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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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온다치는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원작 소설을 썼고,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만 받은 '골든 부커상'을 받은 작가로 알고 있었다. 정작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그의 신작 장편 소설 <기억의 빛>을 읽으면서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물론이고 다른 작품들도 전부 구해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근데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이렇게 유명하고 뛰어난 작가인데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별로 없어서 속상했다. 원서로 읽어야 하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막 끝난 1945년 영국 런던. 14세 소년 너새니얼은 어느 날 아침 부모로부터 아버지 일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만 일 년 간 집을 떠나 싱가포르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동안 너새니얼과 두 살 위 누나 레이철은 기숙학교에서 지낼 것이고, 무슨 일이 생기면 3층에 세들어 살고 있는 '나방'이라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이 덧붙었지만, 남매는 부모의 통보가 워낙 갑작스러운 데다가 나방이라는 남자가 범죄자처럼 보여서 불안하기만 하다. 


마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떠나고, 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남매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나방은 남매의 부모가 집을 비우길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손님들을 불러 들였고, 남매는 처음엔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점점 이들의 자유분방한 대화와 행동, 생활 방식에 호기심을 느끼고 결국 이들을 따라다니게 된다. 그렇게 매일 런던 안팎을 오가며 모험을 하고, 사랑을 하고, 성장을 하는 날들이 계속될 것 같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행복한 동거는 끝이 나고 너새니얼은 미국으로 보내진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1부이고, 1부만 보면 전쟁 직후에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성장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2부가 시작되고, 영국으로 돌아온 너새니얼이 정보국 요원이 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1부에서 아버지의 일을 핑계로 사라졌던 너새니얼의 부모는 사실 자식들에게조차 정체를 밝혀선 안 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특히 너새니얼의 어머니 로즈는 전쟁 중에 적군의 암호를 무수히 해독한 암호 분석원이자 직접 수많은 작전들을 수행한 요원이었고, 그 때문에 로즈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너새니얼은 정보국 요원으로서 어머니의 행적을 조사하는 한편, 아들로서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삶을 탐문한다. 이 과정에서 너새니얼은 어머니가 너새니얼이 14세 때 집을 떠난 것은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분쟁을 수습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국가와 전쟁을 택한 것 자체도 충격이지만, 당시 어머니의 곁에 어머니를 그러한 삶으로 이끈 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을 느낀다. 너새니얼이 몰랐던 진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너새니얼은 부모가 떠난 후 부모 대신 자신과 누나를 돌봐준 어른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그 중 한 사람을 만나는데, 너새니얼에게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 시절이 그에게는 다른 의미였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그 때는 어렸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겼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긴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 그저 순진한 소년/청년 같았던 너새니얼에 대한 인상이 많이 바뀌기도 했다.) 


한 번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다양한 시점의 이야기가 있고, 각 시점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시점의 이야기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라서 여러 번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너새니얼의 관점으로 쓰여 있지만 로즈나 레이철, 나방, 화살, 아그네스의 관점으로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 같고, 소설에선 끝내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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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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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은 신기하다. 이제 더는 청소년이 아닌데도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청소년 시절의 그것이 된다. 김수빈 작가의 소설 <고요한 우연>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다. 주인공 수현은 절친 지아와 하굣길에 밀크티를 마시는 걸 좋아하고, 서점에 가면 문구 코너부터 들르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수현은 같은 반 남학생 정후를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어느 날 꿈에서 한 소년을 보고, 그 소년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우연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설렌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자 주인공 수현이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두 남자 정후와 우연 사이에서 갈등하는, 흔하디 흔한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설정처럼 보인다. 수현에 비해 공부도 훨씬 잘하고 외모도 예쁘장한 고요는 수현을 방해하는 라이벌(연적)처럼 보이고. 그런데 요즘 아이답게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수현이 익명의 계정을 사용해 정후와 우연, 고요와 연결되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왕자님처럼 보였던 정후에게는 남모를 슬픈 사연이 있었고, 존재감이 희미한 우연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친구가 없는 고요는 사실 외로움을 많이 타고 누구보다 친구를 원했다. 수현은 환하게 빛나는 달의 뒷면을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처럼, 그저 지켜보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사연이나 은밀한 속마음까지 알 수 없음을 깨닫는다. 관심과 동경을 사랑과 인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어른들에게도 유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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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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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작가 참 잘 쓴다. 소설도 좋아하지만 에세이도 정말 좋다. 저자가 그랬듯 나도 평생 대도시의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단독주택이 대부분인 동네의 생활을 잘 모르는데, 역에서 집까지 가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고, 겨울에 눈이 오면 빙판길이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눈을 쓸어줘야 한다는 게 힘들 것 같기는 하지만, 사계절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고 다정한 이웃들도 만날 수 있는 점은 좋아 보였다. 


이 책의 1부가 저자가 사는 '언덕 위의 집'에 관한 이야기라면, 2부는 저자의 반려견 '봉봉'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기일 때부터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생명의 일생을 전부 지켜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봉봉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봉봉을 그리워하고, 다른 생명을 대할 때에도 봉봉을 떠올리며 부러 더 다정하게 군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서로 참 많이 사랑하고 사랑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부에는 봉봉이 떠난 후 저자의 일상과 저자가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데버라 리비의 산문집 <살림 비용>에 실린 백수린 작가의 후기가 이 책에도 실려 있는데, 이 글도 참 좋다. 여자 혼자 일하고 요리하고 동물을 돌보며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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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여신님 신장판 5
후지시마 코스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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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여신님 신장판>은 신간이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작화의 개선에 놀라게 된다. 1권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내가 아는 <오! 나의 여신님>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작화가 별로였는데, 2, 3, 4권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작화가 개선되더니, 5권에 이르러서는 전성기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5권은 표지가 너무 예쁘고(동일한 일러스트가 인쇄된 포스트 카드도 훌륭하다), 베르단디를 비롯한 세 자매의 작화가 아주 좋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 빨리 베르단디와 '진도'를 나가고 싶은 케이이치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베르단디, 그리고 그런 둘의 주변을 떠돌며 사고만 치는 베르단디의 언니 우르드와 여동생 스쿨드의 일상이 그려진다. 5권에선 우르드와 스쿨드가 잠시 천계로 돌아가게 되어 케이이치는 마침내 베르단디와 단둘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는데, 엉뚱한 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진도는커녕 장르가 GL로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다. 이런 케이이치도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가 끊이지 않는 게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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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꿈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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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작가의 책을 그동안 열심히 따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리뷰 쓴 책만 세어보니 단 세 권(<맨해튼의 반딧불이>, <디어 랄프 로렌>, <사라진 숲의 아이들>)뿐이라서 놀랐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작은 동네>는 책장에 꽂혀 있을 뿐 아직 안 읽었고,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은 읽은 것 같은데 안 읽었나...? 


아무튼 그동안 읽은 손보미 작가의 작품들을 쭉 떠올려 보니,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맨해튼의 반딧불이>, <디어 랄프 로렌>, <사라진 숲의 아이들>만 봐도, 세 작품 모두 장르나 소재는 제각각인데, <맨해튼>과 <랄프 로렌>은 영미 소설 같다는 점이 닮았고, <랄프 로렌>과 <사라진 숲>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 이야기라는 점이 닮았다(셋 다 탐정 소설, 추리 소설 형식의 요소를 가진 점도 눈에 띈다). 


위에 언급한 세 작품에 비하면, 올해 출간된 손보미 작가의 소설집 <사랑의 꿈>은 장르소설의 느낌이 덜하고 (이른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들이 주로 실려 있다. 중심 인물은 모두 십대 이하의 여자 아이이고, 그 자신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가족(주로 부모)의 불안 또는 부재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물 설정만 보고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모순과 부정을 고발하거나, 아이 자신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이 소설집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어른들의 기대나 지시와 어긋나는 행동을 주로 하고, 그러한 행동의 결과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배신을 합리화하고(<밤이 지나면>), 거짓말을 재능으로 여기며(<불장난>), 어린 여자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기도 한다(<해변의 피크닉>). 자신을 부양하는 엄마보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보모 언니를 동경하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이사>). 


아마도 이 여자아이들은 자라서 엄청난 악녀가 되지는 않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가 될 텐데, 이들이 숨기고 있는 잔혹성은 자신의 차로 친 고양이를 산 채로 땅에 묻을 때처럼(<사랑의 꿈>) 이따금 삐져나와 그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니면 자기보다 잘 사는 친구를 질투하거나 자식 교육 경쟁을 하는 식으로(<첫사랑>) 발현될 수도 있고. 그런 점에서 이 소설집은 여성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기원을 탐구하는 이야기들로도 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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