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코피의 원죄 - 상
Taizan5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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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완결인데 일본 현지에서만 120만 부 넘게 팔린 인기 만화다. 학교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더 글로리>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읽다 보니 <더 글로리>와는 다르게 복수의 과정이나 방식보다는 애초에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문제(원죄)에 집중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해피별 성인 타코피가 학교 폭력 피해자 시즈카 앞에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우주에 행복을 퍼트리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타코피는 지구에 도착한 후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할 때 시즈카가 준 음식을 먹고 힘을 낸다. 보은의 의미로 타코피는 시즈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폭력은 물론이고 증오와 복수 등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타코피가 시즈카를 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문제가 일어난다. 


만화 초반의 빌런은 시즈카를 괴롭히는 마리나인데, 마리나가 시즈카를 괴롭히는 이유가 밝혀지고 마리나가 가정에서 당하고 있는 폭력을 보고 난 다음부터는 마리나와 시즈카의 부모야말로 진짜 빌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즈카를 돕는 유일한 동급생 아즈마 역시 겉으로는 형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으로 그를 괴롭히는 존재는 그의 어머니이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는 아버지 역시 숨은 빌런이라고 볼 수 있겠고. (그러고 보면 <더 글로리>의 최고 빌런도 어머니 아닌가...) 


타코피는 시즈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고, 시즈카를 도울 방법이나 수단도 거의 없지만, 한결같이 시즈카를 돕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그리고 결국 시즈카를 구해냈다는 점이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시즈카처럼 가정이나 학교에서 폭력을 당하고 있는 아이들을 당장 구할 능력이나 방법이 없어도 그들에게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구조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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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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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90년대에는 과학 상상 그림 그리기 대회, 과학 상상 글짓기 대회 같은 게 있었다. 이름 그대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상상해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대회였다. 그 때 많은 아이들이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통화하는 전화기나 공중에 작은 비행접시가 떠다니면서 물건을 배달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 때 그 아이들은 스마트폰으로 화상 통화를 하고 드론으로 물건을 배달 받는 미래가 오리라는 걸 '정말로 알고' 있었을까. 


배명훈 작가의 신작 소설집 <미래과거시제>의 표제작 <미래과거시제>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시간을 사는 인물이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을 사는 인물과 만난 상황을 가정한다.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을 사는 은신은 미래에 일어난 일을 확정적으로 말할 때 특이한 시제를 사용하는데, 선형적인 시간을 사는 은경이 이 시제의 원리를 연구하고 비밀을 간파하면서 생기는 만남과 변화가 감동적이고 흥미롭다.


<미래과거시제>에는 이 밖에도 혹시 작가가 '정말로 알고' 쓴 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들이 많다. 생산에 도움이 되는 로봇들만 개발되면서 발생하는 피해를 상쇄하기 위해 소비 로봇을 만드는 미래를 그린 <수요곡선의 수호자>, 우주선이 하필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잠실 롯데타워 꼭대기에 정박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인류의 대변자>, 창작할 때 실시간으로 독자의 응원과 지지를 받고 싶은 창작자들을 위해 개발된 리액션 애플리케이션에 관한 이야기인 <홈, 어웨이>, 신체의 반 이상을 기계로 대체하고 원래의 기억도 잃은 경우 그것은 사람인가 기계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절반의 존재> 등이 그렇다. 


특히 <수요곡선의 수호자>는 알파고, ChatGPT 등 인간의 지적 수준을 능가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앞으로 더 많이 등장하고 상용화될 경우 어떤 미래가 가능할지 상상해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로봇 도입으로 발생하는 일자리 감소, 실업 증가 등을 상쇄하기 위해 로봇세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떠올랐고, 많은 사람들이 기계가 청소하고 인간은 지적인 활동을 미래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기계가 지적인 활동을 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청소를 한다는 SNS에서 본 우스갯소리가 생각나기도 했다. 


형식상 기발한 시도를 한 작품들도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운문인 판소리의 운율과 장단을 활용한 판소리 SF <임시 조종사>, 비말에 의해 전파되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발음할 때 침이 튀기는 우리말 자음 'ㅊ,ㅋ,ㅌ,ㅍ'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차카타파의 열망으로>가 그렇다(실제로 이 소설에는 'ㅊ,ㅋ,ㅌ,ㅍ'가 사용되지 않았다). 옛날 말, 특히 근대소설 이전의 말에 관심이 많은 작가님이 앞으로 또 어떤 작품들을 보여주실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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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형사 형사 벡스트룀 시리즈
레이프 페르손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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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스 마르틴 요한손은 스웨덴 국가범죄수사국의 국장이었고 전설적인 형사였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다. 요한손은 입원해 있을 때 주치의로부터 25년 전에 일어난 여아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동해 개인적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거동이 불편한 요한손을 대신해 그의 요양보호사와 기사는 물론이고 전직 동료와 부하들까지 나서고, 덕분에 오래전 미제로 남은 사건의 범인을 찾는 데 성공하지만, 문제는 그가 '죽어가는' '전직' 형사라는 것. 과연 현직도 아니고 몸도 성치 않은 형사의 수사 결과를 스웨덴 당국은 받아들일까. 


주인공 형사가 평범한 형사가 아니라 병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말 그대로 '죽어가는') 형사인 점이 신선했다. 뇌졸중 후유증 때문에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앉은 자리에서 범인을 찾은 것과 다름 없는 추리를 선보이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 소설이 재미있어서 벡스트룀 시리즈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려고 알아봤는데, 이 소설은 본편이 아니라 스핀오프작이고, 벡스트룀 형사가 주인공인 본편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평이 많아서 읽을지 말지 고민이다. 불의를 못 참는 전형적인 형사 캐릭터에 부합하는 요한손과 달리, 벡스트룀은 불의를 잘 참고 어떻게 보면 불의 그 자체라고. 


그러고 보니 문제의 여아 살인 사건을 허술하게 수사해 범인을 놓친 인물이 벡스트룀이라고 언급되는 대목이 있었다. 대체 작가는 (요한손처럼 신뢰할 수 있는 형사 캐릭터가 주인공인 정통 경찰 소설을 쓸 수 있으면서) 왜 벡스트룀 같은 인물을 전체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정했을까. (안티히어로가 주인공인) 벡스트룀 시리즈 본편에서 요한손은 과연 어떻게 묘사될까. 궁금해서 얼른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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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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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을까. 백온유의 소설 <유원>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그린다. 고등학생인 유원은 아기 때 언니와 집에서 자고 있는데 윗집 할아버지가 베란다 밖으로 버린 담배꽁초가 집으로 들어와 불이 붙으며 순식간에 집 전체가 타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유원의 언니 예정은 유원을 젖은 이불로 감싸서 11층 아파트 아래로 던지고 숨졌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남자가 이불에 싸인 채 떨어지는 유원을 받았고 그 충격으로 다리뼈가 으스러졌다. 


은정동 화재사건으로 명명된 이 일로 인해 유원을 구해준 아저씨는 '의인'이 되었고, 유원은 화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이불 아기'로 불리게 되었다. 유원을 구한 언니 예정도 동생을 구하고 죽은 천사 같은 아이로 기억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유원은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언니 몫까지 잘 살아야 한다", "어렵게 살아 남았으니 바르게 자라야 한다"라는 말을 듣는 상황이 부담스럽고 힘들다.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가 그 대가로 자신의 부모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은인들을 증오하는 상황이 죄스럽고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점점 더 굳게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런 유원에게 어느 날 수현이라는 아이가 나타난다. 학교 옥상을 좋아하는 유원은 마스터 키를 가지고 다니면서 학교 옥상, 아파트 옥상 가리지 않고 드나드는 수현이 마음에 들어서 수현을 따라 다니면서 수현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우연히 수현의 '비밀'을 알게 되고, 유원이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미워하면서 증오와 죄책감, 자기혐오가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처럼 수현 또한 자신을 낳았지만 제대로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원은 수현이 중대한 사실을 자신에게 숨겼다는 것에 분노하기 보다는, 수현이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친근감을 느끼고, 어쩌면 수현이 자신보다 더 오래, 더 깊이 고통받았을지 모른다며 안타까워한다. 나의 상처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남의 상처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성장이라면, 유원은 수현과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정신적인 성장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이런 만남, 이런 성장이 있었나, 있었다면 언제였고 무엇이었나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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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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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뭘까. 비비언 고닉의 산문집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읽으면서, 나는 어쩌면 사는 일이란 사람을 만나는 일, 결국에는 상처받고 멀어질 걸 알면서도 가까이 다가가 기꺼이 마음을 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저자는 각각의 글에서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사는 일, 기자로 일할 때 우연히 페미니즘을 접하고 페미니스트 공동체와 깊이 교류했던 일, 대학 시절 방학마다 지방의 호텔에서 합숙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 흠모하는 여성 작가와 친해져서 한동안 그와 함께 생활했던 일 등에 관해 서술한다. 각각의 글은 다른 시기, 다른 경험을 다루지만, 경이로운 만남과 잇따른 권태, 허무한 파국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읽힌다.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면서, 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느 관계에나 시작이 있고 끝이 있기에, 사람은 언제든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평생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면 외로움을 없애줄 누군가를 갈구하느라 몸과 마음이 고생하고, 알면 외로움을 없애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아 고립되기 쉽다. 남을 탐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가까이 두는 상태를 찾으면 좋겠지만 쉬울 리 없다. 


마지막 글에서 저자는 편지의 가치를 옹호하는데, 나는 편지를 포함한 글쓰기가 '남을 탐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가까이 두는 상태'에 다다르는 데 있어 좋은 도구이자 수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 역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많은 일을 해보고 많은 공부를 해봤지만, 결국 글쓰기가 - 정확히는 매일 꾸준히 글 쓰는 노력이 - 자기 자신을 덜 외롭게 만들고 세상과 더욱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고 설명한다. 오래 꾸준히 글 써온 사람으로서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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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자나 2023-03-2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계의 생로병사...멋있고 적확한 말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