목인 건 분명합니다.

 

약간 부차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스탈링이 버팔로 빌사건이나 렉터와의 면담을 통해 차근차근 성장해가는 모습도 무척 호감이 갔던 점입니다. 무엇보다 노골적인 성차별이 횡행하던 시대적 분위기에다 연수생이라는 신분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분노 조절법과 잭 크로포드에 대한 존경심을 의지 삼아 절대 좌절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스탈링의 진심은 무척 진정성 있게 느껴졌습니다.

 

서평 초반에 기대에 못 미쳤음이라고 했는데,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만 놓고 보면 별 5개도 모자란 작품이지만, 한껏 기대했던 버팔로 빌사건 자체가 약간은 용두사미처럼 마무리된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이어서 한니발도 읽을 생각인데, ‘양들의 침묵으로부터 11년 후에 집필된 한니발에서 스탈링과 렉터가 어떤 모습으로 재회하게 될지 무척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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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드래건
토머스 해리스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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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밍햄과 애틀랜타에서 한 달 간격으로 두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3년 전 희대의 사이코패스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지만 지금은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전직 FBI 아카데미 법정 진술교관 윌 그레이엄은 FBI 요원 잭 크로포드로부터 수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받습니다. 렉터 체포 당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던 그레이엄은 고심 끝에 크로포드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범행현장과 증거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새로운 단서들을 찾아내지만 그레이엄은 범인이 두 가족을 특정해서 살해한 이유를 알아낼 수 없어 답답할 뿐입니다. 막다른 벽에 막힌 그레이엄의 선택은 주립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렉터에게서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예상치 못한 사태를 일으켰고 그레이엄은 큰 위험에 빠지고 맙니다.

 

토머스 해리스의 대표작인 양들의 침묵은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7년 먼저(1981) 출간된 레드 드래건은 상대적으로 유명세를 덜 탄 작품입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건 1991(고려원)인데, 그해 양들의 침묵이 영화로 대박이 난 덕분에 출간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후 출판사(창해)와 번역자(이창식)가 모두 바뀌어 1999년과 2006년에 재출간되긴 했지만 역시 양들의 침묵의 후광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이 양들의 침묵’ - ‘한니발’ - ‘한니발 라이징으로 이어지는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기점이라고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다 읽고 보니 이 작품에서 한니발 렉터는 카메오 정도의 역할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강렬한 인상과 함께 두 가족 몰살사건의 범인을 추격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데다 주인공인 윌 그레이엄과의 악연도 중요한 모티브로 설정돼있어서 단순한 카메오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합니다.

 

뛰어난 직관력과 함께 증거물을 정확히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그레이엄은 꼼꼼한 현장 조사를 통해 기존 수사팀이 발견하지 못한 미량의 증거와 단서를 포착하는 성과를 올릴 정도로 탁월한 능력자지만, 과거에 겪은 두 개의 치명적인 사건 때문에 은퇴를 결심하고 은둔생활에 돌입한 인물입니다. 하나는 경찰 시절 범인을 사살한 이후 얻은 트라우마이고, 또 하나는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그는 범인의 입장이 되어 침입경로, 살인의 방법과 순서, 시신을 훼손한 이유 등 범행의 디테일을 포착하지만 내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렉터로부터 자신과 닮은꼴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냉정한 캐릭터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그레이엄이 쫓는 범인의 정체는 초반부에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또 두 가족을 희생자로 선택한 이유도 상세히 소개됩니다. 특히 한 부인의 시신을 훼손하고 모욕한 것으로도 모자라 여러 곳에 심하게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놓은 범인은 이빨 요정이란 별명까지 얻으면서 언론을 통해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됩니다. 그리고 그가 붉은 용, 즉 레드 드래건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함께 사이코패스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비참한 성장사가 그레이엄의 수사과정에 맞먹는 비중으로 그려집니다.

 

전체적으로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건 위주의 스릴러라기보다 그레이엄과 범인의 심리묘사가 더 비중 있게 그려져서 속도감이나 긴장감이 다소 떨어졌고, 그레이엄이 범인을 특정하는 과정은 자체 스포일러 때문에 큰 힘을 얻지 못했으며 특별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또 범인이 스스로를 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붉은 용과 동일시하면서 악마적 캐릭터를 강조하는 대목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현실감이 사라져서 막판에는 심령 호러물 같은 이질감만 남고 말았습니다. 망상과 집념에 빠져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이야기를 꽤 많이 읽었지만 이 작품의 범인은 인공미가 너무 강하게 설정됐다고 할까요? 물론 클라이맥스에서의 범인의 돌출행동은 확실히 눈길을 끌었지만 전체적으론 카메오로만 등장한 한니발 렉터에 비해 한참 격이 떨어지는 살인마라는 매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친 김에 양들의 침묵한니발까지 이어서 읽을 생각인데 레드 드래건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는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시리즈 마지막 편이자 프리퀄인 한니발 라이징은 그다지 좋은 평을 발견하지 못해서 구매 자체를 주저하고 있는데, ‘양들의 침묵한니발을 만족스럽게 읽는다면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라도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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