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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플친 Y님께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하는 글의 힘이 새삼 놀라울 뿐"이라며 [다섯째 아이]의 리뷰를 마무리했다. 도리스 레싱의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 역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꼬리를 물며 확장하는 질문 때문이 아니라, 해소 안 된 불편감, 즉 찜찜함 때문이다.
(이하 줄거리 스포입니다)
24살 해리엇과 30살 데이비드는 파티에서 한 눈에 끌려, 결혼했다. 아이 예닐곱을 낳아 큰 집에서 뛰놀게 하는 부모를 꿈꿨던 이들은 지불 능력 밖의 대저택을 구입했다. 그들의 부모는 '행복한 영국인 중산층 가정의 전형'을 현실화하려는 신혼부부의 욕심을 에둘러 나무라면서도 지원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았다.
그 대저택, 같은 방에서,
1. 1966년 큰 아들
2. 1968년 큰 딸
3. 1970년 둘째 딸
4. 1973년 둘째 아들이 잉태되었고, 태어났다.
6년 사이 무려 네 번의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헤리엇은 감당하기 어렵게 전개되는 상황에 압도당했다. 짜증이 늘었고, 친정 어머니에게 점점 더 많이 기대었다. 하지만 "눈물과 속상함은 협의 사항에 결코 포함하지 않았던(49)" 이들 부부는 크리스마스나 여름 휴가 시즌이면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무대를 실수 없이 연출해냈다. 아슬아슬했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피임이나 유도분만 등 일체의 기술적 개입을 배척했던 자연주의파 헤리엇이 덜컥 다섯째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헤리엇은 임신기간부터 그 태아를 남다르게 느꼈다. 그녀에게 산후 우울증이 있었던걸까? 헤리엇은 뱃속의 아기를 "원수, 야만적인 것, 짐승, 괴물"이라 여겼다. 심지어 "커다란 부엌 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상상(66)"까지 했다. 그러니, 그 태아가 몸 밖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애정이 있었으랴! 아가를 향한 헤리엇의 증오와 혐오감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물론 아가의 생김새나 반응 패턴은 평범하지 않다(신생아 때는 엄마 젖가슴을 멍들게 하더니, 걸어 다닐 무렵엔 생닭을 이빨로 헤집어 놓았다). 다른 이들도 다섯째 아가 Ben에게 거리를 두고 비인간인 양 대우한다. 벤을 "외계인," "다른 종족" "몽골 사람" "네안데르탈 아기" "고약한 작은 짐승" "귀신이 바꿔놓은 아이" "도깨비" "난쟁이" "호비트" "짐승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인물들이 이 소설에는 계속 등장한다. 헤리엇은 온 세상이 아이에게 '비정상, 비인간, 다른 종족'이라 진단 내려주고(낙인 찍어주고), 자신을 "Poor Harriet"이라 동정해 주길 원한다. 자신은 남다른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었으니 희생자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자신이 벌린 상황을 수습하지 못해서 자신도 파멸하고 다른 가족의 삶까지 단절과 침묵으로 몰아 넣는 그녀는 과연 희생자인가? 그녀의 시가 부모들은 "대파국(99)"이 예견된다면서, 벤을 요양원(이라 말하고 수용소)로 보내 버린다. 침입자 별종 같던 존재가 사라지자 헤리엇 부부네 대저택엔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앤(Ben) 내 아이가 아니야"라며 차갑게 손절했던 친부 데이비드와 달리 헤리엇은 죄책감과 공포심에 짓눌린다.
결국, 그녀는 뻔히 "대파국" 결말이 예상되는 선택을 했다. 그렇다. 자신이 "고약한 작은 짐승"이라 부르던 그 아이를 다시 집에 데려와 "인간화시키려는(156)" 노력을 한다. 헤리엇은 심지어 자기가 내버렸던 벤에게 "진짜 자식 중 하나를 대할 때처럼(112)" 불쌍함을 느끼기도 한다. 과연 그녀는 죄책감 때문에 감당도 못할 거면서 다시 데려온 아이에게 끝까지 책임을 다했을까?
소설 초반부에 헤리엇의 친정어머니 도로시는 사위와 딸에게 "너희 둘은 마치 모든 것을 움켜잡지 않으면 그것을 놓쳐버릴 거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 같구나."(23)라고 에둘러 꾸짖는다. 헤리엇의 시어머니 몰리는 "순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면서도 사실은 인습의 정수였고 과장이나 과다함의 징후"(19)를 극혐하는데, 며느리를 그 표상으로 본다(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소설 후반부에서는 틀어진다). 헤리엇은 자기 자식을 두고, "그 애는 인간이 아니다"(142) "정상이 아니다(70)"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왔으면서, 막상 다른 사람들이 제 자식을 "몽골 사람"이냐 묻거나 "동물원에 가두자는 거냐" 물으면, 별안간 윤리적인 교양인이 된다.
나는 엄마를 비난하는(mother blaming) 시선을 경계하지만 솔직히 해리엇에게 호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엄마로서가 아닌 한 성인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이중적이고 남탓하기 좋아해서 맘에 들지 않는다.
챕터 나눔 없이 주욱 이어진 소설의 마지막 장은 당혹스럽게도, 엄마 헤리엇이 집나간 탕아, 벤의 불행한 미래를 과도하게 상세히 상상하는 넋두리로 끝난다. 45세 노안의 중년이 된 그녀는 대형 원목 식탁의 반들반들한 표면을 보면서 "화목한 가정과 행복"을 움켜쥐고자 했던 오만함을 반성한다. 20대에 4명, 30대 초반에 한 명, 모두 다섯 아이를 낳았어도 곁에 어떤 자식도 남아 있지 않은 외로운 엄마. 게다가 남편은 그녀에게 "우린 애가 없어. 해리엇. 아니, 나는 애가 없어. 당신은 애가 하나 있지."라며 정곡을 콕 찔러 준다.
왜 노벨문학상 내공의 작가 도리스 레싱은, 주인공이 제 자식의 불행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소설을 끝냈을까? 그 대답으로서 나는 이 문장에 주목했다. "그녀의 사고는 이런 틀 안에서 맴돌았다." (158)
작품에서 해리엇은 아이를 많이 낳고 기르고, 그 아이들이 다시 가정을 이룬 후에도 가끔 들리거나 돌아올 수 있도록 큰 집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런 틀에 갇힌 욕망이나 엄마 정체성 외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소설을 두 번이나 읽고도 잘 모르겠다. 도리스 레싱은 도돌이표를 그리고 사고가 같은 수위에서 맴도는 헤리엇을 두고 "그녀의 사고는 이런 틀 안에서 맴돌았다" 한 게 아닐까?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야 말로, 헤리엇 스스로가 벗어나기 원치 않아 머무르고 맴도는 틀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온통, 자식 생각....집 생각... 그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