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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평점 :

줄리언 반스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데, 솔직히 이 소설은 절반만 이해했다. 변명 비슷한 걸 써보자면, 일단 이 소설은 화자인 닐이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여성 교수와 맺은 길고도 깊은 인연에 대해 다룬다. 이혼과 직업적 실패를 겪고 정신적 공허감을 느끼던 닐은 성인 대상 강좌를 듣기 시작한다. 강좌를 진행하는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는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실력은 상당한 인물로, 첫 강의 때부터 닐은 핀치 교수의 열렬한 신봉자가 된다. 닐이 하도 핀치 교수를 좋아해서 당시에 사귀었던 네덜란드인 여자친구 안나가 화를 낼 정도였지만, 그래도 닐은 계속해서 핀치 교수를 따랐다.
닐은 강좌가 끝난 후에도 핀치 교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고, 결국 닐과 핀치 교수는 핀치 교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기적으로 만남을 이어 갔다. 핀치 교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하던 닐에게 어느 날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진다. 핀치 교수가 생전에 유언장을 쓰면서 평생 보관한 책과 직접 쓴 서류, 노트 전부를 닐 앞으로 남긴 것이다. 핀치 교수의 남자 형제로부터 책과 서류, 노트 일체를 전해 받은 닐은 그 때부터 열심히 그것들을 읽어 나간다. 그렇게 읽다 보면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지만 여전히 미스테리어스한 핀치 교수의 실체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서.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닐의 이야기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고 잘 읽힌다. 문제는 율리아누스 부분이다. 소설 속에서 핀치 교수는 접두사 '모노(mono)'가 들어간 단어 중에 좋은 게 없다며 그 예로 일신교, 일부일처제, 단조로움, 단종 재배, 단일 문화, 독점 등을 든다. 일신교 중에서도 기독교는 수많은 전쟁과 내란, 박해, 순교의 원인이 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종교로서 죄가 많다. 핀치 교수는 만약 '배교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율리아누스의 치세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며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인데, 문제는 내가 로마 기독교 역사를 잘 모른다는 거...
그래도 영국 내 기독교 신자 수가 엄청나게 줄었다고 해도 기독교 문화권 내에 있는 나라인 건 맞는데, 기독교의 핵심인 일신교 사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의 소설을 줄리언 반스 급의 작가가 쓰다니. 작가나 독자들이나 대단하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 계속 읽기는 읽었는데, 읽다 보니 이 소설의 핵심은 핀치 교수의 주장이 어떻다는 게 아니라 어떤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의 위험성 또는 허무함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닐이 네덜란드에서 재회한 (옛 여친) 안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고. 어렵지만 계속 생각날, 언젠가 다시 읽고 싶어질 것 같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