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김애란 소설가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한국 소설을 한동안 읽지 않아서. 늦게나마 김애란 작가의 책을 만난 건 번역 수업 덕분이다. 번역 공부는 거의 국어 공부라 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좋은 책, 좋은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올려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서 책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꽤 젊은 작가였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은 상복도 많은 작가였다. 이 산문집은 작가를 있게 한 이름들, 작가와 함께한 이름들을 주제로 썼다. 1부 나를 부른 이름 2부 너와 부른 이름 3부 우릴 부른 이름들 세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인정받아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인문고등연구소(LASH)에 초대받아 머물렀던 화려한(?) 경험까지 담고 있다. , 정말 부럽군, 했다.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추억이 깃든 장소와 에피소드를 엿보는 일은 늘 뭉클한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작가의 어머니가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았던 가게 맛나당은 작가에게도 큰 의미를 부여한 곳이었다. 작가로서의 기질을 키우고 꿈을 꾸게 한 곳이 아니었을까. 김애란 작가는 자신의 정서가 거기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수많은 손님을 만나고 거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그 분위기가 작가의 가슴에 차곡차곡 스며들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 돈으로 세 딸을 가르치고 생활을 꾸리고 집도 장만했단다. 그곳은 어머니가 경제 주체이자 삶의 주인으로 자의식을 갖고 꾸린 적극적인 공간이었다. ‘맛나당은 작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팔 할의 힘이 되었고 나머지 이 할은 사범대학에 가라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예술학교에 들어간 것이란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어머니를 본받아서 자신이 선택했고, 그것이 인생을 바꾸었다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 두 분의 첫 만남과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고 진한 가족애와 행복한 정경이 전해져 왔다. 또 지인과의 우정, 읽은 책을 소개하며 들려주는 소소한 감상 이야기도 좋았다. 나도 전에 읽다 만 적 있던산해경을 접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이 책은 원래 중국의 신화집 또는 역사서, 지리서 고대 동아시아 풍습과 종교를 다룬 책이지만 문학 텍스트로 읽는다면 창작자에게 먹을 만한 플랑크톤이 풍부한 심해라고 알려 주었다. 귀한 보석을 주운 기분이었다. 선후배 작가와의 여행 이야기도 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는 동료로서 함께 보고 공감했던 시간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하고 충만한 시간일 것이다.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P124)

 



우리의 삶은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한 가지를 풀고 나면 또 한 가지가 우리에게 닥친다. 글 쓰는 삶이나 보통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사를 말하게 된다. 당연한 것들에 놀라는 삶, 그러려고 하는 마음의 다짐이 있을 때 우리 삶은 한층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P133)

 



역시 작가다운 통찰이 들어있는 대목 같다. 이 글은 작가가 창비 50돌 축사를 맡게 되어 쓴 축사의 일부인데 너무나 공감이 가는 문장이라 소개해 본다. 작가가 태어나 처음 가보았던 창비 출판사, 마포 사무실을 떠올리며 감개무량에 젖는다. 다시 올 일 없을 줄 알았기에 대충 보고 말아서 기억도 나지 않는 그곳. 그 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며 하는 얘기였다. 몇 달 전부터, 자꾸만 가보고 싶은 곳이 떠올라 가봐야지 벼르고 있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내가 20대 시절에 다닌 직장이 있던 동네이다. 언제 한번 가보자고 작은 아이에게 말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났는데 그곳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김치찌개가 끝내주던(?) 식당이 있던 골목, 그 뒤편에 수녀원이 있던 동네였다. 지금이라면 휴대폰으로 모든 걸 담을 수 있지만, 그 시절은 온통 아날로그 세상이었다.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 가게 아줌마들, 그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새삼 그립다. 일찍이 아파트촌으로 뒤바뀐 지 오래여서 그 풍경은 온데간데없겠지. 자세히 보고 기록해 둘걸. 그때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 산문집을 읽은 계기로 김애란 작가와 조금 친숙해진 느낌이다. 에피소드 중에는 작품을 쓰면서 기록해 두었던 창작 노트도 들어있다.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나면 인물들이 작가에게서 떠난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신애라고 했다. ‘쪼그려 앉은여자 신애. 한동안 잊고 살았다고 했다. 이렇게 다른 작가의 작품 속 인물을 만나면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 속에 그려 넣은 인물들은 분신이나 마찬가지로 애착이 많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은 누구였더라.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어서였을까. 생각해 본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만나고 스쳐 지나간 이름들은 얼마나 될까. 무수한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앞으로 내 발길 눈길 닿는 곳은 좀 더 세심하게 보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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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1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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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9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고 보면 『번역에 살고 죽고』가 나오게 된 것도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 책이 2011년에 나왔는데, 실은2006년부터 마음산책에서 산문집을 내고 싶다고 점찍었다. 마음산책 산문집은 접근하기 편하면서 고퀄이고, 책이 예쁘게 나와서다. 그러나 마음산책에서 번역을 한 적도 없고, 아는 편집자도 없었다. 써놓은 원고도 없이 문을두드릴 수도 없었다. 겨우 10년 차 번역가, 원고가 있다고책을 내줄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존재를 알리기 위해 출판사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짧은 인사 글을 남겼다.  - P98

견본품 들고 일일이 매장 돌아다니며 영업하는분들에 비하면, 번역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한가.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니까. 문전 박대를 당할일도 없고, 무시당해도 보이지 않고, 답장을 주면 감사하고안 줘도 그만이고, 보내는 것은 나의 의지, 거절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 메일 한 통 보내고 너무 많은 기대도 하지 말고, 좌절도 하지 말고, 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천천히 조금씩 도전하고 싶은 곳의 벽을 뚫어봅시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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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너무 지긋지긋한 기억의 출판사였는데, 누가 그 출판사랑 일한다고 하면 절대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 이후에도 일을 했다는 것이 실화입니다. 일이란 게 감정 문제, 돈 문제를 떠나서 꼭•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그 후에•작업할 때는 완전히 ‘우리 출판사가 달라졌어요‘ 버전이었다. 결제가 며칠 늦어지니 (전적이 있어서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 ‘이사님‘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직접 문자까지 보냈다. 예전에 비하면 거의 칼 결제 수준이었다. - P52

꽃은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면, 오역은누군가가 까발려주어야 오역이 된다. 알고 오역을 하는사람은 없으니 지적받기 전까지는 바른 번역의 탈을 쓰고있다. 오욕의 오역은 번역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두려운것.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어디선가 좀비처럼 뒤어나온다. 생각만 해도 살 떨리네. - P89

앞뒤 설명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은대체로 전래동화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국자로 뺨을 맞았죠?" "국자가 아니라 주걱입니다." 이런 대화가 나온다면 우리는 놀부마누라에게 주걱으로 얻어맞은 흥부를 떠올리지만, 이 얘기를 모르는 외국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 역주가 반드시 필요하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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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너무 지긋지긋한 기억의 출판사였는데, 누가 그 출판사랑 일한다고 하면 절대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 이후에도 일을 했다는 것이 실화입니다. 일이란 게 감정 문제, 돈 문제를 떠나서 꼭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그 후에작업할 때는 완전히 ‘우리 출판사가 달라졌어요‘ 버전이었다.  - P52

그런데 이 방법으로 몇 권을 해보니 이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되지 않으면 손해를보는 방식이다. 최소 2~3만 부는 나가야 원래의 매절 번역료를 확보할 수 있는데 현실은 초판 3000부 나가는 것도 버거운 게 출판 시장. 그리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장 좋은 것은 만병통치약, ‘케이스 바이 케이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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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딸이 엄마 같았으면 속 터졌겠지?"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진지하게 갸웃거린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행동 폭이 좁으니 어디 가서 사고 날까걱정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이것저것 넘보지 않고 한 가지 재주에 목매는 장점도 있다.
덕분에 외국어 좋아하고 글쓰기 즐기는 유일한 재주를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인 양 꼭 붙잡고 놓지 않아서 30년째번역을 하고 있지 않은가.  - P8

예전에는 ‘오늘은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다짐 같은 것하지 않았다. 그런 다짐 하지 않아도 과로사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때보다 이렇게 농땡이 부리며 설렁설렁 사는 지금의 내가 좋다. 죽기 전까지 일을 하고 싶지만, 일만 하다 죽고 싶진 않다. 그렇게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본 뒤로, 적게 벌고 적게 쓰더라도 숨 좀 돌리고 여유 좀 갖고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 P19

어떤 사람들이 어떤 책을 쓰는지, 어떤 출판사에서 어떤 일본 번역물을 내는지 시장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불빛 한 가닥없는 탄광에서 삽질하는 것처럼 막연하고 막막한 행위였다. 출판사의 연락처를 적어 와서 메일을(PC통신으로) 보내거나 전화를 걸곤 했다. 일 좀 주십시오, 하고. 노력은 대단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일은 들어오지 않았으니. 하지만 해봤자 안 될 거라고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보다 낫다는 것은 지금의 나로 증명할 수 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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