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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을유사상고전
이세동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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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지식인의 필독서라는 사서삼경을 다 읽고 싶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해왔다. 그중에서 『시경』은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민요들을 모아놓은 책이라 진입 장벽이 제일 낮았다. 『시경』은 어렵지 않게 읽었는데 나머지 책은 읽을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자금성의 물건들』을 읽으면서 『서경』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공자는 구전되어 오던 요순시대와 하나라, 상나라의 역사, 주나라 사관들의 기록들을 모아 요순시대부터 주나라까지의 역사를 정리했는데, 그 책이 『서경』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하면서 『서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들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유가 사상을 국시로 삼은 한나라가 들어서자, 유교 경전 복원이 추진되었다. 한 문제 때(재위 기원전 180년~기원전 157년)『서경』을 복원하려고 한나라 조정은 진나라 관리였던 복생을 불렀다. 그는 분서갱유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서경』의 일부를 집 안에 숨겨놓았고, 『서경』 전체를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문제가 불렀을 당시 복생은 이미 90세가 넘은 데다 방언이 심해 그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딸뿐이었기에, 한나라 관리 조착은 복생의 딸과 함께 복생이 암송하는 『서경』을 받아 적어 복원해 냈다고 한다. 『자금성의 물건들』의 저자 주용은 복생이 평생 동안 숨 죽여 살면서 『서경』을 지켜내고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온 힘을 쏟아서 딸과 조착과 『서경』을 복원해 가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진실이라면 그들이 지켜낸 역사를 2천 년도 넘은 미래를 살고 있는 내가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나는 『서경』을 읽게 되었다.

내가 읽은 『서경』은 중문학자 이세동 교수가 번역한 2020년 을유문화사판이다. 자비 출판으로 2024년에 번역 출간된 판본을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나온 한국어 번역판이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고 절충해 최대한 이해하기 쉽고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도록 번역한 것이 보인다. 각 편의 앞에는 해설이 있고 본문에도 각주를 풍부하게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번역의 원전이 된 것은 당나라의 유학자 공영달이 편찬한 『상서전의』로, 복생이 복원한 28편을 토대로 한 『금문상서』와 동진 때 매색이 찾아냈다고 하는 58편 중 『금문상서』와 일치하는 부분과 새롭게 찾아낸 부분을 합치고 정리한 것이다. 문제는 매색이 찾아낸 부분 중 『금문상서』에 없던 부분은 후대의 위작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금문상서』도 현대 학자들은 그 시대 당시에 쓰인 것이 아니라 전국 시대에 정리한 고대사 자료로 보고 있다. 『서경』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 중 고고학적으로 그 존재가 입증된 것은 상나라와 주나라밖에 없다. 하지만 전국 시대에 쓰였다 해도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사료와 전해 오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고, 위작으로 밝혀진 부분들도 동진 시대에 발견되었으니 동진이 존속하던 시기(317년~420년)를 생각하면 적어도 1600년은 된 것이고, 당시 중국의 역사관과 정치관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문헌이나 유물로 입증된 정확한 역사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대 중국의 정치, 사회 체계와 정치 이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의 왕과 신료들에게는 이 책은 바른 정치를 위한 교과서였다. 과거 시험에서 『서경』은 시험 범위에 들었고, 왕과 신하의 강론 시간인 경연에서도 『서경』은 기본 교재였다. 하지만 현대인이고 정치인도 아닌 나는 그들처럼 『서경』으로 시험을 볼 필요도 없고 그것을 현실 정치에 적용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한결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이 책 전체에서 반복하는 도덕 정치는 현실 정치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다. 선한 이는 복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고 이 책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리다 편안히 죽은 악인들은 바로 최근 우리 정치판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태해지지 말고 늘 근면할 것,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사나 다른 일을 처리하지 말 것, 책임은 아랫사람들이 아닌 자신이 질 것. 이런 원칙들은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당시에도 이런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군주나 지방관들은 있었고, 이런 도덕 정치를 외치던 위정자들도 정쟁과 음모, 반란에 시달렸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적이나 반란 세력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는 등 나름대로 정치적 술수도 써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도덕 정치의 원칙을 이상으로 내세운 것은, 그러한 이상이 세워져 있어야 현실이 그 이상이 세운 목표치의 몇 분의 1이라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담은 역사서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애초에 요순시대는 역사보다는 고대 설화의 영역이고 하나라도 고고학적으로 존재가 입증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1600년 전까지 형성된 고대 중국의 정치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행정 체계와 사법 체계도. 그 모든 것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 행정, 사법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정교가 분리되고 점술은 비과학적인 것이 된 현대인이 보기에는 제사가 중요한 정치 행사이고 점술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점술만으로 결정하지는 않았고 군주 자신과 신하들, 백성들의 의견을 모두 반영했다는 데서 과거의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좀 더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라 때 왕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물길을 냈다는 부분이 지명만 바뀌면서 반복될 때는, 성경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가 무한 반복되는 부분을 읽는 듯했다(이 부분이 이 책을 읽을 때의 고비였다). 사실 등장인물들이 신하나 백성이나 후손에게 남기는 권고도 비슷비슷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번역자가 각 장 앞의 해설과 각주로 보충 설명해 주거나, 본문에서 엿보이는 당시의 사회상이 흥미로워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현대인인 내게는 이 책이 정치 교과서라기보다는 고대 중국의 면면을 축소해서 모아놓은 상자 같았다. 2천 년 전 중국의 이야기가 현대 한국인인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2천 년 전 고대 중국인들이 현실 속에서 고민하고 분투하면서 구축해 온 원칙과 체계가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세우고 이끄는 데도 영향을 주었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왔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만든 결과물이다. 솔직히 읽으면서 지루하고 단조롭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출판 시장에서 5년만 지나도 절판되는 책들이 넘쳐나는 지금까지도 2천 년을 살아남은 이유와 의미는 분명히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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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미각 - 돼지국밥부터 꼼장어까지, 살아 있는 의리의 맛
고운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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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큰집이 있었던 곳이지만 우리 집에서 워낙 먼 곳이라 거의 가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와 친가 쪽 친척들이 경상도 사람들이고 친구, 지인, 선후배 중에도 경상도 출신이 많은데 부산은 경상권을 대표하는 도시니 속으로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9년부터 매해 부산국제영화제에 가게 되면서, 부산은 내게 좀 더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그해부터 여섯 번 부산에 가면서 찐 로컬 맛집은 아니지만 프랜차이즈에서 돼지국밥과 밀면을 먹고, 자갈치시장에서 지인들과 꼼장어구이를 먹었다. 그중 돼지국밥은 평소에도 종종 먹는다. 그래서 부산 음식을 다룬 『부산미각』이 출간된다고 했을 때 반가웠다. 『부산미각』과 같은 시리즈의 전작인 『중화미각』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기대감이 더했다.

우선 전작처럼 다루고 있는 지역색을 살린 표지가 독자를 반긴다. 표지의 옅은 푸른색 바탕색은 바다를 연상시키고, 부산을 상징하는 바다와 등대, 갈매기, 부산국제영화제를 연상시키는 필름과 슬레이트,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들이 그 위에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뒤표지를 메뉴판 모양으로 만들어 거기에 본문에서 소개되는 음식들을 적어놓은 것은 전작 『중화미각』과 같다. 전작처럼 단일한 배경색 위에 단순한 형태의 오브제들을 놓고 뒤표지에는 메뉴판을 실어 시리즈의 통일성을 만들면서도 부산만의 특징이 드러나게 디자인했다.

본문에는 열아홉 가지의 부산 음식과 부록 속 다섯 가지의 조미료가 소개되어 있다. 『중화미각』이 화려하고 다채롭다면 『부산미각』은 좀 더 담백하고 소박하다. 『중화미각』에서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중국 음식들도 소개되고 그 음식들과 관련된 낯선 역사와 문화도 만날 수 있다. 반면 『부산미각』에는 우리도 몰랐던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곳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와 관련된 역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재일교포의 생존을 위한 분투가 담긴 낙곱새부터 6.25 전쟁 당시 피란민의 애환이 담긴 밀면까지, 한국인이라면 직접 겪지 않았어도 익히 알고 있고 그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역사를 담고 있다.

저자들이 대부분 부산에서 나고 자라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부산에서 살며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책에서는 부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진하게 풍긴다. 중국이 연구의 대상인 반면 부산은 삶의 터전이니, 『중화미각』이 중국의 역사, 문학, 문화 등 인문학적인 지식이 차지하는 분량이 많은 반면, 『부산미각』은 부산 음식과 부산이라는 땅 자체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오는 서정적인 부분이 많다. 비문학이라기보다 한 편의 에세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새벽 골목에서는 아낙네들이 재첩국을 한 동이씩 이고 아침을 아직 안 먹은 동네 사람들에게 팔고 다니고, 낙동강가 갈대숲에서는 사람들이 은백색 웅어를 잡는다. 이런 수십 년 전 부산의 풍경,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그 시간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동래파전을 다룬 꼭지는 6페이지밖에 안 되고(그것도 사진들이 섞여 있고 마지막 페이지는 두 줄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꼭지들도 10페이지 안팎이니 생각보다 각 음식을 깊이 다루지 않는다. 좀 더 풍성한 지식과 읽을거리를 기대하면 아쉬울 수 있을 것이다. 부산 음식에 대한 지식도 조금 쌓고 경험하든 경험하지 못했든 부산 음식에 담긴 부산의 역사, 그 속의 희로애락을 살펴볼 수 있으니, 부산을 좀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면 읽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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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상상력과 문화 - 개정판
정재서 외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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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에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을 본 덕분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 친숙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2010년대부터는 <토르> 등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렇게 신화가 최근 몇십 년 동안 각광받는 이유는, 삭막하고 차가운 현대 사회에서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와 관련된 책도 해마다 출판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특정 지역의 신화를 소개하는 책이나 미술, 철학, 심리학 같은 다른 분야에 신화를 한 방울 떨어뜨린 교양서, 일반 독자가 읽기에 너무 어려운 신화 연구서다. 가장 쉬운 책과 가장 어려운 책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책을 찾기 어렵다.

이화여대에서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라는 교양 수업의 교재로 쓰이는 이 책은, 신화 연구서는 아직 너무 어렵지만 단순히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알맞다. 여러 종류의 케이크를 한 판에 모아놓은 모둠 케이크처럼, 이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세계 여러 지역의 신화를 주제별로 소개하고 있고, 2부는 신화가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 문화 예술 작품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3부는 다양한 신화 연구 이론, 분석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각각의 부분만 해도 깊이 들어가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한 권으로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 분석, 신화 관련 이론 세 가지를 모두 소개하려다 보니 아주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중고등학생 정도의 지식을 갖춘 독자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1부는 세계와 인류의 창조, 영웅의 모험과 귀환, 재앙과 형벌, 변신과 승화 등 전 세계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에 따라 각 지역의 신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히 각 지역의 신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지역의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들과 그 의미까지도 설명해 주고 있다. 각 요소들이 상징하는 의미를 하나씩 짚어가다 보면, 고대 인류가 혼돈과 같은 원시 상태에서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보인다.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 인류의 정신과 문화,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유산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뿐만 아니라 게르만 신화, 메소포타미아 신화, 이집트 신화, 인도 신화, 중국 신화, 한국 신화까지 다루고 있어, 그 신화를 낳은 문화권의 역사와 문화까지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신화의 경우 단군 신화 등 일반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문헌 신화뿐만 아니라 무속 신화까지 소개하고 있는데, 다뤄야 할 내용이 워낙 많다 보니 아주 간략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2부는 문학과 음악, 미술, 연극, 영화 작품 중 신화를 모티브로 하거나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각 예술 분야에 신화가 미친 영향을 다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기 때문에 각 분야 중 몇몇 대표적인 작품만 간략하게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맛보기'의 느낌이 가장 강한 부분이다. 2023년 개정판에서는 2008년 초판에 실려 있던 <와호장룡>과 애니메이션 <헤라클레스>의 분석 대신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와 영화 <토르>의 분석이 실려 있다. 초판과 개정판 사이 15년 동안의 변화를 반영한 것일 텐데, 이후에 새로운 개정판이 나온다면 또 다른 새로운 작품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춰서 조금씩 책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특히 <겨울왕국 2>의 분석에서는 애니메이션 속 다섯 정령과 동양 철학의 오행을 연결시킨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신화학 이론과 연구 방법을 설명하는 3부는 이 책에서 가장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학부생들의 교양 강의 교재이기 때문에 깔끔하고 명쾌하게 각 이론을 정리하고 있다.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은 예시를 들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엘리아데의 신화학 이론에 담긴 인종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등 좀 더 설명해 줬으면 하는 부분도 있지만, 분량의 한계 안에서는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냈다. 시험과 성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반 독자라면 더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강의 하나가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 교양 강의 하나를 들은 것과 다름없다. 삶이 무미건조해 교양을 쌓고 싶다면,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의미, 신화가 여러 분야에 미친 영향까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읽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에 간략하게 소개된 내용 중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학술적인 책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더 풍성하고 깊이 있는 신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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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여행 - 들뢰즈 철학으로 읽는 헬레니즘
김숙경 지음 / 그린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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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영국 화가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철학 이론을 접목해 과제를 작성했었다. 내 과제 발표를 보고 나서 교수님은 ‘너 이거 이해 못 했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 말씀대로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짜깁기했을 뿐이었고, 결국 주제를 바꿔서 과제를 다시 작성해야 했다. 그 이후로는 들뢰즈라면 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들뢰즈의 이론으로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래도 미술사는 내 전공이고 고대 문명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니, 그 둘을 당의정으로 삼는다면 들뢰즈라는 쓴 약도 소화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1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로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유입된 그리스 신들의 변신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1부의 내용을 들뢰즈 철학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다고 했다. 그럼 적어도 1부는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랬으니, 한 문단,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그래, 이건 이해했어’라고 마음속으로 확인한 뒤 다음 문단,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다행히 1부의 내용은 무난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려는 본론은 2부지만 사실 1부가 이 책의 3분의 2를 차지하니, 3분의 2는 일단 확보했다. 1부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을 시작할 때부터 한중일 3국에 불교가 전해질 때까지, 그리스 신들이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둘에 영향을 받은 유라시아 각 나라의 미술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정리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처럼 당시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 신들의 원형과 헬레니즘, 실크로드,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 변형된 모습을 나란히 배치했다(도판의 화질이 떨어지고 도판 설명도 글씨가 너무 작은 것은 아쉽지만). 그런 데다 그리스의 어떤 신은 부처를 호위하는 부하로 전락했고, 어떤 신은 날개가 있어 천산산맥 너머 동쪽으로 멀리 날아갔다는 식으로 의인화하니 설명하는 내용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실 중요한 건 2부인데 들뢰즈 이야기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1부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읽었다. 저자가 말하는 들뢰즈 철학의 개념과 용어 들은 낯설었다. 하지만 저자가 유목 민족과 정주 민족, 그리스 신들과 그들이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유라시아 각 지역의 미술 속에서 변화한 모습을 예시로 들고, 비유를 들면서 반복해서 설명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찬찬히 읽어보니, 저자가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속에서 변화해 간 그리스 신들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들뢰즈는 모든 존재를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는 존재로 보았다는 것. 그리스 신화의 신들도 불교라는 거대한 중심 뿌리의 위계질서에 붙잡혀서든, 타림 분지 내로 흘러들어 온 다양한 문화와 자유롭게 접속해서든, 겉모습도 본질도 부단히 변화했다는 것. 그러니 문화 또한 한 가지 원형으로 굳어버린 유산이 아니라 무한히 변화해 가는 생명이라는 것. 이렇게 2부도 무사히 내 나름대로 소화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들뢰즈의 개념들은 들뢰즈의 철학 이론 중 일부지만, 그래도 이 책 덕분에 그 일부는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명과 실크로드 문명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었지만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과 용어로 다시 보니 신선하게 느껴졌고. 들뢰즈 철학 쪽으로나 문명사, 미술사 쪽으로나 아주 깊이 들어가진 않지만, 에로스의 날개나 보레아스의 바람을 타고 그리스로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여행한 기분이다. 찬찬히 읽으며 책 전체를 소화하고 나니 그 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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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의 발견
박영수 지음 / 사람in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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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語源): 어떤 단어의 근원적인 형태. 또는 어떤 말이 생겨난 근원.

  아주 일상적인 단어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요즘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지만 그래도 일상적으로 하는 말 ‘고맙습니다’. 이 단어의 근원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남의 인격이나 행위를 높여 공경하다’라는 의미의 고유어 ‘고마’가 어근이다. 이 말은 이렇게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생긴 것이다. ‘누군가의 호의나 도움을 받아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고 감동적이다’라는 지금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이 책은 이렇게 말의 근원적인 형태, 또는 말이 생겨난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모둠: 한 무리가 되게끔 작은 단위로 모아둔 것

  ‘모둠’은 ‘모으다’라는 뜻의 옛말 ‘모두다’에서 나온 말로, 한 무리가 되게끔 작은 단위로 모아둔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은 우리말의 어원과 우리말 한자어의 언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단어 하나하나들이 그 두 부분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음식들을 모은 ‘모둠 안주’처럼 이 책에는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까지 다양한 지식들이 담겨 있다.

  이판사판. 수리수리 마수리. 찰나. 강림. 경계.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원래 불교 용어였던 단어들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일상 속 단어들이 불교 용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교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언어와 문화,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기서 실감할 수 있다. ‘땡전’이란 단어에는 흥선대원군의 화폐 개혁으로 대량 발행된 당오전에 대한 반감이 녹아 있고, ‘벼슬아치’라는 단어에는 원나라와의 교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렇게 우리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말을 만들어낸 우리 조상들의 일상과 문화, 역사를 만나게 된다. 모둠 안주에서 다양한 음식을 하나씩 집어 먹듯 다양한 지식을 하나씩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


감질나다: 바라는 정도에 아주 못 미쳐 애가 타다.

  ‘감질(疳疾)’이라는 병에 걸리면 땀이 나고 목이 마르며 시원한 것을 찾게 된다고 한다. 그런 증세에 빗대어 ‘어떤 일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애태우는 심정’ 또는 ‘무언가를 몹시 하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감질나다’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느끼게 되는 감정이 바로 ‘감질나다’이다. 사실 바라는 정도에 ‘아주’ 못 미치는 것은 아니고 ‘조금’ 못 미친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크고,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니 크기도 작고 페이지 수도 적다. 각 단어에 배정되는 페이지는 한두 페이지뿐이니, 아주 깊이 있게 어원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파헤치지는 않는다. 어원에 대해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기대했다면 감질날 것이다. 반면 한두 페이지씩 가볍고 흥미로운 지식을 읽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안성맞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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