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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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 영화는 잘 못 보면서 나폴리탄 괴담은 좋아한다. '나폴리탄 괴담'은 일본의 '공포의 나폴리탄'이라는 괴담에서 유래했는데, 주인공이 일본식 스파게티인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으려고 했는데 그 나폴리탄 스파게티의 정체를 알아채고 공포에 휩싸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굉장히 미스터리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지만, 정작 그것의 정체는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 누락된 정보 때문에 그 존재는 듣는 사람의 상상 속에서 더욱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보다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상상일지도 모른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정보를 일부러 누락시킴으로써 더 큰 공포를 불러오는 전략을 사용한다. 한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쭉 이어나가는 보통의 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은 일본의 긴키 지역(수도였던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옛 수도권 지역)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현상들에 대한 온갖 (가상의) 자료들을 모아놓은 모습이다. 공포 전문 잡지 기사와 인터뷰 녹취 기록,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대로 긁어 온 글과 댓글까지 자료의 출처나 형식도 다양하고 시점도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렇기에 진상은 직선적인 스토리라인을 따라 밝혀지지 않는다. 각 자료에 담긴 단서들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져 간다. 퍼즐이 완성되기 전에 어떤 진상이 숨겨져 있는지 알기 어렵기에 더 공포스럽다.

또 하나 공포감을 더하는 것은 긴키 지방이 우리에게 낯선 지역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긴키 지방이 자신이 사는 곳이라 이야기를 상상하기 쉬웠고, 이 지방 사람이 아닌 사람들도 수학여행으로 한 번은 와봤을 곳이기에 친숙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도 주택가나 노래방, 회사처럼 일상적인 곳이기에 공포가 일상으로 파고드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번역가는 일본에 자주 여행을 간 한국인에게도 긴키 지방은 친숙할 것이기에 작가의 이러한 전략이 유효할 것이라고 본다. 반면 '긴키'라는 지역명을 이 책으로 처음 들을 정도로 일본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긴키 지방은 낯선 곳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덥고 습하고, 더 무성하고 깊은 숲과 산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원한이 풀리면 천도되는 한국의 귀신과 달리, 일본의 귀신은 아무나 자기 영역에 들어오면 해쳐서 희생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런 일본 괴담 특유의 밑도 끝도 없는 악의가 낯설고 무섭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귀신들도 이런 무차별적인 악의를 퍼뜨리는 존재들이기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어 더 두렵다.

하지만 소설이기에 진상은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다. 결말까지 오면서 커진 공포감은, 결말에서 진상을 알고 나면 그 모든 재앙의 원인이 너무 하찮아 식는다. 이 책을 다 읽은 날 밤 이상하게도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어 더 무서웠는데, 이 책 속 만악의 근원이 된 존재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무서운 마음이 가셨다. 세상에 결혼 못 한 게 자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안 만나주는 여자들을 죽인 놈 달래준다고 신사까지 세워줬는데. 몇십 년 동안 제물도 받아 먹고 죄 없는 여자들도 홀려서 신부로 데려와 놓고선, 이제 자기를 잊어버리고 제사를 안 지내준다고 저주를 퍼뜨린다. 그렇게 여자들을 많이 홀리고도 만족을 못 하는지 남녀가 결혼하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 초등학생 여자애를 납치해 '신부'로 삼는다. 이런 치졸하고 추잡한 귀신을 봤나. 이 책을 읽고 밤에 무섭다면 책 속 귀신의 하찮음을 생각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도 결말까지 조각난 단서들이 서서히 맞춰지면서 그 사이의 공백을 독자 스스로 상상으로 메꿔 가면서 공포를 키워가게 유도하는 실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도 끈적끈적한 악의가 읽는 나에게서도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본문 뒤에 실린 (가상의) 문서, 사진들은 어떤 것은 현실감이 있어서, 어떤 것은 조악해서 오히려 더 불쾌감과 공포감을 일으킨다. 이 책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러모로 영리하게 공포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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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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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을 알고 나면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이 너무 하찮아서 깨지만, 조각난 단서들이 서서히 맞춰지고 그 사이의 공백을 독자 스스로 상상으로 메꿔 가면서 공포를 키워가게 유도하는 실력이 뛰어나다. 책을 읽고 나서도 끈적끈적한 악의가 읽는 나에게서도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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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현지 쇼핑 대백과
오가와 지에코 지음, 김정원 옮김 / 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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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 12월에 대만에 다녀왔다. 중국어도 영어도 잘 못하지만 혼자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는 다른 나라들에도 도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행 서적들을 예전보다 많이 찾게 되었다. 여행 서적들은 외국의 갖가지 풍경과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 예쁜 물건들의 사진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가득 싣고 있어 읽는 것만으로 기분 전환이 된다. 이 책은 기분 전환할 겸, 대만 여행을 곱씹어 볼 겸 도서관에서 빌렸다. 나중에 또 대만에 갈 때 뭘 사면 좋을지 참고할 수 있고.

이 책은 클의 'ㅁㅁ 대백과' 시리즈 중 한 권이고, 이 대백과 시리즈는 도감과 시각예술 관련 책들을 주로 내는 일본의 출판사 타츠미 사의 도감들을 번역 출간한 것이다. 대만에서 살며 대만 요리를 연구하는 일본의 요리 연구가가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요리 연구가이다 보니 간식, 음료, 식재료, 조미료, 주방에 쓰이는 각종 도구와 생활용품 125가지를 소개하고 있고, 대만 요리 몇 가지의 레시피도 함께 실었다.


『대만 현지 쇼핑 대백과』의 본문

'대백과'라고 하기에는 200페이지도 안 되는 얇은 책이지만 알면 좋은 정보들을 차곡차곡 압축해 알차다. 소개하는 상품 이름은 중국어 발음과 한자 표기를 함께 써놓았고, 현지에서 주문하기 좋게 성조도 붙여놓았다. 중국어 성조를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해 노래에서의 음의 변화에 비유해 네 가지 성조를 설명했다(외국어 액센트에 약한 나는 그렇게 설명해도 잘 안되긴 하지만). 가게 이름도 중국어 발음과 한자 표기를 함께 표시했고, 위치는 QR 코드로 연결해 놨는데, 지금까지는 다 잘 연결된다. 구글 지도에서 리뷰를 보니 한국인 리뷰가 없거나 적은 곳이 많다. 저자가 일본인이라 일본인들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곳들을 선정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한국인들이 잘 모르던 보석 같은 곳을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가게와 상품에 대한 설명은 한 페이지(상품 사진이 페이지의 반을 차지하니 사실상 반 페이지)씩이지만 필요한 정보는 다 들어 있고 맛과 모양에 대한 묘사도 꽤 생생하다. 책 자체의 디자인은 잡지처럼 세련되고 감각적이고 음식과 물건 사진들도 예뻐서 책으로 아이쇼핑하는 기분이다. 내가 대만을 여행할 때 가보지 못한 곳들을 책으로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원서에 적힌 정보들은 2024년 7월 기준인데, 한국어판 출판사 편집부에서 출간 시점(2025년 3월)에 맞춰 정보를 수정했다고 한다. 한국에 반입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면세 기준 등 한국에 올 때 주의할 점도 본문 앞에 부록으로 넣어놨다. 여러모로 세심하게 만든 책이다. 대만에 가기 전에 예습용으로, 대만을 여행할 때 쇼핑 가이드로, 대만에 갔다 와서 복습용으로 쓰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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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현지 쇼핑 대백과
오가와 지에코 지음, 김정원 옮김 / 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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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지만 알차다. 구글 지도에서의 가게 위치도 QR 코드로 연결해 놨는데 다 잘 연결된다. 구글 지도에서 보니 한국인 리뷰가 없거나 적은 곳이 많은데 보물 같은 곳을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도. 한국어판 출판사 편집부에서 한국어판 출간 시점에 맞춰 정보도 수정했다니 여러모로 세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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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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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호께이의 모든 작품을 챙겨 읽을 정도로 그를 좋아하지는 않고, 아직까지는 그가 『13.67』을 넘는 작품은 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반적인 완성도는 아쉬운 작품들도 재미 하나는 확실히 있어서 차기작이 나오면 관심을 갖게 된다. 『고독한 용의자』는 3년 만에 나온 그의 신작이고, '20년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던 은둔형 외톨이가 방에서 자살했는데, 그의 방 옷장에서 토막 난 시신이 든 표본들이 발견됐다'는 시놉시스만으로 흥미로웠다. 도서관에 신청하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도서관에 비치돼서 읽게 됐다.


  기대했던 대로 확실히 재미있었다. 책을 읽는데 넷플릭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일하느라 계속 읽을 수 없다는 게 안타깝고 그 뒤의 이야기가 일하는 내내 궁금했다. 퇴근하면 이제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기뻐 퇴근하면서도 퇴근하고 나서도 쉬지 않고 읽었다. 그래서 평일인데도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진상이 밝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고, 새롭게 밝혀진 진상도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야기의 흐름을 능수능란하게 바꾸면서 끝까지 읽게 만드는 솜씨는 여전했다. '망자의 고백'과 칸즈위안의 미발표 소설에서 발췌한 내용이 중간중간에 섞여 있는데, 이 두 부분이 교차되면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다 마지막 망자의 고백에서 완전히 드러났을 때의 전율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밝혀진 진상이 너무 억지스러웠다. 한 독자가 '은둔형 외톨이라는 설정을 너무 편의적으로 사용한다'고 했는데 내 생각도 그렇다. 은둔형 외톨이었다는 이유로 사람이 바뀐 것을 친어머니도 모른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녹음된 목소리는 어떻게 하든 실제 목소리와는 다르고, 살아 있는 실제 사람이 내는 목소리라면 녹음된 목소리처럼 매번 똑같을 수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하다. 20년 동안 도대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확인도 하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살아오다니. 셰바이천의 어머니가 아무리 소심하고 겁이 많다고 해도. 그리고 장례를 치르려면 고인의 머리도 수염도 이발해서 단정한 상태로 만들었을 텐데, 그러면 바이정환의 얼굴도 드러났을 것이다. 입관하거나 화장하기 전에 유가족이 고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는 절차가 있고. 시신이 셰바이천이 아니라 바이정환인 것을 숨기기 위해 머리카락과 수염이 마구 자라 덥수룩한 채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인가? 마지막 반전을 위해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칸즈위안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이 작품을 이끌어 가고, 그의 서사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칸즈위안은 반듯한 외모에 중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들보다 더 뛰어난 추리력과 행동력으로 복잡한 사건을 풀어나간다. 또 다른 주인공인 쉬유이 경위는 공무원으로서 개인이 공무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지만, 칸즈위안의 교묘한 수에 번번이 당하다 결국 그와 공조하게 된다. 마치 사마의를 농락하는 제갈량을 보는 것 같다. 거기에 작가로서의 문학적 재능까지 갖추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듯하다.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그에게 그늘을 드리우는데, 그 그늘이 그를 더 신비하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마지막에 밝혀진 칸즈위안의 사연은 그의 캐릭터에 입체감과 인간미를 더하면서 그라는 인간 자체를 연민하게 만든다. '고독한 용의자'는 사실 그였다. 셰바이천이나 바이정환은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가 있었기에 불행한 삶을 살다 떠나도 고독하지 않았다. 하지만 칸즈위안에게는 이제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모든 것을 혼자 감당했는데, 이제는 혼자 뭔가를 지키는 일에서 자유로워졌지만 그래서 더 외로울 것이다. 그래도 새롭게 얻은 자유 속에서 그가 또 다른 소중한 것,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길 바란다. 이 작품도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나 문학성이나 『13.67』에는 못 미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여운이 남는다. 칸즈위안처럼 감당하기 힘든 일을 혼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해오고 있는 친구를 지켜보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알기 때문이다.


P. S. 1. 중국어 원제는 '숨은 용의자(隱蔽嫌疑人)'이고 영어판 제목은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제목에서 따 온 'The Loneliest Guy'(이 노래는 소설 본문에서도 셰바이천이 좋아하던 노래로 언급되며 여러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깔린다)인데, 한국어판 제목인 '고독한 용의자'는 아무래도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셋 다 같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고 '고독한 용의자'도 가장 중요한 그 인물을 한마디로 요약한 표현으로 적절한 데다 '고독한 미식가' 덕분에 입에 잘 붙으니 문제는 없다.


P. S. 2. 데이트하러 가려고 차려입은 칸즈위안을 '한국 배우같이 입었다'고 묘사하고, 바이정환과 궈쯔닝이 대화할 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가수 중 하나로 BTS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한류가 아시아에서 확고한 흐름으로 자리 잡은 게 맞는 것 같다. 찬호께이가 딱히 한국을 의식하고 쓰지는 않은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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