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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테의 언덕길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4년 8월
평점 :

소설 쓰는 게 어려울까, 에세이 쓰는 게 어려울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최근에 들은 모 소설가의 말에 따르면 소설보다 에세이 쓰기가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를 전제하기 때문에 글쓴이의 실제 경험도 허구인 척 쓸 수 있는 반면, 에세이는 어떤 내용을 써도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실제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글쓴이 자신도 아직 미처 소화하지 못한 감정에 관한 것이라면 글로 쓰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걸 해낸 책이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집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이라고 느꼈다.
이 책의 저자 스가 아쓰코는 1929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세이신 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 대학원 사회학과 중퇴 후 2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고 1958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했다. 대단한 부잣집 딸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스가 자신은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란 영향으로 인해 더 큰 부와 명예를 얻는 일보다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학문을 따라 신앙을 따라 살다가, 밀라노에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이 책은 스가 아쓰코의 남편 주세페 리카(페피노)가 사망한 후에 저자 홀로 이탈리아 북동부의 항구 도시 트리에스테를 여행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트리에스테는 저자에게 특별한 도시인데, 트리에스테 출신 시인 움베르토 사바의 시를 생전에 남편이 매일 밤 저자에게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남편의 시 낭송을 들으며 언젠가 남편과 둘이서 트리에스테를 여행하고 싶다고, 조만간 그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혼한 지 7년째 된 해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 꿈은 물거품이 된다. 남편과 사별한 후 남편과 함께 가보고 싶었던 장소들을 혼자서 돌아보는 여행이라니. 이보다 더 슬픈 여행이 있을까.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저자는 남편과 함께 밀라노에서 사는 동안 알고 지냈던 이웃들, 남편의 가족들,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편의 가족들과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 받고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신기했는데, 비록 그들을 연결해준 페피노는 세상을 떠났지만 페피노를 기억하고 페피노를 상실한 고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했을 것 같다. 더욱이 저자에게는 페피노를 알지 못하는 고국의 가족들이나 친구들과는 나눌 수 없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을 테고. (친화력이 좋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인들이라면 한 번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라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하다.)
페피노의 원가족은 지독하게 가난했는데, 저자는 페피노와 결혼 생활을 하며 페피노의 원가족이 안고 있던 진짜 문제는 가난보다 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원래 페피노는 4남매 중 둘째였는데, 맏이였던 형이 급사하고 막내였던 여동생이 뒤를 이어 사망했다. 가족 중 두 사람이 갑자기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사건은 남은 가족들의 성격을 비밀스럽고 음울하게 만들었고, 이는 직업을 구하거나 사람들을 사귀는 일에도 지장을 주었다. 급기야 아버지와 장남이 세상을 떠난 후 실질적 가장 노릇을 했던 페피노마저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남은 가족들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때는 2차 대전 직후이고, 이탈리아도 일본도 전쟁 때문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저자와 페피노의 가족들에게 죽음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 죽음이 여러 번 겪는다고 익숙해지는 일이던가. 오히려 겪으면 겪을 수록 지난 상처에 새 상처가 더해져 고통이 배가 되는 일이다. 게다가 그 죽음이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가족이라면, 자식이라면, 형제의 것이라면. 아마도 페피노의 가족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보다 그저 살아내는, 살아남는 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대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부잣집 딸로 자란 자신이 그저 가난하게만 보았던 페피노의 가족들이 사실은 그토록 깊은 상실의 고통을 안고 생존해 왔음을 알고 경외감을 느낀다. 페피노의 가족들뿐 아니라 동네 수도사, 창부, 이웃, 문제아 등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여러모로 미달인 사람들이 사실은 각자 매우 숭고한 일을 해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발견한다. 그러니 일상에서 마주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둘도 없는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차분한, 그러나 거부하기 힘든 태도로 전한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스가 아쓰코가 평생에 걸쳐 찾고자 했던,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