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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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에 혹해 구입한 책이다. 같은 상을 수상한 작품 중에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었고, 이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다는데, <아노말리>가 마침내 그 기록을 깼다고 한다.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그럴 만하다. 상당히 흡인력이 강하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 


이야기는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짤막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청부 살인업자, 무명 작가, 영화 편집자, 암 환자, 군인의 아내, 나이지리아 출신 가수 등 다양한 지역에 사는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 제시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한 날 한 시에 같은 비행기를 탔다는 것, 그리고 그 비행기 안에서 심한 난기류를 겪었다는 것, 그리고 세 달 뒤 FBI가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갔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옴니버스 형식인가 싶었던 이 소설은 이 때부터 SF 소설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저명한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머리를 모아도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시공간에 오류가 생겼고, 그로 인해 3개월 전 파리를 떠나 뉴욕에 도착한 비행기와 완벽하게 동일한 비행기가 3개월 후 그 때 태운 승객들과 완벽하게 똑같은 승객들을 태우고 또 다시 뉴욕에 도착한 것이다. 


일종의 복제인간이 생겨난 셈인데, 이 복제인간이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에 달하고, 3개월 동안의 시차가 있다 보니 문제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3개월 사이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나타나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남자는 3개월 안에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그렇지 않은 아내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자신의 복제인간을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쌍둥이처럼 여기며 반기는 사람도 있다. 


책에 <블랙 미러>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블랙 미러>뿐만 아니라 <이어즈&이어즈>, <돈 룩 업>도 생각나고 개인적으로는 <로스트>도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에도 복제인간 문제가 나오는데, 복제인간(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정체성, 실존 등)이 요즘 서구에서 핫한 이슈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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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와 생맥주 - 최민석의 여행지 창간호
최민석 지음 / 북스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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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좋아한다. <베를린 일기>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40일 간의 남미 일주>도 좋았다. 이 책도 여행 에세이이기는 한데, <베를린 일기>와 <40일 간의 남미 일주>처럼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을 집중적으로 여행하고 쓴 책은 아니고, 여행 잡지에 연재하기 위해 쓴 짤막한 길이의 칼럼을 엮었다. 좋은 점은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정도는 아닌 분량의 여행 경험이나 생각을 알 수 있었다는 점. 책으로 엮고도 남은 베를린 체류 시절의 일화나 남미 여행 당시의 에피소드가 나올 때도 있는데 이 또한 너무 재미있어서 <베를린 일기>와 <40일 간의 남미 일주>를 다시 읽고 싶네... 


외국어 공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는 취미로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는데, 이게 어떤 사람의 눈에는 신기해 보였는지 외국어 공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단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소설 쓰기로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리고 소설 읽기를 더 잘하기 위해 외국어 공부를 한다. 소설 쓰기는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해서 바로 느는 것이 아닌 반면, 외국어 공부는 시간을 많이 들일수록 확실히 는다. 그러니 소설을 쓰다가 실력이 늘지 않아 자괴감이 들 때 외국어 공부를 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내가 항상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심지어 때로는 후퇴하는 것처럼 보여도) 외국어 공부만큼은 꾸준히 하고 있고 늘고 있다는 자기 확인 또는 자기 위안이 가능하므로. 


외국어 공부를 하면 소설을 더욱 잘 읽게 된다는 것은 나 또한 깊이 공감하는 사실이다. 요즘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는데, 아직 초급 수준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프랑스어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 프랑스 소설을 읽는 일이 훨씬 쉽고 즐겁다. 저자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 <백 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가문의 이름이 '부엔디아(buendia)'인데, 이는 스페인어로 '좋은 날'을 뜻한다. 몰라도 소설 읽기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알면 소설의 내용과 교훈이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온다고. 프랑스어 다음엔 스페인어를 배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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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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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 역사와 젠더, 미스터리와 스릴러. 내용으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다 있다. <마고>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시작된 한반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연가성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종로경찰서의 검안의로 일한다. 어느 날 연가성은 미군에 의해 살해된 윤박 교수의 시체를 검안하게 되는데, 범인이 미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미군정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거라고 판단한 미군정 측 조사관은 윤박 교수와 관련이 있는 여자 셋 중 한 명을 범인으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사실 연가성은 종로경찰서 검안의인 동시에 '세 개의 달'이라는 가명을 쓰는 탐정이기도 하다.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연가성은 어릴 때부터 소꿉 친구이며 현재는 같이 사는 친구이고 신문사 문화부 기자인 권운서와 함께 세 여자에 대해 조사하기로 한다. 그런데 세 여자와 윤박 교수의 관계를 알면 알수록, 이들이 윤박 교수를 죽일 만한 이유, 즉 범행 동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뿐이다. 또한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알아도 적대시하는 관계로 보였던 세 여자는, 사실 서로를 구하고 살리는 관계라는 것도 알게 된다. 


'서로를 구하고 살리는 관계'는 연가성과 권운서에게도 해당된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고 싶었던 연가성과,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고 싶었던 권운서는 각각 다른 상대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한 후 이혼하고 둘이 함께 산다. 친구이지만 - 누구보다 상대를 아끼고 위해준다는 점에서 - 연인 같기도 한 연가성과 권운서를 보면서, 성별에 대한 사회적 제약은 물론 신체와 정신의 한계마저 극복한 사랑의 형태를 본 듯한 기분이 든 것은 내 착각일까. 연가성과 권운서의 관계성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흥미로워서, 둘의 또 다른 이야기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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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괴 2 - 산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다나카 야스히로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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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야스히로는 일본 전국을 다니면서 산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기자이자 작가다. <산괴> 시리즈는 그런 그가 산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은 다양한 실화들을 르포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일단 실화라는 점이 눈길을 사로잡고,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실은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다거나, 능력이 없어도 귀신 비슷한 존재를 본 적 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롭다. 


최근에 출간된 <산괴> 2권에는 1권과 마찬가지로 산사람들이 실제로 체험한 다양한 기담 혹은 괴담들이 실려 있다. 일본에서는 요괴나 신령 등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모노'라고 부른다. 산은 공간 자체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반적인 도시나 마을과는 동떨어진 공간이기도 하고, 동물이나 곤충 등 다양한 생명체가 살기 때문에, 출현하는 모노의 종류나 모노가 출현하는 방식 등이 다양하고 또 특이한 편이다. 


가령 아오모리시에 사는 한 남성은 어릴 때 집 바로 뒤에 있는 산에서 도깨비불을 본 적이 있다. 도깨비불이 나타난 장소는 공교롭게도 죽은 사무라이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그 도깨비불은 무덤 속 사무라이의 원혼이었을까? 미스터리 핫스폿으로 유명한 핫코다 산의 한 여관에는 메이지 시대의 육군 보병 모습을 한 귀신들이 나타난다는 괴담이 전해진다. 이 귀신들은 여관 내부를 배회할 뿐 사람들을 해치진 않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무섭지 않은, 우스운 이야기도 몇 편 있다. 산사람들 사이에는 산의 신은 여성이고, 젊은 사내의 남근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사냥꾼이 산의 신에게 잘 보이려고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다 벗고 그것을 흔들었더니 순식간에 동물들이 주변에 몰려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태로는 도저히 총을 쏠 수 없었다는 것(ㅋㅋㅋ). 이런 걸 제 꾀에 제가 빠졌다고 하던가. 과연 사냥꾼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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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모들 창비만화도서관 7
근하 지음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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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모들이라... 나에게도 이모가 둘 있는데, 엄마와 이모들이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 나 또한 이모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 아니다. 어릴 때는 이모들이 크리스마스나 명절 때 나한테 옷도 사주고 가방도 사주고 잘해줬던 것 같은데, 이모들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나서는 자연히 조카인 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이제는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다(이건 삼촌들도 마찬가지). 그래서 내 지론은, 조카 사랑은 이모 삼촌이 결혼하기 전에나 가능한 것이고 결혼한 후에는 조카고 뭐고 자기 자식뿐이다... 


그래서 이 만화를 보면서 진희 이모가 사고로 엄마를 잃고 아빠까지 아픈 효신을 자신이 맡겠다고 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진희 이모가 비혼이고 레즈비언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진희 이모가 비혼이 아니었다면, 이성애자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바로 결혼할 수 있었다면, 만화 속에서처럼 효신을 맡겠다고 할 수 있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진희 이모가 법적으로 비혼이고, 실제로는 동거인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여자이니까 같이 살 수 있었지, 만약 진희 이모한테 남편이 있거나 남성 동거인이 있었다면 절대 효신이 못 데려왔다. 자식이 있는데 남자면 그것도 어렵고. 


이 만화에서 가장 문제는 효신의 아빠다. 아무리 아내를 잃고 힘든 상태라고 해도 엄마를 잃은 어린 딸보다 힘들까. 힘들어도 아빠로서 어른으로서 애 앞에선 힘든 내색 안 하고 살아야지. 이런 놈도 이성애자 남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가장 대접 받고 산다는 게 참... 그에 비하면 애도 안 낳고 결혼도 안 하고, 한국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문제 많은' 여자들인 이모들은 얼마나 어른스럽고 성숙한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야만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만화를 보여주고 싶다. 그런 당신들은 얼마나 성숙한 어른인지 묻고도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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