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헌법으로 체크하다 - FACT CHECK
JTBC 팩트체커 오대영 기자 외 지음 / 반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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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오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은 것은 다행이지만, 국민들 중 누구도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년 12월 3일부터 우리는 또 다른 탄핵 정국으로 들어섰고, 이제 며칠 뒤면 중대한 결정이 내려진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라는 거울이자 나침반이다.

사회과학 책들은 몇 년만 지나도 새로운 사례와 데이터들이 쌓이면서 시의성을 잃게 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일종의 역사책이 될 수 있다. 7년 전에 발간된 이 책이 그렇다. 한국이 박근혜 탄핵 정국 속에 있던 당시 대통령 탄핵 심판을 놓고 온갖 거짓 주장들이 난무했고, JTBC 팩트 체크 팀은 헌법이라는 기준으로 그런 주장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했다. 그들이 검증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이다.

대통령은 탄핵 심판 중 사임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불소추 특권이 있으므로 탄핵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청와대도 압수 수색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을 풀어나갈 열쇠는 헌법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조인이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는 헌법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팩트 체크 팀도 법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국민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팩트 체크 팀은 직접 헌법책을 찾아 읽고 수십 명의 헌법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탄핵을 둘러싼 온갖 의문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헌법은 법조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 누구라도 스스로 공부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우리는 헌법을 자신도, 진실도, 민주주의도 지킬 수 있는 방패로 삼을 수 있다.

이 책에서 팩트 체크한 거짓 주장들 중에는 지금의 탄핵 정국에서도 반복되는 것이 많아 기시감이 느껴진다. 반복되는 역사에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선례가 우리에게는 거울이자 나침반이 되어준다. 물론 지금도 JTBC 팩트 체크 팀의 탄핵 관련 팩트 체크는 계속되고 있고 기사로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지만, 지금의 팩트 체크와 이때의 팩트 체크 모두 꼼꼼히 읽어나간다면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를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의 탄핵 정국 관련 책들뿐만 아니라, 8년 전에 나온 이 책 또한 지금의 이 정국을 헤치고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분명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 다시는 '헌나'가 붙는 사건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헌나'는 헌법재판소의 사건 분류 부호 중 탄핵 심판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자들도 우리도 8년 뒤에 '헌나'가 붙는 사건이 다시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때나 지금이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는 사람들과, 헌법이라는 원칙에 의거해 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며칠 뒤 우리가 어떤 길에 서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다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헌나' 사건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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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헌법으로 체크하다 - FACT CHECK
JTBC 팩트체커 오대영 기자 외 지음 / 반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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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역사가 또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시점에 다시 읽어보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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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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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해당 책과 『봄눈』의 스포일러 포함

민음사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시리즈 첫 권 『봄눈』이 2020년에 출간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기다렸다. 4년이나 소식이 없어 프로젝트가 중단됐나 했다. 그런데 작년 7월 두 번째 권인 『달리는 말』이 출간됐고, 지난 달에 세 번째 권 『새벽의 사원』이 출간됐다. 올해 안에는 마지막 권인 『천인오쇠』를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풍요의 바다> 시리즈 전체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봄눈』을 읽으면서 순간순간의 미세한 감각과 감정까지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폭력적인 제국주의에 경도됐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2년 뒤 다음 권인 『달리는 말』을 읽으면서 풀렸다. 『달리는 말』은 예상보다 작가의 극우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그가 빠져버린 파시즘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추구했던 순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봄눈』의 주인공 기요아키와 『달리는 말』의 주인공의 이사오는 겉보기엔 성향이 정반대다. 기요아키는 나라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 감정에만 집중해서 살지만, 이사오는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혼다는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이라고 생각하지만 둘이 같은 시대에 공존했다면 틀림없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가 생각하는 순수를 위해서 다른 것들은 다 내던져 버린다는 점에서 둘은 한 사람처럼 닮았다. 문제는 이사오가 추구하는 순수, 절대적인 가치가 천황제라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와 어긋나는 것들은 무조건 악으로 간주하고 배척하고 제거하려고까지 하면서, 그의 순수는 폭력과 파시즘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사오는 정계와 재계가 유착해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자기들의 배만 불리고, 서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현실에 분개한다. 여기까지는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오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상식적인 현대 민주 시민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정재계의 부패한 인사들을 암살하고 계엄령(이사오 무리가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던 날이 우연하게도 12월 3일이니 지금 이 시국을 헤쳐 나가고 있는 한국 독자로서는 더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을 선포해 사회를 청소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모두가 단결해 과거의 태평성대를 회복하자니. 그의 해결책은 시대 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일본에는 애초에 그런 과거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허상이다. 허상을 순수한 가치이자 궁극의 아름다움이라고 믿었던 이사오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붙잡아도 허상을 향해 달려가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자신이 바라던 최후를 맞는다.

작가의 삶만으로 작품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달리는 말』 속 이사오의 모습을 작가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지 않을 수 없다. 운동이라고는 숨 쉬기밖에 안 하며 나라에는 관심도 없던 기요아키가 (혼다의 환생 이론이 맞다는 전제하에) 검도로 몸을 꾸준히 단련하며 애국심이 투철한 이사오로 환생한 것은, 작고 병약한 문학 소년에서 근육질의 극우 청년단 지도자로 변신한 미시마를 떠올리게 한다. 이사오에게는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주었던 혼다와 사와 같은 어른들이 있었고, 미시마에게는 혼다와 작품 속에서 그가 말하는 논리들을 만들어낸 이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사오도 미시마도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자신이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토록 꿈꾸었던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의 마지막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만큼 아름답지도 장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마음속에 떠올리는 상념과 감정의 단편들,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세밀히 포착하는 솜씨는 여전하다. 도입부에서 혼다가 바라보는 무미건조한 법원과 교도소 풍경 묘사조차 혼다의 복잡한 마음 한 구석 한 구석을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 참신한 비유와 날카로운 통찰로 그 순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을 더없이 적확하게 묘사한다. 뭘 해도 결론은 할복인 이사오의 심리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그가 어떤 사고와 감정을 통해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사오의 무모한 행보를 이성의 눈으로 지켜보지만 결국 그의 순수함에는 감동을 받는 혼다의 모습에, 결국 순수의 손을 들어준 작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미시마는 천황제와 극우 사상을 향한 이사오의 열정을 진지한 마음으로 썼겠지만, 맨 정신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한 치도 타협하지 않는 순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는 데 이 책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P.S. 『달리는 말』에서부터 번역자가 바뀌었고, 두 사람에서 한 사람으로 줄었다. 같은 시리즈의 전작인 『봄눈』과 번역의 톤을 맞추기 위해 출간이 늦어졌다고 한다. 『봄눈』에서 『달리는 말』로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졌다고 느낄 수 있게 신경 쓴 것이 보인다. 그러나 『봄눈』과 달리, 문장 구조가 뒤엉킨 비문과 사람들이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난해한 한자어가 곳곳에서 보인다. 『봄눈』의 번역자들이 문장 구조를 정돈하고 생경하고 난해한 한자어는 풀어 썼는데, 새 번역자는 영어 번역체가 심하고 일본어의 일상적 화법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다 그렇게 된 걸까('대칭을 이루는'이라고 옮겼으면 좋았을 텐데 '시머트리컬한'이라고 영어 발음 그대로 음차한 부분에서는 좀 놀랐다). 내가 『봄눈』을 읽은 게 2년 전이니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원문과 비교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정확하지 않겠지만, 읽으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럼에도 글의 아름다움은 남아 있지만, 유려하고 부드럽게 읽혔던 『봄눈』 번역본의 한국어 문장들을 생각하면 아쉽다. 『새벽의 사원』과 『천인오쇠』의 번역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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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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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의 온갖 상념과 감정을 참신한 비유로 적확하게 표현하는 솜씨는 『봄눈』과 같지만, 『달리는 말』에는 미시마를 극단으로 몰아간 사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번역자가 바뀌어서인지 번역자가 한 사람으로 줄어서인지 『봄눈』보다 비문과 난해한 한자어가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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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풍요의 바다 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윤상인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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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자체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이 작가의 작품이 좋다고 말하기 꺼려지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미시마 유키오다. 그가 극우 천황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 책 『봄눈』으로 미시마의 글을 처음 접한 나는 읽으면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왜 그런 사상에 빠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 작품이 속한 <풍요의 바다> 시리즈 이후 그가 더 이상 작품을 내놓을 수 없었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상황을 그렇게 만든 게 작가 자신이었다는 게 더 안타깝다.

이 소설의 서사 자체는 통속적이다.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의 아름다운 청춘 남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헤어지는 이야기. 그렇다고 이 소설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봄눈』의 남주인공 기요아키가 사랑하는 것은 여주인공 사토코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금지되고 불가능한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이다. 귀족 가문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인 그는 손에 물 한 방울, 흙먼지 한 톨 안 묻히고 오직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려고 한다.

그가 추구하는 세계에는 현실의 더럽고 속된 것, 복잡한 이해관계가 없다. 아름다움과 순수, 그것에 대한 도취만 집착만이 있을 뿐. 박경리 작가는 이러한 탐미주의를 일본 특유의 나약한 로맨티시즘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 공감한다. 기요아키와 아야쿠라 백작 같은 나약한 로맨티시스트들에게 침을 뱉고 싶고,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상식적이고 건실한 혼다에게 더 공감한다. 현실을 회피하면서 결벽적일 정도로 순수한 감정만을 추구하는 기요아키를 보면 아이고, 이 답답한 도련님아,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글 자체의 아름다움에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장도 평범하지 않고,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필사하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단순히 문장이 아름다워 감탄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어도 두루뭉술하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과 모습들을 너무나 적확하게 표현해 내 더 감탄스럽다. 글 자체만으로 늘 곁에 두고 읽고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 '네 사람의 머리 위에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펼쳐졌다.'라고 단순히 쓸 수 있지만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어느새 네 사람의 머리 위에는 별들이 가득했고 선명한 은하수가 천정에 걸려 있었다. ... 해가 지고 나니 훨씬 크게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 낮에는 그토록 멀어 보이던 바다와 모래사장이 하나의 어둠으로 녹아드는 모습, 끝도 없이 증식하는 압도적인 별들의 복작거림....... 그런 것들에 둘러싸인 네 젊은이는 거대한 거문고 같은, 보이지 않는 악기 속에 안긴 듯했다.

그 악기는 틀림없는 거문고였다! 그들은 거문고의 몸통 속에 섞여 들어간 네 개의 모래알이었다. 그곳은 한없는 어둠의 세계였지만 몸통 바깥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세계가 있었다. 한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팽팽히 당겨진 열세 개의 현에 더없이 새하얀 손가락이 닿으면, 유유히 운행하는 별들의 음악이 거문고를 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네 개의 모래알을 뒤흔들었다.


읽는 사람마저 밤하늘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렇게 섬세한 감성을 세밀하게 감지하고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폭력적인 사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거기에다 작가 자신의 풍부한 지식도 소설 곳곳에 채워져 있다. 혼다가 서양의 자연법과 마누 법전의 종교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법을 비교하며 고찰하는 부분, 혼다와 태국 왕자들이 환생에 대해 토론하는 부분, 사토코를 만나게 해달라고 혼다가 아픈 기요아키 대신 부탁하러 갔을 때 월수사 주지가 혼다에게 법상종의 교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부분은 굳이 넣지 않아도 됐을 것 같지만)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 소설에 쏟아부었다'는 작가의 말이 실감난다. 톨스토이의 소설들에서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토론하고 때로는 작가 자신이 길게 사상을 설명하지만, 그것이 뜬금없다거나 억지스럽다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작품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데, 이 소설도 그렇다. 법과 종교와 철학, 사상에 대한 고찰이 있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라는 얇은 겉껍질 안의 세계는 더 넓고 깊어진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의 1권인 이 책에서는 아직 제국주의나 천황주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인 만큼 기요아키와 사토코, 혼다가 누리는 부와 안락한 생활을 받쳐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시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이들마저 남을 부리는 것에도, 남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에도 너무나 익숙한 지배 계급이라는 것이 언뜻언뜻 드러날 때는 섬뜩하지만. 나머지 세 권에서 이야기는 어디로 뻗어나가서 독자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연약하지만 매혹적인 세계는 어떤 종말을 맞을까.

P. S. 원문 자체가 영어 번역체가 심한 데다 일본어의 일상적 어법을 벗어날 때가 많아 번역 자체가 전쟁 같았다는데, 이렇게 유려한 문장으로 옮겨내다니 번역자들과 편집자의 노고가 컸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들로 접할 수 있게 해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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