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도, 마감일도 없이 살다 보니 책 읽는 패턴이 "충동 따르기"형으로 바뀌어 간다. 예정에 없던 책을 손에 쥐면, 그냥 읽어버리기가 부지기수.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는 40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두꺼운 에세이다. 반납일이 많이 지나서 도서관에 고이 보내드리려고 모시고 나왔다. 하지만 앞 몇 페이지를 읽는 순간 저자 김범석의 필력에 반해서 4시간을 꼬박 읽었었다. 아. 이런 충동성은 자제해야 하는데, 책 앞에서는 특히 안 되네.

  


"서울대학교 의예과 96학번"임으로 미루어, 김범석 교수는 50세 일 듯하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를 폐암으로 여의고 가정이 풍지박살나고 사람들에게 배반 당하는 쓴 경험을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책상 의자의 방석이 너덜너덜해질"(13) 때까지 공부하여 의대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정신력이 강한 사람인지 가히 짐작이 간다.

내가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를 손에서 못 놓은 이유, 읽자마자 다만 몇 줄이라도 기록하려는 이유는 사실 이 책의 키워드- #암, #진화 #죽음 #삶 #자아 #피아 #self와non-self-보다도 저자의 학문하는 자세 때문이다. 김범석 교수는 학문, 특히 암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소명의식, 암을 골자로 발산형으로 뻗어가는 철학적 사유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를 잃고 삶의 고통을 처절하게 겪던 고등학교 2학년 소년은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암'이라는 병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13) 처음에는 '암'이라는 실체 모를 적을 향한 증오심으로 공부했으나 공부가 깊어갈수록 그는 '암'이라는 비정상 세포(들)보다는 정상세포, 죽음보다는 삶, 적보다는 나를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암은 변절된 나(암세포)를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나를 죽여야 내가 사는데, 나를 죽이지 못해서 내가 죽는다.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146쪽

의 인식에 이른다. 이는 단순히 시적 낭만이 아니라 이십여 년 환자를 돌보며 생사生死 과정을 관찰하고 치열하게 연구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이다. 김범석은


암세포도 처음부터 암세포는 아니었고, 범죄자도 처음부터 범죄자가 아니었다. (257)

내가 이해하건 이해하지 않건 고정불변의 나는 처음부터 없다. 내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살아 있지만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다... 내 몸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모래성과 같은 존재다. 바닷가에서 조금씩 무너지는 모래성을 조금씩 다시 쌓듯이 내 몸도 없어지고 생기기를 반복하며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317)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라며 "직선이 아닌 죽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가 본과 1학년 때, 크리스마스에 또래 스무 살들은 혜화동 대학로에서 연인의 허리를 감싸안고 데이트를 할 때, 창경궁 위로 내려앉는 석양을 보면서 의학논문을 읽고 연구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실험실을 지키고 있자니 왠지 궁상맞게 느껴졌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붉게 물든 창경궁을 바라보며 그렇게 혼자 실험을 했다... 그날 읽던 논문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태아는 암과 같은 생존 전략을 이용한다

이 한 문장은 나를 온전히 사로잡았다... 온몸에 전율이 찾아왔다... 그때, 확신했다. 아, 나는 평생 암을 연구할 팔자인가 보다.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225쪽


전문의료인으로서 학자로서 더 크게 성장한 후에도 김범석의 지적욕구와 소명의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름 없는 수많은 연구자가 한 편씩 논문을 내며 자기 어깨를 다음 사람에게 빌려주었고, 그 어깨를 딛고 다음 사람은 또다시 자신의 어깨를 내어"(101) 준 학문공동체에서 그는 더 가열하게 연구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인 학회 건물 남자 화장실을 상상하게 했던 다음 페이지에서 나는 빙긋 웃었다.

논문에서만 보던 이름들이 내 앞에 걸어 다니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기뻤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거장들과 나란히 오줌을 누었다. 오줌을 누며 거장들을 힐끗 보면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했으면 우리라고 못 할 것도 없지. 우리도 한번 해봐야지.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105쪽

나는 단순히 생의학의 시선에서 "암" 그 자체를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암에서 출발하여 "자아와 비자아, 삶과 죽음, 내몸과 세계"의 경계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김범석에게 놀랐다. 그리고 이 분이 계속 좋은 글과 말로 자신의 깨달음에 사람들을 동참시켰으면 좋겠다.


김범석 교수에게 배우던 서울대 의예과 학생이 어찌보면 매우 무례한 말을 교수에게 했다. "교수님은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힘드셨던 경험이 있어서 환자들과 가족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릴 수 있어서 좋으시겠어요."(239) 부모님 모두 의사에게다 강남에서 유복하게 자라 불행한 자의 처지를 공감하기 어렵다는 그 학생의 말에 독자로서 나는 다소 불쾌해졌지만, 직접 그 말을 들은 김범석 교수는 오히려 대인배 마음으로 대응한다.

나의 어려웠던 환경과 내가 겪은 고단함이 30년 뒤 누군가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뒤집어 보면 좋은 환경은 나쁜 환경이고, 나쁜 환경은 좋은 환경이다.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240쪽

참 좋은 의사, 참 열린 어른이다. 앞으로도 김범석 교수가 좋은 글을 많이 써주시기를 다시금 (독자로서) 부탁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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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러 찾은 도서관, 입구로 안 들어가고 샛길로 샜습니다. 나날이 산이 좋아지니 나이를 감추기 어려워지네요^^ 심호흡 몇 번만 하고 내려오려던 게 자꾸 발이 앞으로 나아가서 전망대까지 올랐습니다. 놀랍게도 전망대에서 알록달록 추상화를 보았어요. 멀리서 보고 정말 설치 미술인 줄 알았죠.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니 그것은, 나물 말림(?)이었습니다. 누군가 공짜 햇볕이 아깝다는 듯 돗자리와 나물을 산 안쪽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것입니다. 아마 그 "누군가"는 나물을 직접 캤을 테고, 애정을 담아 다듬고 씻은 후 산 전망대까지 들고 왔겠지요. 부지런한 누군가의 "채집인 본능"에 미소를 짓습니다.


알록달록 돗자리를 보니 갑자기 수년 전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긴급 안내 방송의 이유가 웃겼는데요.


아파트 단지 내 돗자리 펴놓고 나물 말리시는 분 치우시라,

아파트 경관을 저해한다...


당시 그 방송 듣는데 웃기더라고요. 나물 돗자리 하나 펴놨다고 아파트 평판(?), 집값(?) 떨어질세라 재깍 안내 방송하다니 한가하시네..... 그 후로 가끔 가을이면 고춧가루용 고추를 말리는 돗자리를 보았어요.

길고 긴 인류 진화사, 수렵채집인으로 살아온 우리가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채집인 본능의 기를 못 펴고 삽니다. 산 등성이 전망대에 돗자리를 깔고 나물 말리시는 그 "누군가"의 채집인 본능에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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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6-07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날씨가 건조하고 햇볕이 뜨거워서 잘 마를 것 같은데요.
요즘엔 나물을 캐기도 쉽지 않겠지만, 말릴 공간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가을에는 옥상이나 주차장에서 고추 말리는 분들도 계셨는데,
매운 공기가 들어온다고 입주민과 다투는 것을 본 적 있거든요.
나물 말리는 것이 아파트의 경관을 저해하는 건 생각을 못했네요.
날씨가 6월이 되면서 여름처럼 더워졌습니다.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4-06-07 21:26   좋아요 1 | URL
자장면 먹고 배달 그릇 1층에 내어 놨다고도 안내방송 하시더라고요...아파트 경관 해친다고^^;;;

다양한 민원이 있나봐요

서니데이님께서도 더운 날씨, 비올 주말 건강히 자알 보내시어요

transient-guest 2024-06-1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미친 시대같아요. 80년대, 90년대까지도 안 그랬던 같은데요. 저 어릴 때 같은 동 아주머니들이 단체로 영종도 (그땐 배타고 들어가던 시골)에 가서 고추 잔뜩 구해다가 옥상, 주차장, 길 이런데 사방에 펼쳐놓고 말려서 방앗간에서 고춧가로 만들어오고 그랬어요. 온 동네가 다 그랬는데 이젠 정말 정이 없는 것을 넘어 정 떨어지는 세상이네요. 사진이지만 그렇게 뭔가 펼쳐놓고 말리는 풍경이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랫만에 보이는 것 같네요

레삭매냐 2024-06-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강진에 가는데 고속도로
에 돗자리를 펴고 그렇게 말리시
는 걸 본 기억이 납니다.

그 땐 그랬죠, 다들.
 

마음의 준비를 못 했는데 귀한 손님이 짧게 깜짝 방문한 듯 반갑고도 서운합니다.

작년 가을부터 내내 책 한 권에 매달리느라, 풍경의 변화에도 시큰둥한 채 등살만 두툼하게 키우는 실내 생활을 했거든요. 집 밖으로 나와보니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다 못해 벌써 졌네요. 목련 꽃잎도 떨어져 있고요. 일단 나무 본체에서 멀어지면 갈색인지 고동색인지 참 못나게도 망가지는 꽃잎을 보는데 어린 시절 속상한 마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어요. 목련 꽃잎은 어린 시절 소꿉놀이에 등장하는 스페셜 재료였죠. 한 철 잠시 자연이 선물로 주는 별미용 재료. 하지만 그렇게나 탐스러웠던 흰 눈송이가 소꿉놀이 돌판 도마에만 누으면 갈색 못난이로 변해버려서 속상했었어요.


요즘 꼬마들은 꽃잎 소꿉놀이가 뭔지 알까요? 갑자기 그런 물음표가 떠올라 멜랑콜릭해지려는 차에 산책로에서 반가운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나는야 도시의 고고학자. 남겨진 물질을 보고 그것을 만졌던 사람들과 활동을 상상해봅니다. 산책로 부근 돌 위에 얌전히 놓인 풀잎들. 귀여운 꼬마(들)이 여기서 소꿉놀이를 했구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존재들에게 애정을 느꼈습니다.



계속 걷습니다. 인간의 만족을 높이기 위해 직선화 공사를 해버린 하천을 따라 걷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봄이면 여기로 새들이 날아들고 오리(?)도 살고, 생명의 흐름이 가득했죠. 인간들 눈 즐거우라고 아주 빡세게, 깔끔하게 일자 직선형으로 밀어버린 이 하천에는 더 이상 늘씬한 하얀 새로 다리 짧은 오리 친구들이 오지 않습니다.

혼자 속으로 욕합니다. '봤니. 이 어리석은 정책집행자들아! 너희들이 한 짓이야! 버드나무까지 싹 다 밀어버리더니 이제 이 하천이 어떻게 되었는지 봐봐? 새소리며 생명의 소리가 사라졌어! 모르겠나'




제가 별거에 다 흥분하고 오지랖 떨고 있네요. 하지만 버려지고 소홀히 여겨지는 것에 측은지심, 내가 곧 그 버려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삭막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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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4-08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원 뮤지엄 다녀오셨나봐요. 저도 가보고 싶은 곳인데 아직 못가봤어요.

얄라알라 2024-04-08 00:39   좋아요 0 | URL
예 hnine님 넉넉히 여유두시고 방문하셔서 화집도 보시고, 1층에서 차도 마시시고 좋은 시간 가지시길 바래요 전 이번이 첫 방문인데 다음엔 STAY프로그램(?) 이용하고 싶어졌어요^ ^

transient-guest 2024-04-11 0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하천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공물로 만들어버리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미 다양한 연구와 사례들을 통해 자연적인 흐름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 나온 것으로 아는데 아직도 개발도상국형 공사를 멈추지 못하네요.
 

언어 능력이 곧 생존지수였던 외국 생활, 현지인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귀쫑긋 세워 외우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 번 듣고 강렬해서 잊히지도 않는 표현현이 있었는데 바로


Let's capitalize our time!


정확한 워딩은 잊었지만, "시간을 자본화한다"는 그 개념,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수다가 서로 시간 낭비이니 이쯤 끝내고 남은 시간 각자 잘 쓰자는 의미가 모욕이 되지 않는 사회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긴 이제 우리 사회도 점점 더 "시간=돈," "돌봄 = 돈," "이야기 들어주는 (노동)= 돈" "(거의) 모든 게 돈"의 사회로 급속 전환 중이긴 하다.


옛 기억을 소환한 이유는 오늘 우연히 들었던 7살 꼬마의 말 때문이었다. 줄 서서 먹는 이웃마을 맛집에서였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주인분께서 500ml 사이다를 들고 오셨다. 사장님이 가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귀여운 꼬마가 이렇게 말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세상 공짜 없다던데, 그냥 주네.




해맑게 웃는 꼬마를 나는 깜짝 놀라서 바라보았다.

'도대체 꼬마는 저 어른 말을 누구에게서 들어봤지?' '어떻게 저 어려운 말을 맥락에 맞게 쓸 수 있을까?'

꼬마의 부모님을 떠올려본다. 그런 말을 자주 쓸 것 같지 않은 분들이다. 그렇다면 꼬마가 다닌다는 어린이집 선생님? 그럴 리가.... 하지만 분명 아이는 그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터이다. 아이는 "세상에 공짜 없다고 어른들이 말했지만, 공짜가 있네요."의 뉘앙스 천진하게 말했으니까.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전모를 알면 아이가 슬퍼할 것 같다. 맛집의 규모가 작고 점심 피크타임이어서 5명의 손님을 4인석에 몰아 앉히셨던 사장님이 "미안해서" 사이다를 주셨던 것이다. "그냥"이 아니었다. 이유 없는 친절 없고, 세상에 공짜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예시였다. "세상에 공짜 없다던데 아니네."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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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1 0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4-02-22 0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아.... 공짜가 아니었다니...🤣

얄라알라 2024-02-23 14:48   좋아요 1 | URL
은오니~~~이이~~~임^^ 락방님께서 왜 글 안쓰시냐고 하시던데^^ 바쁘셔서 만약 못쓰시고 계셨다면 이렇게 제 낙서같은 글에 댓글 남겨주시는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러게요 사이다가 공짜가 아니었어요 ㅎ

은오 2024-02-24 08:05   좋아요 1 | URL
얄님 글은 항상 잘 읽고있습니다~! 💕💕 댓글은 매번 달지 못해 제가 더 아쉬운걸요 ㅠㅠㅠㅠ
 


2027년 배경의 SF 영화 [Children of Men]을 보았던 이유는 순전히 배우 때문이었다.

크리스찬 베일

매즈 미켈슨

클리브 오웬

애정하는 배우들의 영화는 놓치지 않으려 하니까.

몇 년 전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불임이 표준이 된 세계, 마지막 남은 임산부와 태어난 아기라는 설정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줄거리를 슬렁슬렁 넘겼다.(그래서 지금도 줄거리 기억은 잘 안 난다. 오로지 주인공 클리브 오웬의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만 훔쳐 보았으니까.....) 특히, 영화 후반부의 이 장면.


아가를 본 어른 사람들이 경이롭고 감격에 찬 표정으로 길을 터주는 이 장면은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오늘 어린이병원에서 딱 저런 표정으로 아가들을 보고 있었다. 그 대형 병원은 어린이 전문 병원인지라 대기실 복도에 아가들이 바글거렸다. 말이 좋아 아가이지, 엄마 몸 속에서 하루 종일 잠자던 태아의 모습과 크게 차이 안나는 쬐그만 신생아들도 있었다. 그 복도에서 1시간 이상 머물렀는데, 나는 챙겨갔던 책을 아예 꺼내보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책 꺼낼 생각조차 안났다. 병원 복도에 들고 나는 아기들의 물결에 마음을 빼앗기고, 아기들에 자꾸 머무는 시선을 애써 감추느라. 특별한 지인 찬스가 아니라면 일상에서 아가 보기 힘들어진 저출산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어린 생명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자꾸 눈이 아가들에게 머물러서, 그 아가들의 부모님들이 싫어할까 조심해야 했다. 원체 아가를 너무도 좋아하지만, 내 시선은 틀림없이 끈적거렸으리라.

나도 모르게 '아! 미래를 위한 희망! 너희 작은 생명들....'이런 프로파겐다적 생각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가는 그냥 생명으로서 소중할 뿐인데, 나도 모르게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희망이라는 거국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딱, 영화 속 저 장면처럼......


이 영화는 2027년을 배경 삼는다. 근미래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가까운 내일이다. 과연 2027년 대한민국의 거리 풍경은 어떠할까? 우리는 아가들의 옹알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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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6 1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 영화를 90년대 나왔다면 리얼리~? 하며 봤을지도.ㅋ 27년이래 봤자 얼마 안 남았네요. 2000년이 됐을 때도 세상이 되게 많이 바뀌어 있을 줄 알았는데 밥 먹고 화장실 가고, 태어나고 죽고. 세상은 돌고 도는 것 뿐이죠. 저는 애들 별로 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좋더군요. 저도 나이 들었나 봅니다. ㅠ

얄라알라 2024-02-18 17:32   좋아요 3 | URL
2027년..
노스트라다무스 예언...때문에 21세기가 없는 줄 알았는데^^;;;

stella. K님 비오는 일요일 행복한 오후 보내시어요

레삭매냐 2024-02-16 1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지만 별무소용
이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이들이 말한 막대한 예산이라는
말도 예산 전용으로 거짓말이라
는 걸 잘 알게 되었지만...

의료 교육 모두에서 소아과 기피,
한 때 최고의 직업이라고 불리던
교사가 불과 몇 년 사이에 기피
직이 되었다는 역설 등등 -

노키즈존이 점점 늘어나는 어느
나라의 서글픈 현실이네요.
아이들이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미래의 단순 노동자로 보는 시선
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인구 절벽
은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현실
이 된 느낌입니다.

얄라알라 2024-02-18 17:33   좋아요 1 | URL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근심 그득한 표정으로
레삭매냐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합니다

이렇게 수도권에 건물을 몰아 짓는데 지방 소멸은 어떻할 것이며...암울해요

2024-02-20 0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4-02-22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가들 너무 이뻐요ㅎ 저도 귀여운 아가들을 보면 자꾸 눈이 가고 기분도 좋아진답니다ㅎㅎ

아기라는 말보다 아가라는 말 너무 정감가고 귀엽고 좋네요ㅎ

아가라는 말 검색해보니 정의 2, 3 번에 감탄사로 분류된 게 너무 웃기네요ㅎ 아기를 부를 때, 시부모가 젊은 며느리를 정답게 부르는 말이래요ㅎ

얄라알라 2024-02-23 14:49   좋아요 1 | URL
그 사전 매우 현실적이네요. 그런데 21세기에도 시어머니와 젊은 며느리 사이에 ˝아가˝라는 말이 쓰이나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ㅎㅎ우리도 이젠 미국처럼 차가운 호칭으로 부르게 될 날도 곧 올것 같아서요

근데 저는 이 글 올릴 때 저 멋진 배우님들 언급하는 댓글이 하나라도 달리지 않으까 했는데 얼굴에 빠지는 건 저만인가봐요 ㅎㅎ

고양이라디오 2024-02-23 16:02   좋아요 1 | URL
아ㅎㅎㅎ 저는 남자라서 이쁜 배우 아니면 관심이 없다는...ㅎ

크리스찬 베일은 저도 좋아하는 배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