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을 부터, 드나드는 공간이 있다. 여섯자리 비번은 멤버쉽의 은밀한 상징. 감사한 마음 반, 자부심 반, 조심스레 이 공유 공간을 드나든다. 


한 두달 지나다 보니, 


이 공간 아무도 청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유통기한이 몇 년 지난, 개봉도 안한 커피원두도 있고, 

기물마다 먼지가 뽀얗다. 


내 기준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문방구용 가위, 머그컵과 에프킬라(?)가 같은 선반에 분류되어 있고

여름 지난지 반년인데 선풍기는 공간의 중심에 떡 하니 자리한다. 


공간 빌려쓰는 주제에 오지랖,

처음엔 물티슈로 "소심"하게 청소했다.

텅 빈 "에프킬라" 통들을 버리고, 

오래 묵은 달력을 버리고

먼지를 털어내고 환기한다.

그러다가 "대범"해져서

아예 빨아쓰는 목화솜 행주를 가져온다. 

오늘은 아예 청소기 돌리려 소매를 걷어 붙였다.


창문 확짤 열고 신호탄을 쏘았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대범"하게 싸악 치워놓으리! 

그런데 

아뿔싸!

청소기는 아예 작동도 안하는 고물. 오백년 전, 고장난 것이다. 



이 공간에는 족히 10년전에 흔적을 남긴 분들도 계신데

아무도 청소하지 않는 것일까? 남의 물건 혹시라도 청소하다 건드릴까 서로에 대한 배려로서 동료애만큼 먼지도 같이 증식시키는 것일까? 

"공유지의 비극"은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바닥 물청소 하면서 자꾸 그 표현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가 더 편할 수 있도록

내 일처럼.

그런 마음으로 공유공간을 쓴다면....

좋.

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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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2-23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유공간이라서 그러긴 하죠. 우리동네 마을회관은 매달 당번이 청소를 하는데
화장실이 조금 그래요. 그래서 청소할 때면 화장실 청소 시간이 제일 오래 걸려요.

남자들은 앉아서 볼일을 보면 좋은데 벽에ㅜ막 튀고 그래서 암튼 공유공간이 만만치 않아요.

2019-12-23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2-23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간 하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청소를 하겠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누구도 청소를 하지 않게 돼요. 이런 사람들 속에서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는 사람을 보면 대단해요. ^^

2019-12-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 8월 폭염, 땡볕이라는 이름이 경박하게 느껴질만큼 뜨거움, 순수한 뜨거움의 8월 태양. 

자외선 차단제도 모자도 없이 온 몸으로 그 뜨거움을 받는데 이 끓어오르는 희열, 인간을 고개 숙여 감사하게 만드는 경건한 힘. 태양의 열기.

8월 오후 3시의 햇볕은 너무도 강렬해서 몸 겉과 내면이 멸균시켜주는 듯 했다. 

도심 아스팔트에서의 땡볕이 아니라, 

시골, 농지에서의 땡볕. 그 볕에 익은 벼로 밥을 지어 먹었다.  뜨거움을 기억하기에 더욱 감동인 그 밥. 



벼는 뜨거운 햇살과 기어올라 집(쥐가 논에 집을 짓는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을 짓는 쥐의 간지럽힘, 여름의 태풍 모두 감내하고 맺은 열매를 인간에게 내어주고, 몸통, 볏짚까지 다 가져가라 한다. 

복조리를 만들어 왔다.



합성화합물들을 다 걷어내리라는 듯 뜨겁게 내리쬐이던 그 8월의 태양. 

2019년, 내 감각의 문이 가장 살아 열리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글로도 뜨거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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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동료가 선물해준 책이 [종의 기원]. 멕시코 친구였는데 당연히 영어 원서였다. 친구 성의엔 미안했지만 점차 서가 뒤편으로 밀려난 그 책은 지금 지적으로 태만한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며 숨죽이고 있다. 


책을 좋아하지만, 편식이 심해서 철학책을 잘 못 읽는다. 편식이 아니라 그냥 취향도 없이 참을성이 부족한 거다. 엉덩이 붙이 고 앉아서 한시간에 한장을 읽더라도 곱씹어 문장을 삼킬 참을성도, 아밀라아제도 없는 거다. 그냥 마음이 급해서 영양제 뚜껑이 열려 있어도 못 꺼내는. 


몇 달 전, 선물받았는데 결단만했지 아직 시도도 못한 책이 있다. [정신의 삶 (The Life of Mind)] 한나 아렌트. 책 읽다 이해가 안 가면, 바닥을 뒹굴며 제 분을 못참아하던 초딩시절이 떠오르며, 나 이러다 머리카락 웅큼웅큼 빠지는 거 아냐? 싶어서 시도도 못한다. 



그래서 살짝 비껴가기. 입문서 격으로 그녀의 삶을 다룬 책부터 접한다. 그것도 이왕 소프트하게 하는 거, 소프트하게 그래픽 노블로. 




"한나 아렌트를 읽는 법"


아렌트는 의식 있는 파리아pariah이자 풍자가로서 어떠한 규칙에도 얽메인 적이 없으며,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래서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아렌트에 관해 쓴 글을 읽으면 우리는 아렌트보다 글쓴이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다시 아렌트로 돌아가자. 그리고 다시.비평가의 글을 읽고, 아렌트로 돌아가기를.반복하면 된다(238쪽).


두 번의 탈출,

from 독일.

from 프랑스.

그런데 층위가 다른 그 세번째 탈출은? 한국아렌트학회 회장 김선욱교수가 이 책의 방점이 세 번째 탈출에 있다 하는데, 읽고도 확실히 문장으로 설며하기가 어렵다. 이래서야 [정신의 삶]에 입문할 수 있을까? 2020년이 가기 전에 [정신의 삶] 읽기를 새해목표 중 하나로 미리 올려놓고. 리뷰 끝! "우리는 아렌트보다 글쓴이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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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9-12-1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나 아렌트 좋아하는데 책은 논문 하나 읽은 게 전부이네요, 불성실함에 자책하며 내년에는 꼬옥 이렇게 다시 약속을 해봅니다. :)

2019-12-20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3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쳔 베일을 보러 새벽 극장을 찾았습니다. [겨울왕국2] 스크린 독점관련 문제제기 덕분일까요? [Ford vs Ferrari] 상영회차가 상당합니다.  새벽인데 상영관 좌석이 5-60%는 차 있습니다. 

읽을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 영어 뿐이지만 웹서핑해보니 [포드 vs 페라리], 해외에서도 호평 일색입니다. 하기야,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인데요. 그는 연기를 위해 '고무줄 몸무게'의 리스크를 안고가며 캐릭터와 하나 되는 노력으로 유명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Vice]의 딕 체니 캐릭터를 분석하며 딕 체니가 자주 쓰는 어휘를 적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입에 착착 그 말들이 붙도록 노력했다는데요. 이번 [포드 vs 페라리]를 찍으며 물론 카레이싱을 따로 배웠죠.  까다롭고도 무뚝뚝한 Ken Miles 캐릭터 표현을 위해, 입을 앞으로 돌출시켜 "나 불만있다. 그래서?"의 표정을 반영구화장처럼 입었네요. 


[이퀼리브리엄]에서 반해서, 그의 영화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의 인터뷰 동영상을 샅샅이 뒤지며 "크리스천 베일" 조각 모으기를 했었지요. 그는 캐릭터 연구가 재미있다고 합니다. 자료가 없으면 아무리 문필력이 좋아도 쥐어짜 쓸거리가 없듯,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 없이는 아무리 연기경험 많은 배우일지라도 연기에 실패할 것 같아요. 이런 연기의 신, 크리스천 베일을 알아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참 다행입니다. 


[포드 vs 페라리] 관람 포인트를 짚어주는 유투버들이 많더라고요. 더분에, 르망 경주의 의의, 귀족 스포츠로서 카레이싱의 역사, 레이싱을 두고 유럽과 미국의 자존심 대결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났는지 등등 배웠어요. 하지만 저는 애시당초 오로지 크리스천 베일을 보러 극장 찾았기에, 계속 이 배우만 생각합니다. 



 [포드 vs 페라리]에서 켄 마일스(크리스천 베일)은 [Le Grand Bleu]의 주인공 자끄를 연상시킵니다. 그 둘 모두, 세속의 평범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경지, 어떤 조우의 순간들을 만끽합니다. 언어화할 수 없는. 언어로써 타인에게 전할 수도 없는 황홀감. 초월감. 

비록 켄 마일스는 고도로 정교한 Machine이라는 매체를 통해 "7000RPM"으로 상징되는 일상성을 넘어버리고, 자끄는 광활한 바다에서 돌고래를 통해 다른 생명종의 세계와 만나지만 말입니다. 아, 또 차이가 있습니다. 자끄는 그 초월감에서 느끼는 편안함에 끌려서 현실의 끈을 놔 버리지만 켄 마일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르망 경주 결승선 끊는 시점에서의 그의 타협(?)은 켄 마일스가 세속의 규범들에 전적으로 냉소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Ford vs Ferrari]에서의 크리스천 베일은 서부영화 [투 유마 3:10]에서의 댄 에반스와 일관된 속성을 보여줍니다. 

세속의 가치에 연연하지 않는 어떤 뚝심 고집, 고결하기까지 한 약속 지킴. 알고보니 두 영화의 감독이 같아요. 

제임스 맨골드입니다. 켄 마일스는 GT40개발을 위해 무려 1000시간의 시승을 했다하고, [투 유마 3:10]에서 댄 에반스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사명을 목숨을 걸고 묵묵히 수행합니다. 두 주인공 모두 한 순간, 사라지죠. 허망하게 죽어요. 그런데 어떤 전기를 읽었을 때만큼이나 감동이 강렬합니다. Pale Blue Dot, 지구 위에서 스티브 잡스건 마르크스건 마릴린 먼로건 모두 하나의 더 작은 점이라면 이왕 찍고 가는 거 온점, 찌~진찐하게 찍고 가는. 조용히 찐하게 찍고 가는 모습.

 자크처럼 돌고래를 따라 저 세계로 건너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점을 꾹 눌러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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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9-12-29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완전히 크리스천 베일 때문에 봤어요!!!!!!!!!!!!! 영화 너무 좋았어요!!!!!ㅠㅠ 그런데 님의 글을 읽어보니 제가 모르던 것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건 생각을 안하고 켄 마일즈만 검색을 해서 읽고 그랬거든요. 지금도 영화에서 제가 좋아했던 크리스천 베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영화였어요!!

2019-12-29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완두콩은 자라서 어디로 갈까? 라임 그림 동화 22
피에레트 뒤베 지음, 이브 뒤몽 그림, 양병헌 옮김 / 라임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채소 먹어야지, 녹황색 채소는 눈에 좋단다. 사과는 껍질째 먹으렴"

아이들에게 채소 먹으라고 하는 어른들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그 채소들은 어떻게 나는 건가요? 누가 기르고, 언제가 제철이며 산지가 어디인가요?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아이들 채소 먹이려 날마나 애쓰시는 분들, 그런데 정작 본인도 본인이 먹는 채소가 어떻게 식탁까지 왔는지 별로 궁금해해보지 않은 분들에게 최적의 동화책을 소개합니다. 그림책이라지만, 초등학생은 물론 어른들에게 좋은 책 같아요.



[완두콩은 자라서 어디로 갈까?]에는 세 형제가 등장합니다. 머리가 말랑할 아이들이라면 금세 외울 그 귀여운 읾은 장-자크, 레알, 그리고 도널드랍니다. 어린이 책을 오래 써온 작가여서 그런지 피에레트 뒤베는 이 세 알의 완두콩 형제에게 인격과 개성을 부여했어요. 그래서 더 읽는 재미가 커요. 몽상가 레알은 시를 즐겨 쓰고, 도널드는 유머감각으로 주변 완두콩을 웃겨주지요. 장-자크는 '카트만두'라는 곳에 가서 모험하게될 거라 믿고 있어요.



 그런데 완두콩 농장의 수확 날, 탈곡된 완두콩들의 행선지는 '카트만두'가 아니었어요. 화물트럭이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달려 도착한 그곳은 커다란 공장이었어요. 완두콩들을 환영해준 이들은 이 공장 소속 연구원과 직원이었고요. 


완두콩들은 크기와 신선도에 따라 선별된 후, '욕조'같이 생긴 통에서 다같이 씻고, 뜨거운 스팀으로 '데쳐진' 후, 급속 냉동된답니다. 기술적인 과정인데 작가가 어찌나 발랄한 문체로 기술했는지, 정말 완두콩들이 '카트만두'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느껴져요. 마지막 종착지는 인간들의 야채소비를 위한 개별 포장지 안으로 쏘옥. 완두콩과 당근 등 다른 채소들과 함께 어울려서 말이죠. 완두콩들은 "끝"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입 안으로 들어갈 운명이어도 굉장히 즐거워합니다. 


어떤가요? 완두콩 삼형제는 물론, 채소들이 달라보이지 않나요? 요즘에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들도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출처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들지도 않고, 음식의 이동 경로에 대해 감사한 마음도 적은 것 같은데 [완두콩은 자라서 어디로 갈까?]는 이 모든 것들에 힌트를 주는 고마운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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