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레시피 - 39 delicious stories & living recipes
황경신 지음, 스노우캣 그림 / 모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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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방에서 어깨를 맞대고 앉아, 버너에 불을 붙이고, 코펠에 물을 받아 팔팔 끓이고, 밀가루 반죽을 조금씩 뜯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수제비. 도대체 무슨 맛이 있었겠느냐마는 나는 지금도 그 뜨거운 국물 맛과 부드러운 밀가루의 맛을 기억해낼 수 있다. 그것은 아주아주 슬픈 날, 눈물을 펑펑 흘리고 난 후, 누군가가 잡아준 따뜻한 손처럼 다정했다. 근본적으로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우리는 폭신한 이불에 싸인 아기처럼 순해져서, 그날 밤 어느 때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물과 밀가루와 소금으로 만든 그 초라한 수제비 속에는, 비바람 치는 날 동굴 속에 웅크리고 모여 앉아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아기곰들의 천진한 우정 같은 것이 녹아 있었다는 생각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떠올랐다. (pp.24-5)

인간의 오감 중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미각이 제일 오래 남는 것 같다. 그토록 좋아했던 첫사랑 남자아이의 얼굴도 목소리도 이제는 가물가물 하고, 처음 잡았던 손의 촉감도 기억나지 않고, 향기도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의 맛이나 친구들과 나누어 먹은 과자나 아이스크림의 맛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방금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월간 <페이퍼>의 편집장이자 다수의 책을 쓴 황경신의 음식 에세이 <위로의 레시피>를 읽고 있자니 내 기억 속의 음식 이야기가 몽글몽글 떠올랐다.  

중학교 때 하교길마다 절친과 '아시나요'라는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곤 했다. 다른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꼭 '아시나요'만 먹었는데, 그 아이스크림이 다른 아이스크림보다 싸기도 했고, 빵처럼 생겨서 나눠 먹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친구가 조성모의 팬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가족 휴가 때 목포에서 먹은 화끈한 낙지볶음과 연포탕, 아버지가 직장 근처에서 사주신 어국수 맛도 좋았다. 지금도 가족들이 모이면 그 때 먹은 음식들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곤 한다. 

대학교 때 선배가 사주었던 학교 앞 명물 오레오 쉐이크 맛은 지금도 여름만 되면 떠오른다. 오레오 과자를 쉐이크와 함께 갈고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만든 음료인데 후배나 친구들한테 사주면 늘 반응이 좋았다. 동생과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떠난 일본 여행 길에 시모키타자와의 허름한 골목에서 동생과 나누어 먹었던 카레빵과 우롱차 맛도 잊을 수 없다. 중국 여행길에 연변에서 먹은 북한식 냉면과 만두, 봉사 활동을 간 곳에서 비를 쫄딱 맞고 우여곡절 끝에 시장통에서 친구와 사먹은 찐빵 맛도 최고였다. MT 단골 메뉴인 삼겹살과 불조절에 실패해 불어터진 라면, 처음으로 친구들끼리 떠난 기차 여행길에 사먹은 춘천 닭갈비 맛도 잊을 수가 없다. 아, 나한테 추억의 음식이 이렇게도 많았다니...!  

떠오르는 음식의 가짓수만큼 나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이렇게 한번이라도 어깨를 맞대고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들은 기억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 것 같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니라 함께 먹은 음식의 맛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사람과는 꼭 같이 밥을 먹어봐야 하나보다. 달콤한 밥알을 꼭꼭 씹어 넘기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소중한 시간을 보낸 추억을 마음에 꼭꼭 새겨두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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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영어책
김원.Shane 지음 / NEWRUN(뉴런)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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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표지 색깔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빨강이라기엔 옅고, 분홍이라기엔 진하다. 살구색에 가까운데 이런 색깔의 살구를 먹어본 적은 없고, 어젯밤에 먹은 천도복숭아 색깔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자몽 색깔도 비슷한 것 같고... '은밀한' 영어책이라는 제목 탓인지 사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도쿄 나카노구 선플라자에 있는 만다라케의 성인 코너(!) 색깔과 제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코너에 있는 '책'이나 '잡지'도 아니고 코너 전체가 이 색깔이다. 그야말로 달아오른 살색의 향연... ㅍㅍ)  

각설하고, 이 책은 월간지 <paper> 편집장 김원과 유명 영어 강사 Shane이 <paper>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을 묶은 책이다. 다른 잡지는 즐겨 읽지 않는데도 페이퍼만큼은 즐겨 읽을만큼 페이퍼의 팬인 나로서 김원 님은 당연히 알고 있었고(이 책에 이어 요즘 나는 황경신 님의 책을 읽고 있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 Shane쌤은 예전에 ebs에서 썬킴샘이랑 방송 같이 하실 때 재밌게 봤는데 요즘은 못 뵈어서 서운했다. 그런 두 분이 페이퍼에 영어 칼럼을 함께 연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근' 알고 있었고, 그 칼럼을 묶어 책으로 내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제서야 읽었다니...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김원 님은 요새 책을 또 한 권 내셨던데...)  

김원 :  그렇지만 최소한 김치전 같은 거라도 같이 먹어야죠. 아! 김치전은 영어로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Korean vegetable pancake?  

Shane : 오! 그렇게 표현하는 거 안 좋아요. 그냥, '코리안 전' 이렇게 말하는 게 제일 좋아요. 김치 같은 것도 어설프게 영어로 'Red peppers and cabbage'라고 하지말고 그냥 '김치'라고 말하세요. 설명하지 말고 그냥 그 음식을 보여주는 거지. 그게 최고죠! 떡 같은 음식이 식당 메뉴판에 영어로 어떻게 쓰여 있는지 알아요? 'glutinous rice cake'이라고 쓰여 있어요. 'glutinous'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막 뭉그러져서 찐득찐득한' 그런 의미거든요. 그런 걸 미국인에게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먹겠다고 하겠어요? No! 그렇게 쓰느니 차라리 'a Korean desert made from rice' 라고 표현하는 게 훨씬 좋을 거예요. 

김원 : 그게 더 좋겠다. 진짜!

'영어책'이라고 하면 두꺼운 문법서나 몇 만 단어가 실린 단어책 같은 게 먼저 떠오르지만, 이 '은밀한' 영어책은 전혀 다르다.  영어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는 감각으로 접근한다. 아니, 영어책이라기보다는 영어가 많이 나오는 책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겠다. 

먼저 두 사람이 만난다. 장소는 신사동 가로수길이기도 하고 인사동이기도 하고 어느 허름한 동동주 집이기도 하다. 김원이 셰인과 대화를 하며 영어와 관련된 질문을 한다. 김치전이 영어로 뭐냐, 이성을 볼 때 뭘 보냐, 외국인한테 말을 걸고 싶을 때 어떤 말로 시작하면 좋을까 하는 사소한 질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대화라는 게 뭔가. 다 이런 사소한 질문의 집합이지 않나. 외국인을 만났을 때 처음부터 자기소개부터 장래계획, 남북관계에 대한 전망과 세계 금융에 대한 견해 같은 얘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냥 친구 만나듯이 이런저런 주제를 두고 얘기를 하고, 그러다가 '이 말은 영어로 어떻게 하니?'라고 묻는 정도. 외국인 친구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딱 그 정도의 분위기다. 

그래서 재밌다. 영어 수준도 어렵지 않고, 칼럼이나 인터뷰를 읽는 기분으로 훌훌 읽을 수 있다. 그러다보면 어떤 단어나 문장이 머릿속에 슬그머니 들어와있기도 하고, 평소에 이런 단어를 이렇게 써먹어봐야지 하고 배우는 것도 있다. 외국어는 이렇게 배워야 하는 거지 암... 일본어는 이렇게 배웠지만, 영어를 내가 진작에 이렇게 배웠으면 고생을 덜 했을텐데ㅠㅠ   

잘 팔려서 2권, 3권 쭉쭉 나와줬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이렇게 즐겁게 영어를 배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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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오리새끼, 날다 -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의 인간관계 멘토링
양창순 지음 / 좋은생각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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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교 신입생 시절, 학교 행사를 통해 4학년 선배 한 명을 알게 되었다. 1학년 꼬꼬마 눈에 졸업을 앞둔 4학년 선배는 어찌나 근사하고 대단하게 보이던지... (졸업하고 보니 1학년이나 4학년이나 거기서 거긴 것 같지만...) 그 선배에게 만약 신입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런데 선배는 영어공부도, 취업준비도 아닌, '심리학 공부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심리학 공부라니... 당시만 해도 심리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도 모르고, 심리를 알아서 뭣에 써먹는가 싶었던 내 귀에는 선배의 대답이 생경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으며 인간관계에 치이고 사회의 벽을 실감하고 보니 공부 중 제일은 나를 알고 남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런 학문이 바로 심리학이라는 것을 말이다.   

한동안 선배의 말을 잊고 살다가(선배님, 죄송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심리학에 관련된 책을 정기적으로 읽고 있다. 이번에 읽은 <미운오리새끼, 날다>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이 월간 <좋은생각>에 연재한 <양창순의 작은 속삭임>이라는 칼럼을 묶은 책이다. 책에 소개된 사연들은 특정 세대나 집단에 집중되지 않고 다양하며,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때늦은 진로 고민을 하고 있는 직장인, 가족 간의 불화를 견디기 힘든 주부, 만나는 남자마다 쉽게 질려서 헤어지는 여성,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남성 등 주변에서 볼 법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어려운 심리학 용어도 안 나오니 편안하게, 남이 카운셀링 받는 것을 관찰하는 기분으로 읽을만 하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데다 직장 생활과 병행해야 하는 탓에 스트레스가 크다고 하셨는데, 저항은 사실 긴 인생에 비하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니면 '그래, 힘들게 고생할 것 없지, 뭐' 하며 하고 싶은 일을 접은 채 그만 나이가 들어 버린 자신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지금 어떤 선택이 현명할지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p.33)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결국 인생 전체가 실패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시도한 끝에 실패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하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p.239)

진로에 대한 고민은 이제 청소년, 청년들만의 것이 아니다. 평생직장, 은퇴, 정년 퇴직 등의 개념은 옅어지는데 수명은 늘어나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나이를 먹어서도 진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으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직장인에게 저자는 돈, 남들의 시선, 가족의 부담 생각은 잠시 접고, 자신의 인생을 두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만약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답이 나온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달려들라고 한다. 흔한 조언이지만, 흔한만큼 이 이상의 조언도 없는 것 같다. 공부든 일이든 원하는 것이 있는데도 두려워하며 회피하는 것은 자존감의 부족, 또는 실패로 인한 트라우마 등등에서 비롯된 것인 경우가 많다. 자기가 원하는 일 하나 못 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를 돕고,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내성적인 사람일수록 '내가 붙임성도 있고 사람들과 거침없이 잘 어울리고 말도 잘하고 씩씩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공상합니다. 그리고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며 불안해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나의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성격이 상대방에게 호감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며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마음의 문을 연다면 대인관계도 그만큼 좋아질 것입니다. (p.75)

내성적인 사람에 대한 조언도 나온다. 내성적인 사람으로서 눈이 번쩍 뜨이는 부분이었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저자는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성격이 상대방에게 호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조언한다. 정말 그렇다. 예전에 EBS에서 방영한 성격 관련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모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외향적인 아이보다 내성적인 아이가 친구로서 더 인기가 많다는 결과가 나왔었다. 나만 해도 너무 밝고 적극적이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친해지기는 쉬워도 오랫동안 마음을 터놓고 사귀는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이처럼 내향적인 성격은 장점이 될 수도 있다. 

 

학교 다닐 때 스스로는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속상해 했는데 의외로 시험 점수가 잘 나올 때가 있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말을 잘했는데도 스스로 못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비판자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세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p.189)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비판자는 나 자신'이라니... 찔린다. 사실 사람들은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다. 그걸 받아들이면 사는 게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내가 그걸 알게 된 계기는 '옷'이다. 아주 옷을 잘 입었거나 못 입었을 때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내가 무슨 옷을 입는지 잘 모른다. 입장을 바꿔서 나도 남이 무슨 옷을 입는지 잘 모르지 않나. (나는 그렇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옷장에 옷이 한 가득 들어있는데도 옷이 없다며 툴툴 댄다.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 다시 입고, 내일 또 입는다 해도 그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니 잘 해줘야 한다 ^^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은 접고, 나는 나를 어떻게 보는지, 진짜 '나'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하면 즐겁고 행복한지,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인지... 

   

간혹 극단적인 사례도 있지만, 대개 일상 생활에는 문제가 없고 남들이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내적으로, 또는 가정에서 문제를 겪는 경우가 많아서 놀라웠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아니면 친구나 지인들의 괜찮아 보이는 표정 뒤에는 저마다의 고민이나 갈등이 있겠지. 평생 공부하고 알려고 노력해도 전부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 한 사람, 내 가족, 친구의 고민을 이해할 수만 있어도 인간관계로 인한 고민은 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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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격 -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격의 미스터리!
에두아르도 포터 지음, 손민중.김홍래 옮김 / 김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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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지갑을 열 때,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기 마련이다 ... 하지만 일반 원칙인 이 가정으로 인해 우리는 미세하지만 중요한 오해를 하고 있다. 시장은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효과적인 제도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소비하려는 재화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가격 결정 과정은 비용과 이익 분석에 능한 이성적인 계산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명하고 직접적인 상호 작용이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시장 거래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들에게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공할 뿐이다.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은 가끔 자기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욕망의 대상이라며 주어진 재화에 대해 왜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가끔은 그 재화가 왜 자신에게 바람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pp.31-2)
 


 

2011년 현재 인류문명은 참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백년, 아니 십년 전과 비교해도 발전의 정도가 상당하다. 나는 여섯살, 일곱살 꼬꼬마 시절 텔레비전에서 (당시 우리 집에는 없던) 무선 전화기 선전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여고생이 되었을 때 내 손에는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휴대폰이라는 것이 들려졌고, 그 때로부터 또 10년 후에는 스마트폰 유저를 부러워하는 일반폰 유저가 되었다. ('스마트'하지 않으면 모조리 '일반'으로 치부하는 더러운 세상!)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모르는 것이 많다. 테크노마트가 갑자기 왜 흔들렸는지도 모르고,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칩이나 부품을 만드는 법은 알아도 그 전지를 태양열이나 풍력 같은 천연 에너지로 충전할 방법은 모르고, 가볍고 날개도 있고 한방 향까지 나는 생리대는 만들어도 쓰레기는 덜 배출하면서 여성질환은 덜 일으키는 생리대를 만드는 방법은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가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수요와 공급, 더 정확히는 공급자의 의도. (아! 테크노마트가 흔들린 이유는 그 문제가 아닐 것 같다.)

 

에두아르도 포터는 1990년부터 파이낸셜 리포터로 활동, 2004년 <뉴욕타임스>의 금융 경제부 수석기자로 입사, 2007년 편집위원으로 위촉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쓴 책 <모든 것의 가격>은 '가격'을 테마로 생명, 행복, 여성, 노동, 문화, 신앙 등 지구촌의 온갖 문제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신선한 시도이고, 글도 깔끔하고, 내용도 재밌다.

 

그는 많은 문제가 경제 원리로 풀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다처제, 지참금 문화를 비롯하여 대형 커피 체인점에서 비싼 커피는 사면서 동네에 있는 허름한 카페의, 그렇지만 맛은 좋은 커피 값이 조금만 인상 되어도 펄펄 뛰는 이유까지 모든 것이 경제로 설명이 된다. 나는 이런 접근법을 참 좋아한다. 원래 전공이 있으면서 경제학을 복수전공을 한 것도, 점수가 잘 안 나오는데도 열심히 들은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모든 것이 경제 원리로 설명된다는 명쾌함이 좋고, (타전공자로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비뚤게 보는 것도 재밌거든. (흐흐흐)

 

앞에서 한 얘기로 돌아가면, 새로운 휴대폰을 소비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친환경 생리대를 소비하고자 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정확히는 새로운 휴대폰을 소비하려는 사람들은 부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친환경 생리대를 소비하려는 사람들은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기업은 더 많은 사람, 정확히는 돈을 가지고 있고 쓸 의향이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을 공급한다. 그렇게 시장이 형성되고 가격이 만들어진다. (친환경 생리대는 백날 가도 안 만들어질테니 직접 인터넷 뒤져서 만들어 쓰는 게 빠르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움직인다는 것이 경제학의 좋은 점이다. 친환경 생리대를 소비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면 가격이 형성될 것이고, 그 가격이 오르면 공급자가 나타날 것이다. 애초에 생리대가 그렇게 생산되기 시작했고, 그 전에는 아예 그것조차 없지 않았던가. (조상들은 정말 대단하다!!!)

 

가격이 붙은 모든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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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에 대비하라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김현구 옮김, 남상구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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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상이 복잡하면 수리연산을 많이 해야 합니다. 복잡하면 역사 공부를 더하고, 기억을 많이 하고, 지혜를 많이 활용하고, 연장자에게 의존하고, 연장자에게 권한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통계학 교수입니다. 그래서 제가 통계학자로서 통계학자를 조롱하는 농담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끼리를 예로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끼리는 나이 많은 할머니 코끼리들을 존중한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모계사회여서 나이가 가장 많은 할머니 코끼리에게 많은 권위를 준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할머니 코끼리가 특별히 몸도 안 되고 새끼도 못 낳지만 코끼리들이 할머니 코끼리를 봉양하면서 모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코끼리에게 MS워드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쓸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코끼리는 지식과 지혜는 있지만 연장자의 머릿 속에 담겨 있습니다.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고 그것이 글을 통해서 전수되지 않는 것이 코끼리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know-what이 아닌 know-how가 연장자 코끼리에게 있습니다.(pp.42-3)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소위 '블랙스완' 이론으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예측하여 유명해진 인물이다. 블랙스완 이론이 하도 유명하기도 하고 괴짜 같은 인물이라는 얘길 많이 들어서 그의 저작을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두 달 전에 신작이 나왔다. 부제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두 번째 메시지'라고 써있기에 전작에 이은 새로운 이론이 나오는가 싶어 기대가 컸는데, 꿈도 야무졌지, 그냥 <블랙스완>을 읽는 편이 나을뻔 했다. 앞부분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에 대한 소개와 한국 방문 때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뒷부분은 총 아홉 장에 걸쳐 전작에 대한 설명과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전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읽으면 그나마 새로운 내용처럼 들리겠지만, 전작을 읽었다면 중언부언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

 
그래도 좋은 점은 화법이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하다는 것. 경제학자 특유의, 쉬운 말도 어렵게 말하는 기술(?) 따위 그에게는 없다. 이를테면 '경제학 수업 듣기와 <뉴욕타임스> 읽기 등을 자제하면 나이가 들어도 뇌기능을 쉽게 잃지 않는다(p.79)'든가, '경제학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우리를 파산으로 이끌기 때문에 경제학 수업을 듣지 말라(p.80)'든가, '돌팔이들만이 긍정적 권고를 제시한다. 서점에는 성공 방법에 대한 책들이 널려 있지만, <파산을 통해 배운 것>이라든가 <인생에서 피해야 할 10가지 실수> 같은 제목이 붙은 책은 없다(p.194)' 등등... 


경제학이 쓸모없다니, 이 무슨 도발적인 주장인가 싶지만 그의 설명을 읽다보면 수긍이 가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근본적으로 그는 "자료를 맹신하면 안 된다. 자료는 스스로 예측하지 못하는 법"(p.12) 이라고 말하며 주류경제학의 합리성 가정(인간은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래서 나온 이론이 바로 블랙 스완이다. '모든 백조는 희다'는 '믿음'은 검은 백조의 '존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마찬가지로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믿음도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존재 앞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한 생각은 그만 두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을 본받아 가외성의 원칙을 지키고(가령 자연의 '창조물'인 인간의 몸은 귀가 두 개, 눈이 두 개, 다리가 두 개, 팔이 두 개, 심지어 뇌도 두 개다. 이는 언젠가 하나가 망가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설명한다. '잉여' 노동력은 바로 정리하는 신자유주의적 조직관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공격적인 투자보다는 리스크 관리에 힘쓰는 것이 그 대안이다. 하지말라는 것만 안 해도 삶은 얼마나 윤택해지는가! 
  

'무엇을 하라'고 하기보다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 조언을 명료하게 던지는 것이 낫다.
'담배를 끊으라'는 말 한마디가 의료 기술 관련 자료보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 (p.13)

  

재미있는 책인데, 역시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역시 전작만한 후속작 없고, 보충서는 보충서일뿐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연달아 출간된 <블랙스완과 함께 가라>는 읽어볼만한 책일까 아닐까? 이거 궁금해서 미치고 팔짝 뛰겠네! 일단 2008년에 나온 <블랙스완>부터 정독하고 도전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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