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나는 내 의식의 상태들을 나란히 차례차례 안에서밖으로 좇아가다가, 그 상태들을 감싸고 있는 현실의 지평선에 도달하기에 앞서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맛본다. 이를테면편히 앉아 있는 즐거움, 신선한 공기 냄새를 맡는 즐거움, 방문객에게 방해받지 않는 즐거움, 그리고 생틸레르 성당 종탑 - P157

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올 때 그 종소리를 전부 합하여 마지막 소리를 들을 때까지 이미 흘러가 버린 오후의 몇시간이 조각조각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또 그에 뒤이은 오랜 고요가 저녁 식사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는 낮의모든 부분을 푸른 하늘에 펼치기 시작하면서 프랑수아즈가맛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여 책을 읽는 동안 책 속 주인공을쫓아다니느라 피곤해진 내 기운을 북돋아 주려니 하고 생각하는 즐거움이었다. 



- P158

베르고트의 찬미자는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그는 문학에아주 조예 깊은 내 어머니 친구분이 선호하는 작가이기도 했다. 또 뒤 불봉 의사는 베르고트의 최신작을 읽으려고 환자들을 기다리게 할 정도였다. 이렇듯 의사 진찰실과 콩브레 근교 공원으로부터 베르고트에 대해 열광적인 최초의 씨앗들이 퍼져 나갔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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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말하기 뭣하지만, 아저씨는 문제가 좀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말했다.
"아저씨가 지금 어떤 곤경에 처해 있든지 —— 보나마나 곤경에 처해 있겠지만 ㅡ 그건 아저씨가 자초한 게 아닌가 싶어요. 아저씨에게 근본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게 자석처럼 갖가지 골칫거리를 끌어들이는 거죠.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여자는 아저씨 곁을 재빨리 떠날 거예요.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 P95

그렇게 압도적인빛 바로 아래에, 이런 유의 어둠이 존재한다. 사다리를 타고조금 지하로 내려왔을 뿐인데, 이렇게 깊은 어둠이 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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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어느 곳에, 천박한 섬이 있어요. 이름은 없습니다. 이름을 붙일 만한 섬이 아니죠. 아주 천박하게 생긴 천박한 섬입니다. 거기에는 천박한 모양의 야자나무가 있죠.
그리고 그 야자나무는 천박한 냄새가 나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또 거기에는 천박한 원숭이가 살고 있어서, 그 천박한 냄새 나는 야자열매를 즐겨 먹어요. 그리고 천박한 똥을 싸죠. 그 똥이 땅에 떨어져 토양도 천박해지고, 그 토양에서 자라는 야자나무를 더욱 천박하게 하죠. 그런 순환입니다."
- P69

최소한 샌드백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죠. 맞으면 맞받아칩니다. 그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 P71

저는 자신의 인생을 어쩌다 잃어버렸고, 그 상실된 인생과함께 사십 년 이상이나 살아 온 인간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같은 처지에 있는 인간으로서, 인생이란 그 와중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라는 행위 속에 빛이 비추는 것은 한정된 아주 짧은기간뿐입니다. 어쩌면 불과 10여 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이 지나 버리고 나면, 그리고 그 빛이 보여주는 계시를 포착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존재하지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후의 인생을 구원 없는 깊은 고독과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같은 황혼의 세계에서 사람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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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10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빛이 보여주는 계시를 포착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존재하지않습니다.인생을 구원 없는 깊은 고독과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문장 읽고
오늘도 열쉼히 ^.^

모나리자 2021-03-10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겐 ‘오늘‘, ‘지금‘이 기회이겠지요. 함께 오늘도 열심히!!^^ㅋㅋ
 

종탑 끝이 얼마나 가늘고 얼마나 선명한 분홍빛이었는지, 오직 자연으로 이루어진 이 풍경, 이 화폭에 누군가가 예술의 작은 흔적, 단 하나의 인간적인 표시를 남겨 놓으려고 손톱으로 하늘에 줄을 그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종탑만큼 높지는 않으나 그 곁에 반쯤 무너진 네모난 탑의 나머지 부분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돌 더미의 어두운 진홍빛에 놀랐다. 마치 가을날 안개 낀아침에 강렬한 보라색 포도밭 위에 치솟은, 거의 개머루빛에가까운 자주색 폐허처럼 보였다.


- P118

 결국 우리가 되돌아가는 곳은 항상종탑이었고, 종탑이 언제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종탑은 예기치 않은 뾰족한 봉우리로 마을 집들을 불러내면서, 마치 수많은 인간 속에 몸을 파묻어도 내가 결코 혼동하는 일이 없는 신의 손가락처럼 내 앞에 모습을 내밀었다. 



- P123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아름다움에 대한 내 믿음이었고, 또 그 책이 어떤 책이든 간에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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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더 물어봐도 돼요? 아니면 안 묻는 게 좋겠어요?"
"물어봐도 상관없어. 대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인이 다른 남자랑 집을 나갔어요?"
"모르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이상하네, 계속 같이 살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몰라요?"
맞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 그런 것도 몰랐을까.
- P39

"그렇게 사소한 일이 의외로 중요해요, 태엽 감는 새 아저씨" 하고 가사하라 메이는 내 눈을 들여다보듯 보면서 말했다. "집에 가면 거울을 찬찬히 봐요."
"그럴게."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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