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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20만 부 에디션, 양장)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1월
평점 :
2024년 인터넷 서점가를 뜨겁게 달구던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를 이제야 읽게 되었다. 작가 패트릭 브링리는 자신의 결혼식이 예정된 날 형의 장례식을 맞이한다. 그해 가을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 무엇보다도 형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닐 만큼 친밀한 관계여서 더욱 무너지는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경력을 쌓기 위해 몸부림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미술관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10년을 보낸다.
연두색 표지의 이 책을 처음 볼 때부터 시선을 끌었고 ‘미술관’과 ‘경비원’이라는 단어가 더욱 호기심을 끌었던 것 같다. 드디어 손에 잡고 읽기 시작했는데 도입부는 좀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너무 기대했나. 어떤 이야기를 원했던 거지. 속으로 실소하면서 차츰 적응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미술관에서 일하면 미술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한 거잖아. 쉽게 몰입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갈지 모르는 그곳을 한번 둘러보자는 생각으로 브링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었다. 저자가 평소 어머니와 함께 미술관으로 모험을 떠났던 추억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감각이 있었기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다. 모르는 그림 제목이 나오면 검색하면서 읽었다. 그림에 대한 배경이나 역사 에피소드 등을 얼마나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지, 그렇게 많은 자료를 어떻게 다 풀어썼는지, 해박한 지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의 꿈을 갖고 즐기면서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매트의 옛 거장 전시관이 마을이라면 주민은 거의 9천 명에 달한다. 주민들은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거의 그 숫자에 맞먹는 햇수 이전에 붓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p37)
전시관은 마을이고 그림 속 인물들을 주민으로 표현한 것이 정겨웠다. 미술관이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 일터에서 거장의 작품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며 삶을 배우겠다는 자세와 결심, 그리고 재치까지 엿볼 수 있었다.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의 수다라니. 시간이 얼마나 많았으면 그걸 다 셀 수 있었을까. 그 주민들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까. 어쩌다 미술관에 가더라도 찰칵 사진을 찍고 금세 잊어버리는 나로서는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했다. 그리고 6년 전 우리 지역 미술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 참 행복했다. 관람객이 없는 전시장을 나 혼자 누비면서 사진도 찍고 <모나리자> 등 명화를 바라보며 웬 횡재냐 했었다. 그런데 뉴욕에 있는 그렇게 넓은 미술관에서 10년 동안이나 그림과 함께 했다니 부러운 마음에 괜히 울렁거렸다.
띄엄띄엄 들려주는 아픈 형과 함께 보낸 기억과 가족 이야기에서 그리움과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그림, 조각, 퀼트 등 위대한 작품을 보면서 삶과 죽음, 인생과 예술을 통찰하고 있었다. 삼백 명이나 되는 경비원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공감하는 이야기도 따뜻함이 묻어났다. 형의 죽음을 슬퍼하며 마냥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었다. 미술관에서 만나는 관람객들과의 교감, 특히 과제를 하려고 온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든든한 선생님을 만난 듯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거장의 작품이 나오는데 이 중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소개해 보겠다.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말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미켈란젤로의 짜증과 절망이 섞인 편지들, “이곳은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결과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 신이시여, 도와주소서!”(p284)라고 한 미켈란젤로의 자신 없어 하는 말을 접하고 브링리는 즐거워한다. 그토록 불만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그린 그림이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지에 감탄한다.
위대한 천재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통스러움을 느낀다는 걸 보면 평범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응원이 되는지 모른다. 위대한 작품은 예술가가 낳은 무한한 근면성의 산물이라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술관에서 10년을 보내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 감사의 말로 마무리된다. 끝자락에 나오는 문장에 깊이 공감하며 인용해 본다. 누구나 힘든 시절, 힘든 일을 겪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한다. 이 책으로 위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적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p319~320)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