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세상에 나온 이후 전 세계 너무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어린 왕자 Little Prince." 그 숱한 이들이 공유할지라도 왠지 내게만 특별한, 하나뿐인 그 이름, 어린 왕자. "어린왕자"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겼건, 미술 작품의 소재 삼었건 어린왕자는 도도할 만큼 원형의 모습을 간직합니다. 적어도 어떤 이에게는.



압구정 K현대미술관에서, 야심 차게 미디어아트를 통로 삼아 "어린왕자"에게 다가가는 길을 열었다고 하네요. 이미 많은 관람객들이 인스타그램에 화려하고 예쁜 사진들을 올렸기에, 가보기 전부터 머릿속에 그림은 그려집니다. 어떤 분위기의 전시일지. 초대권 2장에 더해, 네이버로 1장 더 예매하여 방문했습니다. 20% 할인 혜택을 받았습니다.


입장은 폐장 1시간 전인 오후 6시까지 가능합니다. 건물 1층, 엘레베이터에 이르는 짧은 동선에서도 "나의 어린 왕자에게" 전시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5층 버튼을 누릅니다. 5층에서 시작해서, 4층에서 관람이 끝나는 구조라고 합니다.



5층 전시에 소개된 미디어 아트 작품들은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팸플렛에 써 있네요. 프랑스 출신 케빈 브레이(Kevin Bray), 마찬가지로 프랑스 Pierre Pauze, 중국 Yuehao Jiang, 한국 한상임, 정운식, 구지은, 콜롬비아 Carlos Gomez, 영국 AJ Lass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인생샷 건져왔어요," "인생샷 찍으로 고~!" 식 블로그 리뷰를 이미 읽은지라 짐작은 했지만, 전시회장 들어서자마자 의자며 전시장 바닥에 십수벌 굴러다니는 패당과 코트에 깜짝 놀랐습니다. '관람객들이 벗어 놓은 것일까. 아니면 이 자체가 설치미술일까?'하는 어리석은 궁금증이 3~4분은 계속 피어오를만큼 벗어놓은 잠바들은 마치 허물벗은 뱀껍질같이 놓여 있었지요. 이내, 궁금증은 "외투를 치워주세요. 바닥에 두시면 안 됩니다!"라고 고음으로 안내하는 "K현대미술관"측 직원 덕분에 해소되었지만요. 그렇다면 왜 관람객들은 죄다 외투를 바닥 혹은 의자 위에 놓아두고 가뿐한 몸으로 관람을 하는가? 짐작하시겠지만, 바로 그것입니다. 사진! 인생샷!

저 역시,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사진은 찍고 가야지'의 마음으로 담느라 바빴습니다. 작품 설명은 읽는다고 빼놓지 않고 열심히 읽었는데, 아무래도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언어가 어려워서 기억에는 남지 않네요. "Shadow of Chandelier"의 작품 설명은 아래 사진에 맡기겠습니다.




5층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풍선껌 오브제를 선택한 구지은의 작품입니다. 씹고 버린 볼품없이 제각각인 분홍색 풍선껌을 모아 샹들리에를 만들었더니 멀리서 보면 꽤 화려합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씹다버린 껌들의 집합인데 말이죠. 작가는 이를 '과대자기(Grandiose Self)'라는 정신분석용어로 설명합니다. 보톡스, 필러로 부풀어 팽팽한 뺨처럼 부푸는 과시적 자기애 말입니다.




"나의 어린 왕자에게" 전시에 왔다면, 이 스팟에서는 꼭 사진을 찍어가나 봅니다. 기다리다가 다른 이들이 계속 사진 찍으러 교대해 "어린왕자" 옆을 채우기에 저는 정작 사진 못찍고 지나쳤습니다. 정운식 작가 작품이었습니다. 볼트와 너트를 이용해 금속판을 겹겹 쌓아 입체적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어린왕자, 여우, 선인장 등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마찬가지로, 꼭 사진 찍고 지나가야 하는 4대 Spot(4군데에서 사진 다 찍어 인스타에 올리면 goods받아가는 이벤트 진행중인지라, 다들 여기서 찍으시네요) 중 하나로, Yaloo의 네온 존(neon zone)도 놓칠 수 없겠네요.


이제 4층으로 내려갑니다. 내려가기 전에 다들 이 대형 벽화 앞에서 샷 찍으시더군요. 어린왕자가 금발이었던가? 달을 바라보는 어린왕자의 뒷모습에 갑자기 엉뚱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4층에서는 어린왕자의 행성 여행 루트를 따라가도록 미디어아트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김재욱이 만든 환상적 공간에서 그림자 놀이를 하다보면, 잠시 시계가 멈춘 기분이 듭니다. "혼자 부유하며 자기 자신을 되짚어 볼" 수 있게 유도하는 공간이랍니다.



큰 실수를 했군요. 전시회 안내 팸플릿을 받고도, 군중심리에 이끌려서 전시 동선을 따르지 않고 "Rose room"으로 직행했습니다. 전시장에서 나와서 보니 Adem Elahel, Golgotha, Raphael, 홍유영의 작품을 아예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Rose room에서 참 오래도 머물렀다지요. 왜 이 영하, 한파 날씨에 외투를 5층에 벗어 놓고 관람하는지 알겠습니다. 인생샷 때문이지요. 이 리뷰에 계속 등장하네요. 그 단어, 인생샷!


Moon Room도 인기였어요. 계속 기다려도 차례가 쉽게 안 나서, 다른 관람객 실루엣이 등장하지 않도록 Rose Room과 반씩 걸쳐서 한 장 찍었습니다. 이런 느낌입니다.



윤여준은 백남준처럼 브라운관을 이용해서 "어린왕자"의 보아뱀 이미지를 펼쳐보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Simpson도 나오고, 프랑스 친구 Baba Papa네 가족과, Tin tin(땡땡? 팅팅?틴틴?), 플레이보이 모델이 보아뱀 모자 속에서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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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12-31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엔 공연도 전시도 많아서 좋겠어요. SF엔 고갱전시회가 한창이고 3월이면 모네가 온다고 하니 둘 다 꼭 가볼 생각입니다.

얄라알라 2019-01-01 08:34   좋아요 0 | URL
고갱과 모네라니!
전 미디어아트 전시보다는 고전적 작품들 옛 스타일 전시에서 더 감흥이 큰지라 듣기만 해도 멋지네요^^ SF 날씨는 어떤가요?^^

transient-guest 2019-01-01 10:36   좋아요 0 | URL
영도 위의 날씨지만 춥습니다 저도 솔직히 모던아트는 잘 이해하지 못해서 고전이 더 좋습니다

AgalmA 2019-01-0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즈들 너무 탐나네요♥0♥
얄라알라북사랑님 공연전시 글 특히 즐겁게 보고 있답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즐기시겠지요^^?
저는 점점 움직이기 귀찮아서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데 님의 이런 점 존경스럽습니다/

2019-01-02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르셋과 고래뼈 - 이집트로부터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끝나는 옷 이야기 푸른들녘 인문교양 21
이민정 지음 / 푸른들녘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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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번대, 그중에서도 590번대라면 도서관에서 좀체 기웃거리지 않는 서가 쪽 책일 텐데 제목에 혹해서 『고래뼈와 코르셋』을 뽑아들었습니다. '득템!'하며 재밌게 읽고, 기억이 가물거릴만해지자 6개월 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저자 이민정은 독특하게도 "의류직물" 분야 박사 학위 소지자입니다. 2014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선정 청소년 권장도서인 『옷장에서 나온 인문학』의 저자이면서 고등 국어 교과서 집필에도 참여했다지요. 전문용어가 숨을 못 쉬게 하는 논문 스타일 글쓰기가 아니라, 초중고생뿐 아니라 어른들도 빠져들게 만드는 문체는 그가 패션잡지 에디터로 활약했다는 경력과 연결 짓게 합니다.

『고래뼈와 코르셋』은 여러 면에서 설혜심 교수의 『소비의 역사』를 연상시킵니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사물 혹은 소비 대상 이면의 역사를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양념 쳐서 쉽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비슷하거든요. 설혜심 교수가 역사학 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뜨고 있는 소비史 분야의 전문지식을 강의 PPT 수준 비주얼 자료로 일반에 공개했다면, 이민정은 옷, 옷감과 얽힌 정복과 착취의 역사, 구별짓기와 개인 집단의 정체성 등을 풍부한 곁가지 에피소드로 프릴 달아 내어놓았습니다. 재밌고, 유익합니다. 역사 공부, 요렇게도 하는구나 싶어서 어린 학생들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옷에 관한 한 '멀티플레이어'를 자부한다는 저자 소개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만큼, 이민정은 옷과 패션에 관한한 "박학다식" 그 자체인데요. 예를 들어, 유럽 정복과 함께 사라졌던 원주민들의 생활양식과 물질문명을 언급하면서 단순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브리치클로스뿐 아니라 버펄로 사냥으로 쌓아올린 뼈 무덤 사진을 소개합니다. 또한 옷감 중에 '목화'가 단연 최고라면서, 목화가 일상으로 들어오기까지 피와 땀을 착취당한 흑인 노예들의 삶을 소설 『뿌리』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흑인 배우 헤티 맫내이얼의 슬픈 사연으로 살을 붙여 설명합니다. 재밌죠. 이렇게 자료를 모으고 다룰 수 있기까지 이민정 저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민정 저자 덕분에 이렇게 뒤늦게야 '고래뼈 코르셋'이 뼈로 만든 것이 아님을 알았는데요. 저는 이제까지 뼈에 탄성이 있어서 코르셋 소재로 쓴 줄 알았더랬죠. 알고 보니 뼈가 아닌, 고래수염(baleen)으로 코르셋을 만들었는데 이를 착각한 이들이 whalebone으로 번역하면서 오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세계명작 동화를 읽으면서 공주님 드레스의 소매가 왜 그리 쳐져 있을까 궁금했는데, 오호! 바로 블리오였군요. 에드먼드 레이튼이 그린 여성들이 입은 드레스가 그것이랍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되네요. 번쩍이는 북두칠성 별 박아 네일아트한 여성에게 김장 배추 절이자고 할 수 없겠듯, 소매를 길게 늘인 드레스를 입은 여성에게 물 길어오라 못했겠네요. 이민정 저자가 소개한 "시도서" 속 농기구를 들은 여성의 치마 길이가 짧고 소매가 간소한 것과 대비됩니다.





『고래뼈와 코르셋』 본문 129쪽에 소개된 사진

마지막으로, 위 사진 속 빨간 양말은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요? 저는 어렸을 때 읽은 "일곱 마리 까마귀"란 동화 삽화에서 까마귀들이 신고 잤던 양말과 너무 똑같아서 유심히 보고 기억했는데요, 놀랍게도 이 양말은 4세기 경 제작되었답니다!!!!! 1700년 전 양말이란 말이지요.

6개월 시간 차를 두었더라도 그래도 두 번이나 읽은 책 제목을 『고래뼈와 코르셋』이라고 바꿔 기억하니 부끄럽지만, 『코르셋과 고래뼈』는 일상의 옷과 옷감, 나아가 역사에 천장 없는 호기심의 풍선을 올려보게 하는 좋은 책이라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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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우주 - 우주과학의 역사가 세상의 모습을 바꿨다! 세상을 바꾼 과학
원정현 지음 / 리베르스쿨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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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과학사라면, 졸업 필수 교양 영역 3학점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들은 강의로 접한 게 전부입니다. 존함도 기억나지 않는 강사에게는 죄송하지만, 족히 200여 수강생을 욱여넣은 대형 강의실에서 매주 150분이 어찌나 지루했던지 배배 몸을 꼬다 못해 영화 월간지를 뒤적이며 시간을 때웠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게으른 무관심에 상응하는 학점을 받았기에 인과응보이긴 합니다만....... 과학사를 강의하고, 고등학교 과학사 교과서를 집필한 원정현 저자는 기존 출간된 과학사 책들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답니다. 그녀에 따르면 기존 출간물은 크게 두 종류, 즉 연대기 순 아니면 과학자라는 인물 중심으로 과학사를 서술하는 방식 중 하나를 따랐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두 방식으로는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사를 기술하기에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출간되어 있는 과학사 책들을 보고 새로운 책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과학사가 도구로써 이용되는 기존 도서의 한계를 넘고, 과학사와 과학적 개념이 서로를 보충하며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과학사를 통해 좀 더 재미있고 쉽게 과학 개념들에 접근하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을 바꾼 우주』, 6쪽 '저자의 말'



먼저, 과학사 공부 시작하면서 주의할 점을 과학사학자로서 친절히 안내해줍니다. 1) 과거의 과학은 현대의 관점으로 접근해서는 아니 되며, 2) 용어와 호칭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3) 마지막으로 유럽 중심의 과학에 함몰되지 말고 시야를 넓혀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이뤄진 과학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이라고 합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세상을 바꾸는 우주』, 첫 장에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등장하지요. 이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라는 제목의 2장에서는 당연히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합니다. 이어 3장 "천문학 혁명, 150년 동안 진행되다"에서는 튀코와 그의 제자였다는 케플러가, 4장 "망원경, 우주의 비밀을 보여주다"에서는 갈릴레오가 마지막 5장 "판 구조론"에서는 베게너가 등장합니다.


비딱하게 틈새 비집기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제가 『세상을 바꾼 우주』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갈릴레오가 자신의 전문 지식을 적극적으로 정치인에게 어필하려 들었다는 부분입니다. 원정현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처음에 갈릴레오는 망원경이 군사적 목적으로 쓰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망원경을 당시에 파도바를 통치하던 베네치아 총독과 의원들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망원경을 총독에게 바치는 대가로 연구 후원을 받고자 했던 갈릴레오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상을 바꾼 우주』, 131쪽

하긴, 오늘날에도 각종 장학금과 연구지원비가 없다면 과학사에서 멋진 성취들 이뤄내는 속도가 더뎌지겠지요? 다만, 그 바쁜 갈릴레오가 정치인들을 일부러 만나면서 자신의 연구성과를 어필하여 후원을 확보하려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은 의외여서 기억하게 됩니다. 원정현 저자는 연구하랴, 후학 양성하랴, 박사 논문 집필하랴 바쁜 와중에 『세상을 바꾼 물리』, 『세상을 바꾼 화학』, 『세상을 바꾼 생물』까지 펴내주었네요. 이 "세상을 바꾼" 시리즈 4권을 완독하면 과연 '과학이 세상을 바꾸었는지'를 좀 더 깊이 있게 알게 되겠네요. 차근차근 읽기에, 도전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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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언어 -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
양정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세상을 바꾸는 언어

 


 역주행 베스트셀러였다는 『언어의 힘』 이 밀어낸 물결이었을까? 2018년 유난히도 "말," "언어"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들이 많이 보였다. 나긋나긋 일기체로 "묵언"의 디톡스 운동을 전파하려는 책,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니!"라며 자기 긍정의 말을 종용하는 책, 최근에는 『차별의 언어』(장한 업 교수, 이화여대) 나 『언어의 줄다리기』 (신지영 교수, 고려대) 등 학자들까지 언어 이면, 차별과 불평등을 공고히 하는 이데올로기를 반성하자는 책을 펴냈다. 『세상을 바꾸는 언어: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도 2018년 출판계 파도를 타고 쓸려온 책인가 싶어,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런데, 저자 양종철을 소개하는 책날개 문구에 한국 사회 저자 소개에서 빠지지 않는 학력 사항, 수상 경력 등이 없음을 확인하고 호기심이 생겼다. 대신 그의 생을, 카피라이터 정철이 "양정철로 살았다.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으로 살았다. 문재인을 만났다. 문재인으로 살았다. 다시 양정철로 산다."라고 굵고 짧게 압축해냈다. 읽어봐야겠다 싶어졌다.

 



책 손에 든 후, 내려놓지 않고 한숨에 다 읽었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진보를 이루려면 국민들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7쪽)" 하기에 함께 봉하마을에서 글을 쓰자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빚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드러내놓고 혹은 행간에서 모시던 전 대통령과 현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존경심과 뜻을 함께 세우고 펼친다는 의지가 계속 보인다. 이 책을 쓰기까지, 대한신문기자연합 회장으로서, 대기업 홍보담당 전문 인력으로서, 문예창작과(우석대) 교수로서, 정치인의 비서로서 활동하며 얻은 경험에 더해 뉴질랜드에서 거주하는 친동생, 영국에 거주하는 처제와 동서로부터 얻은 글로벌 비교자료까지 많은 자료를 양정철은 성실히 모았다. 그가 글쓰기 가르치는 업을 삼았었음을 모르고 읽었을 때도, 어쩜 이리 국어 바르게 쓰기 정신이 곧은 데다 실제 실천까지 중시할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원체 글쓰기를 좋아하고 좋은 글쓰기를 사명으로 아는 이이다.

『세상을 바꾸는 언어』는 평등의 언어, 배려의 언어, 공존의 언어, 독립의 언어, 존중의 언어라는 5장 구성에 짧은 에세이들을 담았다. 모든 에세이들이 부제인,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으로 수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실은 구매해서 포스트잇 덕지덕지 붙여놓고 싶은 페이지가 많았다. 여러 주장 중, 상당 부분은 이미 기존 혹은 양정철의 책 이후 출간된 책의 저자들과 주장과 겹친다. 예를 들어 신지영 교수가 『언어의 줄다리기』에서 맹렬히 비판했던 '미망인'이란 단어 이면의 성차별주의나 장한업 교수가 콕 집어낸 한국 특유의 '국민여동생,' '국민배우' 표현의 함의 등이 그러하다. 양정철의 여러 주장 중,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바로 한국에서는 유난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식 정서가 팽배한지 일상생활에서나 정치권 활동에서 '고성 高聲'을 많이 쓴다는 지적이다.


목소리가 크다고 설득력이 높은 게 아닌데도 우리 사회엔 왜 그렇게 고성이 많은 것일까. 사회 전반에서 목소리가 커진 것은 저마다 절박한 상황이 있어서일 것이다. 목소리가 크지 않으면 주목해주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 오랜 풍토가 만든 일종의 사회 병리다 (『세상을 바꾸는 언어의 힘』52쪽) "

양정철 저자의 해석을 듣고 보니, 단지 목소리의 크기뿐 아니라 태도의 공격성에도 마찬가지의 배경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위 점잖게 언질을 주거나, 담당자가 문제 사항을 알아서 처리해주리라고 기대했다가는 숟가락 뺏기는 경험을 하거나 전해들으니...... 내 숟가락 남이 챙겨주지 않는다는 절박함 때문에 나의 상황을 더 격하게 어필하려 드는 성향. 점잖빼거나 어물쩍거리다가는 30분이 지나도록 새치기 때문에 비오는 날 택시 못 잡거나 TV도 없었음을 증명 못해 시청료 8년치를 못 돌려받는다. 목소리를 키우거나 태도에 공격성을 더하는 해법을 쓰게 된다.

비록 230여 페이지 짧은 에세이였지만, 양정철 저자는 서문에서 조심스럽게 희망한 집필목적을 상당히 성취한 것 같다. 그는 한국 사회가 일부가 아닌 전반적으로 차별을 덜 하고, 특권의식을 덜어내고 온화해지는데 꼭 필요한 지적을 했는데, 문제는 저자처럼 언어용법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훈련을 받았거나 업 삼는 일부가 아닌, 그렇지 않은 다수가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을 느끼고 힘을 키우는 방향으로 말하고 써야하는 것이다. 실천하지 않으면 평등, 공존, 배려, 화합. 가치는 가치로서만 남게 되니.

"지방방송 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감사해요. 감사드려요." (상대높임법은 합쇼체를 써야함)

"좋은 하루 되세요." (어법에 안 맞는다!)

"중대박사태권도, 연세대치과, 용인대 유도" (학력드러내는 사회)

"내일은 맑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주체없는 수동형 문장)

"미세먼지 좋음" ('아니, 미세먼지가 어떻게 좋을 수가 있는가?')

"살생부, 진검승부, 화약고, 용병, 격전지" (전투적인 방송용어)

"일가견, 기라성, 18번, 간발" (일본어의 잔재)


『세상을 바꾸는 언어의 힘』에서 지적하는 민주주의 저해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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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zhak(2017) - 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

 



"이차크 펄만 (Itzhak Perlman 1945~)," 그가 세기적 거장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사실을 모를 이 없겠죠? 저 역시 '클래식 문외한'일지라도 그의 연주를 일부러 찾아 듣곤 합니다. 2017년 내한 공연 당시, 한국의 팬들이 어찌나 뜨거운 후기를 올렸던지, 뒤늦게 Live 공연을 놓친 아쉬움도 느껴봅니다. 마침 그를 주인공 삼은 영화가 올겨울 한국에서도 개봉한다기에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는는 수입배급사 측에서 제공하는 홍보의 글 (http://naver.me/FwVe7pfS에서  취할 수 있을 테니, 저는 문외한으로서의 날 감정을 적어보겠습니다.   


"Itzhak(2017)"은 "2017년 뉴욕국제다큐영화제 공식경쟁초청 / 2018년 팜스프링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 / 2018년 아틀란타유대영화제 다큐멘터리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그 작품성을 이미 인정받았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Marvel 영화처럼 현란한 화면이나, 기승전결이 명쾌한 구조의 영화에 익숙한 이라면 다소 80분이 밋밋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현재의 이차크 펄만과 그의 아내 토비 펄만의 일상을 중심으로, 주로 대화를 통해 관객들이 펄만의 과거를 상상케 하고 미래에 포부에 믿음을 갖게 합니다. 
이차크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로 귀 호강하리라는 예상은 영화관 찾기 전부터 했으나, 영화는 의외성의 의아함도 안겨주었습니다. 
첫째, 펄만에 버금가도록 그의 아내 '토비 펄만'의 목소리가 크게 전해집니다. 굉장히 놀랐습니다. 이차크 펄만이야 이미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해도 이미 전 세계적 유명인사이기에, 마치 이 영화가 '토비 펄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짓궂은 상상도 했을 정도입니다. 80분 영화를 보고 나면 관객은 '토비 펄만'이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문화자본조차 변별되는 부모를 둔 뉴요커 출신에 음악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욕심이 대단했으나 욕심만큼 성공하지 못했음을, 대신 그녀는 천재(이차크 펄만)을 알아보고 천재를 남편 삼은 후 그의 연주에 여전히 감탄하면서도 매서운 비판을 가하는 매니저를 자청함을 알게 됩니다. 플러스, '토비 펄만'은 자신이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는지, 사랑과 존중이 결합한 결혼이야말로 최고"임을 설교합니다 (반면에, 영화 속에서 이차크 펄만은 적어도 명시적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고마움, 존경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나아가 토비 펄만은 남편과 새로운 후학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자신이 결국은 어린 시절 꿈을 연주가로서가 아니라 교육자로 더 크게 이루고 있음을 뿌듯해합니다. 때론 이차크 펄만의 목소리를 가져가듯 대리인처럼 이야기해대는 그녀의 모습이 당당해서 아름다운 동시에, 영화 제작 이면의 의도를 궁금하게 만들만큼 큰 비중으로 계속 등장하네요. 


 둘째, 이 영화가 이차크 펄만의 천재성을 관객과 이미 공유한 바탕 위에서 전개된다면 그 천재성이란 레이어 위에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신념'을 탑 데코레이션으로 올렸음이 의외였습니다. 현재는 미국인 자녀를 5명이나 두었고,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직접 찬사를 듣는  이스라엘계 미국인이지만, 펄만의 뿌리가 이스라엘이고 유대인임을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에게 각인시킵니다. 예를 들어, 이차크는 나치즘 신봉자가 바이올린 안에 몰래 상징기호를 새겨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더니, 바이올린의 현을 아예 다시는 연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격분합니다. 물론 그가 연주하는 그 유명한 쉰들러의 리스트도 소개되지요. 극장 객석에서 소름을 경험했을 정도로 애절한 연주였습니다. 이차크 펄만의 정신성이 현을 울리고, 사람들을 울리네요.  

영화 속 등장하는 젊은 이차크의 눈망울은 유난히 따뜻하고 맑습니다. 몸집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순하디순한 사슴 눈망울인데, 소리의 세계를 남다르게 감별하고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예술가의 행복함을 담고 있네요. 1945년생이니 이미 73세인 펄만의 눈빛에서 여전히 생기 넘치는 환희가 보이니 참 신기하네요. 아, 물론 낙천적 기질에서 나오는 장난기도 담겨있고요. 제아무리 화려한 스펙을 갖췄더라도 "자신이 진정하고픈 일, 잘하는 일"에 확신 없이 끌려다니는 인생을 사는 어른들을 많던데,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가졌고, 무엇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지를 확실히 아는 펄만이 부럽습니다, 자신의 장애(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인한 불편한 다리)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낮춰보는 데 대해 펄만이 "재능이 있다면 써야지(Use it), 테니스 선수가 될 건 아니잖아."  라고 소신을 밝히는 데 속이 후련하더군요. 최근 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  역시 뮤지션(musician)을 천직삼으리라는 소명의식을 보이던데, 천재들에게는 역시 남다른 데가 있군요! 



"Itzhak(2017)"를 명동 CGV 시네라이브러리에서 감상했습니다. 아트영화하우스라던데요?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니고서는 개봉관 찾기도 어렵고 관객에게 소개되기 어려운 현실, 이 영화는 12월 20일 개봉된다던데 과연 몇개의 상영관에서 얼마나 오래 상영될까요? 걱정 되는 마음에 응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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