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마취 상태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9
이디스 워튼 지음, 손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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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외부에서 볼 때의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에서 느끼는 상태다. 예를 들어 외부에서 볼 때는 행복해 보여도 내면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부에서 볼 때는 행복해 보이지 않아도 내면은 행복한 사람이 있다. 둘 중 하나의 상태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순수의 시대>, <여름> 등을 쓴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이디스 워튼이 1927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반마취상태>는 전자와 후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수작이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주인공의 가족 구성을 정확하게 이해해 두면 좋다. 주인공 폴린 맨퍼드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 번 이혼한 여자다(당시 뉴욕 상류 사회에서 이혼한 여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안좋았는지는 <순수의 시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폴린의 첫 번째 남편 아서 와이언트는 '뉴욕 구혈통' 출신에 외모도 출중하지만 무직이고 음주와 도박으로 아내의 돈을 축내기 일쑤였다. 결국 아서가 사촌 엘리너와 몰래 만나는 걸 폴린에게 들키면서 이혼을 하게 되었다. 폴린의 두 번째 남편은 폴린의 이혼을 도와준 변호사 덱스터 맨퍼드로 지독한 일 중독자다.


폴린은 아서와의 사이에서 아들 짐을, 덱스터와의 사이에서 딸 노나를 얻었다. 이혼-재혼 가정이지만, 폴린과 폴린의 전 남편과 아들 짐, 며느리 리타, 폴린의 현 남편 덱스터와 딸 노나는 마치 하나의 대가족처럼 서로를 아끼며 친하게 지낸다. 문제는 짐-리타 부부 사이가 예전 같지 않게 되면서 불거진다. 결혼 전부터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리타는 짐과의 결혼 생활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짐과 이혼한 후 연예계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를 알게 된 폴린과 덱스터, 노나는 리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짐에게서 마음이 떠난 리타는 좀처럼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보면 폴린과 덱스터, 노나가 리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짐을 위하고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폴린과 덱스터, 노나에게는 각각의 속내가 따로 있다. 특히 폴린은 자신도 이혼을 했는데 같은 여성으로서 리타의 이혼을 말리는 게 말이 되나 싶다. 사실 폴린은 소설 곳곳에서 이중적, 모순적인 행태를 보인다. 폴린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여성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산아 제한과 출산 장려처럼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동시에 옹호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 이중성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저자가 소설의 제목인 <반마취 상태>라는 단어를 통해 일종의 힌트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출판사 제공 카드리뷰에 따르면 반마취 상태는 '출산하는 여성에게 모르핀과 스코폴라민을 혼합한 진통제를 주사하여 산고를 줄일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출산 자체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하는 의학 기술'을 뜻하며, 실제로 1920년대 미국 뉴욕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 반마취 상태 분만이 유행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도입부의 리타의 출산 장면에서 폴린이 반마취 상태 분만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폴린으로서는 출산을 먼저 경험한 여성으로서 리타가 느낄 고통을 경감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폴린의 캐릭터로 미루어 봤을 때 며느리 걱정을 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깨인' 시어머니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깨인' 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리타의 이혼을 반대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뉴욕의 상류층 가족이지만 며느리 하나 빠진다고 휘청거리는 모습은, 역으로 이 가족이 얼마나 부실하고 허약한 토대 위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죽하면 가족 중에 가장 젊고 앞날이 창창한 노나가 결말에 이르러 "차라리 수도원에 들어가 생을 마무리하는 게 낫다"라고 절규했을까. 결국 돈이나 지위나 결혼, 가족 제도 같은 사회적 안전망은 남들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드는 마취제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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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5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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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 오랫동안 영화 제목으로 알았는데 최근에야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되었기에 반가워하며 구입했다. 원작 소설이 얼마나 훌륭하면 영화로 제작되고 그 제목이 내 머릿속에 입력되기까지 했을까. 일단 소설부터 읽고 나중에 영화도 꼭 보기로 다짐했다. 책을 펼쳐보니 <바베트의 만찬> 외에 네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설을 읽기 전에 작가 이력부터 읽었는데 이력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자크 디네센(본명 카렌 블릭센)은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29세에 남작 폰 블릭센과 결혼해 남작부인이 되었고, 남편을 따라 케냐로 이주해 대규모 커피 농장을 경영했다. 남편에게 옮은 매독 때문에 남은 생 내내 투병했다. 193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출간을 시도했지만 덴마크와 영국에서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의 한 여성 작가가 이자크 디네센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미국의 출판사와 연결해 주었고(여돕여), 이후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책이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덴마크 문단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어째서...). 


로버트 레드포드, 메릴 스트립 주연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도 이자크 디네센이 썼다. 근데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 즉 실화라고. 본명인 카렌 대신 이자크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은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남성의 이름으로 낸 책보다 덜 중요하고 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표제작 <바베트의 만찬>은 노르웨이의 작은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주인공 자매는 목사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신실한 생활을 해왔다. 젊을 때는 자매의 아름다운 외모와 신성한 노랫소리에 반해 관심을 보이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결국 자매는 아무와도 맺어지지 않고 오로지 신만을 섬기며 수녀님처럼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매는 친척의 부탁으로 프랑스에서 온 여인 바베트를 식객으로 맞게 된다. 친척에 따르면 바베트는 파리의 유명한 요리사였는데 혁명으로 집과 일터, 가족까지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세 여성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얼마 전 복권에 당첨되어 큰 돈을 벌게 된 바베트가 자매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상차림을 준비하겠다고 나서면서 긴장이 발생한다. 


이어지는 단편 <템페스트>의 내용도 흥미롭다. 배우를 꿈꾸는 말리는 쇠렌센이라는 연극 연출자의 눈에 띄어 셰익스피어의 연극 <템페스트>의 에어리얼 역을 맡게 된다. 몇 달에 걸쳐 열심히 연습한 말리는 공연을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 직전에 이르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 말리가 용감하게 나서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배의 난파를 막은 것이 알려지자 배의 주인이 말리를 자택으로 초대하고 며느리감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여성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두 남자와 엮이면서 원래의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작가의 생애와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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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장인들 1 - 간다 고쿠라초 이야기
사카우에 아키히토 지음, 하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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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가 배경인 소설이나 만화, 영화, 드라마 등을 좋아한다. 아본 적 없는 시대이고 장소인데 막연히 동경하게 된 까닭은 아마도 한때 열심히 읽었던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대물 시리즈 덕분일 것이다. 사카우에 아키히토의 만화 <에도의 장인들>을 고른 것도 '에도'와 '장인'이라는 키워드 때문이었다. 제28회 데즈카오사무문화상 신인상, 2024 <이 만화가 대단하다!> 남자편 3위, 2024 일본만화대상 3위라는 굵직한 타이틀을 지닌 이 만화. 읽어보니 과연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대물 시리즈에 나오는 장인들을 연상케 하는 인물들이 연이어 나온다.


통 장인, 도검 장인, 염색 장인, 다다미 장인, 미장이. 이들은 결코 왕족이나 귀족의 자손으로 태어나지도 못했고 (아마도) 평생 권세나 부귀 영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겠지만,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일하고 공부하며 성실하게 쌓은 실력으로 고객에게는 기쁨을 주고 동료와 선후배에게는 믿음을 주며 가족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는 훗날 유물이나 문화유산으로 칭송받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비슷하게 재벌이나 유력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귀감이 된다.


다섯 장인의 이야기가 하나 하나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가장 길이가 긴 미장이의 이야기이다. 남성이 대부분인 미장이 업계에서 여성으로는 드물게 편수의 지위에 오른 조시치는 간다 고쿠라초에 새로 지어진 곳간을 칠하는 큰 임무를 맡는다. 이를 위해 가미가타(교토 및 그 부근, 넓게는 기나이 지방을 가리키는 표현 - 책 인용)에서 온 장인 진자부로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서로 절차탁마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단행본은 현재 1권까지 발행되었지만 일본에서 연재 중인 것으로 보아 2권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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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치·더·록! 7 특별판 OFF STAGE 2ND BAND EDITION (ver.B) - 결속 밴드 오프 스테이지 비주얼 카드(7종) + 결속 밴드 아티스트 홀로그램 아크릴 티켓(2종) + 결속 밴드 하우스 패스 카드(4종) + 초판한정 포토카드 1매
하마지 아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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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만화 <봇치 더 록> 7권이 출간되었다. 


<봇치 더 록> 7권은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일반판과 특별판(ON STAGE/OFF STAGE) 이렇게 세 가지 버전으로 출간되었다.





내가 소장한 특별판 OFF STAGE 구성은 다음과 같다.


- 1) 단행본 7권(단권) 

2) 초판 한정 포토 카드 'PA 씨' (1매) 




- 3) 결속 밴드_아티스트 홀로그램 아크릴 티켓(2종) (사진 좌측)




- 4) 결속 밴드_하우스 패스 카드(4종)





- 5) 결속 밴드_오프 스테이지 비주얼 카드(7종) 




다 마음에 들지만 특히 아티스트 홀로그램 아크릴 티켓(2종)이 두께도 두툼하고 크기가 큼직해서 상당히 만족스럽다. 하나하나 퀄리티가 다 좋아서, 특별판 ON STAGE 굿즈도 실물이 궁금하고 소장하고 싶다.



****



<봇치 더 록> 7권은 결속밴드의 기타리스트이자 인기 유튜버(작중에선 오튜버)이지만 극도의 커뮤증(커뮤니케이션 기피증)으로 인해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은 주인공 봇치 히토리의 학교생활과 밴드 활동, 이렇게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학교생활 편에서는 자리 바꾸기, 수학여행, 선배들의 대입 시험과 졸업 등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수학여행 편이 특히 재미있었다. 밴드 활동 편에서는 인기 음악 프로젝트 유닛인 '클림트의 밤'의 작곡 담당 Ame가 처음 등장한다. Ame는 봇치보다 커뮤증이 훨씬 심한데 이 두 사람이 같이 나오는 장면들이 엄청 웃기다. 애니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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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딩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용준 지음, 이영리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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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를 좋아한다. 뭔가 읽고 싶은데 호흡이 긴 글을 읽을 기분은 아닌 때, 비상시를 대비해 쟁여둔 간식을 쏠랑쏠랑 빼먹듯, 그동안 사놓은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 중 눈길이 가는 한 권을 골라 읽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정용준의 <저스트 키딩>을 읽은 것도 그런 때였다. 명색이 책 좋아하는 사람인데, OTT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뒤늦게 넷플릭스 드라마 <데드 투 미>에 푹 빠졌다)와 유튜브(일본 여성 코미디언 콤비 하리센본의 채널을 열심히 정주행 중이다)를 보느라 하루에 책 읽는 시간이 30분도 안 되는 요즘... 이런 생활을 반성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열(심히) 독(서하는) 모드로 진입하기에 앞서 일종의 예열 차원에서 고른 책이 이 책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그동안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를 여러 권 읽었는데 이 책은 그중에서도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 총 열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한 편 한 편의 완성도가 높다. 내용도 안온, 다정, 무해 이런 느낌이 아니고, 세신사와 학교폭력 피해자, 죽은 사람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한 펜션에 굳이 찾아온 손님과 펜션 주인, 새벽 근무 중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수상한 손님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관계만 보아도 다음 전개가 쉽게 예상되지 않고, 예상이 되어도 그 예상이 기분 좋게 깨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장르도 드라마부터 미스터리, 스릴러, 판타지 등 다양하다.

표제작 <저스트 키딩>은 술술 읽히는 내용이지만 결말까지 다 읽고 나면 '그저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어떤 사건의 발단으로 묘사되는 후반부의 어떤 사건은, 실제로 최근에 인터넷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어떤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다). 이런 소설을 '그저 소설'로 읽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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