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그리고 고발 - 18번째 소송과 그 다음 이야기
안천식 지음 / 옹두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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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저자인 안천식 변호사가 향산리 지주 기노걸(아들 기을호)이 건설사와 토지매매계약을 하고 잔금을 못받고 있는 중에, H건설에서 땅을 팔지 못하도록 처분금지가처분을 해 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기을호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아 2005년 8월부터 2014년 7월까지 10여 년간 18번의 소송의 기록을 쓴 글이다.

 

사건의 전말

부동산 광풍이 불던 1997년 D건설은 김포시 고촌면 향산리의 지주 24명과 약 1만 4,550평의 토지에 대해 매매계약을 이미 체결하고, 계약금과 중도금 합계 약 72억 원을 지급하였으나, 나머지 잔금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기노걸도 그해 자기 소유의 땅 약 980평을 19억 6,000만원에 매매하는 계약을 체결한 뒤, 그 중 9억 8,300만 원을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지급받고 나머지 잔금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D건설은 그 와중에 1998년경 IMF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워크아웃 대상기업이 되었고, 1999년 11월 24일 H건설주식회사는 위의 부동산 매매계약을 포함해 이 지역 사업권을 36억 원에 양수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때 H건설과 D건설 사이에서 다리를 놓은 것이 Y종합건설주식회사(대표김영환)라는 시행사였다.

 

주요인물과 증인들

1. 피해자- 기노걸(망)- 아들 기을호

2. 이지학(망)-기노걸과 건설사의 토지매매계약시 중간 역할을 함. 기을호의 친구임.

3. 증인A-기노걸과 이지학이 계약서 작성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유일한 사람.

   H건설의 토지매입 용역회사인 Y종합건설의 전무이사임.

4. 증인B- H건설 차장

5. 증인C-W공영(Y종합건설의 하청 용역업체)에서 회계 및 총무로 근무함.

   이지학의 지시로 기노걸과 허창의 계약서에 기재된 필체의 주인공.

 

 잔금을 못 받은 상황에서 2000년 12월 21일자로 H건설에서 토지에 가처분을 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2004년 8월경에 기노걸은 사망하였으며 기을호의 요청으로 2005년 8월 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H건설 명의의 가처분에 대해 이의신청을 접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토지소유권 이전 및 건물철거 청구 소송이 시작되었다.

 

 H건설에서 제출한 부동산매매계약서에는 기노걸의 성명, 주소, 주민등록번호와 계좌번호 란에 기재된 통장 계좌번호는 기노걸의 자필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씨였고, 날인 란에도 기노걸 이름이 새겨진 ‘한글 막도장’이 날인되어 있었다. 더구나 2004년 8월경에 사망하기까지 이 사건 계약서와 관련하여 기노걸에게 단 한 번도 연락을 취해 온 사실이 없었고, 단 한 푼의 잔금도 지급한 사실이 없었다고 한다.(P30)

 

계약서가 위조되었음을 알게 되는 상황이다. 기노걸의 자필과 인감도장이 아닌 한글 막도장이 찍혀 있었다.

 

법정의 공방

H건설의 주장은 1999.11.24일 경 <증인A>가 기노걸과 H건설을 대리한 이지학이 기노걸의 자택을 방문하여  매매계약이 이무어지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하면서 기노걸의 진정한 의사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기을호측에서는  2000년 7월 28일자로 Y종합건설이 기노걸에게 발송한 통고서를 증거로 제시한다.

그때까지 기노걸은 동의하지 않고 있어서 재촉하는 내용증명을 보낸 것이므로 1999.11.24일의 매매계약은 위조된 것이며 <증인A>의 진술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새롭게 발견된 것은 계약서상에 기재된 통장 계좌번호가 D건설로부터 계약금과 1차 중도금을 지급받은 뒤 1997년 9월 24일자로 해지한 통장이라는 사실이다.

 

뒤에 계약서에 기재한 필체의 주인공은 <증인C>로 밝혀진다.

아래 사진은 <증인C>음성녹음의 내용이다. 이런 사실이 있는데도 

'안천식변호사가 협박하였고, 기을호가 평생 먹을 것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였다며 위증을 하고

번복을 한다.

그럼에도 법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H건설의 승소가 1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공방이 진행될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계약서를 당사자도 모르게 대리로 작성하며 그것도 모자라 위조하고, 농협직원이 차명계좌를 개설해 주는 등 증인들의 위증, 반복되는 진술 번복, 그런데도 한결같이 H건설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재판부는 정의의 편이 아니었다, 위임받은 권력을 등에 업고 권위를 내세웠다.

마치 H건설과 재판부가 사전에 만나 말을 맞추고 예행연습, 작전회의를 하여 결론은 H건설의 승소로 정해놓고, 무대에 서서 그 과정을 시연하는 느낌이었다. 검찰에 필체감정을 신청해도 거절하고, 재심청구도 기각한다. 마치 어서 포기하고 나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아래의 사진은 이 사건의 향산리 지주 24명 중  유일하게 기노걸과 허창의 계약서가 위조되었는데

그 사실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재판부에 재심을 청구하여도 기각을 시켰다.

H건설측은  전에 판사출신으로 전관예우를 받은 변호인을 내세워 막강한 권력을 과시했다. 어디 한번

대항해 보라는 듯이...

모든것이 H건설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대기업은 헌법의 위임을 받은 권력자들도 이렇게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기을호는 끝내 잔금을 못받고, 오히려 H건설은 세입자 건물 철거를 핑계로 3억 8천만원을 뜯어갔다.

악랄하게 한 개인을 유린하고 무너뜨렸다. 10여 년 동안 18번의 소송이 철저하게 패소하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거짓말(증인의 위증)의 잔치에 초대된 것처럼 어이가 없고 화가 나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법조계에 몸을 담고 국민의 세금인 국록을 받아먹고 사는 사람들. 그 권력을 등에 업고 의기양양하게 모든 것을 떡주무르듯하는 대기업. 참으로 무섭다. 도대체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인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은 아예 제쳐놓고 자신들의 이익과 생존을 위하여 발악을 하는 모습이 생생했다. 힘없는 개인이 거대한 대기업과 헌법의 권력을 위임받은 권력자에게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려 한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할 정도로 허탈함이 밀려왔다.

 무릇 법을 다루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조직의 이익, 권력, 권위가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헌법의 정신에도 위배되는 사안일 것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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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절벽 - 노후 공포 시대, 젋은 은퇴자를 위한 출구 전략
문진수 지음 / 원더박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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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양육할 그 당시만 해도 직장인들의 ‘은퇴’란 어느 정도 환상을 가진 꿈의 이상향 같은 어감을 내포한 단어였던 것 같다. 열심히 일한 다음에 자유로운 몸이 되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여행도 하며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자 했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희망퇴직, 강제퇴직 등의 이름으로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직장에서 내쳐지는 냉혹한 단어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국가를 믿고 개인이 편안한 마음으로 노후를 보낼 수 없다. 몇 십 년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밀려나게 되고, 그로 인해 가정에서는 가족들과 경제적, 정서저인 갈등이 고조되어 급기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은, 아니 현실의 삶도 팍팍하여 미래까지 챙기며 살 수 없는 삶의 구조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은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는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이라고 한다. 산업혁명의 결과에서 비롯된 산물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강제적인 은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분명해졌다. 과학의 발달과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졌고, 100세 시대가 도래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은퇴 나이는 점점 빨라지고 살아가야 할 날은 길어서 장수가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인생 100세 시대를 살려면 최소 10억 원을 준비해야 한다.”(p68)

보험회사의 노후 위험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마케팅이다. 자녀교육과 내집마련에 올인하며 살아가다가, 어느 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리는 삶엔 대출금이 고스란히 남은채로 마주한 현실. 미래를 위하여 충실히 대비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삶을 좀 단순하고 소박하게 하면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니어도 노후를 지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휘둘려 감정을 소모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저자는 은퇴 절벽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돈’보다는 ‘일’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은퇴를 하고서도(자의든 타의든) 남은 생을 다시 일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바에는 비축해 놓은 돈이 없는 것에 상심하기보다는 원하는 동안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삶에는 플러스가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인생 이모작을 위해서는 10년계획을 세워 학습하기, 건강수명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실천하기 등을 통해 절벽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엔 삼포세대를 넘어 오포세대, 칠포세대, 흙수저• 금수저, 헬조선 등 과거엔 듣도 보도 못했던 수많은 신조어들이 만연하고 있다. 이는 팍팍한 우리의 삶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청년을 살려야 우리의 사회도 정상적으로 가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국가 사회는 청년실업, 은퇴 등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지 말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응하여 필요한 제도를 정비하고 투자를 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임해야 할 것이며, 개인은 나름대로 예전의 고루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면 언젠가 불쑥 찾아올 수도 있는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해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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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전쟁 - 걷으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하노 벡.알로이스 프린츠 지음, 이지윤 옮김 / 재승출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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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금’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저 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어렵고 복잡해서 별로 알고 싶지 않는 분야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상식을 깼다. 더 알고 싶어졌다! 세금 이야기를 쓴 책을 읽으면서 웃어본 적은 처음일 정도로 재미있었다. 게다가 전문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알기 쉽게 풀어 쓴 저자의 노력이 문장 전반에 걸쳐 재치와 유머로 반짝인다.

 

 

 인간의 삶에서는 오직 죽음과 세금만이 확실한 것이라고 하면서 동서고금의 세금의 역사, 여러 터무니없는 세금에 대한 이야기, 역사적인 인물의 사건과 사례에 얽힌 세금에 관한 비애, 하나의 세금이 탄생하기까지 국가와 정치가가 결탁하는 등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뒷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격인 성경에 나와 있는 고대의 세금에 대한 이야기로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화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는 것을 통해서 세금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세금은 고래(古來)로부터 오늘에까지 계속 진화하고 늘어 인간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19세기까지 존재했다는 ‘창문세’ 또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다는 수염세,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범인을 잡지 못하면, 일정량의 공물을 바치게 했다는 살인세 등 지금으로 말하면 납득할 수 없는 웃기는 이야기다. 역사책에서만 알던 표트르 대제가 세금을 걷기 위해 얼마나 악착을 떨었는지.

 

 

  세금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탈세가 있기 마련이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세금을 전가하게 되는 이야기. 처음 듣는 ‘세금해방일’이라는 단어, 과도한 세금 때문에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 탈세의 온상이 된 제3국에 대한 이야기 등 재밌으면서도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작은 분노(?)까지도 느껴졌다.

 

 

  예나 지금이나 공통적인 것은 세금은 납세자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국가는 나라의 살림을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는다. 한번 늘어난 세금은 결코 줄어든 적이 없다고 한다. 선거시즌이 되면 여러 공약을 내세워 유리한 방향을 끌어내기 위하여 혈안이 된다. 이를테면 ‘부자감세’등 새로운 세금을 고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쪽이 혜택을 보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대 세금의 역사, 증세를 위해 만들어 낸 별 희한한 이름의 세금, 세금을 둘러싼 국가와 정치가의 전략에 휘말려 국민들이 얼마나 허리가 휘는 삶을 살아오고 또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삶이 있는 한 세금과 결코 떨어질 수 없다면 이제라도 우리는 좀 더 관심을 갖고 똑바로 지켜볼 일이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쓰이는 것이 모두를 위한 최상의 것이지만 완벽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일까.



"사람들은 적은 세금보다 공평한 세금을 원한다."-미국의 유머 작가 윌 로저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시민의 것은 시민에게서 뺏는다'(p384)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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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연애는 열병‘이라든가 ‘연애는 맹목‘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랑과 연애는 다르다. 사랑은 겹겹이 쌓여 승화해 가는 것이지만,
연애는 타올라서 이윽고 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俗に「恋は熱病」とか「恋は盲目」とかいわれている。愛と恋は違う。愛は積み重ねて昇華して行くものだけれど、恋は燃え上ってやがては灰になってしまうものだ。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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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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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맨부커상 수상작과는 달리 좀 안 읽혔다. 초반에는 좀 지루한 느낌이었고, 과거의 기억과 현실을 오가는 때문인지 앞뒤로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작품의 도입 부분부터 감정을 절제한 자제력 있는 깔끔한 문장과 작가의 감성이 느껴졌다. 오히려 담담한 절제미가 눈물을 자아내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형 톰이 전쟁에서 돌아왔는데,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는 장면...)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는 문학을 통해서 간접체험 한다. 직접 체험한 사람의 심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문학 작품을 통해 그 참상을 감정이입하며 공감하게 된다. 전에 읽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삶의 의미 찾기가 주제였다면, 이 작품은 열린 공간이지만 자유롭지 못한 포로였다는 점은 비슷하다. 오히려 더 가혹하다고 할까. 동료들 앞에서 구타를 당하고 모든 수치스러움을 견뎌야 한다.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선악, 상실감으로 인한 무기력 등 복잡한 내면의 심리를 이토록 세밀하게 그릴 수 있을까 싶다.



 이 작품의 내용을 알기 전에 제목만 봐서는 시적인 느낌이 강했다. 일본의 와카[和歌]와 함께 일본 시가문학의 커다란 장르를 이룬다는 하이쿠가 등장한다. 17세기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고전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의 영어판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에번스가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말하는 장면과 하이쿠를 언급하는데, 그 시적 우아함과는 전혀 상반되며 오히려 그 참혹함의 대비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라인에서 살아남아 현재 잘나가는 의사이자 화려한 전쟁영웅이 된 외과의 도리고 에번스다. 의도하지 않게 언론과 방송의 주목을 받으며 어느새 유명(有名) 인사가 되었지만, 마음은 몹시 불편하다. 도리고 에번스가 젊은 날 전쟁터로 출정 전 우연히 만난 키스 고모부의 아내 에이미와 나눈 사랑에 대한 기억과, 차후에 철도건설 현장의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겪는 잔혹하고 비참한 현실이 주된 이야기 배경으로, 자신의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교차하며 괴로워하는 삶의 어둡고도 치열한 현장을 보여준다.



 굶주림과 전염병과 폭력이 난무하는 빗속의 정글에서 철도 건설 현장에 투입된 포로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참혹함 그 자체이다. 주먹밥 하나로 하루 일정을 마쳐야 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도 채울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상황이라 먹을 것과 휴식만이 간절하다. 기계도 없이 정과 망치 하나만으로 정글을 베어내고 바위를 깨서 길을 내야 하는 과정이다. 간혹 오리 알 이나 작은 야자당 한두 개를 구경하게 되면 그들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대하듯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을 대하듯이희망을 가진다. 어디 굶주림뿐인가. 군화도 없이 맨 발로 작업복은커녕 거의 알몸이다시피 한 몸으로 이동하다가 죽기도 한다. 철도 건설이 진척되기도 전에 시체가 쌓이기 시작한다.



 이에 일본군 사령부는 안달이 난다. 완공 시한을 두 달이나 앞당기며 채찍을 가한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일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도 고타와 나카무라는 잇사와 부손, 바쇼의 하이쿠에 공감하면서 점점 감상에 빠져든다. 철도가 인도 침공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생각, 바쇼의 아름다운 시와 더불어 온 세계가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들뜬다. 철도의 완성은 일본 정신이며, 유럽인이 못한 일을 자신들이 해냄으로써 우월한 인종이라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고 그 정신이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할 거라는. ()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랑에 관한

키스 멀베이니와 에이미의 어긋난 사랑은 도리고와 엘라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도리고의 마음에는 에이미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욕망, 끝없는 바람기가 계속된다. 아내와 자식들과의 불협화음을 이룰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의 육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절제할 수 없는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한 배려의 결여, 윤리적인 의식의 결여에 다름 아니다.



 만약, 에번스가 빅터 프랭클 처럼 삶의 의미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원()의 일상으로 돌아온 후반의 삶은 좀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그 자체가 감사함이 아닌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 모든 모임, 가족관계에서 외로움과 지루함을 느낄 틈이 어디 있겠는가. 외양만 영웅이 아니라 내적으로 성숙한 영웅으로서 희생자 가족이나 지역사회에 모범이 되는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한 노력 없이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는 없다. 그냥 자신의 마음을 따라 충족하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질서한 아수라장이 될 것인가.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그렇게 먹칠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악에 관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악을 저지르는 자는 의외로 원래 악한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고타는 하이쿠를 읊고 낭만을 아는 사람이지만, 천황의 명령을 따라야 된다는 명제 하에 사람의 목을 치는 기술도 마다하지 않고 배운다. 처음엔 속으로는 죽도록 겁에 질렸지만, 한 번 해냄으로써 죽어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 과정을 나카무라한테 얘기하는 장면은 끔찍하다. 그러니까 어떤 이의도 달지 말고 철도 완성의 임무를 마쳐야 한다는 말이다. 굶주림, 영양실조, 콜레라, 각기병 등 전염병, 폭력에 시달리다가 인원은 점점 줄어드는, 죽어도 불가능한 상황에 포로 백 명은 스리파고다패스 구간 근청의 캠프로 보내라는 명령이다. 버마 국경을 따라 북쪽으로 약 150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한다. 기계나 연장도 추가 지급 없이 인력은 부족한 상태로 어쩔 수 없지만다른 길은 없다. 포로를 철도 건설의 원료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집착과 광기를 본다.



동료들의 죽음에 관한 상실감

 전쟁 포로가 되어 생사를 함께 하다보면 미우나 고우나 동료애가 싹트기 마련이다. 전쟁에 관련된 작품을 많이 접했지만, 이토록 처참한 내용은 처음인 것 같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희망을 떠올리며 동전 던지기 게임을 하는 장면은 애잔하다. 덩치가 크고 건장했던 타이니가 일본인이 정한 할당량을 더 빠른 시간에 해내어 죽음을 목전에 둔 동료들의 미움을 받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점점 해골이 되어간다. 거기에 더욱 잔인해지는 경비병들의 매질까지,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다. 다키 가디너는 그가 싫지만,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한 명이 죽어나갈 때마다 자신이 죽어가는 것이다.


 다키는 그와 오리 알 한 개와 주먹밥 하나를 나누어 먹는 장면은 눈물 젖게 만든다. 타이니는 마치 성체를 받듯이 두 손으로 받아 둘이서 캄캄하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한 입 두 입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는다. 생사를 같이 했던 동료 중 스케치 재주가 있던 토끼 헨드릭스, 괴저로 다리가 썩어 수술을 받던 잭 레인보우 등 하나씩 죽어간다. 활활 타는 동료의 주검을 본다. 그 상황을 에번스도 그 누구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이다. 바지에 똥을 지리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던 다키는 똥 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에 절망하고 우리가 되어간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관한

일본의 패전으로 포로들의 지옥 같은 악몽은 끝이 난다. 그리고 이들을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았다.


그들은 죽음의 냄새를 막으려고 담배를 피우고, 죽음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농담을 주고받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새기려고 음식을 먹었다. 다키 가디너는 자신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계산하면서 매번 자신의 운이 좋아진고 있다고 믿었다.’(P50)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서 온갖 것에 희망을 걸고, 순전히 환상에 대한 믿음으로 살았지만 운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잔인한 세월을 보낸 뒤 이제 트라우마로 고생한다. 가족과 불협화음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생활도 정상적이지 않다. 마음은 온통 동료들의 시체가 쌓인 정글에 머물러 있다.



 전범을 처벌한다는 신문기사가 나고 재판이 시작되지만, 고타나 나카무라는 그 벌이 미약하거나 피해간다. 그런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는데, 처벌은커녕 선한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추악한 가식으로 무장한 선() 이다. 인간의 내면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동물이 인간이라고 했던가. 천황의 명을 받들며 살기 위해 온갖 악행을 쌓더니, 이제는 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선을 가장한다.



 일본군의 경비병이었던 최상민의 삶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겁 많은 선량한 소년이 악의 우두머리의 하수인이 되었다가 사형수 신분이 되었다. 일본인 가정에서 하인으로 숙식과 매달 6엔의 봉급과 매질을 견디다가 매달 50엔을 준다는 말에 경비병이 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돈을 위해 살았던 그는 내 돈 50엔을 외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빈곤한 가정, 시대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돈 만을 쫓은 삶이 이런 결과를 만든 건 아닐까. 학습한 악()은 그대로 전이된다.



 철도 라인의 삶이 선()상의 삶이라면 그 후의 삶은 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삶, 죽음이 삶이 되고 삶이 죽음이 되고 그것이 계속된다. 여기서 에번스가 떠올렸던 빛이란 어둠의 그늘에서 간절히 바랐던 자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 억압되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갈 자유, 자연속에서 호흡 할 자유 말이다. 전쟁의 한 가운데 포로가 되어 한 배에 탄 동료들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가 죽으면 내가 죽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하루하루가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가혹한 굶주림과 병약해진 몸으로 서로 살아남기 위해 견뎌내는 몸부림이 너무 가혹하다. 작가는 큰 틀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그 아래에서는 인간관계의 내면 심리를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선과 악, 증오, 부끄러움의 내밀한 마음이 아프도록 절절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안정을 찾아가는 가운데 모든 것은 점점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조금씩 잊어간다. 선악의 주고받음도. 평온한 일상은 지루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포스가 절벽 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중에도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비인간적인 전쟁 범죄는 어떻게든 단죄를 받아야하며 그 기억은 잊어서는 안 된다. 연합군 중에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네들의 이기적인 광신을 위해 희생된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모르는 많은 상흔의 실상이 이렇게 문학작품으로 많이 나와야 한다. 마치 이건 꿈이 아닐까, 저 너머의 세계, 꿈에서도 만나기 싫은 세계를 들여다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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