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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쇼 - 세상을 지켜온 작은 믿음의 소리
제이 엘리슨 지음, 댄 게디먼 엮음, 윤미연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4월
평점 :
언젠가 언론학 시간에 에드워드 R. 머로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머로는 매카시즘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미국의 방송 저널리스트라고 배웠던 것만큼은 생각난다. 그는 1951년에 [This I believe]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직접 쓴 에세이들을 선별하여 낭송했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 그리고 그가 낭송하는 진솔하고 담담한 에세이들은 세계 대전이 끝나고 냉전과 매카시즘 광풍으로 혼란에 휩싸여 있던 미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라디오 쇼] 는 1952년 초판과 2000년에 개정된 [This I believe] 의 에세이집을 번역한 책이다. 에세이의 저자는 아인슈타인, 아놀드 토인비, 이사벨 아옌데, 헬렌 켈러, 콜린 파월, 빌 게이츠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사들부터 주부, 교사, 언론인, 학생 등 일반인까지 다양하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예일대 법과대학원 학장이 된 고홍주 씨의 에세이도 실려 있다.
에세이의 주제는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관 -내가 믿는 이것(This I believe)- 으로 정해져 있다. 에세이는 종교적, 정치적 신념이나 아집, 편견은 배제하고, 오로지 개인의 특별한 경험이나 성찰을 바탕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저자들은 에세이를 쓰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신념을 재확인하며,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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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믿음들은 항상 유동적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믿는 것들보다는 내가 믿지 않는 것들을 열거하는 게 훨씬 더 쉬울 겁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가 이 세상의 문제들을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의 몫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몫들은 대개 내 몫보다 훨씬, 훨씬 더 크지요. 이런 깨달음 덕에 나는 내가 가진 문제들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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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극장] 이라는 TV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인간극장] 은 내가 즐겨 보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최근 방송 시간이 오전으로 변경되어 못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연예인과 정치인들이 브라운관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 가운데, 적어도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30분 남짓한 시간 만큼은 방송의 진짜 '주인'인 시민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았나 싶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이 특별하고, 특별한 삶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힘을 [라디오 쇼] 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직접 만났더라면 머리 모양이나 말투 따위가 거슬려서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세이라는 간결한 매개체를 통해서인지, 나는 그들을 만난 적이 없어도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고, 나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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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들은 이제 그날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순간에 초점을 맞추며 점점 더 빨리 양산되고 있습니다.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사건은 이미 뉴스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과거의 사건'이 되어버리곤 하지요. ... <내가 믿는 이것>은 그것과는 다른 방향을 추구합니다. <내가 믿는 이것>은 방금 전에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야 겨우 알 수 있는 일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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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엮어낸 언론의 힘에 또한 감동했다. 위기 시에 방향을 잃고 여론을 선동하는 언론이 아닌, 진정 민중의 편이 되어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언론. 그런 언론이 요즘 같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싶다. 나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열심히' 읽거나 보지 않게 된지 오래다. 한때는 언론인이 되기를 꿈꾼 적도 있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민중의 등을 두드려주지는 못할 망정, 민중이 등을 돌리게 만드는 언론을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그런 언론에 비하면 [라디오 쇼] 는 결코 '쇼(show)'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