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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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두려움이 컸다. 주디스 버틀러, 한나 아렌트, 존 버거 등 많은 학자, 사상가들이 이 책을 극찬했다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책도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펼친 이 책. 본격적인 독서에 앞서 저자 소개글부터 찬찬히 읽어 봤다.


발터 벤야민(1892-1940). 독일 출신 유대계 언어철학자, 문예학자, 비평가, 번역가. 1892년 7월 15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베를린대학, 뮌헨대학, 스위스 베른대학에서 철학, 독일 문학사 및 예술사, 심리학 공부. 졸업 후 재야에서 문예비평가이자 번역가로 활동. 나치의 박해에 시달리다 프랑스로 망명한 그는 나치의 힘이 파리에도 미치자 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세관에 붙잡히면서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슬프고 안타깝다. 만약 그가 무사히 미국에 도착했다면 세상은 좀 더 달라졌을까.


<고독의 이야기들>은 발터 벤야민이 '노벨레'의 형식을 빌려 집필한 글들과 문학적 테마가 담긴 글들을 묶은 문학작품집이다. 노벨레란 신기하지만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예술적 구성으로 간결하고 객관적인 묘사로 재현한 비교적 짧은 산문 또는 운문 작품을 의미한다. 읽으면서 같은 독일문화권 작가인 카프카, 재독 소설가 배수아의 글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노벨레의 원조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라고 한다. 괴테의 소설 <노벨레>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새로운'을 의미했던 이 단어가 현재의 의미로 널리 쓰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대체로 길이가 짧고, 분위기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각 글이 시작되는 책장마다 독일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이 실려 있어 그림을 보고 이어질 글의 내용을 상상해 보거나 글을 읽으면서 그림과의 관계를 유추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글의 분위기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지만 내용은 의외로 현실적이고 때로는 비판적이기까지 하다. 가령 <황후의 아침>이라는 글을 여는 이런 문장. "건강한 사람들도 가끔은 문필가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삶이 주권자라는 것을, 분립 불가능하고 심층적인,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주권자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33쪽)


<두 번째 자아>라는 글의 이런 대목. "당신은 자기 비난으로 저녁을 허비했습니다, 당신은 열등감을 안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가 억압돼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가 느끼는 충동을 따르지 못하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충동은 두 번째 자아가 당신의 삶으로 통하는 문에 달린 손잡이에 가하는 압력입니다, 그 문이 왜 그렇게 꽉 닫혀 있는지, 왜 억압이 존재하는지, 당신 자신이 왜 충동을 따르지 않고 있는지 당신은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43쪽) 이 밖에도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아서 앞으로 이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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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잠수 - 힘을 줘서 움켜잡을 수 없는 게 바다였다 아무튼 시리즈 58
하미나 지음 / 위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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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점심 먹고 나서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도는 습관이 생겼다. 공원을 돌면서 예전에는 팟캐스트를 주로 들었지만 요즘은 TTS 기능을 이용해 전자책을 '듣는다'. 분야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듣지만 가장 즐겨 듣는 것은 아무튼 시리즈다. 처음에는 관심 가는 주제를 찾아 듣다가 이제는 관심 없는 주제도 듣는다. 계속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관심이 생기는 매직...! 


어제 완독(완청?)한 책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줄여서 '미괴오똑')을 쓴 하미나 작가의 <아무튼, 잠수>다. 저자는 <미괴오똑>을 쓰는 동안 프리다이빙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친구들과 놀러간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해보고 다이빙의 매력을 알게 되었는데, 스쿠버다이빙은 장비를 장만하는 비용도 많이 들고 이동할 때 차량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프리다이빙은 장비의 도움 없이 자신의 폐에 있는 공기만으로 잠수하기 때문에 비용도 덜 들고 차량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프리다이빙을 시작한 저자는 점점 그 매력에 푹 빠져서 나중에는 필리핀 보홀, 하와이, 호주 등에서도 훈련하기에 이른다.


책에는 저자가 프리다이빙을 훈련하는 과정과 함께 당시 저자가 겪고 있던 심리적 문제들도 나온다. 당시 저자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쓰면서 자신처럼 우울증을 앓는 젊은 여성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 한 분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다. 국내 최고의 대학을 나왔지만 자신과 달리 경제적으로 풍족한 동기들에게 열등감을 느낀 적도 많았고, 졸업 후 취업하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집안에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대학원을 나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조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퇴사하면서 또 다시 깊은 우울과 불안에 빠지기도 했다.


프리다이빙은 이런 문제들을 거의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프리다이빙을 할 때는 모든 걸 잊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생각 하나, 판단 하나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만큼 신중하게 되고 몰입하게 된다. 물 위에 있을 때 나를 괴롭히던 '먹고사니즘' 따위는 떠올릴 새가 없다. 기록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모범생, 우등생 기질을 내려놓을 수도 있게 되었다.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큰 즐거움이다. 자기처럼 프리다이빙이 좋아서 몇 달, 몇 년을 미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나에게도 이런 취미가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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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개정증보판
김하나.황선우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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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가 출간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비혼인 사십 대 여자 둘이서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사는 모습이 신선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는데, 그 사이 이들처럼 비혼인 여성들이 여러 형태로 동거하는 모습이 다양한 매체에 노출되어 신선한 느낌은 덜해졌지만, 김하나, 황선우 작가가 <여둘살> 출간에 이어 시작한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여둘톡)>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은 더 커졌다. 최근에는 억대 선인세에 영미권 출판사와 판권 수출 계약까지 맺으셨다고. 이러다 지구 정복하시는 거 아닌지(해주세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여둘살>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 읽은 <여둘살>은 2019년에 나온 초판이 아니라 2024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이다. 초판을 종이책, 전자책 버전 모두 소장하고 있으면서 개정증보판을 구입한 이유는 여러 굿즈와 고양이 미니북을 받기 위해서였다. 특히 고양이 미니북이 무지 귀엽다. 소장 가치 10000퍼센트...!! 개정증보판에만 수록된 새 에세이와 미공개 사진들도 궁금했다. 새 에세이는 2019년 <여둘살> 출간 이후 두 작가님들에게 생긴 변화를 담고 있다. 둘째 고양이 고로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 투명 고양이가 된 일, 서울사이버음악대 결성, 여둘톡 시작 등등.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이분들을 좋아할까 곰곰 생각해 봤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보고 듣든 연애 이야기, 결혼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아주 즐겁고 흥겨운 대화를 나누는 분들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분들이 <여둘톡>에서 매주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삶에서 연애와 결혼(+주식, 부동산 등등) 이야기를 빼면 문화에 대해, 예술에 대해, 사회에 대해, 인생에 대해 더 많은, 더 깊은, 더 풍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존재 자체가 벡델테스트라고나 할까... (이름을 가진 두 여자가 남자 이야기 아닌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부디 오래오래 이야기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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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생활 - 기록으로 취향을 발견하고 나만의 길을 만드는 법
논디 김하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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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을 믿는다.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블로그를 한 것이 지금의 직업으로 연결되었고, 블로그에 책 리뷰를 쓴 것이 나를 계속해서 읽는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흔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요즘 나는 블로그와 책 리뷰 외에 다른 기록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먹고사는 일과 책 읽기만으로 구성된 단조로운 내 삶에 새로운 자극을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김하영의 책 <쓰는 생활>을 읽은 건, 기록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저자 김하영은 '논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플루언서이자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제품 디자이너, 리빙-스테이셔너리 브랜드 '데이오프 프로젝트' 대표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스케치북, 다이어리, 수첩 등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거나 쓰는 일을 좋아했다. 이러한 습관은 제품 디자이너가 되고 맥북, 아이패드 같은 전자기기를 소유하게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이에 뭔가를 쓰고 그리고 기록하는 습관이 자신의 일과 인터넷 생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전보다 더욱 열심히 종이에 쓰고 그리고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총 11개의 노트를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모든 노트를 매일매일 쓰지는 않는다. 어떤 노트는 매일 쓰지만, 어떤 노트는 한 달에 한 번 쓰기도 한다. 저자는 투 두 리스트 노트, 시간기록 노트, 모닝페이지, 일기, 감사일기, 업무일지, 확인용 위클리 다이어리, SNS 콘텐츠 기획 노트, 소비기록, 영감 노트, 독서 노트, 아카이브북 등을 쓴다. 여기에 이미지 아카이빙을 위해 사용하는 노션과 스마트폰 메모 앱,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굿노트와 제품의 밑그림을 그리는 드로잉북 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11개보다 훨씬 많은 노트를 사용하는 셈이다. 책에는 저자가 각각의 노트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자세히 나온다. 


이렇게 공을 들여 많은 양의 기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경우 기록이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내 취향은 무엇일까' 같은 답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을 하다 보면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등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저자는 또한 기록하는 시간을 보다 즐겁게 보내기 위해 마음에 드는 책상을 구입하고, 기왕 구입한 책상 주변을 자기 취향에 맞게 꾸미다 보니 '책상 인테리어' 전문가로도 알려져 개인 브랜드를 확립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기록으로 어떤 인생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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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전 -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아무튼 시리즈 52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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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집에 사전이 여러 권 있었다. 국어사전, 영어사전, 백과사전 등 종류도 다양했고, 어른들이 보는 사전과 어린이들이 보는 사전이 따로 있기도 했다. 이제는 집에 사전이 한 권도 없다. 고등학교 때 구입한 샤프 영어사전을 끝으로 새로운 사전을 구입한 일이 없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포털 사이트나 사전 앱에서 찾아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어른인 나도 이런데 요즘 아이들은 종이 사전을 사용할까. 종이 사전의 존재나 알까.


번역가 홍한별의 에세이집 <아무튼, 사전>은 사전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종이 사전, 인터넷 사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전을 애용한다. 일차적으로는 번역가라는 직업 때문이다.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거나 단어의 정확한 용례를 알기 위해 영한, 한영, 영영 등 여러 형태의 사전을 수시로 들춰본다. 작업 중이 아닐 때에도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단어들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사전마다 특징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에 사전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다 보면 필요가 생겼을 때 이용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번역가의 사전 사용법을 알려주는 책인가 싶은데, 후반부로 갈수록 사전에 얽힌 저자의 개인사가 담담히 펼쳐진다. 


몇 해 전 작고한 저자의 아버지는 강원도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해서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고 자식 둘을 영어 번역가로 키웠다. 저자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 공부하는 분이었고 그중에서도 언어 공부에 관심이 많아서 영어 사전뿐 아니라 일어 사전, 불어 사전 등 다양한 사전이 집에 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로 기억하는 단어의 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으로서 그리고 언어가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슬프고 두려웠을까.


그러나 언어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새로 생겨나기도 하는 것처럼, 인간은 언어를 잊을 수도 있지만 새로 배울 수도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저자의 아버지는 "최초의 언어로, 번역으로 훼손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성경을 읽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어를 열심히 배웠다. 저자의 어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온 단어 중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따로 적어뒀다가 뜻을 찾아보기도 하고, 고향인 전라도 사투리를 생각나는 대로 수첩에 적는 식으로 자신만의 사전을 만든다. 과연 나는 십 년 후, 이십 년 후, 오십 년 후에 어떤 단어를 알고 있을까. 지금 알고 있는 단어 중에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단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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