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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본성
제프리 잉햄 지음, 홍기빈 옮김 / 삼천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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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사회과학대학에 들어간 것이기에 따로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혹시 나와 맞는 학문일까 싶어 경제원론 수업을 들었다가 '아, 경제학을 공부해 놓으면 살면서 손해는 안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경제학 복수전공을 신청했더랬다. 그 후로 대학 4년을 정치외교학에도, 경제학에도 미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졸업하는 바람에 백조 신세를 면치 못한 나. 이따금씩 경제학을 복수전공하길 잘 한 걸까 자문하곤 했는데, <돈의 본성>을 읽으면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어려운 책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니!! (그러나 '읽었다'고 해서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다.) 

<돈의 본성>은 케임브리지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제프리 잉햄이 지은 책이다. 잉햄은 사회학자로서는 드물게 사회학과 정치경제학을 아우르는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와 노동, 화폐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데, 경제학이 정치철학에서 출발한 학문이고, 사회학이 사회과학 전반을 아우르는 '사회과학의 꽃'과 같은 학문임을 생각하면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경제학의 연구 대상으로만 여겨지기 쉬운 화폐의 속성에 대해 권력, 계급, 사회적 함의 등 사회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지극히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분석했다.  

 

먼저 저자는 화폐를 권력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화폐를 상품이나 다름없는 '중립적 베일'로 간주하여 화폐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무시하는 정통 경제학의 화폐 이론에 딴지를 건다. 너무나 당연해서 잊기 쉽지만, 돈은 종이 한 장, 금속 덩어리에 불과하다. (요즘은 物化되지 않은 돈도 매우 많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화폐는 군주와 귀족, 상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국가와 시민 사이의 대결의 산물로, 그것을 통제할 힘을 가진 자에게는 절대반지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대결의 결과 화폐를 통제할 힘은 정부와 자산계급에 돌아갔다. 그 후 이들은 시민, 노동자에게 화폐를 지극히 공평하고 평등한 교환의 매개인 양 주입시켰고, 시민, 노동자는 화폐의 속성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오직 그것을 소유하는 데 골몰하는 종속자로 전락했다.  

 

   
  자본과 노동 사이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권력균형 상태가 변화하면, 이것은 화폐의 구매력에 영향을 미친다. 이때, 권력균형을 변화시키는 중심적인 투쟁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투쟁이다. 역사적으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투쟁은 가장 중요한 계급투쟁이었다. (p.178)  
   

   

이러한 논의를 뒷받침 하기 위해 저자는 역사 속에서 증거를 찾았다. 그 중에서도 독일어와 일본어 등 여러나라의 언어에서 화폐나 지불을 뜻하는 말의 유래를 분석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언어야말로 대표적인 사회적 산물이 아닌가!) 가령 독일어로 화폐를 뜻하는 겔트라는 말은 보상금, 희생(고대 영어로 Geild)이나 조세(고트족 언어로 Gild)라는 말은 물론이고 범죄(guilt)라는 말과도 관련이 있다. 일본어로 지불을 뜻하는 하라이라는 말은 죄 씻김 이라는 뜻이 있다. (p.190) 화폐 단위인 실링(shilling)은 살인 또는 상해를 뜻하는 스킬란(skillan)에서 왔다. (p.196) 

 

화폐-자본의 권력적 속성에 대한 논의는 현대 경제학, 특히 몇 년 전 미국발 금융위기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도 의의가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반쪽이 미국 중심의 질서로 재편되면서 경제는 '대자본', '대규모 조직 노동', '금리 수취자'라는 3대 경제적 계급이 서로 불안정하게나마 타협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팽창하면서 대자본은 노동 가격 인상을 감수하지 못하고, 노동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질소득이 감소하나, 그런 중에도 금리 수취자는 높은 이자율의 덕을 보는 데다가 탈규제로 인해 고삐마저 풀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세력균형의 축은 금리 수취자, 즉 화폐자본 및 금융에게 유리하게 재편된 것이다. 그러나 고평가된 금융 팽창의 끝은 투기 거품이 꺼지는 종말인 경우가 많다. 그런 사례는 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 수차례 목격했다. 

  

앞에도 썼듯이 읽을 수는 있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한장 한장 읽으면서 내가 이 책을 '어렵다'고 느낀 이유는 돈을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날 때부터 존재했던, 주어진 것으로 자연스럽게만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돈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산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이 시스템을 움직이는 화폐, 즉 '돈'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권력적 속성이라는 개념까지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깝게는 금융을 감독해야하는 자가 그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서민들의 돈을 약탈하는 사건부터 돈을 가진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불평등과 모순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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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6-1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복수전공 하셨군요. 사회과학대학 또한 어떤 면에서 보면 [모 아니면 도]라서 취업이 힘든 것 같기도 해요. 님 나이를 짐작할 순 없지만 저는 그랬던 것 같아요. 더 높은 학위를 요구하는 학문 같아요. 실제로도 그렇게 학문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구요. 그래도 좀 멋있어요. 정치외교학과 경제학이라~^^

키치 2011-06-12 21:42   좋아요 0 | URL
모 아니면 도 맞습니다^^ 아쉽게도 전 아직 도 쪽이네요.
그냥 공부하는 게 좋아서 선택한 전공인데 직업으로 삼으려니 참 힘드네요.
쉽게 빛 보려고 선택한 길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크리티컬 매스 - 1퍼센트 남겨두고 멈춘 그대에게
백지연 지음 / 알마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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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비전이 있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성공을 정의한다. 즉 세상에서 좋다고 말하는 대학에 가서 취직 잘하고, 잘 벌고, 잘 먹고, 잘 살고 하는 식의 성공 잣대를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성공을 스스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크리티컬 매스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크리티컬 매스를 폭발시켜 도약할 수 있다. (p.77)  
   

 

<크리티컬 매스>에 대해 인터넷상에 올라온 리뷰를 보다보니 의외로 critical mass라는 말 자체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글이 많았다. 단어뜻은 알지만 정확한 의미는 몰라서 사전을 찾아보니 '핵분열시 연쇄 반응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질량'이라는 뜻을 가진 물리학 용어로(난 문과라서 다행이야...), 외국에서는 '바람직한 결과를 얻는 데 필요한 최소의 수'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고도 사실 속으로는 '에이, 그래도 얼마나 일.반.적 으로 쓰이겠어?'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마침 오늘 오전에 본 미국 뉴스에서 인터뷰이가 딱 'critical mass'라는 말을 쓰더라....(;;;)

  

각설하고, 이 책은 tvN에서 진행하는 인터뷰 전문 프로그램 <피플 인사이드> 100회 방영을 기념하여 진행자 백지연이 그동안 인터뷰한 이 시대의 명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묶어서 쓴 책이다. '할 수 있어, 믿는다, 괜찮다' 이런 글만 보면 여느 자기계발서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읽어보니 백지연이 인터뷰한 100명의 명사들의 삶이 요점만 쏙쏙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거기에 백지연이 인터뷰어로서 느낀 점이나 방송 뒷이야기도 함께 실려있어서 괜찮은 에세이를 읽은 기분이었다.

 

안철수, 박경철, 김성주, 김용(다트머스 대학 총장) 등 평소 존경해온 인물들의 이야기도 실려 있고, 김혜자, 박중훈, 장혁 등 잘 알려진 연예인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활동하는 분야도 다르고 개성도 다양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남들이 뭐라해도 한 가지 삶의 목표를 향해 진득하게 노력한 결과,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 힘들었을지 몰라도 누구보다도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런 공통점을 발견했고, 이를 '크리티컬 매스'라는 용어를 빌려 표현했다.

 

이 책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저자가 <논어>, <고백록> 등 고전을 비롯한 다양한 책으로부터 글을 인용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 번의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몇 백 장의 자료를 읽어야 한다는데, 그러는 중에도 틈틈이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부지런히 독서를 해왔다니... 거기에 같은 앵커우먼인 바버라 월터스는 물론이요, 키타노 타케시까지 인용한 부분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람에 대한 관심,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그녀로 하여금 독서를 하고, 오랫동안 방송을 하게끔 한 것이 아닐까. 참 멋지다. 그녀가 지금까지도 국내 최고의 앵커우먼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무언가에 몰두하여 하나의 업적을 완성하고 역사와 시대에 이름을 새긴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길을 걷지 않았다.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미련하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광적으로 매달렸다. 돈의 힘과 긍정의 힘에 취한 사회에서 명예나 업적을 논한다는 것은 정말 미친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경지에 도달해보지 못한 범인들은 죽었다깨도 알지못하는 무언가가 있을터ㅡ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행여 꿈에서라도 이 괴로운 희망을 놓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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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6-1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거 읽고 싶어요!^^

키치 2011-06-12 21:42   좋아요 0 | URL
기대에 비해 좋았는데 아이리시스 님은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하네요 ^^ 고맙습니다.
 
경제/경영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5월에 받은 신간 두 권 중에 아직 한 권은 읽지도 못했는데 벌써 6월 신간을 골라야 하다니... 시간 참 빠르다. (아직 한 권을 다 못 읽은 이유는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책이 너무 어려워서 내가 너무 무식해서...) 6월 신간은 부디 쉽고 재미있는ㅡ 내 하찮은 수준에도 맞는 책이 선택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1. 블랙 스완에 대비하라

읽고 싶어서 북카트에 담아둔지 오래인 이 책이 경제/경영 5월 신간에 해당한다니... (으흐흐)  

블랙 스완 이라는 말이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서 경제경영 상식, 시사 상식 같은 책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이론이 주류 경제학과 달리 그만큼 새로웠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미국발 금융위기, 일본 동부 대지진 등 과학이나 통계 등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블랙 스완>의 개정판에 추가로 후기가 들어갔다고 하니 그의 이론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고, 모르는 사람이라면 후기를 통해 더욱 자세히 알게 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2. 계층 이동의 사다리 

요즘 하우스 푸어, 워킹 푸어 같은 말을 자주 듣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양극화라는 말을 들어도 크게 체감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도, 돈 모아서 집을 사도 점점 가난해진다는 것이 뭔지 알겠다. 바로 내가 그 당사자이니... 

점점 심각해지는 경제적 계층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책일 것 같아서 골라보았다.

  

 

 

3. 성장 숭배  

국가든 조직이든 개인이든 뭐든 성장만을 중시하는 풍조는 무섭다. 그 결과 껍데기만 커지고 내실은 없는, 어설픈 성장을 하는 것은 더욱 무섭다. 마침 5월 신간 중에 성장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찾았다. <성장 숭배>를 고를까, <성장의 광기>를 고를까 고민하다가 성장을 숭배하는 풍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더 알고 싶어서 <성장 숭배>로 골랐다. 정말 왜 우리는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을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더 알고 싶기도 한 문제다. 

 

 

 

 

4.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 

이 책도 경제경영 신간에 들어가는지 몰랐는데, 다른 분이 추천하셨기에 한 표 던져본다...^^ 

작년 일본 서점가를 '모시도라' 열풍에 빠지게 한 책으로, 대중적인 인기가 워낙 높아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되고 얼마전 영화로도 개봉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수박 겉핥기 식이라는 비판도 있다고 하는데, 겉핥기인지 아닌지는 읽어봐야 알겠지...? 이제까지 피터 드러커의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 그의 저서를 다른 각도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은근 기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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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이동의 사다리- 빈곤층에서 부유층까지, 숨겨진 계층의 법칙
루비 페인 지음, 김우열 옮김 / 황금사자 / 2011년 5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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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숭배- 우리는 왜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는가
클라이브 해밀턴 지음, 김홍식 옮김 / 바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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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에 대비하라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김현구 옮김, 남상구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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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광기- 왜 경제가 성장할수록 삶은 피폐해지는가
마인하르트 미겔 지음, 이미옥 옮김 / 뜨인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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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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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여자들은 임신하는 순간 자신의 삶도 끝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임신을 하고 나면 지혜가 필요하다고, 뭔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얼마 동안 그녀는 가정과 남편과 아이들이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그런 것들이 평범하지 않은 일이고, 인간의 경험을 좀 더 세련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것들을 가지고 나서는 그녀의 혈관 안에 매일 조금씩 납덩이가 쌓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장을 보지 않으면 집 안에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바나비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베네딕트가 다시 직장에 나가 버리고 자신이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처리해야 할 집안일들이 너무 많아서, 베네딕트에게 부탁하느니 직접 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일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  그런 생각이 처음 들었을 땐 그녀도 많이 놀랐고, 거의 분노를 느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정의에 따르면 그런 일상적 폭력의 흔적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가족들도 알아차려야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불평을 한 것은 실수였다. 어머니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 기쁨의 표정, 사악한 기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pp.55-6)

 
   

 
 

런던 인근의 베드타운 알링턴파크에 사는 중산층 여성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위 문장에서 '런던'을 '서울'로, '알링턴파크'를 '분당'으로 바꾸면, 그러니까 '서울 인근의 베드타운 분당에서 사는 중산층 여성들의 삶'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나의 어머니의 삶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어머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에 들어가 친정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만 하다가 옆 부서에서 일하던 신입사원, 그러니까 지금의 나의 아버지와 1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을 하면 여자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그 때의 상식이었고, 어머니도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그 때부터 오로지 나와 동생을 키우고 내조를 하는 데에만 전념하며 25년을 보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머니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까지 어머니는 과연 행복하셨을까? 당신 입으로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좋은 남편, 안정적인 생활, 부족하지 않게 키운 자식들... 하지만 어머니 인생에도, 자식인 나는 감히 짐작하지도 못할 만큼의 권태와 괴로움, 갈증이 있었을 것이다. 높은 학업, 직장에서의 성공 같은, 어머니 인생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소망들... 못난 딸은 이제서야, 그것도 소설을 읽으며 겨우 그것들을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이 책에는 다섯 명의 중산층 여성이 나온다. 각각 캐릭터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라는 점은 같다. 그리고 지겹도록 단조롭고, 숨막힐듯 갑갑한 남편의 속박, 아이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리고 있다는 점도. 그러나 세상이 그녀들에게 허락한 것은 얼마 안 된다. 기껏해야 근처 쇼핑몰에서 사지도 못할 야한 옷을 입어보며 여성성을 확인하고, 쉬는 시간마다 한 집에 모여 수다를 떠는 정도이다.  

그 수다 조차도 처녀 때 같지 않은 몸매와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는 남편, 말 안 듣는 아이들 얘기를 하고나서, 그래도 자신들에게는 따뜻한 집이 있고 가족이 있으니 낫다는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수다 끝에 자기 삶을 합리화하기 좋아하는 크리스틴이 던진 말은 그 중 압권이다. "하긴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저기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지진이나 그런 거 말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는 불평하면 안 돼. 그렇죠?" 크리스틴이 말했다. - p.140 뉴스나 신문을 보면서, 하루에도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했던가!)

 


배경은 비슷하지만 이 소설이 '위기의 주부들'과 다른 점은 여성들 스스로 삶의 전환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누구는 문학에 대한 사랑, 문학반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고, 누구는 딸에 대한 사랑을 다짐하고, 또 누구는 어머니의 삶을 반추하면서 권태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자세를 찾는다. 특히 솔리가 파올라를 홈스테이 게스트로 맞이하면서 여성성을 되찾게 되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파올라는 친구나 가족, 물건 등 세속적인 것에는 전혀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만끽하면서 사는 여성이다. 솔리는 그런 파올라를 보면서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이 '에사타멘테(Esattamente)', 즉 눈가리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파올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가리개. 결핍과 상실감을 가리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사는 인생이라니,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 아내들은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의 삶을 희생하여 가족을 위해 눈가리개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여전히 많은 딸들, 며느리들에게 그런 삶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아버지, 남편, 아들, 사위들의 삶도 고단하긴 마찬가지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영화 제목에 이어 노래, 그리고 이제는 '결혼은 무덤'이라고까지 말한다. 기술이 발달하고 생활이 편리해져도 가족, 부부 관계는 여전히 불합리하고 불편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소설 속의 여성들이 끝내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나 또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불완전한' 생활이 그녀들의 변화로 인해 '완벽한' 모습이 될 수 있었듯이, 나의 삶 또한 내가 변하면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지혜가 필요한 날이 왔을 때 꼭 이 책을 떠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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