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한테 꽃은 나 하나로 족하지 않아? - 데이비드 세다리스 코믹 에세이
데이비드 세다리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학고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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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너무 심각한척 하는 수사물이나 법정물, 세상을 한없이 낙관적으로 보는 로맨틱 코미디 같은 장르는 안 보게 되었다. 그보다는 헙수룩한 주인공이 자질구레한 역경을 이겨내며(?) 꾸역꾸역 살아나간다거나, 저 혼자 잘난줄 알다가 큰 코 다치는 내용의 코미디가 좋다. 허세나 환상 이런 걸 다 버렸다는 게 아니라, 조금씩 삶의 단맛보다는 쓴맛을 볼 일이 늘면서 산다는 건 그래봤자 전자 아니면 후자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너한테 꽃은 나 하나로 족하지 않아?>의 저자 데이비드 세다리스도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잎새에 이는 바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욕쟁이 이웃 할머니, 성적인 농담으로 딴지거는 택시 기사, 기내에서 불쾌하게 만드는 옆자리 승객 등등 살면서 부딪치는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에도 그는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 그저 소심하게 십자말풀이에 'bitch' 다섯 글자를 쓸 뿐이고, 자기를 속상하게 만드는 연인한테 크게 화 한 번 못 내고 그가 꺾어온 꽃을 병에서 뽑아 던지는 것으로 대신하고, 행여 홧김에(또는 용기를 내어) 언짢은 말 한 마디 했더라도 밤새 죄책감에 가슴이 두근대는 이 사람, 참 나 같다. (근데 난 왜 이 사람처럼 안 귀엽지?)  

그렇다고 더 큰 일에 '분노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정도에 만족하며, 그러나 일상을 너무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건 닭살 돋고, 그냥 한바탕 웃음으로 털털하게 넘기는 ㅡ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다. 주인공도 찌질하고, 에피소드도 찌질하고, 등장 인물도 찌질한데 읽고 있으면 웃기다. 찌질한 나의, 찌질한 일상도 누가 보기에는 이렇게 우습고 재밌겠지?

낯선 이름인데 이미 미국에서는 큰 상도 타고 '현존 미국 최고의 유머 작가'라고 불릴만큼 명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다. 어쩐지 제법 두꺼운 책인데 낄낄대며 웃다보니 금방 다 읽겠더라. 이 사람 책이 국내에 또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그것도 조동섭 님의 번역으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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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붕어빵>을 보는데 어머니가 그러셨다. 민서가 불쌍하다고. (참고로 민서는 붕어빵에 출연하는 박찬민 아나운서의 세 딸 중 둘째딸) 언니한테 눌리고 동생한테 치여서 얼마나 힘들겠냐고.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어머니는 아들 둘 딸 셋인 집의 둘째로 태어나, 그것도 어렸을 때 몇 년동안 어머니(나에게는 외할머니)와 떨어져 시골에서 할머니 손에 자라셨다고 하니 민서 맘을 아시겠지.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자기한테 보이는 것만 본다고 했던가. 나는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첫째딸 민진이가 안쓰럽다. 아들 없는 집의 장녀로 태어나 아들노릇 해야한다는 부담을 알게 모르게 받다보니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똑똑해진 그 애가 기특하면서도 안됐다. 아빠가 좋아하는 테니스도 열심히 하고, 반장을 할 만큼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고, 여동생 둘을 챙겨야 하는 그 아이의 마음을 나는 안다. 내가 그랬으니까. 

심리학 책을 읽다보면 자기 안의 아이와 만나야 한다는 문장을 많이 접한다. 그 문장을 접할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아이를 본다. 저게(내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친척 어른들의 말을 듣는 나, 아빠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나, 일 나간 엄마 대신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나, 부모님, 선생님 마음에 들려면 성적을 더 잘 받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공부하는 나, 어른스러운 척 하는 나, 강한 척 하는 나... 

며칠전 문득 나는 한번도 운동회나 소풍, 수학여행 같은 이벤트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내 기억속에서 단 한번도 즐거운 행사였던 적이 없다. 반장으로서 반 아이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든가, 선생님 도시락을 챙겨야 한다든가 하는 부담, 걱정 그런게 전부다. 가장 즐거워야 할 행사 때에도 그랬는데 보통 학교 생활 때는 오죽했을까. 괜찮은척 웃고있지만 속은 늘 우울했다. 한번도 행복했던 적 없다. 

다행히 대학 입학과 함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부모님, 선생님 모두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에 들어갔다고 재수를 권유했지만 나는 좋았다. 다른 학교들처럼 선후배 관계가 돈독해서 학풍이 권위적인 것도 아니고, 학교 행사가 너무 많아서 내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수업 듣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관심있는 외부 활동 하며 '나의' 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되었다.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성적을 잘 받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내가 여자라서, 장녀라서 어떻다는 소리도 들을 일이 없었다.   

그렇게 지낸지 약 6년. 이제 내 안의 아이가 조금씩 웃을 줄도 알게 되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난 늘 내가 불쌍하고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행복이라는 말도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아이를,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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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얀 마텔 지음, 황보석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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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지만, 나는 여성이니까...흠흠...)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읽고 필 받아서 얀 마텔의 초기작인 <셀프>를 읽었다. 내친 김에 그의 작품을 다 읽어버릴까 싶었는데 <셀프>를 읽고 나니 어려워서 엄두가 안 나네... 

얀 마텔의 소설을 몇 권(이라고 해도 세 권이다. 파이 이야기, 베아트리스와 버질, 셀프) 읽어보니 책 제목이 내용에 대한 힌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파이 이야기>의 원제는 'Life of Pi'인데 말 그대로 파이를 통해 생의 강인함 내지는 잔인함에 대한 책이고,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죽음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셀프>는 감을 잡기가 어려운 제목인데, 읽어보니 영어의 'himself', 'herself'에서 성별을 나타내는 him과 her를 지운, 무성(無性)(혹은 그냥 성)의 존재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남성이었다가 성인 이후로는 여성으로 살게 된다. 란마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데, 남성과 여성 모두를 아울러 성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저자 나름의 설정인 것 같다.  

성인 이전의 남성으로 살았던 부분은 부모가 외교관이라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국어를 배우고 낯선 친구들을 사귀는 모습은 저자 자신의 어린 시절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서 그런지 묘사가 구체적이고 실감났다.  

성인 이후 여성으로 사는 부분은 앞부분보다 매력이 덜하지만 월경에 대한 묘사만큼은 기가 막히다. 남성이었을 때는 월경을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했던 주인공이 여성이 되어 직접 경험하게 되자 '고무줄로 불알을 꽁꽁 동여매놓은 것 같은 통증'이라며 기겁을 하는 장면은 최고였다. (고무줄로 불알을 동여매놓은 통증은 뭘까? 내가 매달 겪는 고통이 그런 고통이란 말이지...?)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이기는 했지만, 읽다보니 살면서 성의 신비를 반절 밖에 경험해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성과 정체성, 인생의 연관성이라면, 여성으로서 나는 삶을 딱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불완전함이 내 성적 정체성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갈구하도록 만들고, 반쪽을 찾게 만드는 것일테지만... 

<파이 이야기>, <베아트리스와 버질> 등 근래작들과는 분위기가 달라서 놀라웠지만, 얀 마텔 특유의 독창적인 문장과 섬세한 묘사가 살아있는 점은 그의 소설 다웠다.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데다가 문장까지 아름다운 작가를 발견하는 일은 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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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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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라는 배경지식이 없었더라면 사실 이 책이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작가인 주인공 헨리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소설을 쓰려다가 퇴짜맞는 부분 이후로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언급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데다가, 다짜고짜 등장하는 단편과 희곡, 이야기 전체의 접점도 알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저자는 유대인도 아니요, 독일인도 아닌, 홀로코스트와 상관이 없는 캐나다 출신의 작가인데 굳이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택한 이유는 뭘까.  

 

하지만 끝까지 읽으면서 그것이야말로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싶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경험의 간극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직접 경험한 사람의 기억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접 경험한 사람의 경험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인류 전체의 상흔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뚝뚝 끊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단편들은 모두 그 상흔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캐나다인이고 홀로코스트를 겪지 않았다고 해서 인류 전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며 홀로코스트는 물론 6.25도 겪지 않은 나도.)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다른 나라 일이라도 고통을 겪은 이들의 증언에 공감하고 계속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은 후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몫이며 이것 또한 소중하다. 전후 세대가 전쟁과 무관하다고 해서 책임을 방기하면 될까? 고국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제 3국들이 모두 등을 돌리면 될까? 모른다고 해서 알려는 노력을 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파이 이야기>에 비해 주제의식은 강한 반면 파격은 덜 한 작품이지만(그래서 실망했다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공부하고 있는 학문과 연관되는 부분도 있고,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식으로 국내 문제뿐 아니라 국제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하는 소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이런 시도를 한 이 소설이 인상적이었다.   

그러고보니 얀 마텔은 아버지가 외교관이라서 고국인 캐나다를 떠나 스페인, 프랑스,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나 시대라는 굴레로부터 더 자유롭고, 전 세계, 인류 전체라는 시각으로 조망하는 것이 더 편하지 않나 싶다. 캐나다인으로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도 쓴 김에, 일제의 조선에 대한 만행에 대해서도 소설을 써주면 좋을 것 같은데(얀 마텔 정도면 전세계에서 관심을 가져줄텐데...)... 무리려나?

 

<파이 이야기>를 나는 엄청 쇼킹한 반전이 있는 비극적인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른 리뷰를 읽어보니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평한 분들이 많으셔서 놀랐다.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고? 내 기억엔 거의 공포 소설이었는데...내가 소설을 읽는 관점이 남들하고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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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가분 - 마음주치의 정혜신의 나를 응원하는 심리처방전
정혜신.이명수 지음, 전용성 그림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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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나 정신분석에 대한 책은 한 달에 한 권만 읽자, 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한테는 그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아서...) 이번달은 예외로 해야겠다.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몇 번이나 결제할까 말까 고민한 책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물론 책을 정리하는 사서님들의 손은 탔겠지만... 그리고 배달하신 분도, 서점 직원도... 음음...) 놓여있는데 어찌 안 읽을 수 있으랴... ㅎㅎ 

<홀가분>은 정신과의사 정혜신과 그녀의 남편 심리기획자 이명수가 함께 쓴 책이다. 부부가 같은 분야에서 때로는 동료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밀고 당기고 보완하며 활동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는데 이렇게 책까지 같이 쓰시다니, 부러움을 넘어 배가 슬슬 아프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지난 5년간 나눈 고민과 생각의 결실을 화가이자 아트디렉터인 전용성의 그림과 함께 담아낸 그림 에세이로, 제목대로 '홀가분'하게 읽기 좋다. 나도 잠자기 전이나 이동할 때 틈틈이 여러 편씩 읽었는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개운해져서 좋았다. 시간도 훌훌 잘 갔다.    

 

한 초등학생은 백 점을 맞았는데도 아빠한테 눈물이 쏙 빠질만큼 혼이 났답니다. 백 점은 맞았지만 글씨가 삐뚤빼뚤해서 앞으로 글씨를 똑바로 쓰지 않는 나쁜 버릇이 생길까봐요. - 모진 사랑(pp.144-5) 
박태환을 축구장으로 데려가 박지성만큼 뛰지 못한다고 윽박지르고, 김연아에게 골프채를 쥐어주고 미셸 위처럼 스윙을 못한다고 한숨 쉬고, 조용필의 글발이 양인자만 못하다고 혀를 차기 시작하면, 견뎌낼 장사가 없지요. - 자책은 이제 그만(pp.44-5)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인간이자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사는 시민으로서 이러한 사회적인 압박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어렵다. 먹고 살려면 수없이 다치고 깨지면서 좀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고, 그런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 점을 맞아 기분이 좋은 아이를 글씨가 안 예쁘다는 이유로 야단을 친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으니 맥이 탁 풀린다. 열심히 했는데도 칭찬은커녕 생각지도 못한 트집이 잡혀 혼이 나는 아이의 모습은, 안 놀고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취업이 어렵고, 취업을 해도 버티기가 힘들고, 높기만 한 집값에 물가인상에 교육비에 등록금에 노후대비 등등 갈수록 걱정이 태산인 대한민국 보통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닮았다. 

게다가 한 번뿐인 인생 내 맘대로 살 권리가 있는데도 친척, 이웃, 지인 등등 감 놔라 배추 놔라 오지랖 넓은 사람도 많은 게 우리 사회의 특징이자 문제다. 진짜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 대개 비슷비슷하다는 것. 대학은 어디 이상 가야 한다, 결혼은 언제까지 해야 한다, 애는 몇 이상 낳아야 하며 연봉을 얼마를 받아야 어쩌고저쩌고... 왜 그 이상을, 그 너머의 것을 생각하지 못할까.     

 

제 경험에 의하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의 근원은 자기를 절절하게 느끼는 행위에서 비롯합니다. 잘나든 못나든, 상처투성이든 아니든 그 안에서 내 본래의 모습이 이랬구나, 내가 그래서 힘들었구나, 나한테 이런 욕구가 있었구나...... 를 알아차리고 발견하기. 그럴 때 인간의 자기치유력은 극대화됩니다. - 자기치유력의 근원(pp.194-5) 

  

이 책의 저자들은 답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아보자고 말한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처가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마주하는 것을 꺼린다. 아마도 입시에 취업에 경쟁에 숨 쉴 틈 없이 살다보니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귀중한 시간을 놓쳐서는 인생 자체에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주변을 보면 재수, 삼수를 하거나 입대, 유학 중에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는 사람이 제법 있다. 시간도 남고, 원래 생활에서 비껴나 있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 자기가 진짜 원하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거나, 전역 후 전보다 치열하게 살게 되었다거나, 유학 후 진로를 변경하는 등 인생의 반전을 이루었다는 스토리도 심심찮게 듣는다.  

나는 재수도 안 했고 1년 휴학 기간도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건만 대학 졸업 후 취업을 못해 인생 최초로 여유로운(또뜨는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한테는 지금이 그 재수, 삼수, 입대, 유학 같은 기간인 것 같다. 이 시간 덕분에 나는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그 결과 평생을 걸고 싶은 공부도 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특히 심리학 책에 눈을 뜨면서 내 안의 상처와 욕구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고나니 첫째, 화내는 일이 줄었다. 덤으로 화내고 나서 후회하는 일도 줄었다. 둘째, 자신감이 생겼다. 나조차도 몰랐던 콤플렉스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셋째, 여유가 생겼다. 아픈 말들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그 사람 마음에 병이 있나보다 하며 넘기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신경쓰이는 일이 줄고 마음 다치는 일도 별로 없게 됐다. 어쩌면 누구보다 날 괴롭히고 힘들게 한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인에게 억하심정이 있던 설렁탕집 주방장이 주인에게 손해를 끼칠 요량으로 뚝배기에 고기를 듬뿍듬뿍 넣었더니 '고기 반 국물 반'이라는 소문이 나서 최고의 설렁탕 전문점이 되었다는 전설처럼요. 그래서 모자람이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동기라는 성공신화는 어떤 경우엔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잠언이 됩니다. 지금 무언가 모자란다고 느낀다면 '조만간 무엇을 이루겠구나' 하는 신호일지도요. - 결핍 동기(pp.58-9)


먼저 나부터 돌보자는 말에는 심리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바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하나 이상의 결핍 요소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나 '나는 완벽하다, 내 말이 곧 법이요, 진리다.' 라는 식으로 믿을 때 문제가 생기고 사람들과 갈등이 생긴다. 먼저 자신의 존재의 불완전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기라는 철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세상을 이해하게 될 수 있는 것 같다.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는가' 라는 유명한 노랫말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바꾸지 않아도 시간이나 상황이 저절로 바꾸어주는 때가 있고, 내가 굳이 말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남이 저절로 깨닫고 바뀌는 때가 있다. 또 내가 맞다고 여긴 것이 훗날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런 때는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자다가 하이킥한다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된다.)  

그저 홀가분하게 모든 걱정근심을 내려놓고 세상을 향한 안테나를 조금 접어두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라고, 조금만 덜 빡빡하게 살자고 말하는 이 책, 참 홀가분하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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