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감각 세계의 건물을 떠받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며, 믿음이 없으면 건물은 흔들린다. 우리는바로 이 믿음이 사람들의 가치와 무용성을 결정하며 또 그들을 만날 때면 느끼는 열광이나 권태의 감정을 결정하는 걸 보아 왔다.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않아 끝나리라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도 슬픔이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또는 슬픔이 돌연 커져서 한 존재를 우리의 목숨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믿음은 슬픔을 견디게 한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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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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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후략)

-문태준 시인의 시 <맨발>의 일부-

 



10년 전 맨발이라는 시로 문태준 시인을 처음 만났다. 개조개의 삐죽이 나온 속살을 보고 맨발로 표현할 수 있었다니, 시인의 탁월한 은유와 관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은 슬피 우는 제자들의 모습, 사랑을 잃고 가슴 아파하는 이들,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 견뎌내는 이들을 하나하나 소환시키며 그들의 가장 아래에는 맨발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것을 맨발이라는 단어로 치환시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그때 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왔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 조금 있으면 지나가리라는 것을.

 



수백 권의 시집을 읽고서 시에 대해 조금 눈을 떴다고 했다. 너무 겸손한 시인이지 않은가. 그 시가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어서인지 문태준 시인의 산문집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이 책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어있다. 서문 저자의 말에서 시인은 문장을 얻는다는 것은 새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새로운 마음을 얻는다, 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인은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 이사와 살면서 새로운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돌밭과 해안, 오름과 숲에서 해녀와 대양의 어부, 귤밭의 농부와 산인(山人) 이웃들, 여객선, 섬들, 자연에서 문장을 얻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4계절 이야기는 시인이 시의 첫 문장을 만나기 위해 사유하며 보낸 과정의 여정이기도 하고 몸과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난 시와 음악, 미술, 영화와 사람들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고 했다. 또 문태준 시인이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마음에서고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한다. 이 말을 접하고 보니 시 맨발과 사람에 대한 인정’, ‘애정이 있었기에 탄생한 시라는 걸 알게 된다. 이러한 시인의 시 철학은 문장들 속에 따뜻하고 선명한 색깔로 그려진다.

 



봄은 여러 가지 색실을 바늘에 꿰어 봄꽃을 수놓고 그것으로 자연의 옷감을 장식할 것이다. (중략) 농부는 밭에 새로이 곡식의 씨앗을 뿌리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할 것이다. 발아를 앞둔 씨앗들은 고운 이가 돋아나는 아가의 잇몸처럼 근질근질할 것이다. 바야흐로 생기의 봄이 오고 있다.’(P58)

 


요즘 가을볕은 금모래처럼 곱다. 잠깐씩 햇살 속에 앉아 있기도 한다. 무언가를 노란 보자기에 싸서 놓아둔 것처럼 마루에 내려앉는 가을빛은 따사롭기만 하고, 푸근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 햇살을 저장할 수 있다면 두고두고 아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P184)

 



어쩜, 산문이 이렇게도 시 같고 그림 같은지! 글을 읽는 내내 눈앞에 그림이 그려질 정도다. 발아한 씨앗들은 곧 돋아나려는 아가의 잇몸처럼 근질근질할 거라고 한다. 씨앗과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인가. 앞부분에서 문태준 시인은 시인은 세상의 모든 생명 존재가 서로 듣는 존재라고 했다. 서로 잘 듣고 들어주어야 하는데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이러한 소통이 잘 안 되어서 상처를 주고받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끊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서로 듣는마음이 아닐까.

 



시인의 온갖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나를 옛 추억의 한때로 데려다주어 희미하던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고향의 그리운 것들을 상기시켜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우리는 햇살 한 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존재다. 비대면을 요구하는 시간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 북적이는 사람들의 인파가 그립다. 마주 앉아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시절이 그립다. 이렇게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사소한 일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내 가까이에 널려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살면서 자주 과거를 떠올리곤 한다. 그 시절의 따뜻한 기억, 후회스러운 일, 떠나간 사람과의 추억 등. 어떤 이는 현재에 집중하며 살기 위해서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태준 시인은 굳이 과거의 시간을 회피하거나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 땅으로부터 뿌리가 뽑힌 꽃나무가 더 자랄 수 없듯이, 우리는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줄기와 잎과 꽃을 얻게 된 꽃나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옛 시간을 옛사람의 시간을 함께 살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 지나갔다고 어제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오늘은 어제이며 내일이기도 한,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 시인은 이렇게도 시를 많이 읽는구나 싶었다. 이야기마다 시가 나왔다. 시가 나오면 소리내어 읽었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문장을 읽으며 그림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왠지 천천히 음미하듯이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시인이 한순간 한순간을 살면서 사유했던 순수함과 맑은 마음이 글에서 전해져 왔다. 계절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끝에서 시가 만들어지는구나 싶었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한 편의 시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시를 잘 완성하려면 참 나를 만나며 살아가는 태도야말로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 산문집을 읽고 느낀 건 나도 새벽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한동안 쓰다가 말았던 미라클 모닝모닝 페이지가 생각났다. 오늘 할 일 메모도 좋고 뭐라도 좋을 것이다. 시인이 항아리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공부와 수행의 대상으로 여기듯이, 나도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통해서 좀 더 충만한 날들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행복의 꽃들이 생활 곳곳에 피어나길바란다고 했다. 시인이 첫 문장을 만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사유했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나로 나아가고 싶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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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06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백권의 시를 읽어야 시에 눈을 뜰 수 있군요~!! 산문인데 시처럼 느껴지네요. ‘햇살을 저장할 수 있디면‘ 이 표현 너무 멋져요~!!

모나리자 2022-03-07 10:07   좋아요 1 | URL
네, 역시 시인은 시를 많이 읽더군요.
문태준 시인이 시를 만나기 위한 과정은 자신의 마음 들여다보기, 그리고
자연과 사물과의 교감, 그 자체였어요.
시적인 문장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한국의 ‘서정시인‘이라는 칭호가 붙었나봐요.

새 한주도 화이팅 하세요. 새파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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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알베르틴 양이 떠났어요."라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고통을 불러일으켰는지, 더 이상은 오래 버틸 수 없을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나의 온 삶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모르는 걸까. 고통을 즉시 멈춰야했다. 마치 죽어 가는 할머니를 보며 어머니가 그랬듯이 스스로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 P15

괴로워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선의의 마음에서스스로에게 말했다. 잠시만 참아. 곧 방법을 찾아볼 테니. 마음을 가라앉혀. 널 이처럼 괴로워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  - P16

알베르틴이 내 옆에 있다는 그토록 큰 확신 속에살아온 내가, 돌연 ‘습관‘의 새로운 얼굴을 본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습관이 우리 지각의 독창성과 의식마저 제거하고 무로 돌리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습관을우리에게 고정된 무시무시한 신(神)으로 간주했고, 그 무의미한 얼굴이 그토록 우리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어서, 만일 우리가 거기서 떨어져 나가거나 멀어지기라도 하면 여태껏 거의알아볼 수 없던 그 신은 어느 누구보다 무서운 고통을 야기하고, 그리하여 죽음만큼이나 잔인한 존재가 된다.
- P17

나는 그녀가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쁜 짓을 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내 집에서 나와 함께 권태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종류의 슬픔보다 어쩌면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 이미 여러 번 깨닫지 않았던가. 물론 어딘가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그것이 어떤 기획된 광란의 파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를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일이 무척 끔찍할지도 모른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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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을 뽑는 노동을 통해 자꾸자꾸 자라려는 탐욕을 관조한다. 많은 경전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얻게 되는 이익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슬픔이나 두려움이 적고, 마음이평온하고, 여유가 있고, 항상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하소연을 하지 않고, 노심초사하지 않고, 다투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풀과 돌멩이를 다루는 시간도 곧 우리에겐 수행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 P104

 우리는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영향관계에 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고달픔은 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그릇되게 되면 다른 것들도 그릇되게 된다. 연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을 비방하는 것은 나를비방하는 것이요, 남을 믿지 못하는 것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된다.  - P143

떠나가는 것을, 마지막 생명의 빛깔을 보여주고 그 화려함을 거두는 것을 우리는 가을의 시간에 마주한다. 사람의몸도 변해간다. 가을처럼. 젊은 시간은 지나간다. 병이 오기도 한다. 사람을 잃기도 한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도 없다.
- P170

요즘 가을볕은 금모래처럼 곱다. 잠깐씩 햇살 속에 앉아있기도 한다. 무언가를 노란 보자기에 싸서 놓아둔 것처럼마루에 내려앉는 가을빛은 따사롭기만 하고, 푸근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 햇살을 잘 저장할 수 있다면 두고두고 아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 P184

관심 없이는 아무것도 기를 수 없고, 아무것도 지닐 수없다. 관심은 연료이며, 엔진이다. 그러나 관심하다는 말은차고 뜨거운 마음의 온도를 동시에 포함한다. 관심이 모든것을 기른다고 해서 무조건 좋게만 대해서는 되지 않을 때도 있다.
  - P195

정신분석학자이면서 사회심리학의 개척자인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무기력이 분노와 공포, 신경증 같은 것으로나아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면서 무기력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감탄하는 능력을 키우고,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고, 피하지 말고 갈등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 P199

과거로의 회고가 퇴행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과거의 시간을 회피하거나 부정할 이유가 없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땅으로부터 뿌리 뽑힌 꽃나무는 더 자랄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줄기와 잎과 꽃을 얻게 된 꽃나무와도 같은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시간을, 옛 사람의 시간을 함께 살면 된다.
- P257

도움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곳곳에서, 또 모든 존재로부터 덕담을 들을 수 있다. 한 톨의 씨앗도 훌륭한 덕담의제공자가 될 수 있다. 나 자신도 내게 덕담을 들려줄 수 있다. 우리가 진심으로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그리고그것을 버킷 리스트처럼 덕담의 목록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말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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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모나리자 > 잠을 자러 올라갈 때 내 유일한 위안은 내가 침대에...

벌써 1년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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