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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1991년부터 첫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 2000년까지는 한국이 남북 분단을 끝내기 위해 주도적으로나선 기간이다. 주목할 것은 냉전 시기에 미국의 종속 변수로 움직이던 한국이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국은 한미 관계를 기축으로 하면서도 스스로 행위자agent가 되었다.  - P58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총리를 비롯한 후임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 성과는 1975년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 CSCF에서 채택한 헬싱키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국가 주권의 존중과 국경의 불가침,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을 주장한 <헬싱키선언>은 회의에 참여한 소련을 포함한 유럽 33개국에미국, 캐나다를 더한 35개국 정상에 의해 조인되었으며 데탕트(긴장 완화)에 공헌했다.
- P60

그렇다고 해도 당시에 한국과 일본이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한것은 아니다. 일본의 바람은 어디까지나 남북 분단을 전제로 하는한반도 안정화였다. 동북아시아 전체의 질서 · 평화 체제를 실현하기보다는 남과 북을 교차 승인하여 한반도를 반영구적 분단 상태로 확정하는 편이 일본의 안보에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미국의 의도도 일본과 같았고, 이는 한반도의 고착 상태를 해체하려던 한국 정부의 목적과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 P62

 따라서 19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는 한국전쟁 이후처음으로 남북이 함께 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의미 있는 사건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가 상대를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라 국가로 인정하는 일이야말로 분단 해결의 첫걸음이다.
- P63

한편 북한도 일본과 교섭을 추진할 동기가 있었다. 북한 외교의최대 목적은 체제 보장이며, 그 교섭 상대는 미국이다. 그런데 부시 정권 출범 후 한미 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었기 때문에 북한은미국과의 관계를 중개하는 역할을 일본에 기대했다. 무시 대통령이 2002년 연두 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겨냥하자 타개책을 구해야 하는 북한의 입장은 한층 더 절박해졌다.
- P72

한반도 정세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확고히 해주리라 기대했던 북일 정상회담은 13명의 일본인이 북한에 납치되었던 문제가불거지면서 오히려 고이즈미 내각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  - P73

오바마는 한반도보다 유럽에 중점을 두었고, ‘전략적 인내는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오바마 정권의 의도였으며, 오바마 재임 8년을 지나 2018년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김정은을 만날 때까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오바마의 집권과 전략은 한반도 비핵화 문제 해결의 ‘잃어버린 10년‘ 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 P81

하지만 정체와 반동을 거듭하면서도 화해를 위한 성실한 노력들이 축적되었다. 특히 이 30년간 미국의 대북 정책에서 한국의동향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커다란 변화이다. 그 노력들이 2017년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문재인의 대북 정책과 2019년 북미 정상이 두 차례 만나는 극적인 장면으로 이어졌다.
- P82

(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의 능력을 폭발력 25 킬로톤, 폭발 확률80퍼센트로 가정했다) 두 나라의 수도권에서 사망자 210만 명,
부상자 770만 명이 발생한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핵 위협하에서 순치보거脣齒輔車(이웃 나라가 서로 도와야 함을 비유. 순망치한脣亡齒寒과 보거상의輔車相依를 결합한 말이다)의 관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쟁만은 피하는 시나리오를 공유한다면 양국의 상호 협조와 공동보조는 한반도와 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P87

북한 측의 불신 또한 만만치 않다. 미국이 자신들을 서서히 무장 해제시켜 알몸으로 만든 후, 결국에는 리비아의 카다피 Muam-mar Gaddafi처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듯하다. 

다만
‘리비아 방식‘을 따라 북한이 ‘전략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을 가해 핵 관련 시설을 한꺼번에 파괴하자고 주장하던강경파 볼턴이 면직된 경위를 볼 때, 트럼프 정권이 단계적이고점진적인 접근 방식으로 기울고 있음은 분명하다.
- P176

전쟁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점이 이미 이라크전쟁에서 증명되었다. 이는 전쟁의 승리가 국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역사의 예이다. 이제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비군사적 수단을 통한 문제 해결을도모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 P177

일본은 한국과 갈등을 겪고 있으며 북한과는 관계가 단절되어있지만, 그럼에도 미국의 가장 친밀한 동맹국이며 중국 및 러시아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6자회담의 무대를 베이징만이 아니라 도쿄에도 설정한다면 일본이 의장국이 되어 북미 교섭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납치 문제의 해결을 향한 북일 양국 교섭을타진할 기회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 분단 체제 극복의 촉매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또한그 결과 북한의 위협이 줄어들면 일본의 안전보장 비용 역시 큰폭으로 줄일 수 있다.
- P179

고대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해로 뻗은 한반도는 대륙의 최첨단 문화를 열도로 전달해주는 유방乳房 같은 존재였다. 21세기에 걸맞는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는 반도와 열도의 유구한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동북아시아를 향해, 더 나아가 유라시아를 향해 협력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팬데믹이라는 화過가 그 계시일지도 모른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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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습득보다는 습관이어야 한다. 영미권 자체의 문화를집에서도 가지고 있다면 굳이 단발적으로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 P105

내가 학교를 나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처럼, 일탈이란걸 생각해보지도 않은 모범생 헤르미온느가 나와 같은 길을 갈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감과 동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문학이 주는 위로가 이런 것인가 새삼 생각했다.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나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열정적으로 좋아했고, 그녀가 성장한 만큼 나도 함께 성장한 만큼 나도 모르게 문학 작품의 캐릭터를 어느새 닮아 있었다.  - P106

언젠가 나는 부모님께 "삶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면나는 주저 없이 바로 ‘상상력‘을 꼽을 거예요."라고 말씀 드렸다.
나는 지금도 상상력의 힘이 나의 다른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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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회북한의 조기 붕괴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었다. 소련이 무너진 뒤 호네거의 동독도,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의 루마니아도 붕괴했으니 북한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세습제 독재 국가가 변화를 버텨낼 리 없다‘ 등의 예상은 서구의 희망사항이었다.
- P47

우리는 이 문제에서 북한의 거듭된 도발과 배신이 비핵화를실현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북한이 처한곤경 또한 자업자득이라는 비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명확하고 일관된 정책 기조 없이 북한과 교섭한 미국과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 북한의 일관된 주장은 ‘핵 보유를 인정하라‘가 아니라체제의 존속을 보장하라‘ 이다. 그리고 체제 보장의 교섭 상대는미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은 20세기 후반의냉전 종식을 계기로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며 교섭을 주저했다.
- P53

 어떤 역사는 똑같은 일만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나선을 이루며 앞으로 향한다. 남북화해도 그와 같았다고 말할 수 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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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한 첫날 선생님으로 보이는분이 책장에 기대어 그 작은 도서관에서 가장 두꺼운 책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의 《레미제라블 ces Miserable》을 읽는 것을 보고 아홉 살짜리 나는 속으로 언젠가 나도 곧 반드시 저 책을 읽겠다고 다짐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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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을 지상 과제로 삼는 ‘십자군 정신‘에 휘둘린 채 ‘혐한‘과
‘반일‘이 가진 정치적 효용에 기대면 기댈수록, 사활이 걸린 국익과 그렇지 않은 국익을 분별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활이 걸린 국익을 해치는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 P16

더 이상 ‘혐한‘과 ‘반일‘에 갇혀 있을 여유가 없다. 서브프라임금융 위기를 웃도는 불황이 깊어지고 경제가 파탄 직전에 몰린 지금, 비타협적인 국력 소모전에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 P17

다음으로 유의할 점은 한일 양국의 국력 차이가 줄어들었다는사실이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은 1965년에는 양국의 1인당국내총생산이 약 9배 차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러시아, 이탈리아와 거의 동등한 세계 10위 수준으로 성장하는 사이에 무역 상대국으로서 일본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하락했다.  - P23

역사적 · 지정학적으로 21세기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전망할 때,
일본이 해야 할 역할은 막중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녕은 곧 일본의 평화와 안녕과 이어진다. 한반도가 혼란과 긴장, 그리고 전화에 휩싸인다면 일본의 평화와 안전 또한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 P29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요구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로 ‘끝나지 않은 20세기에 머물러있다. 새 시대로 나아가지 못한 까닭 가운데 하나는 북한 핵 문제이다. 북한의 핵 개발 중지와 핵 폐기를 요구하는 교섭이 시작된지 어느덧 30여 년이 지났다. 현재 북한은 20개 이상의 핵탄두를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며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발사 실험에 성공한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었다.
- P33

하지만 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의 평화 체제는 모두의 기대처럼되지 않았다. 「제네바합의의 체결을 불과 몇 달 앞둔 1994년 7월,
‘북한 건국의 아버지‘ 김일성이 급사하면서 정세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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