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헨리. 애드가 알렌 포.기 드 모파상. 안톤 체호프. 알퐁스 도데. 프란츠 카프카.
초중등 시절 단편에 푹 빠졌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단편소설을 간식이나 야식이 아니라 주식으로 읽고 큰 줄 알았죠.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보니, 단편의 세계를 아예 접하지 못한 어린이는 물론 어른도 많아서 놀랐습니다.

단편작가 목록을 꽤 오래 업데이트 못했는데, 기쁩니다. 드디어 멋진 작가를 만났으니까요.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arver(1938-1988). 책덕후님들 사이에서 입소문 열기가 후끈했던 [대성당 Cathedral]을 직접 읽으 전율을 느꼈습니다. 제가 달달한 환타 맛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담백밍밍 현실세계에 끌리는구나를 깨달았고요.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레이먼드 카버는 19살에 결혼합니다. 그해, 두 살 더 어린 아내 메리앤 버크(Maryann Burk)사이에서 첫 딸을 낳았습니다. 이 년 후, 둘째 아들이 태어났으니, 또래들은 한창 청춘과 대학생활을 즐길 스물 한 살에 두 아이의 아빠이자 가장이 된 셈이지요. 카버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수위, 배달부, 병원 청소부 등으로 일하면서 짬짬이 글을 썼다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글 쓸 시간 부족, 블루컬러로서의 경험이 그가 매력적 단편을 창조하게 된 토양을 제공해주었죠.
My circumstances of unrelieved responsibility and permanent distraction necessitated the short story form.
Raymond Carver, Fires: Essays, Poems, Stories
레이먼드 카버는 알코올 중독(을 이겨낸)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취기가 머리 위까지 뜨끈하게 올라올 때 글 쓰고 싶은 충동을 느껴봤습니다만, 행동에 옮긴 적은 드물어요. 하지만 레이먼드 카버는 오랜 기간 알코올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글을 쓰고 다듬었군요. 그 과정에서 작가가 느꼈을 감정을 상상할 길이 없어 질투가 납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어떤 상황에서도 글 쓰는 사람이야말로 작가입니다. 온갖 핑계 대며 글을 안 쓰는 사람은 고개 들기 어려워집니다.
고작 [대성당] 한 권을 읽고 레이먼드 카버를 아는 척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대상을 미화하지 않고 본질을 냉소적일 정도로 투명하게 보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소설가 김연수가 쓴 역자 후기를 보니, 레이먼드 카버는 '더티 리얼리즘 Dirty Realism'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에 속한다 하네요.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요.
We didn’t say anything for a time. He was leaning forward with his head turned at me, his right ear aimed in the direction of the set. Very disconcerting.
단편집 [대성당]의 표제작은 맨 뒤에 배치되어 있어서 덕분에 다른 작품으로 레이먼드 카버 맛보기를 할 수 있었는데요. 저는 특히 "칸막이 객실"이 인상깊었습니다. 다른 작품이 허세와 거품을 걷어낸 현실밀착형 스토리라면 이 작품은 캐릭터의 무의식까지 내려가 '인셉션'해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주인공은 연을 끊고 살았던 아들을 만나러 기차에 몸을 실을 아버지입니다. 아들에게 주려고 고가의 시계도 사서 챙겼지만,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이(아들)을 여전히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마이어스의 청춘을 집어삼켜버렸고, 그가 연애해서 결혼한 젊은 여인을 신경과민의 알코올중독자로 바꿔놓고는 번갈아가며 병도 주고 약도 줬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누군가를 만나려고 이 먼 길을 나섰단 말인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누군가가 시계를 훔쳐 갔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그는 내면 깊숙한 거부감을 깨달았습니다. 남자는 아들과 재회하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인정하고 역에서 내리지 않았는데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남자를 태운 기차는 국경을 넘어버렸거든요. 황망한 심정이 되었을 남자는 아들과 화해하고 과거를 재정립할 기회를 영영 놓친 걸까요? 아니면, 화해와 소통을 향한 강박적 책임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정을 경험하게 걸까요? [칸막이 객실]은 상징적이고 매우 매혹적인 작품이어서 Carl Jung을 참고해가며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표제작 [대성당]은 '(대상을) 이름으로 고정하기'가 얼마나 폭력인지, 풍성하게 펼쳐질 경험 세계를 얼마나 제한해 버리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했습니다. 제 평소 관심과 닿아 있는지라 무척 재밌었습니다.
작품 속 화자인 '나'는 아내에게 친구가 찾아옵니다. 아내가 목소리로 10년 이상 교류해 온 '남사친'. 상대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그저 '맹인 a blind man'이라 부를 뿐입니다. 심지어 맹인에게 어울리는 검은 선글라스니 안내견을 곁들여 상상하며, 실제 아내 친구를 만났을 때 (맹인의) 턱수염이 자신의 상상을 배신하자 황당해 합니다. '맹인'이라는 범주어에 상대를 가둬버렸던 '나'는, 그에게 알량한 우월주의, 선민의식까지 보입니다. 뻔히 상대가 기차밖 풍경을 볼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왼쪽 창가에 앉았는지 오른쪽 창가에 앉았는지'를 물어보는 등 말입니다.
대신에 나는 뭔가 다른 이야기, 허드슨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기차를 타는 일 따위의 가벼운 얘깃거리를 꺼내볼까 했다. 뉴욕으로 갈 때는 기차 오른쪽에, 뉴욕에서 돌아올 때는 기차 왼쪽에 앉아야만 한다는 그런 이야기들.
“기차 여행은 어떻게, 좋았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런데 어느 쪽에 앉으셨나요?”
“뭐가 궁금한 거야, 어느 쪽이라니!"아내가 말했다.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말했다 (pp.294-295)
하지만, 음식과 마리화나를 나누며 맹인에게 서서히 경계심이 풀린 '나'는 비로서 상대를 '맹인'이 아닌 '로버트'로 보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시각 우월주의의 삶을 살던 그가 다른 감각으로도 세상을 풍성하게 인식할 수 있음을 깨닫고 경이로워하는 결말이 매혹적입니다.
“Close your eyes now,” the blind man said to me. I did it. I closed them just like he said. “Are they closed?” he said. “Don’t fudge.” “They’re closed,” I said. “Keep them that way,” he said. He said, “Don’t stop now. Draw.”
(...)
“Well?” he said. “Are you looking?” My eyes were still closed. I was in my house. I knew that. But I didn’t feel like I was inside anything. “It’s really something,” I said.
눈 뜨고도 상대를 못 보는,
대화를 나누는데도 상대와 소통하지 못하는
이름을 부르는 데도, 그 이름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그런 우리 모습을 "대성당"이 보여주는 듯 하여,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