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셸터 -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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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출신 작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소설 <타임 셸터>는 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한 남성이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을 위해 그들이 기억하는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한 공간을 제공하는 클리닉을 고안하면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2020년대에 80대인 노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자신이 아직 청년이었던 1940년대의 기억만을 가지게 된다면, 그에게 낯선 2020년대에 살게 하는 대신 그에게 친숙한 1940년대를 재현한 공간에 살게 해 여생을 보다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클리닉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일반인들도 자신들이 선호하는 과거에 살고 싶다는 의사를 표하고, 급기야 전 세계적으로 나라 전체가 돌아가고 싶은 시대를 국민투표로 정해서 회귀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이 책에는 작가가 살고 있는 유럽에 한정해 각 나라의 국민들이 어느 시대를 가장 좋다고 생각할지 가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만약 아시아에서 같은 주제로 국민투표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일본은 경제 성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대일 것 같고, 한국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부터 외환위기 직전까지 아니면 2002년 한일 월드컵 전후가 아닐까.


이 소설은 사람들이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과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 전제하는데 원래 이렇게 변화를 두려워하고 익숙한 걸 추구하는 생각 자체가 보수주의의 근간이다.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은 좋은 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미래에 있다)고 생각하고 변화에 포용적인데, 이 소설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상황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유럽이라는 지역 자체가 현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새로운 흐름이 출현할 가능성이 적고,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사회의 보수화, 우경화 경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어디 유럽만의 문제일까.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상황(계엄령을 계몽령이라고 부르지 않나, 이승만, 박정희를 찬양하지 않나)을 보면 우리가 이미 경험한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대신 예측 가능하고 애써 변화할 필요 없는 과거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계엄령에 찬성하는 사람, 이승만, 박정희 시대가 더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타임 셸터가 생기면 어떨까(이미 어떤 지역들에 끼리끼리 모여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이걸로 누가 소설 써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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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게 될 것
최진영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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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의 <쓰게 될 것>을 읽다가 앞으로는 스마트폰 들여다 보는 시간을 줄이고 소설을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SNS 앱을 지웠다. 이렇게 좋은 소설이 있는데 나는 왜 별로 좋지도 않고 도움도 안 되는 SNS 상의 글을 읽으며 그동안 그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까. 누가 왜 썼는지도 모르고, 읽고 나면 괜히 기분만 상하는 글을 읽느라 시간을 날려 보내지 말고, 이제부터는 작가가 한 줄 한 줄 집중해서 정성을 다해 쓴 글만 읽어야지. 그래야 나도 내 글을 읽은 사람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끼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쓰게 될 것>은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과 다짐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에는 총 여덟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표제작 <쓰게 될 것>은 똑같이 전쟁을 겪었지만 삶에 대해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닌 모녀 삼 대의 이야기를 그린다. 전쟁을 한 번 겪은 '나'는 전쟁을 두 번 겪은 어머니가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만, 전쟁을 세 번 겪은 할머니가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하고 그러므로 인류에게 희망은 있다고 말하는 것에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전쟁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언젠가 죽고, 대부분은 예고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그걸 알면서도 (언젠가 죽을) 타인을 사랑하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를 계획하며 살아가는 원동력은 뭘까.


<유진>은 삼십 대 여성 유진이 이십 대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던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했던 동명이인 유진 언니의 부고를 들으면서 시작된다. 가난하고 외로운 대학생 시절을 보낸 유진은 남들과 달리 자신의 입장을 배려해주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관심사나 장래 희망을 알아봐 준 유진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유진처럼 나도 어릴 때는 주변 어른들이나 손윗사람들이 나에게 해준 것에 대해 고마운 줄 몰랐다가 그 분들 나이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고마움을 깨닫는 일이 종종 있다. 더 늦기 전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겠다.


유진은 유진 언니를 보면서 "어른스럽다는 건 아이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에 근거해 이 책에 나오는 어른들을 분류하면 크게 어른스러운 어른과 어른스럽지 않은 어른으로 나눌 수 있다. <유진>의 유진 언니나 <ㅊㅅㄹ>의 서진이 아이 입장을 배려하는 어른스러운 어른이라면, <인간의 쓸모>에서 자식의 동의 없이 자식의 동영상을 촬영해 돈을 버는 부모나 <썸머의 마술과학>에서 거액의 빚을 지고도 가족 앞에서 뻔뻔하게 행동하는 아버지, <차고 뜨거운>에서 딸에게 가스라이팅을 일삼는 어머니 등은 어른스럽지 않은 어른에 속한다. 

 

<디너코스>의 아버지 오석진은 환갑이 되어서도 철없는 행동을 일삼아 가족들을 걱정시킨다는 점에서는 어른스럽지 않은 어른에 속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소설 후반에 이르러 드러나는 그의 본심을 알고 나서는 그가 정말 어른스럽지 않은 어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계획적이고 무책임한 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을 한 적은 없고, 어떻게 보면 자신과 가치관이나 취향, 습성 등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 또한 미성숙한 게 아닐까. 내가 나영(석진의 큰딸이자 화자) 같은 유형의 인간이라서 석진이 많이 밉기도 했고 그에게 많이 미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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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에 토카레프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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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에 토카레프>는 영국에서 보육사로 일하며 글을 쓰는 일본인 여성 작가 브래디 미카코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다. 거친 분위기의 제목 때문에 브래디 미카코가 그동안 써온 에세이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장르의 소설일 줄 알았는데(제목만 보면 킬러나 갱단이 나올 것 같다) 읽어보니 그의 에세이들과 아주 많이 닮았다. 브래디 미카코 자신이 딸로서, 엄마로서, 보육사로서, 독자로서 그동안 경험하고 생각하고 기대한 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버무려 내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주인공 미아는 브래디 미카코의 에세이에 자주 등장하는 영국의 빈곤 가정 아이들과 많이 닮았다. 또 다른 주인공 가네코 후미코는 실존 인물로, 한국인들에게는 조선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진행된다. 영국의 중학생 소녀 미아는 하루 종일 엄마와 남동생을 돌보느라 바쁘다. 미아의 엄마는 자식이 둘이나 딸려 있는데도 일을 하지 않고 생활보호수당이 나오면 그 돈으로 자식들을 먹일 빵 대신 약물을 구입한다. 미아의 남동생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미아가 구해줘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미아는 당장 오늘 먹을 빵을 급식실에서 훔칠지 푸드뱅크에서 받을지 고민하며 사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괴롭고 힘들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없고, 같은 반 친구들에게는 더더욱 할 수 없다. 말해봤자 그들은 미아를 구할 수 없고 미아의 처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만난 한 남자가 책 한 권을 소개해줘서 미아는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 표지가 파란 그 책의 주인공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을 살았던 일본의 소녀 가네코 후미코. 후미코도 미아와 마찬가지로 아빠가 없고 엄마만 있는데, 엄마는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대신 남자에게 의존하고 딸을 방치한다. 미아는 엄마와 남동생을 돌보며 생계를 걱정하는 자신의 삶과 100년 전 일본을 살았던 후미코의 삶이 많이 닮았다고 느끼며,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는 아이의 처지를 비관하는 후미코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공감한다. 나아가 어쩌면 미아보다 훨씬 불행한 환경에 놓여 있는데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견디는 후미코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독서가 미아에게 정신적인 위로 혹은 지지를 준다면,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교육과 사회 복지 제도다. 미아는 엄마 대신 동생을 돌보고 생계를 걱정하는 자신이 철저히 혼자라고 느끼지만, 사실 미아 주변에는 미아를 지켜보는 이웃들과 친구들,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있다. 특히 미아의 이웃이자 미아의 친구 이비의 엄마인 조이는 자신도 싱글맘으로서 쉽지 않은 삶을 살면서 미아와 미아의 남동생까지 챙겨주는 고마운 어른이다. 음악이 미아에게 주는 위로와 희망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미아는 윌의 제안으로 랩 가사 쓰기에 도전하는데, 이를 계기로 자신의 숨은 재능도 발견하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게 된다. 브래디 미카코 자신이 좋아하는 펑크록 덕분에 인생이 바뀐 케이스라서 이런 전개가 더욱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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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천사 오늘의 젊은 작가 44
이희주 지음 / 민음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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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천사>는 <성소년>, <마유미>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이희주 작가의 소설이다. 이희주 작가의 대표작 <성소년>은 아름다운 소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를 납치한 네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 풍의 소설인데, <나의 천사> 역시 소설의 중심에 아름다운 소년이 있다.

 

이 소설은 크게 세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유미, 환희, 미리내의 이야기이다. 인간과 연애하고 결혼하기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로봇 '천사'를 구매하는 것이 보편적인 시대. 인간 엄마와 인간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열세 살 소녀 유미는 아름답지 않은 자연인 부모를 두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어느 날 유미의 친구 환희가 천사 중에서도 진짜 천사로 칭송받는 '자비천사'를 동네에서 보았다고 말하고, 유미, 환희, 미리내는 다같이 자비천사를 보러 간다. 자비천사가 산다고 알려진 아파트 안을 돌아다니던 세 사람은 그곳에서 자비천사가 아닌 같은 반 남자아이 이오를 만난다. 환희와 미리내는 실망하지만, 전부터 이오를 내심 좋아했던 유미는 마음이 설렌다.


다른 하나는 전직 형사 민성기의 이야기이다. 퇴직 후 천사를 폐기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부처(butcher)가 된 민성기는 수많은 '천사'들을 만든 불세출의 디자이너 '선우판석'이 장미 저택에 남긴 천사들을 폐기하는 일을 의뢰 받는다. 민성기는 프로답게 일을 처리하지만, 속으로는 젊고 아름다운 소년들을 성적으로 착취한 후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이가 들고 추해 보이면 방치하거나 폐기한 선우판석의 행위에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자신도 죽은 아내와 똑같이 생긴 천사를 주문 제작한 후 천사와 아내를 비교하며 천사를 증오하고 자신은 여전히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혐오는 모순적이다. 


마지막 하나는 천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윤조의 이야기이다. 하루 여덟 시간을 공장에서 일하고 공장에 딸린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윤조는 자신과 다른 파트에서 일하는 남성 직원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친밀감을 느낀다. 어느 날 동료로부터 그 남성 직원이 부품을 몰래 빼돌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윤조는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대체 이 남성 직원은 왜 부품을 몰래 빼돌리고 있는 걸까.


이야기는 크게 새 갈래이지만, 유미, 환희, 미리내의 이야기 비중이 다른 두 이야기의 비중에 비해 훨씬 크다. 유미, 환희, 미리내는 각각 청소업자, 전업주부, 배우가 되어 전혀 다른 결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환희와 미리내가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고, 둘 사이의 해묵은 애증의 실체가 드러난다. 유미는 의뢰받은 집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이오와 꼭 닮은 천사를 발견하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천사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해도 절대적인 미를 추구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미의 기준이 다양해지고 급기야 천사보다 인간이 낫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는 천사의 공급량이 늘면서 아름다움이 흔해지자 아름다움의 가치가 낮아지고 반대로 아름답지 않은 것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결과다. 결국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다고 믿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나 신봉도 언젠가는 한계에 달할 것이고, 어차피 모든 것에 끝이 있다면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걸 추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역시 아름다움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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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김원영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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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관해 자유롭게 쓴 글이 에세이라면, 이 책은 에세이 그 이상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장애인이면서 변호사이고 무용수이기도 한 자신의 삶을 장애의 역사, 법의 역사, 무용의 역사와 교차하며 서술한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해 종횡무진 뻗어나가는 사고의 흐름, 지식의 깊이가 너무나 흥미로우면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리베카 솔닛, 율라 비스 등의 책을 읽으며 부러워했던 마음이 이 책으로 해소되었다. 저자의 다음 책이 벌써 기대된다.


1980년대 강원도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릴 때 장애 때문에 또래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만 지냈다. 만화 <슬램덩크>를 보면서 자신도 강백호, 서태웅처럼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고 활발하게 운동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몸을 움직이고 운동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다. 특수학교에 진학한 저자는 자신처럼 신체적 장애가 있지만 각자의 몸을 잘 활용하고 운동 능력도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일반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몸의 차이를 뛰어넘어 우정을 나누는 법을 배웠다. 이후 서울대 사회학과, 서울대 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가 되었고, 오래 전부터 꿈이었던 무용수가 되기 위해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 대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이 책은 저자가 한예종 입학 실기 시험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저자가 다른 대학의 무용과가 아닌 한예종의 문을 두드린 건, 한예종의 교풍이 다른 학교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고 진보적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무용은 기존의 무용이 완벽한 몸을 추구하고 엄격한 훈련을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탄생한 장르이기 때문에 장애가 있고 오랫동안 무용 훈련을 받지 않은 자신도 지원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고, 이 경험을 통해 저자는 현대 무용이 내세우는 자유로움, 다양성 포용 같은 가치가 자신과 같은 장애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현대 무용뿐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스스로를 계몽적이고 문명화 되었다고 여겼던 근대의 유럽인, 미국인들이 아프리카, 아시아의 문화를 배타적, 차별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프릭 쇼(freak show)'라는 이름으로 전시하여 돈벌이를 했던 역사를 소개한다. 실제 장애인은 춤은커녕 집 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운 게 현실인데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흉내내어 춤을 추는 '병신춤'은 계승해야 할 전통 문화로 칭송받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를 하기도 한다. 어느 예술 분야를 막론하고 장애인 공연자를 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장애인이 공연을 보러 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2부는 장애를 가진 몸과 무용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3부는 사회와 법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독일의 저명한 법학자인 칼 슈미트의 사례를 읽으며 정상적인 몸, 이상적인 몸에 대한 편견 그리고 집착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나치즘 같은 위험한 사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떠오른 인물이 미시마 유키오인데, 그 또한 완벽한 육체에 집착한 극우주의자였다. 몸을 차별의 근거가 아닌 연대의 계기로 삼을 순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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