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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함정 - 가질수록 행복은 왜 줄어드는가
리처드 레이어드 지음, 정은아 옮김, 이정전 해제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오래전에 본 건데도 어느 일본방송의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인기 절정의 젊은 여배우가 게스트로 나왔는데, 자기 취미는 사진 찍기라면서 쉴 때도 그 사진을 보면서 옛날일을 회상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패널 중 한 사람이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느냐며 차라리 그 시간에 지금의 감정에 집중하라는 말을 했다. 당시 나도 그 여배우처럼 사진 찍고 보는 걸 매우 좋아했던터라 '나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 자연스럽게 사진과 카메라로부터 멀어졌다.
듣는 사람에 따라 그 패널이 쓸데 없는 참견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분이 중요한 지적을 했다고 본다. 그 후에 어디선가 행복은 무엇을 성취하거나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데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사진을 찍는다는 것, 무언가 기록하고 소유하는 것에 집착하다보면 현실을 소홀히하게 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행복은 감정이다. 기쁘고 즐겁고 만족스럽고 설레는 모든 감정을 통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뚱맞은 예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까지도 '기쁜 것 같아요', '재미있는 것 같아요' 등등 '~인 것 같다'는 말을 붙이는 걸 보면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닐런지.
리처드 레이어드의 <행복의 함정>을 읽었다. 레이어드는 런던 정경대 교수이며 토니 블레어 정부의 경제자문을 지냈고 2000년 부터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있는 경제학자로, 행복, 삶의 질에 관한 연구로 이른바 '행복 황제'로 불리며 2010년에는 <더 타임스>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승려 마티유 리카르와 함께 꼽혔다. (이런 조사는 누가 하는 걸까? 왜 나는 빼고 하는 거지?) 그의 행복에 관한 연구는 영국 캐머런 총리,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등 유럽 국가의 수장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르코지가 소집한 경제 위원회의 연구 보고서를 담은 <GDP는 틀렸다>라는 책을 최근에 읽었는데, 어쩐지 행복과 삶의 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더라. 요즘 유럽 정부들의 정책, 특히 경제 정책은 이 레이어드라는 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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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같은 액수의 돈에 다른 사람들보다 덜 만족해한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믿는다. 경제적 인간은 돈을 위해 일하며 더는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일에 매달린다. 사실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다른 일을 한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이들은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보고 경제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p.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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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해서 행복을 마냥 강조하는, 이른바 긍정론 쪽의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레이어드는 벤담, 밀의 이론을 분석하며 행복의 개념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소득과 생활수준은 높아지는데도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연구하고, 경제적인 척도 외에도 사회 전체의 행복을 측정하고 증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개발하려고 애쓰는, 지극히 학문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절대적인 행복보다 상대적인 행복을 중시한다. 즉 남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더 나은지를 척도로 행복을 평가한다. 그러나 한번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익숙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갈망하지만 일단 그렇게 되면 금방 권태를 느끼고 우울증에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행복의 비밀 중 하나는 당신보다 더 성공한 사람과 비교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항상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아닌 낮은 사람과 비교하라. (p.81) 행복의 비밀은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그래서 흥미를 잃지 않는 대상을 찾는 것이다. (p.82)'라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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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느 정도 높은 소득에 적응하게 될까? 이를 가장 쉽게 알아내려면 사람들의 실질소득이 그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소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파악해야 한다. ...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필요 소득'이 현재 자신이 받는 실질소득과 매우 강하게 연관돼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받는 소득에서 1달러가 오르면 필요 소득에서도 최소 40센트가 올라갔다. 즉 올해 1달러를 더 벌면 행복해지지만, 다음해에는 40센트가 더 오른 기준으로 자신의 소득을 평가하는 것이다. 결국 올해의 소득 가운데 최소 40%가 내년에는 '사라져버리는' 셈이다.
이것은 소득에 대한 중독을 알 수 있는 척도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익숙해지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은 자동차나 집 같은 물질적인 소유물이다. 광고업자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돈을 써서 '중독을 채우라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 만약 물질적인 소유물에 대해 익숙해질 것을 미리 예상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물건을 사는 데 과도하게 돈을 써버릴 것이다. 결국 그 돈은 자신의 여가를 희생해서 버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습관화 과정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그 결과 우리 인생은 일을 더 하고 돈을 더 버는 식으로 왜곡되고 있으며 다른 취미나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는 삶에서 점점 멀어진다. (p.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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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에는 개인 수준에서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논의도 등장하지만, 궁극적인 내용은 후반부에 있다. 공직에 몸담고 있는 인물인만큼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공정책을 세울 때, 특히 경제나 복지 정책을 마련함에 있어 개인의 삶의 질, 행복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놀랍게도 저자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사상이 만연한 영국의 학자답지 않게(일반적인 생각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영국에 대해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 권위, 종교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현대인이 사회 전체적인 생활 수준은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과거에 있던 가족, 마을, 종교, 조직 같은 공동체가 해체되어 안정감을 잃어서라고 한다. 이를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면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들은 경제적 개념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외부 효과를 창출하는데, 경제적 개념으로 환산되는 것만을 인정하는 풍조로 인해 공동체보다도 당장 나, 내가 잘 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하게 되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은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내 생각엔 공동체, 종교 같은 문제로 멀리 갈 것도 없이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기만 해도 될 것 같다. 혼자 있을 때 불행하다고 느끼면 둘이나 셋이 더 낫고, 반대라면 혼자가 더 낫다. 그건 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그보다도 저자가 현대인들이 궁극적으로는 가족, 연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어린 시절의 꿈을 하나둘 이루며 사는 삶을 소망하지만, 당장 눈 앞에 놓인 돈, 즉 보수나 명예, 지위 같은 것에 정신이 팔려 감정을 무시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의 경우 가족 해체, 우울증, 자살, 종교의 권위 하락 같은 사회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처방으로 공동체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 같다. 만약 우리나라라면 계급, 조직 내의 모순, 불합리를 해결하고, 권위가 있어야 할 집단이 권력만을 휘두르는 세태를 바로잡는 데에서 행복이 출발하지 않을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남보다 더 벌고,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동네에 살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해서 행복한 것일까.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의 수장들과 학자들은 이미 이 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제기하고 있는 추세다. 더 벌고 더 가지기 위해 애쓰는 건 이미 한물 간 트렌드. 행복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