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4
서이레 지음, 나몬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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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쫓겨났던 정년이 국극단에 돌아온다. 벌로 설거지를 도맡게 된 정년은 <자명고> 오디션을 준비하는 단원들을 부러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정년은 호동왕자도 고미걸도 아닌 군졸1 역할을 맡게 된다. 방자에 이어 생애 두 번째 배역을 받은 정년은 군졸을 연기하기 위해 군인을 만나기로 마음 먹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국군들을 위로하는 잔치에 간다. 드라마에선 정년이 남성 군인에게 사연을 듣는데 만화에선 정년이 여성 군인들에게 사연을 듣는다. 정년은 그들의 사연을 하나 하나 들으며 자신만의 군인 캐릭터를 만들어 간다.


한편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자명고> 오디션에서 아무런 배역도 받지 못한 도앵은 머릿속이 복잡하다. 양반 출신인 도앵의 아버지는 기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도앵이 어려서부터 영특해 교사가 될 줄 알았더니 어머니 따라 기생이 되었다며(배우를 기생으로 낮잡아 보는 시절이었다) 도앵을 타박한다. 그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극단에 들어온 도앵은 남성 배역에만 특화된 자신과 달리 남성과 여성 배역 모두를 잘해내는 옥경을 보면서 동경 혹은 질투의 감정을 느껴왔다. 이제는 자신도 옥경을 의식하는 것을 넘어 자기만의 연기를 찾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년이>의 구성상 특징 중 하나는 극중 인물들의 상황과 인물들이 연기해야 하는 '극중극' 인물들의 상황이 절묘하게 겹친다는 것이다. <춘향전>이 그랬고 <자명고>도 그러하며 나중에 나오는 <바보와 공주>, <쌍탑전설>도 그렇다. 만화에서 옥경과 도앵의 관계는 <왕자와 왕자>라는 극을 통해 표현되는데 드라마에는 안 나와서 아쉽다. 4권 후반부는 정년과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국극단 내부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본격적으로 비리를 캐기 시작한다. 이 부분도 드라마에 안 나와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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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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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봤을 때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주정을 부릴 정도로 술을 마신 사람과는 웬만해선 상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녕 주정뱅이>라니. 주정뱅이 앞에 안녕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기 시작한 이 소설집. 거짓말 안 보태고 이제까지 네다섯 번은 족히 읽은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서 처음 읽는 기분이 드는데 읽어 보면 당연히 다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무슨 내용이냐고 누군가 물으면 시원하게 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봄밤>은 무슨 내용이야? 음, 그러니까 알코올 중독인 여자와 류머티즘 환자인 남자가 마흔 넘어 사랑에 빠지는데...


최근에 다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는 맨 마지막에 실린 <층>이 유난히 좋았다.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해온 남자와 박사 수료생인 여자가 연애를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좋아했지만 각자 다른 상황에서 상대의 말을 오해하는 바람에 헤어지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 오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에 빚어졌다는 사실을 (아마도) 영원히 모른 채 살 것이다. 독자라는 먼 입장에서 보면 지독한 농담 같은 상황인데, 영문을 알 길이 없는 두 사람에게는 곱씹기도 찝찝한 추억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비단 소설 속에만 있을까.


지독한 농담 같은 불행이라는 모티프는 <카메라>라는 단편에도 등장한다. 문정은 직장 동료 관희의 남동생 관주와 몰래 사귀다 헤어졌다. 이별 이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으므로 그의 현재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관주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알게 되고 그 사건이 자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 애인이었던 문정이 관주의 불행을 의도했을 리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게 사실이고, 그 사실을 알아버린 문주로서는 죄책감을 피할 길이 없다. 차라리 모르고 살았다면 나았을까. 아니면 늦게라도 그의 사랑을 알아서 다행인 걸까. 완전한 불행도 다행도 없는 것이 인생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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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3
이희영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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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평범한 고등학생인 인시울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의 얼굴은 보이기 때문에 얼굴이 무엇인지는 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매일 다른 색깔이나 무늬가 보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울에게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같은 반 남학생 묵재가 던진 공을 잘못 맞는 바람에 얼굴에 상처가 생겼는데, 그 날 이후 거울을 보면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떠오르는 색깔이나 무늬는 매일 변해도 상처만은 변하지 않고 늘 보이게 된 것이다. 


이희영의 소설 <페이스>는 여러 의미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주인공이 가진 문제가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일단 너무 불편하고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짐작과 달리 시울은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불편해 하지 않고 불행해 하지도 않는다. 얼굴에 뭐가 묻은 것 같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도와달라고 하면 되고, (거울을 이용하지 않는 한) 어차피 사람은 자신의 뒤통수도 못 보고 날개뼈도 못 보는데 얼굴 못 보는 게 대수냐,라는 식으로 쿨하게 생각한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태도, 닮고 싶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예쁜 얼굴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참 편해 보였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면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어른들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믿지 않게 되는데, 자기 얼굴을 본 적 없는 시울은 엄마 아빠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줄 알고 사니 얼마나 속 편해 보이던지 ^^ (시울의 엄마 아빠가 시울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부모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울의 부모가 외모 지적을 숨 쉬듯 하는 사람이었다면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고 주변 사람들 다 걱정하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시울의 모습도 신선했다. 나처럼 외모 신경 안 쓰고 사는 사람도 얼굴에 뭐 하나 생기면 빨리 없애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데, 상처도 얼굴의 일부라며 이제야 얼굴의 일부가 보인다고 기뻐하는 시울을 보니 나 또한 외모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구나 싶고, 상처가 난다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통증이 있어야 해당 신체 부위를 인식하고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아서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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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
C 팸 장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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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서부 개척 시기가 배경인 소설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한 권은 C. 팸 장의 소설 <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이고 다른 한 권은 <트러스트>의 작가 에르난 디아스의 데뷔작 <먼 곳에서>이다. 두 권 다 서부 개척 시기에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왔지만 기대와는 다른 삶을 산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소설은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의 주인공 루시와 샘이 <먼 곳에서>의 주인공 호칸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다고 느꼈다.


루시와 샘은 금을 찾아서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부모의 자식들이다. 그들의 부모는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노숙을 하며 열심히 금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고아가 된 루시와 샘은 생존을 위해 마을로 가지만, 피부색이 다른 데다가 가난하고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이들을 환영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결국 이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살게 되는데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녀 아니면 창녀 정도다. 급기야 샘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남자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는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 계획 또한 좌절된다.


루시와 샘은 고아가 되기 전, 그러니까 부모가 살아있을 때에도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이들의 아버지는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아내를 학대하고 딸들을 구박했다. 가정 안에서도 밖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던 루시와 샘에 비하면 호칸은 형편이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호칸도 호칸대로 엄청나게 고생했지만, 적어도 야외에서 노숙을 하거나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성적인 위협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 않을까). 


미국의 서부 개척 시기가 배경인 만큼 그 시절에 대한 평가도 나온다. 4부에서 루시는 부잣집 딸 애나의 시녀가 되는데, 애나의 아버지는 채금업자 출신으로 골드러시 초기에 금을 발견해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현재는 자신의 땅에서 금을 채굴한 사람들에게 일부를 상납 받는 식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가 이미 정착되어 있고, 자신은 무슨 수를 써도 이러한 구조의 상부로 올라가지 못하고 하부에 남을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루시는 절망 내지는 환멸을 느낀다. 분명 옛날 미국이 배경인데 지금 한국의 상황 같아서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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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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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한국소설 중에 읽어볼 만한 작품이 뭐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고를 것이다. 같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계기로 친해진 재일교포 3세와 한국인,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여성, 지치고 힘든 삶에 재미라고는 인터넷 밈뿐인 외국인 노동자와 마트 직원, 고전 읽기 시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혔다가 곤경에 처하는 고교 교사,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가수 등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잘 보여주는 소재 선정과 인물 설정이 탁월하다.


서늘함과 따뜻함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문체도 매력적이다. <전조등>의 주인공 남자는 살면서 한 번도 누구와 갈등을 빚거나 사회에 반기를 드는 일 없이 그저 남들 하는 대로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고 적당한 여자 만나 결혼해서 살고 있다. 많은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건 전부 가졌고, 무난하고 안정된 지금의 삶이 흔들리거나 망가질 전조는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그는 불안하다. 그를 보고 있는 독자 역시 불안하다. 야간 운전 도중 전조등 앞에 나타난 무언가 혹은 나타나지 않은 무언가에 의해서도 흔들리거나 망가질 수 있을 만큼 위태롭고 불안한 것이 인생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일까.


<전조등>이 품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상쇄하는 듯한 작품이 <무겁고 높은>이다. 주인공 송희는 탄광촌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고3 여학생이다. 역도에 재미를 느껴서 열심히 해왔지만 한 번도 메달권에는 들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역도를 그만둬야 하는가. 대학 입시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운동은 하면 안 되는 건가. 역도뿐 아니라 많은 것들에 대해 한국인들은 무엇에 쓰는지, 돈이 되는지 묻는다. 그걸 하는 사람이 즐겁고 행복한지는 안중에도 없다. 겉보기에 안정된 삶을 살면서 불안을 느끼는 <전조등>의 남자보다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확실한 행복을 아는 송희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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