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3
이희영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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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평범한 고등학생인 인시울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의 얼굴은 보이기 때문에 얼굴이 무엇인지는 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매일 다른 색깔이나 무늬가 보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울에게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같은 반 남학생 묵재가 던진 공을 잘못 맞는 바람에 얼굴에 상처가 생겼는데, 그 날 이후 거울을 보면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떠오르는 색깔이나 무늬는 매일 변해도 상처만은 변하지 않고 늘 보이게 된 것이다. 


이희영의 소설 <페이스>는 여러 의미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주인공이 가진 문제가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일단 너무 불편하고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짐작과 달리 시울은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불편해 하지 않고 불행해 하지도 않는다. 얼굴에 뭐가 묻은 것 같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도와달라고 하면 되고, (거울을 이용하지 않는 한) 어차피 사람은 자신의 뒤통수도 못 보고 날개뼈도 못 보는데 얼굴 못 보는 게 대수냐,라는 식으로 쿨하게 생각한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태도, 닮고 싶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예쁜 얼굴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참 편해 보였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면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어른들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믿지 않게 되는데, 자기 얼굴을 본 적 없는 시울은 엄마 아빠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줄 알고 사니 얼마나 속 편해 보이던지 ^^ (시울의 엄마 아빠가 시울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부모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울의 부모가 외모 지적을 숨 쉬듯 하는 사람이었다면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고 주변 사람들 다 걱정하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시울의 모습도 신선했다. 나처럼 외모 신경 안 쓰고 사는 사람도 얼굴에 뭐 하나 생기면 빨리 없애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데, 상처도 얼굴의 일부라며 이제야 얼굴의 일부가 보인다고 기뻐하는 시울을 보니 나 또한 외모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구나 싶고, 상처가 난다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통증이 있어야 해당 신체 부위를 인식하고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아서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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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
C 팸 장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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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서부 개척 시기가 배경인 소설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한 권은 C. 팸 장의 소설 <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이고 다른 한 권은 <트러스트>의 작가 에르난 디아스의 데뷔작 <먼 곳에서>이다. 두 권 다 서부 개척 시기에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왔지만 기대와는 다른 삶을 산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소설은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의 주인공 루시와 샘이 <먼 곳에서>의 주인공 호칸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다고 느꼈다.


루시와 샘은 금을 찾아서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부모의 자식들이다. 그들의 부모는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노숙을 하며 열심히 금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고아가 된 루시와 샘은 생존을 위해 마을로 가지만, 피부색이 다른 데다가 가난하고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이들을 환영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결국 이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살게 되는데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녀 아니면 창녀 정도다. 급기야 샘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남자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는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 계획 또한 좌절된다.


루시와 샘은 고아가 되기 전, 그러니까 부모가 살아있을 때에도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이들의 아버지는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아내를 학대하고 딸들을 구박했다. 가정 안에서도 밖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던 루시와 샘에 비하면 호칸은 형편이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호칸도 호칸대로 엄청나게 고생했지만, 적어도 야외에서 노숙을 하거나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성적인 위협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 않을까). 


미국의 서부 개척 시기가 배경인 만큼 그 시절에 대한 평가도 나온다. 4부에서 루시는 부잣집 딸 애나의 시녀가 되는데, 애나의 아버지는 채금업자 출신으로 골드러시 초기에 금을 발견해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현재는 자신의 땅에서 금을 채굴한 사람들에게 일부를 상납 받는 식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가 이미 정착되어 있고, 자신은 무슨 수를 써도 이러한 구조의 상부로 올라가지 못하고 하부에 남을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루시는 절망 내지는 환멸을 느낀다. 분명 옛날 미국이 배경인데 지금 한국의 상황 같아서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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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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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한국소설 중에 읽어볼 만한 작품이 뭐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고를 것이다. 같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계기로 친해진 재일교포 3세와 한국인,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여성, 지치고 힘든 삶에 재미라고는 인터넷 밈뿐인 외국인 노동자와 마트 직원, 고전 읽기 시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혔다가 곤경에 처하는 고교 교사,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가수 등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잘 보여주는 소재 선정과 인물 설정이 탁월하다.


서늘함과 따뜻함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문체도 매력적이다. <전조등>의 주인공 남자는 살면서 한 번도 누구와 갈등을 빚거나 사회에 반기를 드는 일 없이 그저 남들 하는 대로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고 적당한 여자 만나 결혼해서 살고 있다. 많은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건 전부 가졌고, 무난하고 안정된 지금의 삶이 흔들리거나 망가질 전조는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그는 불안하다. 그를 보고 있는 독자 역시 불안하다. 야간 운전 도중 전조등 앞에 나타난 무언가 혹은 나타나지 않은 무언가에 의해서도 흔들리거나 망가질 수 있을 만큼 위태롭고 불안한 것이 인생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일까.


<전조등>이 품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상쇄하는 듯한 작품이 <무겁고 높은>이다. 주인공 송희는 탄광촌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고3 여학생이다. 역도에 재미를 느껴서 열심히 해왔지만 한 번도 메달권에는 들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역도를 그만둬야 하는가. 대학 입시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운동은 하면 안 되는 건가. 역도뿐 아니라 많은 것들에 대해 한국인들은 무엇에 쓰는지, 돈이 되는지 묻는다. 그걸 하는 사람이 즐겁고 행복한지는 안중에도 없다. 겉보기에 안정된 삶을 살면서 불안을 느끼는 <전조등>의 남자보다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확실한 행복을 아는 송희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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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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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라는 말이 참 좋다. 풀 해(解), 놓을 방(放)무언가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상상만 해도 가뿐하고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 그러나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막막함과 불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해방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지탱할 것을 마련해야 한다. 정신적인 지지대로 삼을 만한 것 중에는 책이 있다. <해방의 밤>의 저자 은유 역시 그랬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초보 엄마 시절 유아차를 끌고 집 근처 도서관을 드나들었던 추억을 소개한다. 아이 둘을 데리고 도서관 책기둥 사이를 누비던 그 시절의 저자는 몇 년 후 자신이 유명 작가가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자신의 정신적인 지지대가 되어준 책들을 소개한다.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해 이십 대 중반에 아이 둘의 엄마가 된 저자는 당시 자신이 얼마나 어리고 젊은지 몰랐다. 그랬던 저자에게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알려준 것이 책이다. 왜 남편의 노동, 아빠의 노동은 자상함의 발로이고 특별한 일로 찬사를 받는데 아내의 노동, 엄마의 노동은 당연한 희생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폄하되는가. 왜 아들에게는 더 주고 덜 받는 것이 당연하고 딸에게는 덜 주고 더 받는 것이 당연한가. 혼자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한 답은 늘 책 안에 있었고, 책을 읽으며 저자는 현실을 곧바로 바꿀 수는 없어도 더 나은 미래가 올 때까지 버틸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어느덧 두 아이를 다 키우고 오십을 넘긴 저자는 최근 '간헐적 자취'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자식들이 자취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자신은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는 경험을 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자취에 관한 책은 많지만 비혼 무자녀에 살림 경험도 적은 사람이 쓴 책이 대부분인데, 만약 저자가 자취에 관한 책을 쓴다면 기혼 유자녀에 임출육 경험자이고 살림 실력도 만렙이라서 기존 책들과는 다른 내용이 나올 것 같다. 저자의 또 다른 해방기(記)를 기대해 봐도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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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아닌 여행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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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는 나에게 여러 의미로 특별한 작가다. 부모님이 사주시는 책이나 학교에서 읽으라고 하는 책만 읽었던 중학생 시절. 집 근처 서점에서 예쁜 표지에 혹해 <키친>, <암리타> 같은 소설을 사서 읽었는데 그 책들의 작가가 요시모토 바나나였다.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내가 몰랐던 세계가 이 책 안에 있다는 건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일본 소설 읽기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해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 오쿠다 히데오 등으로 취향을 넓혀갔다. 지금은 일본 소설을 그때만큼 열심히 읽지 않지만, 그 시절 좋아했던 작가들의 책이 나오면 옛정으로 읽곤 한다.


<여행 아닌 여행기>는 요시모토 바나나가 2012년에 출간한 에세이집이다. 원제는 <人生の旅をゆく2>. 1권은 <매일이,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2017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제목만 보고 여행 이야기도 있고 여행 아닌 이야기도 있겠구나 짐작했는데 과연 그랬다. 서민 동네 출신인 저자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도시 경관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것에 불만이 많다. 새로 지은 고층 건물이 늘어나면 부동산 업자들은 좋겠지만 그 동네에서 오랫동안 어울려 살아온 이웃 관계가 무너지고 소상공인의 형편도 어려워지는 등 여러모로 안 좋은 점도 많기 때문이다.


여행을 즐겨 하는 저자는 외국에 갈 때에도 그곳의 이른바 로컬 문화에 눈길이 간다. 저자가 특히 좋아하는 여행지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그리스 미코노스섬, 이탈리아 카프리섬 등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도시에서 보기 힘든 자연 경관과 현지 문화가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사잔 올스타즈, 오바케의 Q타로, 마쓰우라 야타로 등에 관한 글도 흥미롭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저자의 경험과 생각을 알 수 있는 글도 있고, 동물 및 식물과 어울려 사는 삶, 육아의 기쁨과 어려움에 관한 글도 있다. '그때그때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을 찬찬히 헤아리자'라는 문장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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