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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층의 하이쎈스
김멜라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평점 :
십 대 청소년 아세로라는 부모의 집을 뛰쳐나와 남산 타워가 보이는 상가 건물 2층에서 산다. 아세로라의 옆방에 사는 '동거인' 할머니 사귀자는 '하이쎈스'라는 필명으로 명필 교습소를 운영한다. 좋아하는 음식부터 외모를 꾸미는 방법까지 무엇 하나 일치하는 것이 없는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세로라는 사귀자가 외출한 틈을 타 교습소를 뒤지다가 사귀자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귀자가 '하이쎈스'라는 이름으로 남한에서 오랫동안 활동 중인 간첩이라는 것이다.
김멜라 작가의 첫 장편 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는 가출 청소년과 명필 할머니라는 기이한 조합으로 시작한다. 성격도 취향도 맞지 않는 두 사람이 상가 건물에 숨어 산다는 설정도 우스운데, 심지어 할머니가 간첩이라고 적힌 문서가 청소년의 눈에 띄면서 이야기 전개가 급물살을 탄다. 사실 사귀자 할머니는 군사 독재 시절에 지금의 상가 자리에서 하숙집을 운영했다. 사귀자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혼기가 차자 마자 결혼했다. 다행히 괜찮은 남편을 만나 딸 하나를 얻었고, 남편이 구한 하숙집을 운영하며 열심히 살아갈 계획을 품었다.
그랬던 사귀자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면서 인생이 뒤집혔다. 어느 것도 자신의 탓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앞에 사귀자는 무너졌다. 순식간에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사귀자의 사연을 알게 된 아세로라는 자신의 '없는 사람'을 떠올린다.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죽은 남동생 '칭퉁이'다. 어려서부터 희귀 면역 질환을 앓아서 과자나 고기도 못 먹고 외출도 자유롭게 못 했던 칭퉁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세로라는 칭퉁이 몰래 고기를 먹고 횡령 사건을 벌인 부모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었던 건 칭퉁이가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자신이었다.
자신처럼 어쩌면 자신보다 더 큰 상실과 고통을 겪었다고도 볼 수 있는 사귀자가 지금은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세로라는 자신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살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죄를 짓게 되기도 하고,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죄인으로 몰리기도 하고, 힘들게 얻은 걸 빼앗기기도 하지만, 살다 보면 빼앗긴 걸 다시 얻게 되기도 하고, 죄인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지은 죄를 갚을 기회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니 살아 있을 것. 살아 갈 것. 최근에 읽은 한국 장편 소설 중에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