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루비] Life 선상의 우리들 - 뉴 루비코믹스 2157
토코쿠라 미야 지음 / 현대지능개발사(ruvill)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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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사는 남고생 니시 유우키는 도로에 그려진 하얀 선 위만 밟는 기묘한 습관이 있다. 어느 하굣길에 평소처럼 혼자 하얀 선 위를 따라 걷던 니시는 맞은편에서 자신처럼 하얀 선 위를 따라 걷는 다른 학교 남학생 이토 아키라와 마주친다. "선 밖으로 벗어나면 죽는다"라며 대립각을 세우던 두 사람은 결국 "내 발 사이에 발을 디뎌봐"라는 이토의 제안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그 날 이후 두 사람은 매일 하얀 선 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며 친구가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토는 하루 종일 니시 생각만 하고, 니시와 손을 잡고 몸이 닿을 때마다 니시에 대해 좀 더 알고 만지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이거 친구 사이 맞나?


토코쿠라 미야의 만화 <Life 선상의 우리들>을 나는 동명의 일본 드라마로 먼저 만났다. 드라마는 니시와 이토가 처음 만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생, 사회초년생 시절을 거쳐 한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시점까지를 그리는 반면, 원작 만화는 두 사람이 기적적으로 재회한 직후의 상황과 중, 노년 시절도 그린다. 드라마와 달리 만화에는 두 사람의 잠자리 장면도 나오고, 주변 인물들의 비중이나 설정이 조금씩 다르다(드라마에선 이토의 누나가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 만화에선 아님). 만화나 소설이 영상화되는 경우 원작보다 나은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 작품은 원작 만화도 좋지만 드라마도 정말 좋다. 먼저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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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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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여자'한 외모를 지닌 나리는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도망치듯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딸 은채를 키우며 살던 나리는 집에서 캔들 공방을 운영하다 상가로 진출했는데 하필 팬데믹이 터지면서 위기를 맞는다. 월세는 내야 하는데 수강생은 급감하는 와중에 나리공방에 드나들던 수미가 확진 판정을 받고 이동 경로가 공개 되면서 나리공방의 상황은 더욱 더 절박해진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기초가 된, 최은미 작가가 2020년에 발표한 단편 <여기 우리 마주>의 줄거리이다. 이어서 더 쓴 부분을 엮은 장편소설 <마주>는 <여기 우리 마주>보다 훨씬 더 다채로우면서도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수미의 밀접접촉자로 분류된 나리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다. 결과는 다행히 음성인데, 피 검사 결과 잠복결핵균이 있는 것이 드러난다. 결핵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나리의 부모님은 대전으로 이사하기 전에 다른 지역에서 과수원을 운영했다. 수확철이 되어 일손이 부족해질 때마다 부모님은 '만조 아줌마'라는 분을 불렀는데, 나중에 나리는 방학이 되면 일주일에 한 번씩 만조 아줌마네 집에 가서 지낼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나리의 결혼식에도 와주었던 만조 아줌마가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뭘까.


한편 나리는 수미가 격리 시설로 들어가기 전에 딸 은채가 보여준 영상 속 화면을 생각한다. 같은 딸 하나 엄마인 나리와 수미는 일 때문에 바쁠 때마다 서로의 딸을 돌봐주며 자매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 학창 시절에도 절친한 동성 친구 하나 없었던 나리로서는 처음 사귄 동성 친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은채가 보여준 영상 속의 수미는 나리가 아는 수미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게다가 그 영상을 보낸 사람은 수미의 딸 서하다. 나리는 수미에게서 서하를 보호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모녀 관계를 떠올리며 불편함을 느낀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과거의 만조 아줌마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만 보면 팬데믹 시대의 자영업자의 애환과 모녀 사이의 애증을 다룬 소설 같은데,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결핵 환자라는 이유로 사람들과 섞여 살지 못하고 따로 격리되어 살았던 사람들의 공동체인 '딴산마을'과 팬데믹 당시 사망률이 일반 병원의 2배 이상이라서 '코로나 무덤'으로 불리기도 했던 장기 요양병원 문제다.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모두가 힘든 시기에 더 힘든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자기 자신도 힘들면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만조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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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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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여성인 피비는 한국에서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다행히 피비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일찍부터 '천재 피아니스트' 소리를 들으며 주목 받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한다. 한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믿음을 잃고 무신론자가 된 윌 켄달은 대학에서 피비를 보고 강하게 이끌린다. 연인이 된 두 사람은 한동안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만, 피비가 탈북민 구조 활동을 하다가 북한의 수용소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존 릴이라는 남자에게 끌리면서 둘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소설을 쓴 권오경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의 첫 소설 <인센디어리스>는 작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출간 직후부터 큰 주목을 받아 현재 드라마 <파친코>를 연출한 코코나다 감독의 연출로 드라마화가 확정된 상태다. 이 소설은 피비와 윌의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북한의 독재자를 모방해 스스로 종교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존 릴이다. 그를 추종하게 되는 피비는 임신중절 수술 찬성에서 반대로 입장을 바꿀 정도로 그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이후 피비는 9.11 테러 이후로 미국 땅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습격에 투입되고, 피비의 연인인 윌은 그의 선택을 되돌려 보려고 하지만 역부족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피아노도 공부도, 부(富)도 명예도, 신앙도 열정도 최고만을 추구하고 어중간한 상태는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극단적인 정치와 종교, 테러 등에 대한 강한 이끌림으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도 아니고 완전한 한국인도 아닌 어중간한 정체성 역시 한국계 미국인들에게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선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 복잡한 서사를 코코나다 감독은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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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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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석탄을 나르는 작업 중인 사람들은 다섯 살 소년 빈센트가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 빈센트의 부모는 빈센트의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 이혼했고, 이별의 슬픔을 견디지 못한 빈센트의 어머니는 결국 어린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빈센트의 슬픈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빈센트에게 뭐라고 위로할 말을 건네지 못하는데, 정작 빈센트가 사람들을 돕겠다는 듯이 그들 곁으로 다가온다. 작디 작은 손으로 석탄 조각을 옮기며 사람들을 거드는 빈센트는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아는 걸까. 자신도 도움이 필요한데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유디트 헤르만. 독일의 유명한 여성 작가라고 하는데, 독서 이력이 짧은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의 책을 읽었다. 그는 1998년 <여름 별장, 그 후>로 데뷔해 <단지 유령일 뿐>, <알리스>, <모든 사랑의 시작> 등을 발표했다. 2010년에 출간한 소설집 <알리스> 이후 12년 만에 나온 소설집 <레티파크>에는 총 1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편수가 많은 만큼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짧은데, 그만큼 서사는 약한 대신 장면 하나 하나의 인상이 강렬하다.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석탄>에 나오는 빈센트가 손에 쥔 석탄 조각이라든가, 이어지는 단편 <페티시>의 여자(엘라)와 소년이 모닥불 앞에서 보낸 하룻밤이라든가.


표제작 <레티파크>는 페이지 샤쿠스키라는 남자의 연인이었던 두 여자, 로제와 엘레나가 긴 시간이 흐른 후 상점의 계산대에서 우연히 재회한 상황을 그린다. 로제는 한때 놀랍도록 예쁜 아가씨였던 엘레나가 몰라볼 정도로 몸이 불고 늙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페이지와 엘레나가 사귈 때 페이지는 엘레나가 자란 레티파크라는 동네의 사진을 찍어서 앨범으로 만든 후 로제에게 먼저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로제는 이런 사랑을 받는 엘레나가 부럽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페이지와 엘레나는 헤어졌다.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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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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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성식은 아내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얼마 전 성식의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대뜸 자신에게 꿔간 돈을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돈을 꾼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알츠하이머병을 의심하고,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날에 서둘러 어머니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교회 사람들과 기도원에 가고 없고, 예전의 총명했던 어머니라면 자신들과의 약속을 잊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걱정은 더욱 깊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성식과의 전화 통화에서 성식의 목소리를 죽은 형 성준의 목소리로 착각한다. 정녕 어머니는 큰아들의 죽음조차 잊은 것일까.


이승우 작가의 소설집 <목소리들>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어떤 단편은 추상적이고 어떤 단편은 구체적이라서 공통점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목소리들>이라는 제목을 보고 어느 단편에나 인상적인 '목소리'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에는 차도에 물을 뿌리고 솔질을 하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강제 연행하려고 하는 경찰, 그리고 여자를 대변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어지는 단편 <공가>에는 남편 부재 중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시부모와 시동생의 큰 목소리 때문에 고생하는 여자의 사연이 담겨 있다.


앞에 서술한 <마음의 부력>에는 죽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목소리를 혼동하는 어머니가 나오고, 이어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야 했다>에는 갑질 및 성추행의 가해자로 지목된 회사 후배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피하는 남자가 나온다. <귀가>에는 재건축을 위해 비워진 건물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소리를 들은 남자가 나오고, 표제작 <목소리들>에는 아들이 죽은 후 계속해서 목소리를 듣는 남자가 나온다. <물 위의 잠>은 또 다시 죽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마음의 부력>과 겹쳐 보인다. 시인 이상의 이야기를 다룬 <사이렌이 울릴 때―박제가 된 천재를 위하여>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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