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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평점 :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면 나름 많이 읽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러다 얼마 전 인터넷 서점에서 폴 윤의 소설 <벌집과 꿀>의 소개 글을 읽고 나의 오만과 편견을 깨달았다. 오만은 그저 디아스포라 문제에 관심이 약간 있어서 자주 거론되는 책 몇 권을 읽은 걸 가지고 많이 읽었다고 과장해서 생각한 것이고, 편견은 디아스포라의 범위를 너무 좁게 생각한 것이다. 디아스포라가 원래 기독교에서 비롯된 개념이고, 내가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처음 배운 게 故서경식 선생의 저서 <디아스포라 기행>이기도 해서, 나는 그동안 디아스포라를 유대인이나 재일조선인 문제에 한정해 생각했다. 그런데 <벌집과 꿀>에 따르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자신이 원래 살았던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다시 일궈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 책의 초반에 실린 몇 작품은 내가 그동안 읽은 이민자, 이방인 소설의 결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장물 운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감옥 신세를 지고 이제는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처지에 놓인 남성 '보'의 이야기를 그린 <보선>이 그렇고, 목숨을 걸고 북한에서 탈출해 서울에 도착했지만 자리를 잡는 데 실패하고 독일 함부르크를 거쳐 현재는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며 근근이 살고 있는 여성 '주연'의 이야기를 그린 <코마로프>, 북한 출신 아버지와 남한 출신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나 평생을 영국에서 살았지만 영국인들에게 늘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그들 또한 영국인보다 그들과 피부색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해리'와 '그레이스'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크로머>가 그렇다. 이 단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특수성보다는 이민자 또는 이민 2세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사회적, 정신적 고충이 두드러지며, 등장 인물의 배경을 다른 나라로 바꿔도 내용이 성립되지 않는 정도는 아니다.
반면 그 외의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정치적 특수성이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진다. 임진왜란 직후의 일본이 배경인 단편 <역참에서>가 대표적이다. 이 소설에는 임진왜란 중에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소년 '유미'가 등장한다. 활쏘기를 잘해서 주군의 마음에 들었으나 조선통신사 사절단을 따라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처지에 놓인 그의 운명은 조선과 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오랜 역사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벌집과 꿀>, <고려인> 역시 한국과 러시아, 그중에서도 연해주의 역사를 알아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고려인>은 고려인 3세인 '막심'이 사할린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 때 사할린으로 끌려간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마지막에 실린 <달의 골짜기>는 일견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작품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휴전선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 '동수'라는 남자가 몇 년을 은둔하며 지내다 '은혜'와 '운식'이라는 두 아이와 함께 살게 되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다. 전쟁 때문에 집을 떠났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돌아온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고 그가 살게 된 집은 그가 그리워한 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집을 떠나 있는 상태인 것과 다름이 없다. 은혜와 운식 또한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집을 떠나 한 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한 명은 돌아오지만 그때의 집은 예전의 집과 다르다는 점에서 이방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방인의 운명이란 뭘까. 이 책에 나오는 '떠난 사람들' 중에는 떠나온 곳을 그리워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보선>의 보는 오래 전에 떠나온 한국은 물론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뉴욕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코마로프>의 주연은 북에서 나올 때 헤어진 아들은 그리워 하지만 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고려인>의 막심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예정이 없음은 막심이 아버지와 헤어진 후 막심을 스칠 뻔하며 달려 지나가는 '시커먼 차 한 대'와 요란한 경보기 소리가 암시한다. 결국 이들은 원해서 떠났든 원치 않게 떠났든 간에 한 번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다. <달의 골짜기>의 동수가 아프게 확인한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고 장소 자체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장소는 예전과 다르게 변해서 돌아가도 돌아간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주는 반면, 어떤 장소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아서 돌아갈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령 <달의 골짜기>에서 은혜가 도시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서 느끼는 '낯섦'은 그곳이 전과 다르게 변해서 느끼는 생경함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불쾌감에 가깝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거나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고려인>의 막심의 아버지, 바실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거 아니? 그자들이 하는 일이라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세상은 달라지는데, 그리고 언제나 달라질 텐데, 그자들은 언제나 똑같은 거야. 왜 그런지 아니? 고집 센 바보들이니까." (239쪽)
회귀는 퇴보이며 정주(定住)보다 이주를 택하는 삶이 현명하다는 생각은 <역참에서>에서 히로코가 유미에게 하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내가 뭘 봤는지 알아, 유미? 그 해골 입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있었어. 어린 벚나무였어. 신기하지 않니? 우린 이 생을 살다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야. 네 생각도 그렇지 않니? 너는 이 생을 살았지만, 내일이면 금방 또 다른 누군가와 살게 될 거잖아. 그런 변화를 두려워해선 안 되는 거야. 그걸 받아들이고 더 강해져야 돼." (96-7쪽) 이런 문장들은 막연한 생각으로 이방인의 삶을 동정했던 과거를 반성하게 한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화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발적으로 떠나기 보다는 비자발적으로(사실은 자발적으로) 체념하고 타협하는 편을 택하며 살아온 삶이 과연 맞는 건지 자문하게 만든다. 물리적으로 떠나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택한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라면, 나는 여태 이방인이 되지 못했구나. 떠나야겠다. 아니,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