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하다는 착각 - 왜 여성의 말에는 권위가 실리지 않는가?
메리 앤 시그하트 지음, 김진주 옮김 / 앵글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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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생이던 시절에는 반장은 남자가, 부반장은 여자가 맡는 일이 흔했다. 간혹 여자가 반장으로 뽑히면 나댄다, 드세다는 말과 함께 그 반 남자들은 뭐하냐는 조롱 섞인 핀잔이 나돌았다. 그 시절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은 학급이나 학교에서 여자 반장, 여자 회장이 뽑히는 게 별난 일이 아니지만, 정부나 기업을 비롯해 사회 전반을 보면 권위 있는 자리에 여성을 앉히는 경우가 여전히 드물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권위는 남성과 어울리는 단어이지 여성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메리 앤 시그하트의 책 <평등하다는 착각>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권위 격차'에 대해 다룬다. 예전에 비하면 훨씬 많은 수의 여성이 정부나 기업의 최고위직에 오르고, 미투 운동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남성이 여성보다 지적이고, 전문적이고, 권위를 인정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여긴다. 일례로 여성은 남성 작가가 쓴 책도 읽지만 남성은 여성 작가가 쓴 책을 웬만해선 읽지 않는다(만화, 영화, 드라마도 마찬가지). 여성은 아무리 뛰어난 성취를 해내도 누군가(남자)의 아내, 연인, 어머니, 딸로 호명된다. 


남녀 간 권위 격차가 가장 분명하고 빈번하게 드러나는 영역은 바로 '대화'이다. 지역과 세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말이 남성의 말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남성이 말할 때보다 여성이 말할 때 더 많이 끼어들고, 전문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처럼 말하라는 조언을 듣지만, 남성은 여성처럼 말하라는 조언을 듣지 않는다. 모든 남성이 아나운서처럼 듣기 좋은 음성으로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말을 훨씬 잘하는데도 '남성처럼 말하기'가 권장되는 것은, 아직도 남성이 기준이고 곧 권위이기 때문이다. 


딸 가진 부모들은 딸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점을 잘 받으면 취업을 잘 할 수 있다고 격려하지만, 실제로는 학업 성취도가 최상위권인 여성 집단이 학업 성취도가 중간 수준인 여성 집단보다 취업 시장에서 성공하기 힘들다. 연구에 따르면 남성은 능력과 열의를 기준으로 선발되는 반면 여성은 호감도를 기준으로 선발되며, 인사권자(주로 남성)들은 대체로 자신보다 높은 지능을 가졌고 스펙도 좋은 여성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는다(200-1쪽). 유능하면서 남자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외모와 성격을 지녔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이익을 당할 소지가 있다.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남성은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치고 여성은 강물을 거슬러 헤엄친다. 남성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강둑 풍경을 보면서 스스로 굉장히 헤엄을 잘 친다며 기뻐한다. 그리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분투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쟤들은 왜 나만큼 빠르게 헤엄치지 못할까? 그건 분명 수영 실력이 나보다 부족하기 때문일 거야.'라고 생각한다." (27쪽) 


현실이 이러한데도, 최근에는 10대 남성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극단적인 반페미니즘 정서가 유행하고 있다. 로라 베이츠의 연구에 따르면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남성이 겪는 모든 문제를 페미니스트 탓으로 돌리는 식의 악질적인 여성 혐오 메시지가 끝없이 바이럴 되며 10대 남자아이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이는 미국이나 영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퇴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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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간 -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
김진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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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여행의 시간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되찾은 여행의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누리고 싶어서, 도시건축가 김진애의 여행 산문집 <여행의 시간>을 읽었다. 직업상 전 세계 여러 도시들을 직접 찾아가 걸어보고 앉아보고 눈으로 보고 들어보고 만져보고 맛도 본 사람은 그동안 어떤 여행을 해왔고, 각각의 여행을 통해 무엇을 느끼거나 배웠고, 그 중에 어떤 여행이 최고의 여행이라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저자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건 미국 유학 중이던 20대 말이다. 동기 전원이 남학생인 대학 생활도 잘해냈고(저자는 서울 공대 800명 동기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이 때 이미 결혼도 하고 유학도 하고 출산도 해낸 상태였지만, 혼자서 여행을 해본 경험은 없었기에 걱정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행선지인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를 만났고,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희롱(캣콜)과 은근한 차별, 때로는 대놓고 하는 차별을 당했다. 


매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낯선 곳에서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겪는 경험은 분명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게 했지만, 겪어보기 전에는 무섭고 불안한 일도 막상 겪어보면 별 것 아니고, 겪게 된다 한들 혼자서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불편한 상황에 대한 면역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그래서 저자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홀로여행을 추천한다.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일상의 오고 감을 짧은 여행으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 


저자는 홀로여행을 최고로 꼽지만, 커플여행, 아이들과의 여행, 효도여행, 강아지와의 여행 등 홀로가 아닌 여행도 추천한다. 특히 가족여행은 자신의 뿌리와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자신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자연여행과 구별되는) 도시여행 팁도 나온다. 사전에 공부하고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서 하는 여행도 좋지만, 아무 지식 없이 발길 닿는 대로 하는 여행은 (생존 본능에 의해) 오감이 총동원되어 훨씬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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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요정 -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요정님이 전하는 하찮은 삶의 지혜
정세원(OOO)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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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출간된 OOO(정세원) 작가의 첫 책 <어떤 만화>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손바닥만 한 책 크기, 픽셀이 그대로 보이는 작화, 키치한 분위기의 채색, 아스트랄한 내용... 어느 것 하나 그동안 보아온 만화와는 달라서 이렇게도 만화를 그릴 수 있구나 싶고, 전례 없는 만화를 창조해낸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OOO(정세원) 작가의 신작 <인생의 요정>을 읽었는데, 첫 책이 나온 지 몇 년이 흘렀는데도 작가 특유의 기발함과 신선함은 여전하다. 이 책은 독립출판되었던 <인생의 요정>과 미공개 요정 만화 시리즈, 요정 세계관의 스핀오프 격인 두 편의 컬러 만화 <멘트 빠칭코>, <지구 멸망의 날>로 구성되어 있다. 인생의 요정 외에 어둠의 요정, 낚시의 요정, 요리의 요정, 춤의 요정, 업무의 요정(그 외 돈의 요정, 죽음의 요정, 판매의 요정, 인내의 요정 등도 있음) 등이 있는데, 공통점은 딱히 하는 일은 없고 대개의 경우 방해만 된다는 것 ㅋㅋㅋ 


인생의 요정만 해도 본래의 역할은 바쁜(?) 신을 대신해 인간의 삶을 지켜보는 것인데, 지켜보기만 할 뿐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주거나 적극적으로 조언을 해주지는 않는다(굿즈로 제작된 요정왕 카드에 적혀 있는 요정족에 대한 설명 "당신 인생이 망가질 때까지 지켜보기만 한다." ㅋㅋㅋ). 그러나 인간으로서 알다시피, 인간이 누가 조언을 해준다고 듣는 존재인가. 어쩌면 조언은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요정 같은 존재가, 조언해 준답시고 원치 않은 간섭과 참견을 해대는 사람들(a.k.a. 꼰대?)보다 더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OOO(정세원) 작가 특유의 블랙 유머를 즐기고 싶다면 단편 <멘트 빠칭코>를 추천한다. 돈을 안 낸 사람에게는 좋은 소리를 해주지 않는 빠칭코라니. 소비자일 때만 인간으로 대접받는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설정 아닌가.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각종 전문가(달인)들을 불러 모으지만 결국 실패하는 <지구 멸망의 날>이라는 단편도 어쩐지 현실 같아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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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하는 마음 - 김혜리 영화 산문집
김혜리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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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라디오를 즐겨 듣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가 김혜리 기자가 출연하는 영화 코너를 듣게 되었고, 그 때부터 김혜리 기자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김혜리 기자가 나오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방송국 개편 때문에 없어지는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번거롭고 아쉬웠는데, 2016년(벌써 7년!) 김혜리 기자가 최다은 PD, 임수정 배우와 함께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 클럽>을 시작한 이후로는 아주 편하다. 편해진 만큼 영화를 많이 보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이놈의 게으름) 


<묘사하는 마음>은 김혜리 기자가 5년 만에 출간한 영화 산문집이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씨네21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칼럼과 따로 집필한 에세이들을 엮었다. 5년 치의 글을 모아서 엮은 만큼 분량이 많고 두께가 상당하다. 사전처럼 상비해두고 있다가 어느 날 이 책에 소개된 영화를 보았을 때 꺼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평단의 사랑을 받은 영화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영화,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와 OTT에서 공개된 영화 등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한국 영화보다 외국 영화에 관한 글이 훨씬 많다. 


영화 한 편 한 편에 대한 에세이들도 좋았지만, 한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중심으로 해당 배우의 연기 세계를 높은 밀도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배우론 부분이 특히 좋았다. 이자벨 위페르,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크루즈, 폴 러드, 틸다 스윈튼 모두 유명한 배우들이지만, 필모그래피 전체를 알 기회는 없었고 연기의 특징이나 배우로서의 매력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본 경험은 더더욱 없었기에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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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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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는 박연준 시인의 첫 소설이다. 시인이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은지 소설가가 시를 쓰는 경우가 많은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쓴 시인이 박연준 시인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소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모월모일>, <쓰는 기분> 등 그동안 박연준 시인이 발표한 산문집을 읽으며 그의 문장에 반했고, 그의 문장이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와 만날 때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혹은 일으키지 않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설에서도 '박연준다움', '박연준스러움'은 여전했다. 


소설의 배경은 1986년 서울의 변두리다. 일곱 살 여자 아이 여름은 엄마가 없다. 아빠는 있지만 밖으로만 나돌고, 여름을 맡은 고모는 피아노 학원 운영하랴 자기 딸 키우랴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의 인생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는 아빠가 데려온 새엄마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만난 첫 친구 루비다. 새엄마가 불편한 여름은 방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루비와 함께 보내고, 루비는 그런 여름을 조건 없이 받아준다. 여름은 그런 루비의 소중함을 모르고 점점 루비를 소홀히 대하고, 루비는 그런 여름에게 결국 이별을 고한다. 


일곱 살 여름이 자신을 사랑하지만 책임지지 않는 부모와 자신을 책임지고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고모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열두 살 여름은 자신의 무관심과 불합리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는 루비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어떤 관계에서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상처 주는 것이 과연 이득일까. 남에게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상처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과연 성장일까. 무엇이 관계이고 성장인지도 모른 채 서투르게 관계 맺고 어설프게 성장이라는 의식을 치러야 했던 날들을 아프게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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