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미드 - EVERYBODY LIES 아무튼 시리즈 68
손보미 지음 / 제철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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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미드>는 미드(미국 드라마) 마니아로 유명한 소설가 손보미가 특별히 아끼는 미드를 소개하는 책이다. 그동안 미드를 나름 열심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소개된 드라마 중에 제대로 본 건 <로스트>뿐이다. (<로스트>도 본 지 너무 오래되어 줄거리와 결말이 가물가물하다. 결국 넷플릭스에서 다시 보기 시작함.) <오자크>와 <트윈 픽스> 빼고는 전부 들어본 적 있는데 왜 안 봤을까. 신기하게도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만 하고 넘어가거나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작품 중에는 내가 본 것이(그것도 엄청 재미있게 본 것이) 꽤 많다. <프렌즈>라든가 라든가 라든가... 


미드를 열심히 본 것이 저자의 소설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려주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학창 시절 내내 수학과 과학 공부를 등한시 했는데 <로스트>의 내용을 더욱 잘 이해하고 싶어서 양자 역학, 평행 우주, 불확정성 원리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공부해서 알게 된 것들을 <디어 랄프 로렌>, <그들에게 린디합을> 등에 반영했다니 신기했다. 저자의 소설에 미국의 인명이나 지명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작은 동네>, <사라진 숲의 아이들> 같은 범죄 스릴러물을 꾸준히 발표해온 것도 미드의 영향인가 싶다.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나서 보고 싶은 미드가 아주 많이 생겼다. 첫 방영일자가 가장 오래된 <사인필드>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저자 말대로 배경이며 연출이며 캐릭터 설정까지 <프렌즈>, <윌 앤 그레이스>,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후대의 시트콤, 드라마 등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 눈에 보인다. <사인필드>를 다 보고 나면 <사인필드>에 나오는 배우 중 하나인 줄리아 루이드라이퍼스가 주연을 맡은 <부통령이 필요해(VEEP)>를 보고 싶다. <프렌즈>를 다시 보거나 <윌 앤 그레이스>를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더 오피스>, <커뮤니티>도 재미있을 것 같고. <로스트>도 보고 있는데 언제 다 보나... 


내 버전의 <아무튼, 미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드를 가장 열심히 봤던 대학생 시절에 좋아했던 작품으로는 <퀴어 애즈 포크>, <그레이 아나토미>, ,  등이 떠오르고, <콜드 케이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등도 생각난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작품으로는 <9-1-1> 시리즈와 <시카고 파이어>를 비롯한 시카고 유니버스가 있다. 최근에는 미드보다 영국이나 북유럽 국가의 드라마를 더 즐겨 보는데, 미국인들 특유의 자본 친화적이고 이성애-유성애 중심적인 면을 불편하게 느껴서 그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했고 좋아한 미드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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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 하버드대 마틴 푸크너의 인류 문화 오디세이
마틴 푸크너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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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랜 취미 중 하나는 팟캐스트 청취이다. 팟캐스트를 언제부터 듣기 시작했는지 생각해 보다가 <이동진의 빨간책방>(이하 '빨책')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빨책을 제작한 출판사의 독자 서포터즈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빨책의 존재를 초창기부터 알았고 방송에서 소개되는 책들을 열심히 따라 읽으면서 책을 고르는 안목도 높아지고 독서 생활도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했다. 빨책이 종영된 후에는 다른 도서 팟캐스트를 찾아 들었는데, 최근에는 빨책의 진행자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 추천하는 책들을 꾸준히 구입해 읽고 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처럼 신뢰할 만한 독서가가 추천하는 책을 따라 읽는 것의 장점은 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분야, 장르, 작가의 책만 찾아 읽는 것을 피하면서 나보다 높은 식견과 넓은 취향을 가진 독서가의 안목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마틴 푸크너의 책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가 대표적이다. 하버드대 교수인 마틴 푸크너가 쓴 이 책은 인류의 역사를 문화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총 열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의 내용이 분량에 비해 깊고 방대해서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나는 마치 대학교의 역사 문화 교양 강의를 한 학기 동안 수강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역사를 소개해줄 뿐만 아니라 잘 안다고 생각한 역사의 뒷면을 알려주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플라톤은 원래 연극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거리에서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바로 제자로 들어갔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자신의 저작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며 직접 스승의 가르침을 담은 책을 집필하고, 학교를 설립해 가르침을 전파했다. 아틀란티스는 플라톤이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것인데, 지금은 아틀란티스가 실존한 적 없는 전설 속의 섬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어 있지만, 전설 속의 섬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남아서 여러 소설과 영화, 만화 등에 영감을 주었다.


최근에 읽은 영국 작가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에 관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조지 엘리엇의 본명은 메리 앤 에번스로, 그는 당대의 여성들과는 다르게 어릴 때부터 공부와 독서에 열중했고 특히 역사학에 관심이 많았다. 역사학 중에서도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자신의 견해를 보다 많은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고 더 쉽게 이해하는 소설의 형식을 빌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의 소설 <미들마치>는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고전 문학 작품으로 남았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어떤 예술 작품이나 문화가 생겨난 배경을 소개함으로써 그 어떤 예술 작품이나 문화도 다른 예술 작품 또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환경의 영향 없이 탄생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어떤 문화도 특정 개인이나 단체, 국가의 소유 또는 자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이런 식으로 독점적,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문화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발전 가능성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K-POP이 나오고 BTS 멤버 뷔의 퍼포먼스와 일본의 전통 예술인 노의 유사성에 관한 설명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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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그럼에도 친구가 되는 여자들
서한나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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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참고로 나는 여자다). 그중에는 친구가 된 여자도 있고, 친구였다가 더는 친구가 아니게 된 여자도 있고,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친구가 되지 못한 여자도 있고, 친구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한 여자도 있다. 나는 왜 어떤 여자와는 친구가 되고 어떤 여자와는 친구가 되지 못했을까. 나는 왜 어떤 여자와는 친구가 될 수 있고 어떤 여자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서한나의 산문집 <드라마>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그것이 자신에 관한 질문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말해준다. 궁금해 하는지 어색해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여기는지, 판단하는지 활용하는지, 변화를 지켜보는지, 기대 따윈 없는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믿어보기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는지...... 직면은 어려운 일이다." (185쪽)


이 구절을 읽고 생각해 보니 예전에 나는 주로 취향이 맞는 친구들을 만났던 것 같다. 이를테면 나처럼 독서가 취미이거나 같은 영화, 드라마, 연예인을 좋아하는 친구들. 대화의 주제도 늘 그때 그때 재밌게 본 콘텐츠에 관한 것이었지 각자의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사귀었던 친구들 대부분과 지금은 만나지 않는다. 서로의 취향이 바뀌면서, 취미가 달라지면서, 취업이나 결혼, 육아 등으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공통의 화제가 사라지고 더는 만나도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취향도 취향이지만 그 취향을 가진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만나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이가 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어지다 보니 그런 친구를 사귈 계기도 만나기 어렵다. 계기를 만난다 한들 내향인인 내가 먼저 다가갈 리 만무하고...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작가님과 작가님의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것도 부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나눠받을 에너지가 많은 것도 부럽고.


에너지라는 단어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의 나는 에너지가 정말 부족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안 해서 그런가 싶다. 여행 가고 싶어도 안 가고, 콘서트 가고 싶어도 안 가고, 가방 사고 싶어도 안 사고, 영화 보고 싶어도 안 보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들을 안 하니까 '하고 싶은' 에너지가 안 생기는 거다.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어차피 안 할 텐데 뭐하러 하고 싶어해, 그러니까 애초에 하고 싶어하지 말자, 이런 사고랄까.


이렇게 나 자신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못 되니까 친구한테도 우호적인 존재가 못 되어주고, 그래서 친구들이 다 내 곁을 떠나갔나 싶다. 나처럼 많은 여자들이 자기 자신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못 되니까 다른 여자들에게도 우호적인 존재가 못 되고, 그래서 친구가 없거나 친구가 있어도 '진정한 친구'는 없고, 여성들만의 연대나 협력 같은 걸 기대할 수 없으니 존재할 수도 없어서 급기야 '여자의 적은 여자' 같은 말이 나도는가 싶다. 근데 또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같은 책이 나오는 걸 보면 남자도 친구가 없는 것 같고... 


아, 대체 이 현대 사회에서 친구 많은 자는 누구인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친구가 많아 보이는 사람 몇 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막상 그 사람들한테 친구 많으냐고, 어떻게 해야 그렇게 친구가 많으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손사래칠 것 같다. 친구가 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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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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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한국어판은 2010년)에 출간된 책의 개정판인데 지금 읽어도 매우 재미있다. 책에 실린 단편은 모두 다섯 편으로 각기 다른 이야기로 읽히지만 다 읽고 나면 '바벨의 모임'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바벨의 모임은 상류계급의 영애들만 가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독서 모임으로, 각각의 단편에는 바벨의 모임 소속이거나 모임의 존재를 아는 인물이 한 명 이상 나온다. 독서모임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에드거 앨런 포, 체스터턴, 요코미조 세이시 등 다양한 (미스터리) 문학 작품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비블리오 미스터리 소설로 보아도 좋겠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이 고르게 좋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표제작 <덧없는 양들의 축연>이다. 얼마 전까지 바벨의 모임 회원이었던 오데라 마리에의 아버지는 유산을 물려 받아 부자가 된 케이스로, 돈은 많지만 부자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는 부자들만이 고용할 수 있는 세상에 몇 없는 특별한 요리사인 '추냥(廚娘)'을 중개업자의 소개로 고용하는데, 이 추냥의 행실이 여간 특이한 것이 아니다. 최고의 요리사답게 요리 실력은 우수하지만, 한 끼 식사를 차리는 데에만 엄청난 양의 식재료를 소비하고 (당연히) 엄청난 액수를 청구한다. 대체 그의 비밀은 무엇일까.


<다마노 이스즈의 명예>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연상케 하는 백합(GL) 느낌이 가미된 고딕 미스터리 소설로, 이 작품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다. 고다이지라는 지방 도시에서 이름난 가문의 외동딸인 스미카는 엄한 외할머니와 유순한 어머니의 비호 아래 부족함 없이 자랐다. 스미카가 열다섯 살이 되던 생일에 외할머니는 스미카와 동갑인 여자아이 다마노 이스즈를 선물로 주었고, 스미카와 이스즈는 외할머니 앞에선 아가씨와 시녀를 연기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에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한 스미카는 그토록 동경한 바벨의 모임에 가입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생사의 기로에 선다.


앞에 서술했듯이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은 바벨의 모임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또는 타자)의 '목숨'을 희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산장비문>의 화자인 야시마 모리코다. 야시마는 깊은 산속에 있는 무역상 가문의 별장을 관리하는 별장지기 일을 맡는데, 일 년이 지나도 별장을 찾아오는 손님이 없자 어떤 일을 벌인다. 이런 식으로 남이야 죽든 말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악(惡)의 시작점이자 핵심인 것 같고, 이를 잘 보여주는 단편들을 읽으니 기분이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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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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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옷 정리는 식목일 즈음에 하려고 했지만 3월 중순인데도 날씨가 퍽 따뜻해서 패딩과 니트 등 한겨울에 입는 옷은 미리 정리했다. 이렇게 겨우내 입었던 옷들을 세탁하고 접어서 서랍에 넣고, 봄에 입을 옷들을 서랍에서 꺼내어 옷장에 걸다 보면 완연한 봄이 되고 또 여름이 올 것이다. 작년보다 일찍 찾아오고 더 길어질 거라는 이번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더위 때문에 힘이 들 때마다 나는 이 봄의 선선한 날씨를 그리워하겠지. 어쩌면 차라리 한겨울이기를 바라기도 할 것이다. 정작 한겨울에는 한여름의 무더위를 그리워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렇게 그리워하기만 하다가 흘려 보내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한강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은 작가가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쓴 일곱 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한강 작가가 이전에 발표한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는 물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과 비교해 분위기가 훨씬 밝고 희망적이다. 한강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상흔을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해 정신적 붕괴나 인간 관계의 단절 같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회복의 계기를 만나고 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선택을 한다.


이러한 전개를 따르는 대표적인 작품이 표제작 <노랑무늬영원>이다. 소설 속 여자는 교통사고로 양손을 다친 이후 이 년이 다 되도록 작업실 출퇴근은 물론 일상 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대로 손이 낫지 않으면 화가로서의 이력도 결혼 생활도 끝이 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친구가 사는 동네에 있는 사진관에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듣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러면서 떠올리게 된, 사진을 찍어준 남자에 관한 기억과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아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긍정적인 에너지는 여자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여자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운을 준다.


한강 작가가 2010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책에 실린 2006년에 발표한 단편 <파란 돌>을 발전시킨 것이라는데, 얼마 전에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은 나로서는 <파란 돌>이 <바람이 분다, 가라>의 에필로그처럼 느껴졌다. <밝아지기 전에>와 <회복하는 인간>은 둘 다 가까운 언니 혹은 친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는 여성 화자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어쩌면 이 언니가 타인이 아니라 화자의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일 수도 있었던 어떤 존재의 죽음을 겪으며 그 존재의 몫까지 살아내겠다고 다짐하는 화자의 모습은 한강의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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