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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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편집 기사로 일하는 정연은 얼마 전 엄마를 잃었다. 정연의 엄마는 남편 없이 혼자서 식당을 운영하며 정연과 미연 자매를 키웠다. 장녀이고 비혼인 정연은 결혼 후 남편과 두 아이를 키우는 미연의 몫까지 열심히 엄마를 간병했다. 그래서일까. 정연은 엄마가 죽고 장례까지 다 치른 후에도 좀처럼 엄마를 보내지 못한다. 엄마가 혼자 살았던 집에 머무르면서 엄마의 옷을 입고 엄마의 신발을 신고 엄마의 화장품을 바른다. 엄마가 해놓고 다 먹지 못한 음식을 먹고, 엄마가 미리 만들어둔 육수로 칼국수도 끓인다. 정연은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긴 겨울을 보낸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 <겨울을 지나가다>는 엄마와 사별한 주인공 정연이 엄마의 죽음을 겪는 과정을 동지, 대한, 우수로 나누어 보여준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의 장(章)에서 정연은 이제 막 엄마를 떠나 보낸 상태다. 정연은 엄마가 평생 일만 하느라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해본 것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하다. 그런 엄마가 마지막까지 가장 걱정한 대상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자신이었다는 것도 죄스럽다. 슬픔과 분노, 허무와 우울이 범람하는 이 시기를 정연은 기나긴 잠과 최소한의 음식 그리고 술로 보낸다.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보내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한의 장(章)에서 정연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마지막 우수의 장(章)에서는 엄마의 삶을 반추하며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감정을 돌아보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종교도 없고 다음 생에 대한 믿음도 없어 보였던 정연은 목공소 주인인 영준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후 영준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죽은 소녀와 엄마가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승에서 만나 사랑했지만 먼저 저승으로 가버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고 죽음과 공존하는 삶을 산다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소재 자체는 무겁고 어두운데, 소설의 분위기나 메시지는 조해진 작가가 그동안 발표한 작품 중에서 가장 밝고 희망적이라고 느꼈다. 특히 제목만 보면 대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조해진 작가가 2015년에 발표한 소설 <여름을 지나가다>와는 제목만 비슷할 뿐,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이 인생의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이야기이고, 자신의 공간이 아닌 다른 사람의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점은 같지만, <여름을 지나가다>의 주인공이 몰래 드나들던 가구점에서 쫓겨나면서 절망적인 기분으로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면, <겨울을 지나가다>의 정연은 스스로 엄마 집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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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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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사는 톈홍은 음력 7월 15일 '중원절'을 맞아 오랜만에 자신의 고향인 타이완 중부의 외딴 시골 마을 용징에 돌아온다. 지금은 쇠락해 별 볼 일 없는 동네이지만 1980년대만 해도 이 지역에 개발 붐이 불어서 이주해 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톈홍의 아버지 천톈산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딸 다섯 아들 둘을 둔 그는 평생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을 건사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타운하우스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원혼이 떠도는 숲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인 탓인지, 톈홍의 형제 자매들은 단 한 사람도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첫째 딸 수메이는 돈만 생기면 노름이나 사업으로 날리는 남편 때문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둘째 딸 수리는 타이베이 시 공무원인데 매일 같이 진상 민원인들에게 시달린다. 셋째 딸 수칭은 타이완 최고 대학을 나온 엘리트이지만 유명 뉴스 앵커인 남편에게 학대를 당한다. 넷째 딸 쑤제는 여동생을 밀어내고 마을 최고 부자인 왕씨 집안 큰아들과 결혼했지만 거대한 저택의 작고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지낸다.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다섯째 딸 만메이와 장남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무한한 애정과 지원을 받은 첫째 아들 텐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타이완 작가 천쓰홍의 장편 소설 <귀신들의 땅>은 천씨 집안 사람들의 일대기를 통해 타이완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가족들이 원래 살던 구식 가옥을 떠나 최신식 타운하우스로 이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가족들은 새로 지은 건물인 데다가 모든 것이 현대식인 타운하우스로 이사 와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점차 이상한 소문들이 그들의 귀에 들어온다. 타운하우스 근처에 있는 대나무 숲에는 일본군에게 강간 당해 죽은 여자 귀신이 있다든가, 개천에는 짐승의 시체가 썩어서 내려 온다든가... 불안한 예감은 이들의 삶을 잠식한다. 어릴 때는 다들 예쁘고 잘났던 형제 자매들이 하나 같이 비참한 생활을 하거나 제 명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이것들이 과연 귀신의 탓일까. 마을을 떠도는 귀신 이야기 대부분이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의 사연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이 귀신이나 저주,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것들은 대체로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주의 사상으로 인해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혐오, 위협과 폭력에 기인한다. 여성만도 아니다. 아들이지만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아들 취급을 못 받고 집에서 쫓겨난 톈홍처럼, 살아 있는 인간이지만 귀신처럼 숨어 있기를 강요 받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행복한 인간들의 세상이야말로 무시무시한 귀신들의 땅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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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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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가오카는 역 앞 쇼핑몰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 이시게에게 희한한 제안을 받는다. "저기, 나가오카, 나랑 새로운 사이비 종교 시작해보지 않을래?" 처음에 나가오카는 말도 안 된다며 웃어 넘기려 했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대체 누가 이런 허접한 사기에 넘어 오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이시게의 제안을 받아들인 척하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본다. 


<편의점 인간>의 작가 무라타 사야카의 단편집 <신앙>에는 단편소설 6편과 에세이 2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신앙>은 설정부터 강렬하다. 호기심 반 조롱 반의 심정으로 이시게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나가오카는 다른 동창들이 사이비 종교에 대해 비난하는 말을 듣고 의문을 느낀다. 명품이라는 말에 혹해 원가의 몇십, 몇백 배가 되는 돈을 주고 가방이며 화장품, 그릇 등을 사는 것과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신묘한 정수기를 사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예뻐지고 싶어서 성형 수술을 받는 마음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마음이 대체 얼마나 다른가. 극단적이지만 유의미한 질문이다.


생존율이 등급으로 매겨지는 세상을 그린 <생존>, 인간으로 살기가 힘든 나머지 야인이 되는 편을 택하는 사람들을 그린 <토맥윤기>, 모든 것이 균질한 세상에서 살아가던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모든 것이 균질하지 않은 세상으로 여행을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컬처 쇼크>, 클론 가전 로봇이 보편화된 세상을 상상한 <쓰지 않은 소설>, 인류 멸망 이후 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시회를 다룬 <마지막 전시회> 등도 하나같이 기발하고 인상적이다. 자신을 우주인으로 상상했던 어린 시절의 일화를 그린 <그들>과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 때문에 생긴 일을 담은 <기분>도 에세이이지만 소설만큼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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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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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다섯 살인 '나'는 오랜만에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대화 도중 '나'는 에번의 친구가 자신의 집에 침입한 10대 소년을 총으로 쏴서 죽이게 된 사연을 듣게 되고, 친구들은 그들 중 유일하게 자식이 있는 '나'에게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그 순간 '나'는 이십 년 넘게 알고 지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며 가치관이 비슷하다고 여겼던 친구들과 자신이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고 느낀다. 달라진 것은 친구들일까 나일까. 무엇이 그토록 비슷했던 그들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사라진 것들>에는 로 백인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남성이 인생의 중반에 이르러 그동안 자신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불안과 걱정, 후회와 미련 같은 감정을 느끼는 내용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백인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남성이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최상위 스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소설 속 남자들은 자신의 삶을 불안하게 여기고 시종일관 걱정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단편 <오스틴>의 주인공 남성은 남의 집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총을 맞고 죽은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년의 부모의 감정에 이입해 자기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넝쿨식물>의 주인공 남성은 전 여친 마야가 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려했던 그들의 청춘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한다. <첼로>의 주인공 남성은 첼리스트이자 대학 교수인 아내 나탈리가 파킨슨 병으로 의심되는 증상을 보이면서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 듯 보였던 그들의 미래가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숨을 쉬어>의 주인공 남성은 어린 아들이 수영장에서 놀다가 익사할 뻔한 일이 있은 후 수시로 공황 상태에 놓인다. <실루엣>의 주인공 남성은 정년직 교수 임용에서 탈락한 후 주변 동료들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백인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남성으로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위치에 있지만 언제 어디서든 자신 또는 가족에게 질병이나 사고, 범죄 등이 일어나 불시에 삶이 무너질 수 있다고 느끼면서 경계하고 불안해 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이 소설집에는 자주 나온다. 이른바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에 대해 그린 걸로도 볼 수 있지만, (백인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남성도 공포를 느낄 만큼) 지금의 미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회적 안전망이 취약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증으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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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일기
김지승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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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부모님께서 연달아 수술을 받으셨다. 특히 아버지는 올해 이맘때 큰 수술을 받으시고 현재까지도 경과를 지켜보는 상황이다. 환자의 가족으로서 여러 번 병원을 오가면서 세상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꼈다.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대기하는 환자와 가족들, 수술 전후 환자를 돌보기 위해 몇 주, 몇 달에 걸쳐 근처 모텔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수술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해 검사를 받고 경과를 확인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보이고 들리고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짐승일기>는 암 수술 경험자인 이지승 작가가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현재의 생활에 대해 일기 형식으로 쓴 책이다. 전에 없던 증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아간 저자는 의사로부터 항암 후유증으로 오는 갱년기 증상일 뿐 갱년기는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산부인과를 찾아가 보았지만 답변은 비슷했다. 갱년기 증상은 갱년기와 무엇이 다른가. 원인이 무엇이든 증상이 있으면 치료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생각을 말로 하면 아픈 여자, 늙은 여자가 말도 많고 예민하게 군다고 할 것 같아 그만뒀다. 그렇게 저자에게는 치료되지 않은 증상과 언어화되지 못한 상처만이 남았다.


아픈 사람의 삶에 아픔만 있는 건 아니지만 아픔 이외의 것도 아픔으로 해석되는 경향은 있다. 친구와 함께 일본의 가부키 공연을 보던 저자는 무대 위의 어떤 존재를 보고 매혹되었다. 검은 천을 온몸에 두르고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옷을 벗기거나 입하고 소품이나 무대 장치를 이동하는 역할을 하는 그들의 정체는 가부키 용어로 '쿠로코(黑子)'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분명히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관객의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기'로 합의된 그들을 보면서 저자는 그들이 꼭 아픈 사람, 늙은 사람, 여성인 사람 같다고 느꼈다. 보이지 않기로 합의된 것을 보는 것이 아픔이라면,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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