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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나는 세계 끝자락에서 태어난 여자애였고, 고향을 떠나는 내 어깨에는 하인의 망토가 둘러져 있었다." (78쪽)
서인도제국 출신의 십 대 소녀 루시는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백인 가족의 입주 보모(오페어)로 일하러 뉴욕에 간다. 처음에 루시는 세계 최대의 도시에서 백인 상류층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에 대해 기쁨과 설렘을 느낀다. 다행히 집 주인 가족은 친절하고 네 아이를 돌보는 일도 크게 힘들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루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집 주인 가족의 배려가 위선으로 느껴지고, 루시 자신도 아직 어린데 다른 아이를 넷이나 돌봐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난다. 급기야 자식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한 부모와, 후손들을 피점령국 출신으로 태어나 점령국 국민들의 하인으로 살게 한 조상들을 원망한다.
저메이카 킨케이드가 1990년에 발표한 소설 <루시>는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상당히 많이 반영된 성장소설이다. 저자는 주인공 루시와 마찬가지로 1949년 서인도제국의 영국 연방 내 독립국가인 앤티카 섬에서 태어났다. 1966년 뉴욕으로 이주해 입주 보모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비서, 모델, 클럽의 보조 가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야간 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간 끝에 1976년 <뉴요커>에 칼럼니스트로 데뷔했고, 다수의 소설, 에세이를 발표하며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현재는 하버드 대학교의 연구 교수로 자리잡고 2004년에는 미국 문학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소설은 총 148쪽으로 분량은 많지 않지만, 제국주의, 여성주의, 섹슈얼리티, 성장과 자립 등 묵직한 주제들이 잘 연결되어 있다. 십 대 청소년인 루시는 언제까지나 부모의 보호를 받는 아이이고 싶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며 괴로워한다. 같은 또래의 십대 청소년들처럼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지만 입주 보모로 남의 집에 기숙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러기도 쉽지 않다. 집 주인의 아내인 머라이어는 같은 여성으로서 루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잘해주려 하지만, 루시는 인종과 계급이 다른 머라이어의 친절을 기만 또는 위선으로 느낀다. 제국의 국민이 식민지 국민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야수들이 천사를 가장하고 천사들이 야수로 묘사되는 환경"(29쪽)과 다름 없다고 본다.
“그녀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곳에서 나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었다. 우리가 그 장면을 똑같이 보고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맛은 다를 것이었다.” (29쪽)
다른 사람이 나를 고유한 존재로 보지 않고 출신이나 인종, 계급, 학벌, 성별 등으로 단정짓고 판단하는 것은 무척 불쾌한 일이다. 그런데 루시는 아직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외국에 나가 외국인 보모로 일하며 사춘기까지 겪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문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루시의 국적과 피부색, 성별 등은 바꿀 수가 없고, 더 절망적이게도 이것들은 일종의 꼬리표로서 루시 자신의 인생을 계속해서 힘들게 만들 거라는 점이다.
다행히 루시는 계속해서 비뚤어지는 대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한다.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돈 벌기, 부지런히 공부하고 글쓰기가 그 방법이다. 이러한 루시(와 작가)의 이야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필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