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외부 저장소

글쓰기의 여러 신경학적 특성 중에서 저장성은 글쓰기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어 있다. 최초의 글쓰기는 뇌의 용량을 확장하기 위한 외장하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P33

탐험쓰기는 이 안과 밖이 어우러진 흥미로운 인터페이스를보여준다. 형태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머릿속의 인지적 무정부상태를 바깥세상으로 끌어낸다.  - P35

글을 쓰면 생각만 할 때와는 달리 고차원적 뇌 영역이 활동할 시공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 패닉에 빠진 침프를 통제하고, 희망차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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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버지니아 울프 -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수사네 쿠렌달 지음, 이상희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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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만 보고 급구매한 책이다. 책을 받고 펼쳐 보니 그림이 가득한 만화였다. 만화의 일종인 그래픽 노블이었다. 뜻밖이라 당황했지만 읽을 만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는 그의 많은 작품을 언급하며 배경이나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커다란 판형에 양장본이라 편하게 자주 들춰 볼 것 같다. 또 성인만이 아니라 청소년 학생이 읽기에도 너무 무겁지 않은 내용이라 가뿐하게 읽을 수 있겠다. 이 책을 쓴 수사네 쿠렌달은 일러스트레이터로 복잡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어 사람들이 공감하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데 매력을 느껴 그래픽 노블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등 예술성 높은 작품을 그래픽 노블로 만들었으며 울프의 대표작 올랜도를 준비 중이라 한다.

 



겉표지를 넘겨 안쪽에는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물들의 얼굴이 나와 있다. 가족은 물론 버지니아가 교류하던 지인들이다. 본문을 읽을 때 찾아보며 읽으면 이해하기 쉽다. 특별히 목차나 소주제는 없고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야기로 쭉 이어진다. 이 부분은 좀 아쉬웠다. 작품 세계와 일대기를 다룬 내용이니 시기별로 나누거나 소주제로 구분했다면 읽는데 훨씬 편했을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각각 재혼이었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딸이었다. 이부 오빠, 이복 자매까지 합치면 여덟 명이나 되고 잭슨 부인과 외할머니, 그리고 일곱 명의 하인까지 꽤 북적이는 집안이었다. 울프는 만 두 살이 되어서야 말을 하기 시작할 정도로 늦었지만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형제자매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줄 정도가 되었다. 여섯 살 때 직접 쓴 편지 내용도 들어있다. 성격은 자기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감언이설을 해서라도 얻어내고 그게 통하지 않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반드시 얻어냈다. 화를 내면 모두가 두려워했다고 한다.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울프가 열세 살이 되던 1895년에는 엄마인 줄리아 스티븐이 세상을 떠난다. 가족과 친지들 모두 슬픔으로 가득했는데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일까. 울프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사고 자책하기도 하며 우울증에 빠진다. 이런 감정은 델러웨이 부인이나 파도등 작품에 묘사된다.

 



나는 웅덩이 앞에 왔어.

로다가 말했다.

나는 넘을 수가 없었어.

나는 나 자신에게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었어.

우리는 아니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쓰러졌다’(p19)

 



이래서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이 어려웠나 보다.자기만의 방은 여러 번 읽었는데 등대로등 다른 작품은 읽다 그만둔 게 많다. 바로 버지니아가 성장해 온 환경이나 성격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작품으로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시대적 상황도 책을 좋아하는 버지니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전통적 구습은 울프의 마음을 옥죄는 듯했다. 신경 쇠약증으로 오래 요양을 해야 했을 때는 더욱 불안해했다. 의사는 건강 회복을 위해 안정을 취해야 하며 친구와 만나서도 안 되고 책도 안 된다며 휴식을 강조했다. 사람들과 나누는 지적인 대화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지적인 교류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당찬 버지니아 울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런 열정이라면 자신의 마음도 잘 다스릴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우울증과 신경 쇠약증에 시달리다가 강에 몸을 던졌을까, 많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마음이 잘 맞는 버네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다가 자신을 돌보지 못한 엄마나 결혼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죽은 스텔라 언니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언니 버네사와 미래 계획을 세우며 자유로워질 거라고 말하며 희망으로 설렌다. 나중에 이 둘은 블룸즈버리 그룹을 만들고 그 핵심 멤버가 된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지만 이러한 지적 교류 활동이나마 가능했기에, 강연 활동을 하고 작품을 써서 성공적으로 발표하는 등 어엿한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작가인 비타 색빌웨스트와의 우정을 넘은 연인 관계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울프가 아플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올랜도는 비타를 모델로 쓴 작품이라는 걸 알았다. 젊은 귀족 남자로 나오는 모양이다. 작품이 완성됐을 때 제일 먼저 알리는 등 함께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비타는 울프가 오빠 제럴드 덕워스로부터 거울 앞에서 당한 성추행의 충격으로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는데 그 공포를 치유해 주기도 했다. 올랜도192810월에 발표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비타는 울프를 자랑스러워했다.

 



평생 버지니아를 사로잡게 했던 주제는 남성의 명예남성들의 오만함이었다. 여성 차별의 직접적인 대상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은 작품에 오롯이 묘사하곤 했는데 작품을 낼 때마다 세간의 비난이 두려워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울프는 쓰고 또 썼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울프의 마음과 정신에 조금 더 가까이 간 것 같다. 앞으로 울프의 작품을 읽는다면 좀 더 몰입할 수 있을까 기대된다. 의식흐름 기법으로 쓴 글쓰기 방식이어서 놓치기도 할 테지만 분명 아무것도 모르고 작품을 대했을 때 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한다. 백 년도 더 오래전에 강조했던 울프의 말이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시간이었다.

 



여성이 글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세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글이 영원히 기억될 가치를 가질 것인지,

단 몇 시간 만에 잊힐 만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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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3-04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너무 좋아해요. 댈러웨이 부인이나 올랜도를 읽었지만 등대로가 더 좋더라구요.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싶은데 일단 내용이 워낙 만만찮아서 선뜻 안 들어지네요. 이 책을 먼저 읽으면 어려운 버지니아 울프의 책이 조금은 더 다가가기가 쉬울거같네요.

모나리자 2025-03-06 22:49   좋아요 0 | URL
울프이 작품은 읽기 어려운데 많이 읽으셨네요. 대단하세요.^^
저도 좋아하는 작품이 생기면 좋겠네요. 울프는 신경쇠약증이나 우울증을
오랫동안 겪었기에 그러한 마음의 감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실린 것
같아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읽기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내용이었어요.^^

희선 2025-03-05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로 나온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를 보고 버지니아 울프가 쓴 글을 보면 좀 낫겠습니다 그래도 어려울 듯하지만... 읽다 만 책 이번에는 보시겠군요


희선

모나리자 2025-03-06 22:52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성장해 온 환경이나 작가의 성격 등을 파악한 다음 읽으면
어려운 작품 읽기가 훨씬 도움이 되겠지요. 읽다말고 오래 지나면 또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해서 귀찮은 생각도 듭니다. 왠만하면 쭉 읽어나가는 것이 시간
낭비도 하지 않고 좋을 듯합니다.
 
나, 버지니아 울프 -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수사네 쿠렌달 지음, 이상희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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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로 만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과 인생 이야기. 이 책을 읽고 울프의 작품들을 관심목록에 올려두었다. 커다란 판형과 튼튼한 양장본이라 더욱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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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초에 구입한 책이다. 

적립금 만기가 다 되어서 급하게 샀는데. 글쎄 받아보니 만화 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만화의 한 형식인 그래픽 노플이다.

어렸을 때 순정만화는 좋아했지만 별로 만화로 된 책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만화 형식의 책은 활자도 작고 그림도 어지럽고 해서다.

학창시절엔 초롱초롱 빛나는 시력을 갖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한참 책을 들여다 보면 침침하고 피로가 느껴진다. 그래서 왠만하면 밝은 낮에 책을 읽고 밤에는 쉬는 편이다.

시간이 있었다면 미리보기를 살펴봤을 텐데. 시간에 쫓기듯 구매하느라... 

  



1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몇 쪽 읽고 멈췄다가 어제오늘 읽기를 마쳤다. 처음보다는 적응이 됐는지 읽을 만했다. 익히 알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어린시절부터 인생 이야기가 나왔다. 게다가 울프의 많은 작품을 짧게 언급하고 있는데 그 작품이 나온 배경이나 에피소드를 알려주고 있어서 좋았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책인데 가격도 착해서 얼른 고른 책. 만화이긴 해도 총평을 하자면 만족스럽다. 세일즈 포인트도 제법 높은 걸 보니 잘 팔리는 모양이다. 역시 버지니아 울프는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구나.





민음사 리커버판이다.

<등대로>는 읽다가 진도가 안 나가서 멈춘지 몇 년이 지났다. 다시 읽어야 한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 사실 <등대로>는 아주 오래전 내가 블로그 활동을 하지 않던 시절에 어렵게 오래 걸려서 읽은 책이었다.(이것도 독서목록 정리표를 보고 알았다) 그런데 안 읽은 줄 알고 또 손에 잡았던 것. 울프의 책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나중에 알았는데 프루스트처럼 의식흐름 기법의 소설을 많이 썼다지. <자기만의 방>에는 <3기니>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3기니>는 읽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읽어야겠다.









이 책도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는데 아직 비닐 포장도 뜯지

않았다. <나, 버지니아 울프>에는 비타와 절친을 넘어 연인 사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는데 그 편지들을 책으로 엮은 것 같다. 아주 두꺼운 책인데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올랜도>도 소장하는 책.

올랜도는 지명인가 했는데 비타를 모델로 해서 쓴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이면 이렇게 소설로 쓸 수 있을까. 그들의 우정과 존경과 사랑이 부러워진다...













버지니아 울프이 단편소설집이다. 울프는 동시대의 캐서린 맨스필드를 단편 소설의 대가라고 칭했단다.

나중에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도 읽어봐야겠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


















책을 사는 속도보다 읽는 속도가 느리다. 많이 사지도 못 하면서. 꼭 사고 싶은 책만 사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고 한다. 자꾸만 책장을 차지하는 책들도 부담스럽다. 더구나 30년 넘은 책을 아직도 갖고 있고 버리지도 못하는 성격 때문에...



최근 몇 달 동안 거의 책도 읽지 못했다. 아니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21세기 대한민국에 계엄령이라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행동해야 하고 정의의 편에 서야 발전할 수 있는데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사회가 되었다. 충격에 분노에 스트레스가 겹쳤고 밤에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벌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을 달랬다. 이제야 조금 유튜브와 뉴스에서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하루빨리 안정된 정국이 되면 좋겠다.



버지니아 울프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열심히 책을 읽어 보자는 마음이 일어났다. 울프가 살던 당시보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졌지. 시간도 많고 읽을 책도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올해는 최소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라도 읽어보려고 노력해야겠다. 그러면 버지니아 울프의 내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지...




내 지식이 이렇게나빈약한 것은 놀랄 일도아니야. 대화보다 더 좋은가르침은 없어. - P32

식사 시간에냅킨 따위는 필요 없어.
마음대로 식사할 거야!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글을 쓸 것이고,

저녁 식사 후 9시에는차 대신 커피를 마실 거야! - P38

올랜도가 완성되었어!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당신 안에서 살았어.
내가 다시 나왔으니 이제 당신은 어떻게 될까?
당신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만든 존재에 불과할까? - P89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세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글이 영원히 기억될 가치를 가질 것인지,
단 몇 시간 만에 잊힐 만한 것인지는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 P95

버지니아 울프는<3기니>에서 이렇게 썼다.
이 기니에는 천 조각과 석유,
그리고 성냥이 함께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메모를 덧붙여야만 한다.
‘이 기니로 대학의 모든 것을 불태워라.
오래된 위선을 태워버려라.‘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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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20만 부 에디션, 양장)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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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인터넷 서점가를 뜨겁게 달구던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를 이제야 읽게 되었다. 작가 패트릭 브링리는 자신의 결혼식이 예정된 날 형의 장례식을 맞이한다. 그해 가을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 무엇보다도 형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닐 만큼 친밀한 관계여서 더욱 무너지는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경력을 쌓기 위해 몸부림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미술관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10년을 보낸다.

 



연두색 표지의 이 책을 처음 볼 때부터 시선을 끌었고 미술관경비원이라는 단어가 더욱 호기심을 끌었던 것 같다. 드디어 손에 잡고 읽기 시작했는데 도입부는 좀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너무 기대했나. 어떤 이야기를 원했던 거지. 속으로 실소하면서 차츰 적응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미술관에서 일하면 미술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한 거잖아. 쉽게 몰입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갈지 모르는 그곳을 한번 둘러보자는 생각으로 브링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었다. 저자가 평소 어머니와 함께 미술관으로 모험을 떠났던 추억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감각이 있었기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다. 모르는 그림 제목이 나오면 검색하면서 읽었다. 그림에 대한 배경이나 역사 에피소드 등을 얼마나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지, 그렇게 많은 자료를 어떻게 다 풀어썼는지, 해박한 지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의 꿈을 갖고 즐기면서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매트의 옛 거장 전시관이 마을이라면 주민은 거의 9천 명에 달한다. 주민들은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거의 그 숫자에 맞먹는 햇수 이전에 붓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p37)

 



전시관은 마을이고 그림 속 인물들을 주민으로 표현한 것이 정겨웠다. 미술관이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 일터에서 거장의 작품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며 삶을 배우겠다는 자세와 결심, 그리고 재치까지 엿볼 수 있었다.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의 수다라니. 시간이 얼마나 많았으면 그걸 다 셀 수 있었을까. 그 주민들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까. 어쩌다 미술관에 가더라도 찰칵 사진을 찍고 금세 잊어버리는 나로서는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했다. 그리고 6년 전 우리 지역 미술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 참 행복했다. 관람객이 없는 전시장을 나 혼자 누비면서 사진도 찍고 <모나리자> 등 명화를 바라보며 웬 횡재냐 했었다. 그런데 뉴욕에 있는 그렇게 넓은 미술관에서 10년 동안이나 그림과 함께 했다니 부러운 마음에 괜히 울렁거렸다.

 



띄엄띄엄 들려주는 아픈 형과 함께 보낸 기억과 가족 이야기에서 그리움과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그림, 조각, 퀼트 등 위대한 작품을 보면서 삶과 죽음, 인생과 예술을 통찰하고 있었다. 삼백 명이나 되는 경비원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공감하는 이야기도 따뜻함이 묻어났다. 형의 죽음을 슬퍼하며 마냥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었다. 미술관에서 만나는 관람객들과의 교감, 특히 과제를 하려고 온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든든한 선생님을 만난 듯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거장의 작품이 나오는데 이 중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소개해 보겠다.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말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미켈란젤로의 짜증과 절망이 섞인 편지들, “이곳은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결과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신이시여, 도와주소서!”(p284)라고 한 미켈란젤로의 자신 없어 하는 말을 접하고 브링리는 즐거워한다. 그토록 불만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그린 그림이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지에 감탄한다.

 



위대한 천재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통스러움을 느낀다는 걸 보면 평범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응원이 되는지 모른다. 위대한 작품은 예술가가 낳은 무한한 근면성의 산물이라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술관에서 10년을 보내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 감사의 말로 마무리된다. 끝자락에 나오는 문장에 깊이 공감하며 인용해 본다. 누구나 힘든 시절, 힘든 일을 겪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한다. 이 책으로 위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적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p319~320)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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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3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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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3 1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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