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겨울 2022 소설 보다
김채원.성혜령.현호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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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요즘 이 계절에 어울리는 소설을 읽었다. 블로그 친구 희선 님으로부터 받은 책 선물인데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서 올해 안에 읽어야지 다짐하고 읽기 시작했다. 작고 얇은 책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소설 보다시리즈는 문학과지성사가 분기마다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 홈페이지에 그 결과를 공개하고 이를 계절마다 엮어 출간하는 단행본 프로젝트라고 한다. 각 작품 뒤에는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있다.

 



<빛 가운데 걷기>(김채원)는 어린아이와 함께 사는 노인 이야기다. 아이의 할아버지인 노인은 주기율표를 외우고 수업 노트를 복기한다. 예전에 교사였던 듯하다. 그 정도의 지식인이라면 아이와 친밀한 대화도 할 수 있고 공부도 봐 줄 수 있을 텐데. 아이는 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언어 치료를 받고 있다. 노인은 아이의 엄마였던 딸이 죽은 것에 대해 괴로워한다. 아니 괴로워하기보다는 죽은 게 싫다. 자세한 얘기는 없지만 아마 자살한 것 같다. 딸이 힘들어했을 때 좀 더 마음을 써서 도와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기도 한다. 온갖 상념들은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기만 한다. 햇빛을 받으면 몰라보게 건강해진다고 했던 옆집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걷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혹시나 자신이 언젠가 죽게 되면 아이 혼자 남겨지는 걸 상상하면서 걱정하기도 한다. 노인의 마음은 아주 복잡하고 불안해 보인다. 무얼 해야 하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몸은 예전 같지 않고 누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다. 어쨌든 살아 있고 또 남은 삶을 이어가야 하니까 감내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슬프고 아픈 기억, 복잡한 마음은 어떻게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햇빛을 받으며 자주 걸을 것. 그러면 조금씩 견딜만한 나날도 오지 않을까.

 



<버섯 농장>(성혜령)은 고등학교 동창 기진과 진화의 이야기다. 진화는 10년째 인터넷 쇼핑몰에 다니고 있는데, 금수저인 나이 어린 사장을 저주하고 욕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한다. 기진은 그런 진화의 푸념이나 불평을 늘 참고 들어주었다. 기진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모두 돌아가셨지만 남겨진 재산이 있어서 직장을 열심히 구하지도 않았고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진화가 기진에게 전화를 걸어와 휴대폰 개통 사기를 당해서 빚 독촉을 받고 있다는 사정을 털어놓으며 요양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한다. 기진이는 진화의 부탁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

 


 

기진과 함께 요양 병원으로 찾아가 만난 사람은 휴대폰 개통 사기를 친 남자의 아버지였는데 자신의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다면서 아들과 연락도 안 된다. 나는 어머니 병원에 모시기 위해 집까지 판 사람이다. 자신은 아들에게 효도를 받지 못한다. 내가 자식에게 줄 때는 지났다면서 하소연을 하고는 가버린다. 피해자인 진화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기진과 진화는 그 남자 차를 타고 나오는 것을 보고 뒤쫓아 간다. 참외를 먹으며 대화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듯했고, 기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니 남자는 죽어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진화는 그 남자를 땅에 묻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진은 겁이 나면서도 진화를 돕는다. 어쩌다 보니 사기를 당하는 흔한 이야기인 듯한데 갑자기 사람이 죽었다는 게 뜬금없게도 느껴졌다. 그리고 왜 기진은 옳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진화가 하자는 대로 행동했을까. 서로의 부모님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공유한 적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어디에 매이지 않고 사는 자신과 달리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진화에게 빚 갚는 심정으로 그랬을까. 버섯 농장에서 일어난 이 이야기는 흔하게 발생하는 끔찍한 죽음의 사건도 우발적인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연필 샌드위치>(현호정)는 작가가 꾼 꿈 이야기를 모티브로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꿈 받아쓰기를 한 셈이다. 왠지 멋지게 느껴졌다. 꿈에 나온 규칙은 식빵 두 장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샌드위치를 만든다. 양상추와 마요네즈 소스, 토마토 등을 자유롭게 활용해도 좋다는 조건이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하지만 꿈이고 소설이니까 상상력을 불어넣을 수는 있겠지. 꿈속의 공간 복돼지 문구점에서 연필 샌드위치를 먹어야 하는 고통은 문구점 아주머니의 감시를 받으며 이어진다.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다고 몸부림치지만 빠져나올 구원의 손길은 없다. 꿈에서도 꿈과 현실 사이를 느끼며 이야기를 쓰는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화자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거식증 이야기까지 상기한다. 건강했던 할머니가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되고 그때부터 식사를 거부한다. 엄마는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밥을 많이 먹었지만 할머니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건강해지는 쪽은 엄마 쪽이었다. 내가 엄마를 위해 밥을 열심히 먹었던 때처럼 몸이 건강해지지는 않고 오히려 말라만 갔다. 모녀간에 서로 영적인 탯줄로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환타지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희선 님은 이 책을 얇은 책이고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기도 해서 본다고 했다. 나에게도 마음에 드는 소설이 한 편이라도 있기를 바란다면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한다면 첫 번째 단편 <빛 가운데 걷기>라고 말하고 싶다. 제목은 멋진데 내용과 좀 동떨어진 건 아닌가 생각하다가 거듭해서 읽어 보니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되었다. 엄마를 잃은 아이, 딸을 잃은 노인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불안하고 복잡하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삶, 그 노인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을 스스로 이해(인정)하고 그러려면 시간과 풍경이 필요하고 그래서 주인공을 걷게 한다는 작가의 말이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와서다. 전혀 몰랐던 소설 보다시리즈와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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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12-12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얇아도 바로 읽지 않기도 하는 책이군요 소설이 세편이어서 부담은 덜 되지만... 어떤 때는 괜찮기도 하고 어떤 때는 뭐가 뭔지 모르기도 하네요 겨울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면 좋을 텐데, 햇빛이 덜 받아서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하겠습니다 사람은 어떻든 살아 가기도 하네요


희선

모나리자 2025-12-12 20:10   좋아요 0 | URL
네, 오래 묵혀 두었다 읽게 되었네요. 덕분에 잘 읽었어요. 희선님.^^
이 시리즈가 꾸준히 나오고 있더군요. 삶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닮은 점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주말에 눈이 많이 온다네요. 감기조심하시고 따뜻하게 잘 지내세요. 희서님.^^
 
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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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을 읽는 의미는 무엇일까. 작품 속 인물들과 교감을 나누고 나아가서는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교감을 나누는 일이다. 이러한 독서 과정에서 마음을 치유하고 어제보다 성장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당연히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나 작가의 발자취가 있는 곳은 언젠가 찾아가고 싶다는 로망이 된다. ‘독서여행자 곽아람의 문학기행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문학작품 속 주인공들이 살았던 도시를 찾아가고 작가의 고향과 묘지를 찾아 꽃다발을 바치며 인사를 한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며 궁금증을 해소한다. 마치 기자의 취재 현장을 보는 듯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몇 해 전에 조민진 작가의 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기자 출신의 작가가 해외에서 보낸 1년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닮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곽아람 작가는 누구보다도 독서광이었고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도 벌써 초등학교 때 읽었을 정도로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저서로 나의 뉴욕 수업,쓰는 직업,공부의 위로등 다수 있다.

 



이 책은 2018년에 출간된 바람과 함께, 스칼렛의 개정증보판이라 한다. 작품을 소개할 때 원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좀 더 깊은 문학작품을 음미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한다. 이 문학기행에서 소개하고 있는 작품은 우리의 추억을 소환해 준다. 학창시절에 읽었거나 영화로 보았던 감동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1장 문자로 지은 집에서는 빨강 머리 앤, 에반젤린,주홍 글씨,작은 아씨들,위대한 개츠비,마지막 잎새를 소개하며 작품 배경과 작가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2장 바람과 함께, 스칼렛에서는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품 배경과 작품 세계는 물론 미첼의 가족과 어머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준다. 미첼의 어머니 메이벨은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인 남부 명문가 딸로 여성 운동가였다고 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은 작가의 그것이 많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동명의 영화에서 배우 비비안 리가 연기했던 스칼렛은 얼마나 멋졌던가. 강인한 딸로 키운 어머니라는 존재는 참으로 위대하다. 3장 태양 가득히에서는 월트 디즈니의 디즈니 그림 명작’,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 마크 트웨인의톰 소여의 모험,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등 몇 작품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카리브해의 미스터리의 작품 세계와 그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간다. 특히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헤밍웨이의 흔적을 그렇게 샅샅이 돌아보고 소개하고 있는데 작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보기 좋았다. 무수한 여성 편력으로 세간에 오르내렸던 헤밍웨이지만 행복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에필로그에서는 미우라 아야코가 1964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빙점을 언급하고 있다. 나도 오래전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라 반가웠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일본 소설이 이 작품이라고 하니 당시 얼마나 인기 있는 소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곽아람 작가는 이 작품을 초등학생 때 읽었는데 얼마나 좋아하는 작품인지 중고생 시절에도 성인이 되어서도 반복해서 읽었단다. 이 작품의 배경지인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를 문학적 소양을 길러준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며 힐링하는 모습도 정말 보기 좋았다. 진정한 문학 사랑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되었다.

 



많은 문학작품과 배경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중 내가 정말 사랑했던 작품 빨강 머리 앤을 소개하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푸르른 이십 대 시절에 내가 번 돈으로 구매한 열 권짜리 시리즈를 읽고 또 읽으며 언제나 씩씩하고 긍정적인 앤을 보면서 미래의 꿈과 희망을 품고 용기를 얻었다. 올해 초에는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빨강 머리 앤 에니메이션을 발견하고 하루 이틀에 다 볼 정도로 정주행을 했다. 이제 하나의 꿈이 생겼다면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가서 그린게이블즈와 몽고메리의 생가 등을 돌아보는 것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은 저마다 꿈과 목표가 있을 것이다. 읽고 쓰고 여행하는 삶은 아마도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닐까. 허구로 그려진 소설이라는 장르를 읽으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도 한다. 곽아람 작가는 이 책을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 살고 있는 모든 꿈꾸는 자를 위한 여행기라고 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작품과 작가들의 발자취를 한번 걸어본다는 동기에서 접근해도 충분한 위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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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2-09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취 혹은 흔적을 찾는 여행의 감동과 설레임이 그 어떤것인지
미처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사적으로 존경하는 우리 역사의 인물들을 찾았던
그 느낌과 일면 유사할 것 같기는 하지만요.

좀 위험한 책인듯요~
이기기 쉽지 않은 격한 충동질이 전해오는걸 보니까요!!




모나리자 2025-12-09 20:03   좋아요 0 | URL
저는 7년 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 기념관이나 도쿄 대학에 있는 산시로의 연못을 찾아가 보고 설렜던 겅험이 있습니다.
6월 초의 한 여름 더위였지만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요.
벌써 7년이 지났다니 시간은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요!

저자가 사랑했던 작품과 작가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여행입니다.
여행을 충동질하는 작은 위험은 있겠습니다.ㅎㅎ

편안한 밤 되세요. 차트랑님.^^

마힐 2025-12-09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께서 꼭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가셔서 그린게이블즈와 몽고메리의 생가를 꼭 찾게 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나중에 감상문 꼭 올려 주셔야 돼요. ㅎㅎ

모나리자 2025-12-10 19:52   좋아요 2 | URL
네, 마힘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겠네요. 여행 다녀오면 꼭 알려드릴게요.ㅎㅎ^^

희선 2025-12-1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보다가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겠습니다 홈즈가 사는 곳 베이커가가 갑자기 생각나기도 하네요 홈즈 별로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앤이 살았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은 정말 많은 사람이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초록지붕집도 있고... 지금 생각하니 그런 책 보기도 했군요 모나리자 님 언젠가 그곳에 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나리자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시 쓰기 안내서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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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메리 올리버는 1935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났으며, 열네 살 때 시를 쓰기 시작해 1963년에 첫 시집 No Voyage and Other Poems를 발표했다. <뉴욕 타임스>는 메리 올리버를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시인이라고 평했으며, 그의 시들은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경이와 기쁨을 단순하고 빛나는 언어로 노래한다. 그는 월트 휘트먼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내면의 독백, 고독과 친밀하게 지냈다는 측면에서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되기도 한다. 저서로천 개의 아침을 포함한 스물여섯 권의 시집이 있으며 완벽한 날들, 휘파람 부는 사람, 긴 호흡등 일곱 권의 산문집을 썼다.

 



내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지난 9, 23년 만에 백일장에 참여하고 11월 시상식에 다녀온 것이 계기였다. 그날 문학상 시상도 함께 이루어졌는데 우리 지역 이름의 신인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다른 지역에 사는 고3 여학생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어린 학생이 문학상 수상자라는 것에 놀랐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도 시를 배운지 6개월 만의 성과라고 했다. , 그럼 나도 한번 써 볼까. 그 신인문학상은 오로지 시 장르만 응모할 수 있었다. , 나도 저 단상에 서서 신인문학상을 받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일까, 상상했다. 그렇다면 일단 시 쓰기를 배우는 것이 먼저지. 바로 희망 도서로 신청하고 두 달 넘게 기다리다 손에 들어온 책이다. 참 희한하다. 시 쓰기를 배워 볼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학창시절 시를 암송하고 애송 시집을 정성 들여 만들었던 추억은 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발상으로 선택한 책인데 미국 문단에서 꽤 유명한 시인이었다는 점과 시 쓰기의 기본기를 알려주는 내용이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이제 시 쓰기 안내를 따라가 보자.

 



목차의 내용은 준비, 시 읽기, 모방, 소리, 소리의 또 다른 장치들, , 몇 가지 주어진 형식, 자유로운 시, 어법ㆍ어조ㆍ목소리, 이미지, 고쳐쓰기, 창작 교실과 고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에서 보듯 시를 쓰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야 하는지 준비 과정이 있고 시를 구성하고 있는 행과 연 등 소리와 이미지는 어떻게 담아내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고쳐쓰기를 한 다음 하나의 시로 탄생한다. 메리 올리버는 시 한 편을 사오십 번 정도나 수정한 뒤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해서 놀라웠다.

 



그렇다면 시를 쓰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메리 올리버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밀 연애 얘기를 꺼내면서 시를 쓰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두 사람이 만날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매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책상에 앉아있겠다고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라고. 또 하나는 시 읽기다. 좋은 시는 최고의 스승이라고 했다. 좋은 시와 시인을 찾을 때는 스타일이나 시대, 나라와 문화의 경계에 갇히지 말라고 했다. 시인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단일 부족이고 자신은 그 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라고 말이다. 적어도 크리스토퍼 스마트, 이백, 마차도 같은 시인들의 시를 만날 것을 권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모방을 죄악으로 여기지 말고 최대한 활용할 때 진짜 시를 탐구하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본격적인 시 강의에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져녁 숲가에 멈추어를 비롯한 존 키츠, 윌리엄 블레이크, 에밀리 디킨슨 등 여러 위대한 시인의 시를 언급하며 설명하고 있다. 영시 원문과 번역된 시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알파벳-소리의 계보, 두운, 모운 등 소리의 또 다른 장치들, 행과 길이와 리듬에 대한 설명으로 계속 이어진다. 길이와 리듬에서는 네 가지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1. 운율시에서는 시의 각 행을 운보로 나누고 각 운보는 강세(음절의 소리)로 나누어 전체적인 리듬 패턴을 나타낼 수 있다.


2. 행을 운보로, 운보를 각 구성 요소로 나누는 과정을 운율 분석이라고 한다.


3. 약강격 또는 약강운보는 약한 강세 다음에 강한 강세가 오는 구조다(기호ˇ´)


4. 약강격 다섯 개가 연속되면 약강 5보격이 된다(ˇ´ˇ´ˇ´ˇ´ˇ´).

 


약강 5보격 행은 영어 운율시에서 가장 널리 쓰이며 밀턴의 실낙원,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 워즈워스의서곡The Prelude등 특히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도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이처럼 5보격 행은 영미 시인들이 주로 쓰는 기본 행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영어 사용자의(영어로 말할 때의) 폐활량에 가장 잘 맞아 특수한 효과에서 제일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고. 일종의 표준이라고 했다.




<사진>54

 


이 부분은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데도 시에 문외한이라서 그런지 어렵게 다가왔다. 세상만사 중 무엇이 첫술에 배부르랴.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직접 느껴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 메리 올리버는 시를 읽을 때 가장 강력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리듬이라고 하면서 새내기 시인은 이 리듬 패턴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니는지 기억해두어야 한다고 했다. 리듬은 모든 것의 바탕이라면서.

 



시는 문학 장르 중에서 가장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경제적인 언어라고도 했던가. 이 짧다면 짧은 시가 상당히 많은 구성 요소를 내포한다는 것이 너무나 경이롭게 느껴진다. 리듬을 비롯하여 어법과 어조 목소리, 이미지, 수사까지 조화롭게 담아야만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가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 물고기The Fish를 소개하면서 어떤 시가 얄팍하고 빈약하게 느껴진다면 시인의 어휘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꽃들 사이에 오래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시의 구체성과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는지 그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시를 쓰는 작업의 고독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는다. 창작 교실에서 동료들과 교류하며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키며 귀중한 자양분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지만 시는 시인에게 교류나 가르침이 아닌 깊고도 온전한 고독을 요구한다고 했다. 물론 시 쓰기 모임이나 창작 교실을 만류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고독을 견디고 즐기는 가운데 그리고 자기와의 교감을 중요하게 여길 때 진짜 작업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 쓰기 안내서는 그 누구보다도 시 쓰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책이지만 시를 읽는 사람들도 시라는 장치에 대한 통찰과 시의 역사에 대한 유익한 생각을 얻길 바란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시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나 나아가 시 창작을 목표로 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깊은 인상을 준 문장

 


운동선수들은 몸을 관리한다. 작가 역시 시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감수성을 돌보아야 한다. , 다른 분야 예술, 역사, 철학, 그리고 신성함과 즐거움에 자양분이 있다. (중략) 활기차고 탐구하는 마음, 연민과 호기심, 분노, 음악이나 감정이 가득한 마음도 시의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시는 삶을 소중히 여기는 힘이다. 그리고 시는 하나의 비전을, 구식 표현을 쓰자면 믿음을 요구한다.’(p172~173)

 


시는 단어들의 집합이 아니라 추위에 떠는 이들을 위한 불이며, 길 잃은 이들에게 내려진 밧줄이며, 굶주린 자들의 주머니 속 빵처럼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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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9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9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5-12-1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온 건 라디오 방송에서 들어서 알았군요 예전에 메리 올리버 시집 보려다 그만뒀지만...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시인인 듯해요 산문도 좋아하고... 개를 소재로로 시를 썼던 것 같아요 자신과 함께 살았던 개...

모나리자 님 쓰고 싶은 시 즐겁게 쓰시기 바랍니다


희선
 
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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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인가부터 온라인 서점에 클레어 키건의 작품 리뷰가 자주 눈에 띄었다. 아직 읽어 보지 못했고 제목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대단한 호평과 함께 푸른 들판을 걷다,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이 왠지 시적으로 느껴져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너무 늦은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시적인 제목과는 달리 예리한 시선과 강렬한 문장의 어조라서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모습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는데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내가 예상한 분위기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낸 남자와 여자의 심리묘사는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몰입하게 된다.

 



이 소설집은 아주 얇은 데다 딱 세 편의 소설이 들어있다. 너무 늦은 시간,길고 고통스러운 죽음,남극이다. 너무 늦은 시간은 회사 업무로 만나 친해진 사빈과 카헐의 이야기다. 서먹한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하고 함께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결혼과 아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쩐지 서툴러 보인다. 남자로서 당당하게 청혼하는 것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여자의 마음을 떠보는 듯한 어조다. 서로 가까이에 있으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카헐이 어떻게든 사빈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거리를 둔다. 신시아에게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나름대로 카헐에 대해 분석해 보는 듯하다. 사빈에게 줄 반지를 맞추고 웨딩드레스를 사고 금세 결혼에 골인할 것 같은 기세로 진행되지만 다 틀어지고 만다. 카헐은 예전에 어머니를 대하던 아버지의 태도를 떠올리며 거기에 동조했던 자신을 후회한다. 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그렇다고 반성하지는 않는다. 살아가면서 내 몸에 새겨진 어떤 습관은 누군가에게는 혐오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인간관계 특히 남녀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소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세상사를 들여다보면 차별과 차이, 혐오의 대상은 거의 한 방향, 여성 쪽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이건 나의 생각이기만 할까.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에서는 애킬섬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에게 독일인 교수라는 남성이 불쑥 찾아와 그녀를 방해하고 무례하게 구는 이야기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도 여성은 예의를 갖춰 대접하지만 남성은 오히려 여성을 비난한다. 이러한 관계의 훼손은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을,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임을 공감하게 한다.

 



마지막 작품 남극은 그야말로 서스펜스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남편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던 평범한 주부가 오랫동안 꿈꾸던 일탈을 실행에 옮기다가 전혀 예상치 않은 상황에 놓이고 만다. 친절하게 보살펴주던 그가 돌변하다니. 달콤한 감정에 빠져 그게 바로 함정이라는 것도 미처 몰랐다. 도망치려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 그녀의 마음을 남극에 비유한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녀는 꽁꽁 언 남극 땅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한다. 키건의 다른 작품을 읽을 생각을 하니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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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3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4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5-12-04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키건의 책을 두 권 샀어요.(저 책은 아니고요.)
대단한 작가입니다. 많은 책을 내지 않았는데 내는 책마다 문학상을 받고 애독자들이 많다니...
적게 일하고 많은 수익을 보는 작가, 라고 할 만합니다. 부 러 워 요..^^

모나리자 2025-12-04 17:41   좋아요 0 | URL
네, 이 작가 정말 카리스마도 느껴지고 글도 울림이 있습니다.
대단한 작가 맞지요. 부럽다는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2025-12-04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4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5-12-05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클레어 키건 소설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짧아도 거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담는 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가 봅니다 세계 사람이겠네요

모나리자 님 서재 달인 되신 거 축하합니다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모나리자 2025-12-06 12:24   좋아요 1 | URL
네, 짧은 단편이지만 꽤 강렬하고 울림이 있는 이야기였어여요.
하루키는 이미 20년 전에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높이 평가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엔 늦게 소개된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 희선님도 축하드려요. 건강 잘 챙기시고요.^^

서니데이 2025-12-07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편안한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클레어 키건은 최근에 책이 많이 소개되는 것 같은데, 단편이나 페이지가 많지 않은 책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는 조금 늦게 번역되지만, 좋아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올해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제 서재에도 댓글 남겨주시고 관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모나리자 2025-12-08 17:45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님.^^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네요.
이 작가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은 많은 나라에 소개되겠지요.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려요.

추운 날씨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12월에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연에 대해 생각할 때 산문의 문단을 연상하면 유용할 수 있다. 문단은 하나의 생각이 끝나고 새로운 생각이 시작됨을 나타내는 합리적 분할이다. 물론 시인이 반드시 이런 방식으로 연을 구성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 P85

연은 시인이 독자에게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느껴야 하는지안내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시의 설계에서 형식적 질서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연은 유용하고 동시에 기쁨을 주는 장치이다. - P86

음절시는 한번 정한 패턴을 철저히따르는 시 형식으로, 첫 번째 연의 각 행에 포함된 음절 수를이후 연들에서도 정확히 지킨다. 각 행의 단어들이 한 음절이든 여러 음절이든 상관없다. 각 행에서 강세가 어디에 놓이느나 역시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각 연의 행마다 정확히 같은음절 수가 반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로써 시의 패턴이 정해진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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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2-04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모나리자님,
모나리자님께서 게시한 어느 글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모나리자님께서 쓰신 글이
언젠가 저의 서재에 페이퍼를 쓰는 단초가 될수도 있습니다.
행여 그런 일이 있게되면
나의 글이 차트랑에게 하나의 글을 쓰는 계기가 되어주었구나, 라는
너른 양해를 구해봅니다 모나리자님.

설사, 그런 일은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줄 수가 없어!! 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소용은 없습니다.
저는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일이 있게 됨을 알려드리면
덜 당혹해하실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요 모나리자님!



모나리자 2025-12-04 18:49   좋아요 0 | URL
이 글을 늦게 보았네요. 차트랑님.^^

제가 게시한 어떤 글을 읽다가 차트랑님의 글쓰기의 계기가 되었다면
저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제가 더 감사한 걸요.

그리고 이 말씀은 저에게 응원의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좀 더 분발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자, 하는 다짐을 하게 되니까요.

오늘 차트랑님의 서재에 방문해서 둘러 보았는데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이시구나 했습니다. 저는 문외한이거든요.:;^^

12월 추운 날씨지만 따뜻한 시간 보내시고 화이팅 하세요. 차트랑님.^^

페크pek0501 2025-12-04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면 산문을 쓰더라도 시적 표현이 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모나리자 2025-12-04 17:49   좋아요 1 | URL
저도 검색으로 이 책 알게 되었는데 아주 유명한 시인이 썼더군요.
내용도 알찹니다. 좋은 선택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페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