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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별로 두껍지 않지만 여기에는 단편소설이 여덟편이나 실렸습니다. 잘 쓰지 못해도 뭔가 할 말이 떠오를까 해서 한국단편소설은 두번 읽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이번에는 그러지 않아서예요. 한번 보는 데도 거의 나흘이 걸렸습니다. 책을 만난 기간은 그럴지라도 책을 읽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예요. 책을 보기 전에는 하루에 한번 다 보고 두번째도 조금 볼 수 있겠다 했는데 마음과 다르게 첫날 끝까지 못 보고 둘째날에는 조금 보고 셋째날에는 하나도 못 보고 넷째날에야 끝까지 봤습니다. 책을 만난 기간을 나흘이라 한 건 잘못된 거군요. 정확하게는 사흘이네요. 어쨌든 이 책을 한번 잡고 여러 번 쉬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정은 소설은 이번이 세권째예요. 지금까지 나온 책이 세권은 넘을 텐데 조금 만났네요. 두권은 그럭저럭 봤는데 단편은 어렵군요.
제목 ‘아무도 아닌’은 네번째 소설 <명실> 앞에 붙었던 거더군요. ‘명실’은 처음에 ‘아무도 아닌 명실’이었어요. 이걸 알았다고 해서 <명실>을 아는 건 아니네요. 책을 많이 가지고 글을 쓰려고 한 실리 이야기를 하더군요. 실리는 사람이 맞을까요. 실리는 소설을 다 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실리가 썼떤 소설은 끝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마리코를 죽 기다리겠다고 명실이 말했어요. 기다리는 일은 좋지만 쓸쓸하고 힘들기도 합니다.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도 있을 테니까요. 그게 살아가는 힘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 자체가 기다림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도 아닌’ 이 말을 생각하니,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 옆에서 누구야 하면 ‘아무도 아니야’ 하고 말하는 게 떠올랐습니다. 여기에서 그런 뜻으로 쓴 건 아닐지 모르겠지만. 상대는 그 사람과 친하다고 여길지도 모를 텐데, 자신을 ‘아무도 아니야’ 했다는 걸 알면 마음이 좋지 않겠습니다. 어쩐지 제가 그런 사람 같기도 합니다. 아무도 아닌, 아무 사이도 아닌. 이 말로 이런 우울한 생각을 하다니.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도 쓰기로 했습니다.
여기 실린 소설을 보니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이 말은 나중에 생각한 거군요. 익숙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낯설게 썼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上行>에는 시골에 사람이 얼마 없는 일과 도시에서 비정규직으로 사는 사람 이야기가 담겼어요. 지금 현실을 잘 담아냈지요. 마지막 소설 <복경>도 요즘 많이 나오는 갑, 을 이야기 같았습니다. 저는 그런 말 잘 몰랐어요. 제가 아는 말은 많이 가진 사람이 못가진 사람을 낮잡아 보는 일인데(자신보다 밑에 사람을 부려먹는 것도 있네요). 시대에 따라 널리 퍼지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거 잘 모릅니다. 텔레비전을 안 봐서 그런가. 컴퓨터 인터넷은 써도 잘 모르는군요. 몰라도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알려면 좀더 좋은 걸 아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제가 그런 것만 아는 건 아니지만. 가진 사람과 못가진 사람 처지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요.
두번째 소설 <양의 미래>는 무슨 뜻인가 싶네요. 양이 뭔지. 진주라는 아이가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 돌아간다. 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던데. 저는 잘 못 봐서 아쉽습니다. <상류엔 맹금류>에서는 예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걸 조금 아쉽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나’가 바라는 건 따듯한 식구 사이였는데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는 거기에서 멀어졌어요.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보다 식구에 들어가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건지도. <누가>에서도 층간소음 문제를 낯설게 쓴 듯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해야 했는데 잊어버렸네요.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더 심해진 걸까요. 여기에 나온 여자는 저 같기도 했어요.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에 괴로워 하는 모습이. 그 뒤에 조용한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층간소음이 들려요. 마지막에는 밑에 층 사람이 여자 집에 쫓아왔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지만 먼 사람이기도 하네요. 위층 아래층 사람은. 예전에는 멀리 사는 친척보다 가까이 사는 이웃사촌이 더 낫다는 말도 있었는데. 이제 이 말도 옛말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두 소설 <누구도 가 본 적 없는>과 <웃는 남자>에서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군요. 그 이야기만 죽 나오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가 본 적 없는>에서는 아이가 <웃는 남자>에서는 도도와 함께 살던 디디가 죽었어요. 아이를 잃은 슬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평생 가겠지요. 도도는 차 사고가 났을 때 디디가 아닌 가방을 잡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가두었습니다. 도도를 구할 수 있는 건 디디일지. 아니 도도 자신이겠네요. 자신을 용서해야 도도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다. <누구도 가 본 적 없는>도 끝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소설이라고 다 좋게 끝나지는 않아요. 우리 삶도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겠지요.
희선