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딸들 1
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홍익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조금 고통이 느슨해지면 죽은 듯이 잠에 빠지고, 그러다 새로운 통증의 파도가 밀려오면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중략)... 다시 통증이 찾아왔고, 나는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턱턱 막히는 숨을 참으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멀리서 순록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얇고 노란 초승달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순록의 달(Reindeer Moon)'이었다."



『세상의 모든 딸들』 2편 332~333쪽.

한국에서는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타이틀로 출판되어, 특히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많이 읽힌 소설의 클라이맥스 대목이다. 원제 『 Riendeer Moon 』에 등장한 초승달 아래, 홀로 아기를 낳는 주인공 야난의 고독과 생존본능은 처절하다 못해 비장하다. 저 독백을 조아리던 한 사람, 여성, 초산 중인 10대 소녀, 야난의 숨은 천천히 멈추었다. 그녀의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야난은 그렇게 죽어갔고, 아기는 태어났다.





벚꽃 만개한 4월의 환한 대낮, 스타벅스 매장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눈물을 어찌 억제할까. 『세상의 모든 딸들』을 읽으며 콧날이 시큰해지다 뜨거운 눈물의 강둑이 몇 번이나 터지려는 걸 어찌 막으랴.

K에게 전해 들은 말이 있다. 그녀는 출산의 고통 속에서 짧은 혼절과 진통 주기를 반복하면서 내내 "칼라하리 사막의 니사도, 나의 어머니도, 그의 어머니도,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이렇게 생명을 낳았어."를 되뇌며 감격스러워했다고 한다. '진통이 어마어마하다던데 그런 낭만적 생각을? 에라!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꿀꺽 삼켰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야난이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아기를 낳는 그 장면에서 바로 K가 전해준 그 '짧은 잠과 진통의 반복' 대목이 등장했다. '소설이 아니었구나. 경외했던 것이구나. K는 야난, 아니 생명을 낳고 지켜온 이 땅의 그 모든 어머니들에게 감격했기에 진통을 감사해하며 견뎠구나.



『세상의 모든 딸들』은 20,000년전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매머드, 여우, 늑대, 호랑이, 순록, 하이에나가 등장하고 파카(기능성 방한 아웃도어가 아니라, Inuit언어에 등장하는 가죽옷의 이름이다)를 입은 수렵채집 부족들이 등장한다. 원서로는 393쪽, 번역판으로는700쪽에 이르며 무려 2만년 전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이 21세기 넷플리스 SF마냥 빠른 전개와 생동감 있는 묘사로 쓰여진 건 작가 엘리자베스 M. 토마스의 인생이력과 관련 있다. 그녀는 부시맨(San族) 탐사대였던 아버지를 따라 20대에(1950~1956) 칼라하리 사막에서 지내며 그 곳 사람들과 자연물, 동물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인류학자로서 그녀는 이 경험에 기반해 『The Old Way』, 『The Harmless People』 등을 썼다. 부시맨이 따뜻한 지역의 수렵채집민이라면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묘사한 수렵채집민들은 혹독한 시베리아 추위를 견뎌내야하는 지역 사람들인데, 많은 부분 엘리자베스 토마스는 부시맨의 생활양식, 종교의례, 약혼과 결혼, 선물 교환의 규칙 등을 반영해서 상상해냈다.


예를 들어, 이 가계도만 보아도 약혼과 결혼으로서 집단의 연망이 어떻게 맺어지고 유지되는지 이것이 혹독한 환경에서의 생존에 어떤 잇점을 가져오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좁은 사회, 면대면 관계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토마스가 상상한 20000년전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체면, 윗 어른에 대한 공경, 서열짓기보다는 공동체성, 공동육아, 연대 등의 정서와 가치가 발달했다. 주인공 야난은 이 사회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에 비한다면 더 충동적이고, 자기주장과 고집이 세고, 독립적이다.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때린 남편 티무에게 발끈해서 바로 이혼을 선언하고, 어린 여동생 메리와 함께 집단을 떠나 홀로 이동하는 길을 택한 에피소드가 야난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야난은 어쩌면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생존에의 압박을 더 크게 느끼고 고난과 마주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고 동생도 살아 남긴다.

엘리자베스 토마스는 페미니즘의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1980년, 90년대에 학술서가 아닌 소설로서 여성의 존엄과 특히 어머니로서의 거룩함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나보다.



사람은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는 거란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나처럼 이렇게 살았어. 호랑이를 따르는 까마귀처럼 남편을 따르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사는 법이란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잘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만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야난, 언젠가는 너도 어머니가 되겠지. 세상의 모든 딸들이 결국엔 이 세상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는 것처럼......너는 티무의 아내로, 메리는 화이트 폭스의 아내로...



스마트폰이나 족보가 없던 20000년 전, 사람들은 피부 냄새와 음성으로 서로를 식별하고 이야기의 타래에 엮어 이름을 기억하고, 황홀경에 이르는 춤을 추어 천상의 존재와 소통하고 자신의 육체성을 초월하고자 한다. 마블에서 이야기하는 다중 유니버스가 아니어도, 이들은 원초적 생명력과 상상력의 힘으로 이 불가해한 우주의 거룩함을 만난다.『세상의 모든 딸들 』을 꼭 여성, 어머니의 시각에서만 읽으려하지 말고 인간의 위대함, 그 거룩한 생존력과 상상력의 측면에서 읽어 볼 수도 있겠다. 인류학자이자 휴머니스트로서 엘리자베스 토마스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를 비단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란 육체성으로 살지만 나는, 너는, 우리는(심지어는 늑대와 순록까지도) 연결되어 통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땡땡 展" 입소문이 대단하길래, 궁금했지요. 왠지 강아지 애칭 같은 이름인지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이미지랑 매칭이 안되는데, 도대체 왜 그리 칭찬들인지. 알고 보니 "땡땡"은, 유럽 만화의 아버지라는 에르제가 탄생시킨 만화 캐릭터 Tintin의 우리말 발음이더라고요. 예술의전당 측에서 벨기에 물랭사르 재단(The Hergé Foundation 혹은 Moulinsart) 과 1년간 공들여 준비한 전시라는데, 지난 겨울부터 차일피일 미루다 드디어 다녀왔습니다.



'미루기' 능숙한 관람객은 저만이 아니더군요. 전시회 종료일이 임박한 주말, "에르제: 땡땡" 展 보러 온 이들이 어찌나 많았던지요. 불안한 마음에 기념품샵부터 기웃거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sold out"된 아이템이 반은 넘었어요. 도슨트 해설은 아쉽게 놓쳤지만 여느 때처럼 오디오 가이드의 안내를 받을 수 있으니 든든합니다.



전시장은 총 10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해당하는 Room에 들어서면 자동으로 오디오 가이드에서 친절한 해설이 흘러나옵니다. Room1부터 Room10을 차근차근(개인차가 있겠지만 평균 1~2시간) 둘러보고 나오면, 마치 에르제(Herge)의 긴 인생을 허가받고 엿보는 느낌마저 들거예요.



입장권 티켓팅을 하면 전면에 Herge의 멋진 서명과 함께 비밀의 공간으로 이끄는 듯한 독특한 색감의 복도로 발을 내딛게 됩니다. Room1과 Room2에서는 화가로서의 재능과 가능성을 갖춘 Remi가 정통회화와 만화 사이에서 왜 만화가를 천직으로 택하였나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집중과 선택"이 그 답이었고, 탁월한 선택이었죠. 그가 남긴 작품은 단순히 만화가 아니라 세계의 과학, 문화, 역사, 예술을 총망라한 예술작품으로 칭송받아왔고, "땡땡" 역시 세계인의 마음 속에 살아 있으니까요. 이 '땡땡' 캐릭터가 어찌나 유명한지 벨기에에서는 문화유산급 콘텐츠로서, 매년 최고의 낙찰가를 경신할 정도로 예술적 가치도 인정받는다 해요. 마치 영국의 'Peter Rabbit,' 핀란드의 'Moomin'캐릭터 급 스타인가봐요.



"에르제: 땡땡 展"에서 가장 흡족했던 부분은, Remi(본명) 그러니까 에르제(가명)가 얼마나 (폭 넓은 의미의) 예술과 예술가를 사랑해왔고 만화가로서의 소명의식이 강했던가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에르제는 지금처럼 SNS, 미디어가 발달하기 훨씬 이전 '호랑이 담배필 적'에도 한 컷의 만화를 위해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했던 완벽주의자였습니다. "달나라에 간 땡땡" 삽화를 그리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로켓 모형을 좀 보세요.



물론 천부적인 재능에 더해 장인정신이 더해진 집요함도 있었고요.

나는 이 단계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미친 듯이 그린다. 지우고, 다시 수정하고,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고, 작업에 집착하고, 욕을 한다...(중략)...연필로 종이를 뚫어 버리기도 한다.

Herge 어록 중



"땡땡"을 만화책과 에니메이션으로 이미 접해본 꼬마들이나, 만화가 등 이 분야 전문가에게는 Room5와 Room6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 아닐까 합니다. 한 권의 "땡땡" 만화책이 나오기까지의 작업과정을 알 수 있는 데 더해, 벨기에 사회가 아니 시대가 에르제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막연하나마 그려보게 해주거든요.



"에르제: 땡땡 展"에서 만난 뜻밖의 인물은 에르제의 중국인 친구, 챙(Chang)이었지요. "티벳으로 간 땡땡" 편에서 땡땡이 중국인 친구, 창을 구하러 가는 설정인데 실존인물이자 에르제가 임종이 다가와서도 만나고 싶어한 귀한 인연이라니. 멋졌어요. 과연 20세기 중후반 유럽의 어떤 예술가가 에르제처럼 동양을 기존 고정관념이 아닌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리려 노력했겠어요?





어린시절 보이스카웃을 경험했던 에르제는 TinTin을 모범적인 보이스카웃 스타일로 그려냅니다. 부모가 없는 소년인데 그래서 더 자유로울 수 있고 에르제가 애착을 가졌다하네요. 아독선장 (Captain Haddock) 캐릭터와 캐미가 참 잘 맞아요.


"에르제: 땡땡 展" 다 보고 나와도 끝이 아닙니다. 땡땡의 모험 만화를 상영하고 책을 전시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거든요. 쾌적합니다. 책을 소장하고 싶다면 Goods샵에서 구매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하드커버보다 페이퍼백을 선호하는지라 "The Adventures of Tintin" 시리즈 한국판의 날렵한 편집이 반가웠어요.

땡땡 덕분에 에르제라는 멋진 예술가도 알게 되었느니, 기회가 닿으면 에르제와 땡땡의 나라 벨기에도 더 알아보고 싶네요. 이것이야말로 문화교류의 힘인가보지요? 2019년 3월 벨기에 국왕이 27년만에 한국을 찾았다는 소식이 더욱 반갑게 들립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9-04-0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회, 음악회 참 많이 다니시는것 같아요. 저도 얄리알라북사랑님 서재에서 많은 정보와 도움 얻고 간답니다.

얄라알라 2019-04-02 22:42   좋아요 0 | URL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오랜 취미라 쉽게 안 바뀌네요^^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
유정희 외 지음 / 아이네아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Alita: Battle Angel" (2018)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극장을 찾았다. 놀랍겠도 Sci-Fi 장르에 심야시간 상영인데도 대다수 관람객이 40~50대로 보였다. 아마 2000년대 초반 인기를 끌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총몽"을 즐겼던 중년이리라.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를 두 명의 사학자가 함께 썼다기에 짐작했다. 공저자 모두 일본 만화 "드래곤볼"을 읽으며 자란 세대에 속하리라고. 아니나 다를까, 유정희 저자는 이미 초등 6학년 때 '드래곤볼 Z 특별판' 비디오를 빌려다 보았을 정도로 팬이었고, 이후 26년을 숙성시켜 그 감상을 책으로 엮었다 했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전공한 공저자 정은우 역시 '드래곤볼'에 대한 생각의 "똬리를 풀고, 정돈하고, 또 엮(17쪽)"는데 무려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대상을 잘 알고, 주제를 오래 숙고한 만큼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는 지적 희열을 주는 멋진 책이다.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를 읽다 보면, 한 페이지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귀에 익숙해서 마치 뜻을 아는 듯해도 겉핥기 뿐의 용어..... 하지만 유정희, 정은우 저자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 "드래곤볼"을 다시 소환하다보면,이 용어들이 어찌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게 쓰였는지 독자로서 후련함까지 느끼게 된다.




서구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 이류 제국주의, 일본 제국주의, 인종주의, 범아시아주의, 일본인의 이중적 정체성, 일본인의 역사의식, 역사적 트라우마, 일본인 기억과 망각의 정치학......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를 읽다 보면, 한 페이지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귀에 익숙해서 마치 뜻을 아는 듯해도 겉핥기 뿐의 용어..... 하지만 유정희, 정은우 저자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 "드래곤볼"을 다시 소환하다보면,이 용어들이 어찌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게 쓰였는지 독자로서 후련함까지 느끼게 된다.

기본적으로 공저자는 "드래곤 볼"의 대표저자가 토리아마 아키라이건만, 이 만화가 드러내는 일본인의 정신세계와 전후 역사관은 일본인의 집단의식을 반영한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 작품을 분석한다. 물론 공저자가 서두부터 명확하게 했지만, "전후 일본인의 역사인식은 일정 부분 단층적일 수밖에 없었다...(중략)...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한 일본인의 자기정체성은 다양한 정체성들의 혼합체(26쪽)"으로 보아야 옳다. 저자들은 "드래곤볼"의 핵심 캐릭터인 프리더와 그 일당을 '서구 제국주의(western imperialism)'의 구현자로, 이에 맞서는 사이어인(Saiyan) 베지터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리자로,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일본,' 특히 '일본의 전후 시민사회'를 상징하는 인물로 파악한다. 


주목할 점은, 저자들이 이 만화 캐릭터들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일본인의 자기정체성 형성 "과정 "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원자폭탄의 피해자이자 잔혹한 침략자로서의 일본제국주의가 역사적 트라우마,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자기 반성이 충돌하는 그 지독한 다중성을 어떻게 화해시키려해왔는지 그 "과정"을 너무도 흥미롭게 풀어낸다. 저자들이 역사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cultural studies 등 제분야의 관련 자료를 잘 버무리고, 일본과 미국을 위시해 세계 각국에서 체류해본 삶의 경험을 녹여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을 썼기에 독자로서 책 읽다가 'A-ha' 모멘트를 수차례 경험하게 된다. 잔혹한 폭력성을 본성으로 가진 사이어인, 그 중에서도 선택받은 '초사이어인'인 손오공이 종국에 프리터와 결전을 벌일 때, 그 사이어인의 본성인 복수심을 일깨워내 싸워 이겼다는 결말은 솔직히 끔찍한 예언같다.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을 펴낸 '도서출판 아이네아스'에서는 이렇게 공저자의 집필의도 핵심을 정리한다. "과연 일본 대중문화의 과거와의 화해 시도가 아시아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공감 속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 (10쪽). 출판사 측에서 공저자 두 분과 독자와의 만남을 또 한 번 주선해주시면 좋겠다. 제기한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없기에 더욱 여러 번 되묻고, 더 많은 이들과 나눠 탐색해보아야 할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 독주회. 포스터 속 주인공은 미소녀에 가까워보였다. 별 중의 별들이 빛나는 줄리아드 음악원 박사과정에, 촉망받는 인재라는데 이제 스물여섯이다. 10세에 한국무대에, 12세에는 미국 무대에 데뷔하며 굵직한 성취를 이뤄온 영재이다. 2019 "T. L. I Young Virtuoso 시리즈 초청 연주자"인데, 이미 클래식 애호가 사이에서는 그녀의 명망이 높은지 공연당일 T.L. I.아트센터 로비가 북적인다.

8시.


시선을 뗄 수 없게 하는 미소녀가 해사한 미소를 날리며 무대에 등장한다. '겨울 왕국' 에니메이션 Elsa 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에메랄드 빛 드레스 아래에 희고 아름다운 어깨와 팔, 손가락이 빛난다.


애초 공지한 프로그램 첫 곡은 Bach의 샤콘느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8번으로 바뀌었다. 피아니스트 홍소유와 호흡을 맞추어 상쾌한 분위기로 곡을 연주한다. 르느와르 그림 속 미소녀를 연상시키는 굵게 컬이 진 머리카락을 경쾌하게 흔들며, 때론 격정적으로 선율을 만들어낸다. 진지하고 학구적으로 곡을 해석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미 나는 첫 곡 연주가 끝났을 때 그녀의 팬이 되기로 했다.

맨 앞 줄, 비매너 관객들에게 신경이 쓰인다. 서로 머리를 맞대며 심야영화관 분위기를 내지를 않나, 연주 중에 카카오톡 메시지를 열어보며 대화를 나누지 않나....다행히 인터미션 이후에 그들이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오늘 연주에서 송지원 바이올리니스트는 비에니아프스키의 Faust Fantasy를 연주할 때, 가장 당당하고 존재감 강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내내 눈을 감은채 연주해내는 그 곡은 난해했다. 기교가 어마한 듯. 고음을 낼 때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 D장조로 2부를 마무리한 후, 커튼 콜에 화답하러 무대에 다시 등장한 송지원.



러블리한 외모처럼 러블리한 미소녀의 음성으로 '아직 앵콜 곡을 고민 중'이라며 어떤 곡을 듣고 싶냐고 청중에게 묻는다. 오리지널 프로그램에서 'Bach'의 샤콘느가 있었던 걸 기억하는지 많은 청중들이 'bach'라 대답했고 덕분에 무반주 No.1을 들을 수 있었다. 묵직하고 깊고 강렬하다.


시리즈 제목 그대로 "영 비르투오조," 송지원은 젊은 대가인 듯하다. 마이크를 들고 청중에게 감사인사 할 때, "음악으로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의미의 인사를 전했는데, 꾸밈없이 소박하지만 그녀의 진정이 느껴졌다. 음악이 너무 좋은 사람.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아티스트. 티엘아이의 "영 비르투오조" 시리즈, 다음 주자도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년 몽트튀유 아동도서전에서 그래픽 노블로 선정되었다는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림체가 "뽀메로" 캐릭터만큼이나 귀엽고, 색감이 화사해서 표지부터 끌렸습니다. 상상했던 대로 작가가 젊은 여성이군요. 프랑스에서 태어나 현재 벨기에 브뤼셀에서 거주하는 유럽 기반의 예술가, 엘로디 샹타(Elodie Shanta)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하였으나 아동문학에 관심이 생겨 가명으로 만화작품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는 실명을 내걸고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네요. 그녀의 온라인 공간을 방문해보니 아이들에게 미술 수업, 서점에서 팬사인회도 많이 하고 일러스트레이션은 물론 자수와 헝겊 아트로 뭔가 끊임없이 만들어내요. 창작욕에 불타는 예술가인가 봅니다.

좋은꿈 출판사가 한국의 독자를 위해 이 예쁜 프랑스어 그래픽 노블을 번역해주었습니다. 불어 전문 번역가 임영신 덕분에 프랑스어 장벽을 넘어 크레베트를 만날 수 있었네요.



만나본 적은 없지만, 『크레베트』를 통해 상상한 작가 엘로디 샹타는 외로움에 익숙하고 강하면서도, 따뜻하고 와글거리는 공동체를 동경할 것만 같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크레베트가 바로 그렇거든요. 크레베트는 마술사가 되고 싶어, 마법학교에 두 번이나 응시합니다. 두 번 다 낙방했어요. '난 바보인가 봐'하며 좌절하는데, 작은 악마 조제프가 '아냐, 크레베트. 네가 잘하는 일도 분명 있을 거야.'라고 응원하면서 마법학교 입학시험을 도와주지요. 『크레베트』에는 그 외에도 마법학교 졸업생 고양이 가멜 등 크레베트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낙천적인 친구들이 등장해요. 사실, 크레베트에게는 엄마가 안 계시답니다. 돌아가셨어요. 크레베트는 엄마의 영혼과 소통하며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혹은 마음 깊은 곳의 고민을 공유하지요.

삼수 끝에 마법 학교에 입학하여 엄마 영혼과 더 공유할 이야기가 많아졌는데, 그만 엄마의 영혼이 떠나버린 듯합니다. 울며 절망하는 크레베트를 친구들이 다독여 주네요. "네가 다 컸다고 (너희 엄마가) 생각하신 건지도 모르지'라고. 놀랍게도 크레베트는 친구의 다독임에 빠르게 마음을 추스릅니다. 엄마의 유골을 꽃들에게 뿌리고 유골함을 예쁜 꽃병 삼아 곁에 놓아두지요.





어린아이가 이렇게 슬픔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몇 컷의 그림을 통해서이지만 아프게 전해지네요. 예쁘고 서정적인 그림과 대사인데, 마음 한 쪽에서 아련히 애처로운 마음이 일게 합니다. 이렇게 크레베트는 부모 잃은 외톨이 꼬마에서 조금 더 씩씩해진 모습으로 성장해나갑니다.


『크레베트』의 장면마다 주인공을 사랑받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집니다. 크레베트는 마법학교에 입학해서도 좋은 친구를 만나 잘 지내고, 서로 도움과 사랑을 주고받기에 외롭지 않거든요. 잘 커나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척이나 단순한 줄거리, '외롭고 힘든 상황의 친구를 다른 친구들이 도와서 행복하게 해준다"라는 줄거리이지만 힘 있게 전달됩니다. 고마운 그림책이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