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개정증보판
김하나.황선우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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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가 출간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비혼인 사십 대 여자 둘이서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사는 모습이 신선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는데, 그 사이 이들처럼 비혼인 여성들이 여러 형태로 동거하는 모습이 다양한 매체에 노출되어 신선한 느낌은 덜해졌지만, 김하나, 황선우 작가가 <여둘살> 출간에 이어 시작한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여둘톡)>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은 더 커졌다. 최근에는 억대 선인세에 영미권 출판사와 판권 수출 계약까지 맺으셨다고. 이러다 지구 정복하시는 거 아닌지(해주세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여둘살>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 읽은 <여둘살>은 2019년에 나온 초판이 아니라 2024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이다. 초판을 종이책, 전자책 버전 모두 소장하고 있으면서 개정증보판을 구입한 이유는 여러 굿즈와 고양이 미니북을 받기 위해서였다. 특히 고양이 미니북이 무지 귀엽다. 소장 가치 10000퍼센트...!! 개정증보판에만 수록된 새 에세이와 미공개 사진들도 궁금했다. 새 에세이는 2019년 <여둘살> 출간 이후 두 작가님들에게 생긴 변화를 담고 있다. 둘째 고양이 고로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 투명 고양이가 된 일, 서울사이버음악대 결성, 여둘톡 시작 등등.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이분들을 좋아할까 곰곰 생각해 봤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보고 듣든 연애 이야기, 결혼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아주 즐겁고 흥겨운 대화를 나누는 분들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분들이 <여둘톡>에서 매주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삶에서 연애와 결혼(+주식, 부동산 등등) 이야기를 빼면 문화에 대해, 예술에 대해, 사회에 대해, 인생에 대해 더 많은, 더 깊은, 더 풍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존재 자체가 벡델테스트라고나 할까... (이름을 가진 두 여자가 남자 이야기 아닌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부디 오래오래 이야기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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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생활 - 기록으로 취향을 발견하고 나만의 길을 만드는 법
논디 김하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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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을 믿는다.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블로그를 한 것이 지금의 직업으로 연결되었고, 블로그에 책 리뷰를 쓴 것이 나를 계속해서 읽는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흔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요즘 나는 블로그와 책 리뷰 외에 다른 기록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먹고사는 일과 책 읽기만으로 구성된 단조로운 내 삶에 새로운 자극을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김하영의 책 <쓰는 생활>을 읽은 건, 기록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저자 김하영은 '논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플루언서이자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제품 디자이너, 리빙-스테이셔너리 브랜드 '데이오프 프로젝트' 대표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스케치북, 다이어리, 수첩 등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거나 쓰는 일을 좋아했다. 이러한 습관은 제품 디자이너가 되고 맥북, 아이패드 같은 전자기기를 소유하게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이에 뭔가를 쓰고 그리고 기록하는 습관이 자신의 일과 인터넷 생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전보다 더욱 열심히 종이에 쓰고 그리고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총 11개의 노트를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모든 노트를 매일매일 쓰지는 않는다. 어떤 노트는 매일 쓰지만, 어떤 노트는 한 달에 한 번 쓰기도 한다. 저자는 투 두 리스트 노트, 시간기록 노트, 모닝페이지, 일기, 감사일기, 업무일지, 확인용 위클리 다이어리, SNS 콘텐츠 기획 노트, 소비기록, 영감 노트, 독서 노트, 아카이브북 등을 쓴다. 여기에 이미지 아카이빙을 위해 사용하는 노션과 스마트폰 메모 앱,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굿노트와 제품의 밑그림을 그리는 드로잉북 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11개보다 훨씬 많은 노트를 사용하는 셈이다. 책에는 저자가 각각의 노트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자세히 나온다. 


이렇게 공을 들여 많은 양의 기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경우 기록이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내 취향은 무엇일까' 같은 답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을 하다 보면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등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저자는 또한 기록하는 시간을 보다 즐겁게 보내기 위해 마음에 드는 책상을 구입하고, 기왕 구입한 책상 주변을 자기 취향에 맞게 꾸미다 보니 '책상 인테리어' 전문가로도 알려져 개인 브랜드를 확립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기록으로 어떤 인생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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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전 -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아무튼 시리즈 52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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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집에 사전이 여러 권 있었다. 국어사전, 영어사전, 백과사전 등 종류도 다양했고, 어른들이 보는 사전과 어린이들이 보는 사전이 따로 있기도 했다. 이제는 집에 사전이 한 권도 없다. 고등학교 때 구입한 샤프 영어사전을 끝으로 새로운 사전을 구입한 일이 없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포털 사이트나 사전 앱에서 찾아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어른인 나도 이런데 요즘 아이들은 종이 사전을 사용할까. 종이 사전의 존재나 알까.


번역가 홍한별의 에세이집 <아무튼, 사전>은 사전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종이 사전, 인터넷 사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전을 애용한다. 일차적으로는 번역가라는 직업 때문이다.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거나 단어의 정확한 용례를 알기 위해 영한, 한영, 영영 등 여러 형태의 사전을 수시로 들춰본다. 작업 중이 아닐 때에도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단어들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사전마다 특징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에 사전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다 보면 필요가 생겼을 때 이용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번역가의 사전 사용법을 알려주는 책인가 싶은데, 후반부로 갈수록 사전에 얽힌 저자의 개인사가 담담히 펼쳐진다. 


몇 해 전 작고한 저자의 아버지는 강원도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해서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고 자식 둘을 영어 번역가로 키웠다. 저자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 공부하는 분이었고 그중에서도 언어 공부에 관심이 많아서 영어 사전뿐 아니라 일어 사전, 불어 사전 등 다양한 사전이 집에 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로 기억하는 단어의 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으로서 그리고 언어가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슬프고 두려웠을까.


그러나 언어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새로 생겨나기도 하는 것처럼, 인간은 언어를 잊을 수도 있지만 새로 배울 수도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저자의 아버지는 "최초의 언어로, 번역으로 훼손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성경을 읽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어를 열심히 배웠다. 저자의 어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온 단어 중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따로 적어뒀다가 뜻을 찾아보기도 하고, 고향인 전라도 사투리를 생각나는 대로 수첩에 적는 식으로 자신만의 사전을 만든다. 과연 나는 십 년 후, 이십 년 후, 오십 년 후에 어떤 단어를 알고 있을까. 지금 알고 있는 단어 중에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단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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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만드는 마음 - 보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서해인 지음 / 문예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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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열 개 정도의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구독하고 있는 뉴스레터가 ㅎㅇ(서해인) 님이 매주 월요일에 발송하는 대중문화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이다. (구독하러 가기 https://contentslog.stibee.com/) 어떤 계기로 이 뉴스레터를 알게 되어 구독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매주 이 뉴스레터를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알게 되며 얻는 즐거움이 크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콘텐츠 감상 이력을 아카이빙할 목적으로 뉴스레터를 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같은 콘텐츠 향유자(중독자?)로서 오랫동안 응원하고 싶다.


<콘텐츠 만드는 마음>은 <콘텐츠 로그> 제작자 ㅎㅇ 님이 본명 서해인으로 2022년에 출간한 에세이집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보는 사람'은 저자가 좋아하는 영화, 음악 페스티벌, 팟캐스트, 책, 케이팝, 호러물 등에 관한 에세이를 싣고 있다. 2부 '만드는 사람'은 '보는 사람'이었던 저자가 뉴스레터를 '만드는 사람'이 된 계기와 그 과정을 소개한다. 3부 '일하는 사람'은 프리랜서 창작자로 일하는 저자에게 영감과 자극을 준 책, 드라마 등의 리뷰를 담고 있다. <콘텐츠 로그>의 각 코너의 탄생 비화라든가 저자에게 영향을 준 콘텐츠 또는 콘텐츠 제작자 등을 보다 깊이 알 수 있어 <콘텐츠 로그> 구독자로서 재미있고 유익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콘텐츠 로그>야말로 콘텐츠 감상과 기록의 선순환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책, 영화, 드라마, 음악, 공연 등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콘텐츠를 엄청나게 많이 지속적으로 소비해온 사람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책을 제외하고) 감상한 콘텐츠에 관한 기록을 꾸준히 남기지 않은 나와 달리 저자는 자신이 감상한 콘텐츠를 꾸준히 기록하고 뉴스레터라는 공적인 형태로 발행까지 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콘텐츠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상한 콘텐츠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발행하다 보면, 아무래도 감상할 때 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정자세로 보게 되고, 본인의 취향이나 흥미에 치우친 감상을 덜하게 되어 궁극적으로 감상 경험의 폭을 넓히고 질을 높이는 효과를 얻게 된다.


실제로 몇 년 동안 <콘텐츠 로그>를 구독하면서, 처음에는 ㅎㅇ님이 일주일 동안 보고 듣는 콘텐츠의 양이 엄청나게 많은 점에 놀라고 관심 있는 분야나 장르가 다양한 점에 놀랐지만, 나중에는 하나의 콘텐츠를 바라보는 시선이 깊고 예리한 점에 놀랐다. 내 생각에는 오랫동안 많은 양의 콘텐츠를 보면서 일종의 자기만의 데이터 베이스 같은 게 생겨서, 새로운 콘텐츠를 볼 때 그 콘텐츠를 이해, 분석하는 데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떠올리고 활용하는 과정이 (콘텐츠 감상 경험이 적거나 데이터 베이스가 부족한 사람에 비해) 훨씬 신속하고 수월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토록 양질의 리뷰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기록을 표현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뉴스레터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책에 따르면 뉴스레터 제작자는 제목을 정하거나 새로운 코너를 만드는 일에도 다양한 연구와 시도를 한다고 한다. 내가 매주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보는 뉴스레터 한 회차를 만드는 데 이렇게 많은 수고가 들었다니. 앞으로 더 열심히, 세심히 읽어야겠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뉴스레터 시장 자체가 작아서 뉴스레터 운영이 수익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스레터라는 공익적 활동을 통해 스스로 업을 만들고 지속하는 모습이 멋지다. 저자의 커리어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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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테의 언덕길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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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게 어려울까, 에세이 쓰는 게 어려울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최근에 들은 모 소설가의 말에 따르면 소설보다 에세이 쓰기가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를 전제하기 때문에 글쓴이의 실제 경험도 허구인 척 쓸 수 있는 반면, 에세이는 어떤 내용을 써도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실제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글쓴이 자신도 아직 미처 소화하지 못한 감정에 관한 것이라면 글로 쓰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걸 해낸 책이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집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이라고 느꼈다.


이 책의 저자 스가 아쓰코는 1929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세이신 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 대학원 사회학과 중퇴 후 2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고 1958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했다. 대단한 부잣집 딸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스가 자신은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란 영향으로 인해 더 큰 부와 명예를 얻는 일보다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학문을 따라 신앙을 따라 살다가, 밀라노에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이 책은 스가 아쓰코의 남편 주세페 리카(페피노)가 사망한 후에 저자 홀로 이탈리아 북동부의 항구 도시 트리에스테를 여행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트리에스테는 저자에게 특별한 도시인데, 트리에스테 출신 시인 움베르토 사바의 시를 생전에 남편이 매일 밤 저자에게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남편의 시 낭송을 들으며 언젠가 남편과 둘이서 트리에스테를 여행하고 싶다고, 조만간 그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혼한 지 7년째 된 해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 꿈은 물거품이 된다. 남편과 사별한 후 남편과 함께 가보고 싶었던 장소들을 혼자서 돌아보는 여행이라니. 이보다 더 슬픈 여행이 있을까.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저자는 남편과 함께 밀라노에서 사는 동안 알고 지냈던 이웃들, 남편의 가족들,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편의 가족들과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 받고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신기했는데, 비록 그들을 연결해준 페피노는 세상을 떠났지만 페피노를 기억하고 페피노를 상실한 고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했을 것 같다. 더욱이 저자에게는 페피노를 알지 못하는 고국의 가족들이나 친구들과는 나눌 수 없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을 테고. (친화력이 좋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인들이라면 한 번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라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하다.)


페피노의 원가족은 지독하게 가난했는데, 저자는 페피노와 결혼 생활을 하며 페피노의 원가족이 안고 있던 진짜 문제는 가난보다 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원래 페피노는 4남매 중 둘째였는데, 맏이였던 형이 급사하고 막내였던 여동생이 뒤를 이어 사망했다. 가족 중 두 사람이 갑자기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사건은 남은 가족들의 성격을 비밀스럽고 음울하게 만들었고, 이는 직업을 구하거나 사람들을 사귀는 일에도 지장을 주었다. 급기야 아버지와 장남이 세상을 떠난 후 실질적 가장 노릇을 했던 페피노마저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남은 가족들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때는 2차 대전 직후이고, 이탈리아도 일본도 전쟁 때문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저자와 페피노의 가족들에게 죽음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 죽음이 여러 번 겪는다고 익숙해지는 일이던가. 오히려 겪으면 겪을 수록 지난 상처에 새 상처가 더해져 고통이 배가 되는 일이다. 게다가 그 죽음이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가족이라면, 자식이라면, 형제의 것이라면. 아마도 페피노의 가족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보다 그저 살아내는, 살아남는 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대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부잣집 딸로 자란 자신이 그저 가난하게만 보았던 페피노의 가족들이 사실은 그토록 깊은 상실의 고통을 안고 생존해 왔음을 알고 경외감을 느낀다. 페피노의 가족들뿐 아니라 동네 수도사, 창부, 이웃, 문제아 등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여러모로 미달인 사람들이 사실은 각자 매우 숭고한 일을 해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발견한다. 그러니 일상에서 마주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둘도 없는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차분한, 그러나 거부하기 힘든 태도로 전한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스가 아쓰코가 평생에 걸쳐 찾고자 했던,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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